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 구정이었다. 가만 돌아보면 십 수 년 세월 동안 잊고 살았던 구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물론 한 번도 고국의 구정을 잊어본 적은 없다. 그러나 단지 달력상으로만 구정인 것을 기억했을 뿐 그 누구와도 구정잔치를 가져본 적도 없거니와 또 한 번도 명절처럼 지내본 적도 없었다. 고국을 떠난 그 순간부터 사실 구정잔치란 이미 접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미국에서 삶을 사시는 모든 분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얘기이리라.


  그러다가 금년에 처음으로 온 교우들이 함께 구정 잔치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모든 분들이 다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반 가까이 되는 교우들이 함께 한바탕 구정 행사를 처음으로 가졌다. 개인적으로도 미국에서 이처럼 구정 잔치를 갖는 것이 처음이기도 하거니와 교회적으로도 3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니 감회가 보통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민족 고유의 명절에 우리 자신들이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교회 아래층 식당에서 펼쳐진 구정 대잔치. 사실 말이 대잔치이지 구정 행사라고 해야 ‘윷놀이’가 전부였다. 그래도 단일 종목(?) 치고는 꽤 재미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게임이었다. 정말이지 윷놀이가 이리도 재미나고 흥이 나는 놀이인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 윷놀이를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웃에 사는 타 인종들과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문화로 널리 보급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윷놀이처럼 그 규정이 단순한 게임이 또 어디 있는가? 세 살 난 어린아이도 쉽게 할 수 있는 게임이 윷놀이이다. 그렇다고 나이 드신 어르신이 힘이 없어 못할 만큼 체력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특별히 준비물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특별한 장비나 시설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아무 곳에나 질펀히 앉아서 막대 네 개만 준비하여 집어던지면 그만인 놀이가 윷놀이이다. 가만 생각하면 그야말로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한바탕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윷놀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즐거운 윷놀이 구정 대잔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윷놀이에 대한 한 글이 떠올랐다. 한국의 유명한 국문학자이자 문화학자인 이어령(李御寧)씨가 썼던 글이다. 당시 그 글을 읽으며 단순한 윷놀이에서 우리 민족의 의식과 정서를 읽어낸 그 깊은 통찰력에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윷놀이의 비극성에 괜한 서글픔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윷놀이를 보면서 한국 민족이야말로 ‘우연’에 자신들의 운명을 내어맡기는 민족이라 하였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네 개의 윷을 공중을 향해 던지는데 그 떨어지는
윷가락들이 어떻게 변할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거기엔 다만 바램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떨어진 결과에 따라 울고 웃고 한다. 물론 서양에도 주사위라는 것이 있다. 그 주사위 역시 우연을 보여주는 것이긴 하다. 그러나 윷가락은 서양의 주사위와는 다르다. ‘주사위’는 하나의 개체가 각각의 운명을 보여주지만 ‘윷’은 네 개의 가락이 서로 얽히고 설켜서 그 연관성 아래 한 운명을 만들어낸다. 즉 한국의 윷은 서양의 주사위보다 훨씬 복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하나의 윷가락이 엎어지고 젖혀지는 운명을 갖게 되고 또 그것들이 합쳐져서 전체적인 운명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서로 관련된 운명성- 이어령(李御寧)씨는 윷놀이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한국인의 민족성이라고 보았다. 서구의 특성은 ‘주사위’가 보여주듯 한 개인의 영웅주의를 강조하는 경향이 크다. 그저 한 개의 주사위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운명은 개인의 영웅주의가 아니라 ‘조직체’에 있다. ‘파당’에 있다. 이어령씨는 윷놀이에서 바로 그 같은 한국인의 민족성을 읽었다. 그는 윷놀이를 보면서 조선의 사색당파(四色黨派)를 보았고, 윷놀이를 보면서 사화당쟁(士禍黨爭)을 보았다. 그것이 바로 이순신이 그토록 영웅이면서도 결국은 역적이 되어 다시 백의종군을 해야만 했던 이유이고, 그것이 바로 조광조가 그토록 개혁을 외치다가 결국은 피를 토하며 죽음을 당해야만 했던 이유라고 했다. 그 개인은 뛰어났지만 그가 속한 파당이 미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어령(李御寧)씨는 윷놀이를 보면서 ‘앞서가는 말을 잡아먹는 놀음’에 주목을 했다. 거기서 그는 윷놀이가 보여주는 또 다른 민족의 비극을 읽었다. 사실 윷놀이의 재미 중 가장 큰 것이 있다면 앞에 가는 말을 잡아먹는 것 아니겠는가? 상대방이 높은 점수를 내어 앞서가게 되면 그것을 가만 두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서 결국은 그 ‘말’을 잡아먹고야 마는 것, 그것이 윷놀이의 재미이며 또 거기에 환호와 탄성과 박수가 있지 않은가? 이어령씨는 바로 그 같은 놀이 방식을 보면서 거기서 우리 민족의 비극을 보았다. 누군가 죽도록 노력을 해서 크게 앞서 가게 되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끌어내리고,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 민족의 역사가 보여주는 아픔이요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뿐인가? 상대편과의 싸움은 그토록 잔인하고 치사스러우면서도 자기편끼리는 서로 업고 갈 정도로 그렇게 다정하고 그렇게 마음이 잘 맞을 수가 없다. 업고 가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힘이 나고 신이 나게 된다. 끼리끼리의 문화, 끼리끼리의 사회- 그것이 우리 한국인의 민족성이라는 것이다.

