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 그리고 믿음
The Truman Show 그리고 Stranger than Fiction 보기


십여년 전, 한 신앙의 선배가 “The Truman Show”를 볼 것을 권하셨다. 이 영화를 통해, 스스로 계획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당신의 삶이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이끌 어 오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그래서 감동스러웠다고 하셨다. 그런데 솔직히 필자는 이 영화에서 그런 감동을 느끼 지 못했다. 오히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세지가 그 선배께서 느끼신 감동과는 정반대의 것이 아닌가 하고도 여겨졌다.


이 영화는 태어날 때부터 아주 큰 방송 스튜디오 안에서 사는 한 사람, Truman 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스 튜디오는 너무나도 크고, 실제 마을처럼 꾸며놓았기 때문에, Truman은 그곳이 기 획된 세상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Truman의 기획된 삶은 환경에 그치지 않았 다. 아내, 직장, 이웃, 아버지의 죽음 등 모두가 다 기획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 전체는 TV 드라마로 방송되고 있었다. 그런데, Truman이 자신의 삶에 뭔가 이 상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점점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그 모든 것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영화의 말미에서 Truman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스튜디오를 탈출 한다.


그 종결을 보면서 필자는, 이 영화가 어떤 짜여진 틀에서 탈출하는 인간성의 승리를 홍보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 속박에는 종교, 하나님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영화를 보는 이들이, 필자의 선배가 느낀 감동과는 다른 해석을 많 이들 하지 않을까 추측하였다.


최근 Stranger than Fiction 이란 영화를 보 았다. The Truman Show도 좀 기괴한 내용이 었는데, Stranger than Fiction 의 이야기는 더 황당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두 영화 다 코메디언을 주인공으로 썼다. 내용은 전혀 코메 디가 아닌데.) Stranger than Fiction의 주인공 은 IRS 에서 근무하는 세무원 Harold이다. 그 의 삶은 온통 숫자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그 것 밖에 없었다. 칫솔질도 몇십번으로 딱 정해져 있고, 출근시간, 버스를 타는 곳까지곳까지 걷는 발걸음 수도 정확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다른 삶은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 었고, 취미도 없고 휴가도 전혀 가지 않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노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뒤흔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어느날,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대로 낭독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 리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그 소리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 고 있는지 조차 알아내어 낭독을 했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실제, 그 낭독자는 소설가였다. 그녀가 쓰고 있는 소 설의 주인공이 Harold였고, 그 소설의 내용이 그대로 Harold 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설가의 한 가 지 특징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마지막에 모두 죽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신의 현재를 그대로 낭독하는 소리를 이상스럽게만 여기고 있던 Harold는, 소설가의 한마디 언급에 기겁을 한다. 그녀가 무 심코 Harold가 일주일 후에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버린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낭독소리를 듣고만 있을 수 없게된 Harold는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삶을 써가고 있는, 또 자기를 죽게 하려는, 그 소설가를 찾아낸다. 그리고 자신에 대 한 소설초고를 얻어낸다.


하지만 Harold는 그 소설가를 찾도록 도움을 준 한 문학교 수에게서 절망스런 얘기를 듣게 되는데, 그 교수의 말로는 소설 속에서 자신은 죽어 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소설이 제대로 종결되려면 소설가가 쓴대로 자신이 죽지 않 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 조언에 망연자실하던 Harold는 종국에 그 조언을 받아들인다. 소설가에게 그 초고를 다시 넘겨주면서 그 소설 속의 자신의 얘기가 참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획했던 대로 소설을 마치라고 한다. 자신을 죽이라고 한다.


The Truman Show와 Stranger than Fiction 두 영화 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한 사람, Truman은 그 삶에서 탈출했고, 또 다른 한 사람, Harold는 그의 예정된 삶, 심지어 죽음까 지 받아들였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을까?


그 들에게 계획된 삶을 비교해보면, Harold의 것이 더 안좋은 결과인데도, 왜 Truman은 거부한 반면 Harold는 그것을 수용하게 되었을까?


