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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다. 동생 집은 가난하고 식구가 일곱이나 되었지만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 행복한 집인 반면에 형 집은 부자인데다 식구도 셋밖에 되지 않는데 늘 싸우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느 날 형이 동생을 찾아와서 웃고 사는 비결을 묻자 동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형님네는 똑똑한 사람만 있고 우리 집에는 모두 바보들만 살기 때문이지요.”
바보들만 살아서 행복하다니?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 뜻을 알기 위해 동생 집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조그만 잘못이 생겨도 식구들마다 서로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식구들끼리 다툴 일이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자기 집을 가만히 돌아보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 상대방 잘못이라고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였다. 서로 제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여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니 다툼이 끊일 새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형이 무릎을 치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같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회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잘 되는 회사는 성과를 서로 상대방에게 돌리고 책임은 서로 짊어지려고 하는 회사이다. 그 같은 회사에 무슨 불평이 있겠으며 무슨 다툼이 있겠는가? 그러나 거꾸로 성과는 자신이 독점하고 책임은 부하직원이나 상사에게 돌리려고 한다면 그 같은 회사에 무슨 신뢰가 있겠으며 무슨 의욕이 있겠는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네 탓’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곳엔 결코 평화나 발전이 없을 것이다. 그 같은 조직체는 결국엔 공멸하고 말 것이다. 회사 안엔 성과는 함께 나누고 책임은 내가 먼저 지겠다는 사람이 많아야만 한다. 서로 간에 잘못과 허물을 감싸주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럴 때 각 개인은 더욱 능력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고 조직체는 그만큼 큰 시너지(synergy)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국가 역시 다를 바 없다. 잘 되는 국가는 서로 책임지려는 사람이 많은 국가이다. 요즘 고국의 뉴스를 들여다보면 불행히도 사회 전반에 걸쳐서 서로 ‘네 탓 공방’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아니 비단 요즘의 일만이 아니다. 무슨 일이 터질 적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국민은 정부를, 정부는 언론이나 다른 부처(部處)를, 여당은 야당을, 야당은 여당을 향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추태들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마저 매사에 ‘네 탓 타령’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는 취임 초부터 시작되어 온 대통령의 안 좋은 습성(?)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좌파 코드의 인사를 기용함으로 인해 혹은 여러 가지 미숙한 국정운영에 대해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자 그는 말하기를 ‘신문만 안보면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다’고 언론을 탓했었다. 즉 자신은 국가를 잘 통치하고 있는데 언론들이 딴죽을 건다는 말이었다. 그때로부터 한국뉴스를 볼 적마다 늘 접할 수 있는 내용이란 대통령의 ‘네 탓 불평’이었다. 오죽 했으면 대통령의 단골 메뉴가 ‘네 탓’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을까.
그러던 중에 얼마 전에 있었던(지난 1월 23일) 국정연설에선 거의 절정에 달한 대통령의 ‘네 탓’ 불평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실정이나 혹은 실정으로 평가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언론 탓’, ‘야당 탓’으로 돌리며 강도 높은 비판을 퍼부었다고 한다. 언론을 향해 ‘불량상품’이라고 말하며 “선수도 아니면서 운동장에 내려와 공차고 반칙까지 일삼고 있다”고 말하는데다 “악의에 찬 제목들을 뽑아내고 있다”고 거침없이 불만을 터뜨렸다고 한다. 글쎄다, 한국의 정치를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언론의 협조를 별로 받지 못하는 대통령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지만, 또 한편으론 한 나라의 대통령답지 못한 처신이요 불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그보다는 대통령다운 통 큰 모습을 보여주며 모든 비판들에 대해 초연한 자세로 “다 내가 부족해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국민으로서 오죽 보기 좋은 모습일까. 그럴 경우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이 그처럼 성깔 있는(?) 국정연설을 하자 그 같은 소리를 듣고 언론이 또 가만있겠으며 야당이 또 가만있겠는가? 모든 신문들이 수위만 다를 뿐 하나 같이 국정연설에 대해 혹평을 퍼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즉 날이면 날마다 대통령과 언론의 말싸움이 쉴 날이 없는 것이다. 멀리 이국땅에 살고 있는 교포로서 그 같은 고국의 모습을 보자니 이만저만 마음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다.