과연 범인(凡人)들은 생각하기 어려운 놀라운 통찰력이요 분석력이 아닌가 싶다. 이제껏 나는 이어령(李御寧)씨의 그 같은 윷놀이 분석에 큰 영향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분석에 상당히 공감을 했고 그랬기에 그때 이후로 윷놀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가끔 윷놀이를 할 때조차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난주일 구정 대잔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때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어령씨의 생각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삼척동자까지 포함하여 온 백성이 즐기는 그 고유의 민속놀이가 과연 그처럼 비극적인 민족성을 담고 있는 것일까? 지금 이처럼 즐거이 민속놀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렇다면 내가 오늘 종일토록 우리 민족의 치부를 보여주는 비극적이고 치사스러운 놀이를 하고 돌아가는 것이란 말인가? 뭔가 모르게 서글픈 생각이 더 나아가 불쾌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뭔가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어령(李御寧)씨는 윷놀이를 분석하되 너무 부정적으로만 분석하였다. 모든 문화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 지나치리만큼 윷놀이의 부정적인 면만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역사의 어두운 면만을 찾으려고 하였다. 즉 그의 분석은 윷놀이의 부정적인 면과 우리 역사의 비극적인 부분을 꿰어 맞추려 한 듯한 인상마저 들었다. 그가 본 것이 마치 윷놀이의 전부인 양, 또 그것이 우리 민족의 전체 모습인 양 비관하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왜 꼭 그렇게 봐야만 했을까.


나는 윷놀이의 긍정성을 새롭게 쓰고 싶다. 사실 윷놀이야말로 삶의 해학이 담긴, 그리고 우리 선조들의 삶의 지혜와 철학이 담긴 놀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윷은 모두 네 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 네 개의 조합으로 자신의 운명이 정해지게 된다. 분명 그 운명은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단지 그 네 개의 윷을 던질 뿐 그 결과는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의 인생 아닌가? 우린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최선을 다해서 살 뿐이다. 그 결과는 결코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늘에 달린 것이다. 나는 그 같은 사고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고와 유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글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 16장 33절)


즉 우리가 비록 윷가락을 던질지라도 그 결과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운명관이다. 이는 결코 체념의 문화가 아니며 우연의 문화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을 인정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이다.


윷놀이에서 우리는 현재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엿보게 된다. 자신이 네 개의 윷가락을 던져 무엇이 나오든 그 하나하나의 운명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즉 큰 것이 나와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도’이든 ‘개’이든 반드시 그 만큼의 가치가 있으며 그 만큼의 의미를 가진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결과에 대해 결코 좌절하거나 탄식하지 않고 반드시 그만큼의 몫을 받아들이고 나아가게 된다. 거기에 바로 윷놀이의 멋이 담겨 있다. ‘도’라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도’가 더 좋을 때도 있다. 때로는 ‘도’가 꼭 필요할 때가 있다. 분명 ‘윷’이 나오거나 ‘모’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로 인해 더 멀리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여기서 사람 팔자 결코 알 수 없다는 한국인의 인생관이 나오게 된다. 현재 잘 나간다고 그것이 다가 아니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태도를 엿보게 된다. 이번에도 구정 대잔치를 가지며 많은 팀들이 경험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한창 잘 나가고 있던 팀이 결국엔 패배하는 경우들이 자주 있었다. 어떤 팀들은 그 별 볼일 없는 ‘도’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어이없게 무너진 경우도 있었다.


