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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와 인디언 전쟁 이야기(17)
특별기고/그리스도인과 전쟁 | 2008년 07월 08일 08시 37분
 

콜럼버스와 인디언 전쟁 이야기(17)


‘복음과 황금(for Gospel and for Gold)'이란 이름의 양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독 수리와 같았다고나 할까, 콜럼버스. 그가 아뿔사 복음(선교) 쪽 날개를 잃더니 드디 어 지상으로 추락해 황금 쪽 날개만 퍼덕이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하는데...

원래 콜럼버스에게는 스페인 왕실과 맺은 계약이 있었지요. 얻게 될 황금 중 열 에 하나는 그의 몫이 되고, 발견할 땅의 총독이 되며, 「대양의 제독(Admiral of the Ocean Sea)」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받는다는 것이었지요. 저번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네 차례 왕래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492년의 1차 항해 로부터 1504년의 마지막 항해까지 12년에 걸쳐 있었던 일인데, 5개월 만에 귀국한 첫 항해를 빼고는 매 2년마다 그곳에 갔고 2년씩 머물다가 돌아오곤 했네요. 3차 항해까지 그는 캐리비안 해에 있는 모든 섬들을 발견하지요. 바하마(Bahama), 큐바(Cuba), 헤이 티(Haiti), 도미니카(Dominica), 자메이카(Jamaica) 그리고 푸엘토 리코(Puerto Rico) 등 등. 4차 항해 때는 중미의 온듀라스(Honduras)와 파나마(Panama) 그리고 남미의 베네 주엘라(Venezuela)까지 발견하지만 미주 본토엔 그의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고 맙니다.

1차 항해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지요. 원주민으로부터 금부치를 수탈한 일 과 그들 몇 명을 붙잡아 새 땅과 황금 찾는데 길잡이로 써먹은 것 정도였으니까요. 1493년, 1차 항해에서 돌아오기 전 콜럼버스는 스페인에 있는 그의 협조자들에 게 편지체의 「경험수기」를 보냅니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팔아먹은 이야기보다 더 꽝 놓는 이 사설이 출판까지 되었는데 어찌나 인기가 충만했던지 여덟 번을 더 찍어내야만 했고, 그것이 전 유럽에 삐라처럼 퍼져나갔다네요. 하여 유럽인들은 그 의 업적에 대해 ‘천지 창조 이후 예수 강림과 십자가 사건 이외에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란 전대미문의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1494년에 떠나는 2차 항해는 정말 굉장뻑적지근 한 것이었지요. 선박이 17척이 나 되었고 1500명의 부하들에다 충분한 식량과 말이며 가축까지 싣고 갔으니까요. 1500명의 남자들 중엔 군인과 일확천금을 노리는 룸펜까지 섞여 있었답니다. 로마 교황청도 교세 확장의 이 호기를 놓칠세라 일군의 신부들을 따라 붙이는데 그들에 게 주어진 임무는 항해가 거룩하게 되도록 축복하는 일과 앞으로 붙잡게 될 노예들 을 개종시키는 것이었답니다.

거룩하신 성삼위의 이름으로 비옵나니 우리로 그곳에 가서 모든 인디언들을 잡아 노예로 팔 수 있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2차 항해 도중 그가 드린 기도가 이러했으니... 그의 맘 속에 있던 ‘복음과 황 금’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엔 ‘노예와 황금(for Slaves and for Gold)'이란 우상 이 아세라 신전의 목상처럼 우뚝 들어서고 말았네요. 사실 그에겐 스페인 왕실 뿐 아니라 그의 항해에 돈을 댄 많은 투자가들에게 진 빚이 있었지요. 아무리 목을 빼고 찾아봐도 그곳엔 기대했던 만큼의 황금이 없다는 것을 벌써 눈치채고 있던 콜럼버스는 인간 황금 즉 노예 장사 쪽으로 눈길을 돌리 게 된 것입니다. 완전 부장한 200명의 부하들과 함께 본격적인 노예사냥에 나서는 콜럼버스. 캐리 비안 해에 있는 섬들을 여기 저기 뒤져 원주민을 잡아들이기 시작합니다.

