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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5장 1-13절)
주님이 오실 것은 확실하나 그게 어느 때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만은 아시되 예수님도 모르신다고 했습니다. 그럴수록 이때를 위해 대비하는 일에 빈틈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다섯 슬기로운 처녀처럼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밤중 어느 시간이 될지, 소리 없이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등불을 켤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몸은 비록 눈앞의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영원>을 희구하는 절박한 기다림 속에서 나날을 지내온 것 - 이것이 원시기독교인의 귀한 시간체험의 교훈입니다.
우리 현대인은 시간의식을 어느 때보다도 더 뚜렷이 가지고 있다고 자처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앞에 닥쳐올 일들에 대해서 미리 빈틈없이 계획하고 대비하려고 합니다. 그 습성을 기르는 것이 <이성인간>의 덕성 (virtue)으로까지 되어 있습니다. 우리 수첩에 새까맣게 기입된 행사, 면회, 기타의 약속시간, 학교생활에서 미리 짜인 학기나 학년도의 시간표, 5년, 십년이 아니라 심지어 백년대계를 위한다는 국가목표의 확립, 거기에 나타난 합리성의 본질이 뭣이겠습니까? 그것은 시간 지배의 의욕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만사를 "우연"에 맡기지 않고 합리적으로 처리하려 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우연>을 겁내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시간에 쫓기기를 싫어합니다. 반대로 시간을 줄에 매어 제가는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강아지처럼 다루려는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그러나 시간표에 짜인 시간들은 다 객관적 사물에만 관계되는 시간, 그 자체가 세상적인 <사물>로 전락된 시간입니다. 그것은 미리 예측할 수 있고 때에 따라 우리 뜻대로 변경할 수 있는 "관리 가능한" (manageable) 시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나를 다리부터 휩쓸고 압도하는 <졸시>의 시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운명의 시간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것은 뻔히 올 줄 알고 미리 각오하고 있더라도 막상 그 때가 되면 앞에서 다가오질 않습니다. 오히려 등 뒤에서 깜쪽같이 뒷통수를 때리듯이 닥쳐옵니다. 이처럼 계획대로가 아닌 시간, 나를 놀라게 하고 사로잡는 시간을 키에르케골 (Kierkegaard)은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눈깜짝하는 사이>(Augenblick, batting of the eye)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오시는 순간에 대비하는 자세로 자기의 종말을 위해 대비하는 사람은 남보다 덜 놀라는 사람일까요? 그는 자기 수첩에 이 비밀스런 날짜를 살짝 적어둔 사람일까요? 아마도 "진실하고 착한 종"이라면 그 순간이 겁나는 순간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별로 어떤 큰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루 하루 말씀위주로 작은 일에 충성하며 착실히 노력하며 살아온 사람일 것입니다. 등잔에 차있는 기름의 분량, 그것은 그의 하루 하루의 말씀중심의 생활, 영혼의 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영혼에 관계되는 <기다림의 시간>에 이처럼 대비하고 있었다는 뜻에서 "너는 이제 모두 이루었다" 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조가경(철학, UB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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