듣는 바로는 지금 고국의 경제는 수출 3000억 달러 달성에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물론 모든 국민들이 다 그 같은 경제호황을 피부로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단한 경제 발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럴지라도 고국의 현실이 대통령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다 제각기 손가락질을 하며 ‘네 탓 공방’을 하는 현실이라면 그깟 경제 발전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전보다 조금 잘 살게 된 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이야말로 서두에서 말한, 늘 다툼이 끊이지 않는 부자 형 집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어찌 그 같은 나라를 잘사는 나라, 살만한 나라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잘 못살지라도 늘 화목하고 서로 ‘내 탓’이라 하는 동생 집 같은 나라가 살만한 나라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성경 말씀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닌 듯싶다. 잠언 15장 1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이는 사실 태초의 인간 때부터 나타난 인간의 악한 본성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금지된 실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의 심문을 받을 때 그들이 뭐라고 하나님께 변명을 했는가? 다음은 아담의 답변이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세기 3장 12절)
아담이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겼는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아무리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꼭 그래야만 했을까? 왜 자신이 기꺼이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을까? 아담만이 아니다. 이번엔 하와의 답변을 보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세기 3장 13절)
하와 역시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시켰다. 즉 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모두 하나 같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하였다. 그 자리는 어쩌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자리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인간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보다는 변명과 책임전가로 일관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네 탓이로소이다’- 그것이 분명 태초의 타락한 인간이 보여주고 있는 추한 본성이라면 우린 기꺼이 그 본성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래야만 하는 것은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 또한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모두가 다 ‘내 탓 운동’을 갖는다면 우리 사회엔 용서하는 분위기가 확산될 것이며 이 사회는 더욱 신뢰할만한 사회, 살만한 사회가 될 것이다.
성경을 보면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유다가 멸망한 뒤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의 후손으로 페르시아의 왕궁에서 영향력 있는 관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지 여러 세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고국과 자기 민족의 하나님을 잊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일 터인데 더 나아가 그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위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대한 내용을 보여주는 느헤미야서 1장을 보게 되면 느헤미야가 유다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형편을 듣고서 슬피 울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런데 특히 주목할 대목은 그가 자기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자기 민족의 지나간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여기면서 하나님께 자복하고 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죄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신의 선조들이 지은 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그 죄를 자신의 죄처럼 하나님께 회개하였다. 그의 기도 내용의 한 부분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분명 느헤미야는 자기가 태어나기도전에 자기 민족이 지은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여기며 자복하고 있다. 즉 민족의 죄악을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인가?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느헤미야의 모습을 귀하게 보셨다. 그리하여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사 결국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케 하시는 큰 축복을 베풀어 주셨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 이는 ‘내 탓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심지어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조차 ‘내 탓’이라 여기며 남의 허물까지 기꺼이 짊어지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살아가신 삶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본 받아야 할 삶의 모습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사람, 이는 ‘네 탓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벌이 주어진 것이며, 바로 그것 때문에 인류사회에 갈등과 분열과 다툼이 그치질 않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서로 ‘네 탓 공방’을 벌이는 고국의 문제를 말하였지만 가만 보면 교회 안에서 또한 수없이 ‘네 탓 공방’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의 교회들에 그렇게 문제들이 많은 이유가 아닌가 싶다. 한국의 경우는 그만 두고라도 우리가 사는 이 미국만 해도 많은 한인 교회들이 자주 분쟁을 겪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 공통점이 서로 ‘네 탓’이라는 것이다. 서로 제가 똑똑하며, 제 생각이 옳으며 모든 것은 다 상대방 탓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교회들에 갈등과 다툼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일들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를 생각할 때 더욱 안타까운 생각이 들게 된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 아닌가? 그리고 주님의 삶을 본 받는 사람들이 곧 교인들 아닌가? 주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기보다 그 허물을 가리기 위한 삶을 사셨다. 용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마침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삶이다. 그런데 그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이 이제는 정반대로 서로 ‘네 탓 공방’을 벌이며 살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요 우리 주님께서 크게 통곡하실 일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경향이 있다면 남의 결점은 잘보고 자신의 결점은 잘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선 관대하며 남에 대해서는 엄격하다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것이 ‘네 탓’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불행한 것이며 비극적인 것이다. 이는 태초의 비극에 연루된 본성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게 주의시키는 본성이다.
우리는 결코 그 같은 본성에 붙들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란 본성에 얽매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본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심령, 변화된 심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 같은 사람들이 갖는 삶은 ‘내 탓의 삶’이다. 그럴 때 작게는 행복한 가정, 일할 만한 직장이 되고, 크게는 살만한 사회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 같은 사람들이 모일 때 그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 천국 같은 교회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내 탓의 삶’이 있기를 소망한다. 김현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