1495년, ‘최대의 노예 급습(A great slave raid)'이라 불리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라왁 인디언을 1500명이나 붙잡은 것이지요. 여자와 아이들까지 닥치는 대로 붙잡았다 네요. 이들 중 값나갈만한 자들만 500명을 가려내 스페인으로 보내게 되는데, 항해 도중 글쎄 200명이나 죽었답니다. 추위란 것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니 벌거벗은 몸으로 어떻게 뱃길의 추위를 견뎌낼 수 있었겠어요. 살아남은 자들은 물론 노예로 팔려갔고요. 조찬선 목사님의 「기독교 죄악사」엔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1494년 콜럼버스는 500명의 원주민들을 끌고 가서 노예로 팔려고 했는데 이사벨 여왕의 명령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 콜럼버스 일행은 닥치는 대로 잡아서 노예로 매매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노예 수입까 지 하였다. 1498년에는 또 600명의 원주민을 강제로 납치하여 스페인으로 보냈다. 날 벼락을 만난 선량한 사람들은 콜럼버스의 군대를 피하여 마을을 떠나 울면서 원시림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원주민의 마을들은 텅텅 비어갔고, 또 웬일인지 붙잡힌 노예들도 시름시름 앓다 가 많이 죽어버리게 되니 노예장사가 점점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하여 다시 황금 쪽으로 눈을 돌리는 콜럼버스. 헤이티의 어느 지방에 거대한 금광이 있다고 스스로 굳게 믿은 그는 이런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14세 이상의 남자들은 일정 양 의 황금을 3개월 마다 바쳐야 된다는 것이었지요. 황금을 가지고 온 사람의 목엔 구리 목걸이를 걸어주었고, 만약 이 목걸이가 없는 자가 발견되면 그들의 손목을 잘라 피를 흘려 죽게 하는 잔학 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답니다. 만약 도망자가 있 게 되면 사냥개를 앞세운 수색대가 쫒아가 살해해 버렸고요.

다시 「기독교 죄악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수다한 원주민을 잡아 노예로 혹사한 콜럼버스는 다음과 같은 구실로 자기 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원주민들은 잔인하고 욕심이 많은 타락한 영혼이기 에 이들을 천주교 신앙으로 무장시켜야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 방법으 로 노예들을 합숙시켜 광산으로 보냈고, 부녀자들은 땅을 개척하여 농사를 짓 도록 하였다. 이는 원주민들에게 가혹한 중노동이었다. 부부가 함께 살면 아기의 출산으로 노동력이 저하될 것이므로 서로 만나지 도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동물처럼 취급되는데 식사는 잡초였다. 영양부족으 로 산모의 젖이 나오지 않아 태어난 아이들도 굶어죽을 수 밖에 없었다. .... 노예들은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매일 죽어갔다. 이와 같이 콜럼버스 일행은 복 음전파보다는 원주민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살인강도 집단으로 변했다.

「기독교 죄악사」는 콜럼버스 일행의 만행을 증명하는 몇 가지 실화들을 싣고 있지만 그중 하라과(Jaragua) 왕국이 당한 이야기만 들려드리지요.

당시 도미니카 에는 다섯 개의 왕국이 있었답니다. 도미니카 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던 이 왕국은 비옥한 땅과 가장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문화와 예절은 그 나라 사람들의 자랑이었다. 여왕은 우아한 미인으로서 인자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다. 콜럼버스 일행 (천주교도들)이 처음 왔을 때 낯선 손님에게 베푼 호의와 콜럼버스 일행을 수 차 죽을 위기에서 구해준 이야기는 수다하다. 그런데 여기서도 콜럼버스 일행은 그들의 고마움을 배은망덕으로 갚았다. 60 명의 기병과 3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일시에 그들을 불로 태워 죽여버렸다. 계략은 이러했다. 먼저 그 나라의 유력자들 300여 명을 은혜를 갚는다는 구실 로 만찬에 초대하여 몇 채의 가옥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일시에 불을 놓았다. 불을 피해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사전에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 으로 찔러 죽였다. 도망가다 넘어진 어린애는 칼로 다리를 잘라 버렸다. 그 때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어떤 군인이 도망나온 어린애를 살리려고 말에 태우려 하였으나 다른 군인이 그 애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여왕은 경의를 표 시한다며 목매달아 죽였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카누를 타고 다른 무인도로 도피해야 했 다. 그러나 콜럼버스 일행의 지휘관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잡으라고 명령하였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악마가 바로 그들이었다.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마치 짓밟힌 지렁이가 꿈틀거리듯 최후의 발 악적 싸움을 시도하는 아라왁 젊은이들. 그러나 그것은 싸움이라 불리울 수도 없는 싸움이었어요. 갑옷 입고 장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말까지 탄 자들과 겨우 활과 대 나무 창을 든 자들의 대결이었으니...