윷놀이의 가장 짜릿한 부분이 있다면 역시 ‘앞서 가는 말을 잡아먹는 것’에 있지 않나 싶다. 이어령(李御寧)씨는 그것을 보면서 남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며 어떻게 해서든 끌어내리려는 우리 민족의 비극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야말로 너무 자학적인 분석이요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비극적인 분석이 아닐 수 없다. 이어령씨의 방식대로 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은 다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을 가만 두지 못하는 민족성을 가지게 된다. 풋볼만 해도 그러하다. 공격팀이 공을 잡고 달릴 때 상대 수비팀은 어떻게 해서든 그 선수가 달리지 못하도록 태클을 걸려고 한다. 그것을 보면서 미국인을 가리켜 남이 잘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 딴죽을 거는 민족이라고 평하겠는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인생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옳으리라. 우리를 넘어뜨리는 많은 장애물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며 앞으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야 옳으리라. 그것이 바로 풋볼의 정신이다.


  나는 윷놀이에서도 마찬가지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싶다. 앞으로 잘 나가던 말이 잡
혀 먹히는 것, 이는 인생은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디든 항상 적이 도사리고 있고, 언제든 실패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남보다 앞서 나간다고 해서 마지막 승리하기까지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윷놀이가 보여주는 교훈이랄 수 있다. 그렇다면 윷놀이란 얼마나 멋진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놀이인가. 윷놀이의 더 멋진 부분이 있다면 ‘잡혀 먹힌 다음’이다. 상대방에게 잡혀 먹혀서 한없이 추락했을지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결코 포기란 없다. 다시 출발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사이 그 잡혀 먹혔던 말이 상대방을 다시 앞지르고 먼저 출구로 나오기도 한다. 그것이 윷놀이의 묘미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우리 인생 아닌가? ‘오뚝이 인생’ 그것이 윷놀이에 나타나고 있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태도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윷놀이의 백미는 역시 팀웍에 있다. 윷놀이는 결코 혼자 가는 게임이 아니다. 이어령(李御寧)씨는 그것을 가리켜 우리 민족의 끼리끼리의 문화, 파당의 민족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럿이 가는 것을 어찌 꼭 ‘파당’이라고만 부를 수 있는가? 그렇다면 모든 스포츠는 다 ‘파당’이요 ‘끼리끼리’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느 누구도 스포츠를 분석하면서 ‘파당’이나 ‘끼리끼리’를 말하지 않는다. 단지 ‘팀웍’(Teamwork)을 말할 뿐이다.


  오히려 나는 윷놀이를 보며 그 속에 담긴 팀웍에 감탄한다. 그것이 보여주는 함께 가는 삶, 더불어 사는 삶에 탄성을 발한다. 결코 어느 ‘말’ 혼자 잘 나간다고 게임에 이기는 것이 아니다. 윷판 위의 네 개의 말이 모두 함께 잘 나가야 한다. 네 개가 함께 출구로 나와야만 그 팀이 이기게 된다. 이를테면 윷놀이가 보여주는 정신이 있다면 운명공동체 의식이라고나 할까. 즉 서로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네가 잘되면 나도 잘 되는 것이고 네가 망하면 나도 망한다는 것이다. 함께 업어서 갈 경우 즉 서로 뭉칠 경우 그만큼 배나 잘 나가게 된다. 셋이 뭉치면 세배나 잘
나가게 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운명공동체 의식을 보여주는 것인가? 이 윷놀이에서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읽는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운명공동체 의식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윷놀이는 얼마나 멋진 놀이인가?


결국 윷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해학이 담긴, 자부심을 가질만한 놀이임을 깨닫게 되었다. 윷놀이를 하면서 나는 그 속에서 인생의 축소판을 보았다. 그래서인지 윷놀이가 진행될 적엔 목사의 신분마저 잊을 만큼 그 속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정상적인 삶 가운데로 돌아와 윷놀이 생을 살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결국 윷놀이 같기 때문이다. 아마도 윷놀이의 해학과 철학을 인생에 적용한다면 모두가 지혜로운 삶을 가질 수 있으리라.


  처음으로 가져본 구정 대잔치, 비록 우리가 사는 이곳이 이역만리 타국이지만 앞으로 구정 명절 때마다 제대로 윷놀이 문화가 자리 잡힐 것 같은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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