필자는 한 가지 이유 밖에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삶을 예정한 자에 대한 믿음 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기획한 자의 의도에 대한 신뢰의 차이이다. Truman은 자신의 삶을 기획한 PD의 의도가, 자기를 이용하여 시청율 높은 드라마 를 만들고 그것으로 광고수입을 올리려는 것임을 알았다 – PD 당사자는 기필코 그 의도가 아니라고, 대신 Truman을 스타로 만들고 행복하게 해주려는 것이라고 핏대 를 높이며 주장했지만. 한편, Harold는 자신에 대한 소설을 읽으며, 그 소설가가 자 신의 무미건조한 삶을 의미있는 삶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한 여인을 사랑 하게 되었고, 어릴 적부터 하고 싶었던 꿈인 기타도 시작하게 되었다. 앞으로 일어 날 일 중에는 친구의 꿈을 이루도록 돕는 역할도 있었다. 비록 그리 대단하게 영웅 적인 죽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죽음도 꽤 괜찮았다. 바로 이 점, 즉 자신의 예정 된 삶의 의도, 그 삶을 기획한 설계자에 대한 신뢰 의 차이가 두 영화의 결말을 다 르게 만들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신앙의 주된 주제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가늠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예정론은 여전히 잘 납득이 안되는 영역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들을 창 세전부터 정해놓으셨다는 구원예정론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개인의 삶을 하나님 께서 미리 정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부분에 이르면 좀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해석은 일단 제쳐놓자. 자신의 삶만을 놓고 생각해보아도 하 나님의 작정의 명제가 안겨주는 당황스러움은 충분하다. 굴곡이 많았던 지난 날의 일들이 다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진행되어 왔던 것인가? 현재 겪고 있는 이런저런 어려움과 시련도 하나님의 의도인가? 내가 원하지 않은 일들은 자꾸 생기고 정작 바라는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야 하는가? 미 래를 두고 생각해보면 겁부터 난다. 어떤 내일을 하나님께서는 내게 예정해 놓으셨 단 말인가? 혹 전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상황이 전개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Harold처럼 곧, 갑작스레 나의 삶이 끝나버리는 종결이 예정되어있다면, 과연 나는 이를 수긍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를 두고, 우리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떠날 수도 있다. Truman처럼 탈출하 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Harold 가 그랬던 것처럼. 그 차이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통해 나로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하실 것이 라는, 그 분의 의도에 대한 신뢰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 하셨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들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그리 달가운 일들이 아 니었음을 알게된다. 그것은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이었다 (35 절).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려운 일들을 통해 그 분이 의도하시는 목적 이 선한 것이라는 믿음을 지녔다. 그 믿음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세계를 바꾸는 위 대한 선교사가 되게 하였다. 같은 믿음을 많은 신앙의 선조들에게서 발견한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에 순종하여 자신의 외아들을 제단에 바치는 아브라함에게서, 형제들에게서 버림받 고 13년간이나 노예로 죄수로 전전하며 살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했던 요셉에게서, 40년 동안 그 변덕스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생활을 이끌면서도 한 마디 불평하지 않았던 모세에게서, 질투심에 불타는 사울을 피해 십수년 동안 도망자 생 활을 하면서 수많은 믿음의 시와 찬양을 남긴 다윗에게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 을 통해 선을 이루어 가시리라 신뢰하는, 동일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더 나아 가 , 우리는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에게서 그 믿음의 절정을 본다. 온 인류의 죄 를 지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 무서운 일을 예수님께서는 끝내 순종하여 받아들이 셨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선을 바라보셨기 때문이었다. 내게 이런 믿음이 있는가 자문해본다. 당연 그렇지 않다. 하지만, 신앙의 선조들 이 모범을 보인 그 믿음의 부스러기 티끌이라도 내게 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믿 음은 과정인 것 같다.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도 과정을 통해 그 큰 믿음의 분량까지 자랐다. 비록 현재 우리의 믿음이 그 분들에게 비교할 때 턱도 없는 수준이겠지만,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자라가길 소망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던지, 어떤 내일로 이어지던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하 며 순종하는 분량에까지 다다르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김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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