포로된 자들은 모두 교수형이나 화형을 당했고. 소망이 사라진 이 불쌍한 인간들은 집단 자살이라는 또 다른 방법의 저항을 하게 되지요. 카사바 독(cassava poison)을 먹고 그렇게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스페인인 에게 죽느니 차라리 자기 손에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부모들은 어린 자식을 스 스로 죽이는 일까지 있었고요. 2년 안에 헤이티의 인구 25만이 그 절반으로 줄었고, 1515년엔 5만으로 그리고 1550년엔 겨우 500명만 살아남게 되었다네요. 1650년엔 이런 끔찍스런 보고까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아라왁 계의 원주민은 그 섬에서 완전히 사라져 자취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지요.


인류 역사 상 유례가 없는 이 비극은 물론 콜럼버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범한 만 행에 기인하지만, 원주민들을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간 또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염병이었지요. 천연두와 홍역. 면역성(Immunity)이 전혀 없는 원주민들은 백인들 이 가져다 준 이 가공할 선물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어요. 2년 내에 인구의 1/3이 쓰러진 곳도 있다는데, 「Inventing America」란 책엔 이런 구절이 있네요. 서인도제도의 어느 부족은 이 수입된 질병으로 스페인들의 도착 이후 1세기 안에 몰살당하고 말았다.(wiped out) 수년 전 남미 페루에서 오신 선교사님의 「선교보고」자리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 다. 밀림 속에 숨어 사는 원주민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계신 이분의 ‘원주민과 전염병’이란 제목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그들과 접촉할 때는 전염병을 각별히 조심 해야 된다고 하셨지요. 까딱하면 선교는 커녕 그들을 모두 떼죽음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페루에 콜레라가 창퀄했던 일이 있었지요.


내 사랑하는 버팔로 믿음 의 형제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소냐, 돈을 모아 다량의 항생제를 사서 바로 이 선 교사님께 보낸 일도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발을 디딘 후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 료, 어떤 점에선 유일하기조차 한 라스 카사스(Las Casas)의 「서인도제도의 역사 (History of the Indies)」란 책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미국 민중사」의 저자 진 교 수(Prof. Zinn)는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량을 인용하고 있네요. 라스 카사스, 그는 본래 카톨릭 신부였답니다. 큐바 침공 때 종군했고, 한 때는 인 디언 노예들을 부리는 큰 농장의 주인이기도 했다는데 개과천선 했는가 그는 스페인 의 잔혹성(Spanish cruelty)에 대한 가장 격렬한 비판자가 되지요. 간추려 봅니다.

원주민에겐 종교가 없어 보였다. 필요에 따라 서로 주고받을 뿐 상업이라는 것이 없었고 금이나 귀금속의 중요성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평화롭고 온유 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왕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일로 너무나 초조해진 콜럼버스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다. 이 침입자들은 점차 과대망상적 안이에 빠져 길을 갈 때도 큰 거위 날개로 부채질을 받으며 인디언 등에 업혀서 갔다. 심지어 칼의 날 선 것을 시험한다 며 인디언을 서슴없이 베어보는 짓까지 했다. 스스로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자 둘이 길에서 앵무새를 가진 인디언 소년을 만났다. 그들은 새를 뺏고 그 소년 의 목을 잘라버렸다. 모든 것은 잔혹함의 극치였다. 이렇듯 원주민의 완전 장악은 완전 잔혹함으 로 몰고갔던 것이다.(Total control led to total cruelty). 산들은 밑에서부터 산정까지 몇 번이고 파헤쳐졌다. 파여진 흙에서 금을 찾 아내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해야 했다. 대개 6-8개월 일해야 주어진 황금의 양 을 채울 수 있었다. 이 강제노동으로 1/3의 남자들이 죽어나갔다. 한편 아내 들은 농장에서 중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부부가 만나는 것은 겨우 8-10개 월에 한 번 정도였으니 출생율의 저하는 물론이고, 아이가 태어난다 해도 엄 마의 젖 부족으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내가 큐바에 있을 동안 3개월 안에 7000명의 유아가 죽었다. 어떤 엄마는 절망에 빠져 자기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내 눈은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 이 참혹한 짓들을 보았다. 나는 지금 이 글 을 쓰면서 떨고 있다. My eyes have seen these acts so foreign to human nature, and now I tremble as I wirte.


원주민 어느 추장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남을 사랑하고 도우라고 가르치시는데 당신들의 하나님은 남을 죽 이고 빼앗으라고 가르치십니까? 「슬픈 인디언 이야기」보따리엔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네요.

주안에서 샬롬.

이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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