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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만든 사람(3)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이야기-
제 3부 최고의 평신도 사역자
사람, 교회, 비즈니스 등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고 믿었던 워너메이커는 자신의 사업과 주일학교 사역을 통해 이 신념을 입증시켰다. 1858년 27명의 어린이와 함께 시작한 베다니 주일학교가 10년 후에 1천 명을, 15년 후에 2,248명으로 꾸준히 성장하였고, 그가 체신부 장관을 지내던 1892년에는 3천명 이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워너메이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삶의 원칙이 있었는데, 바로 ‘주일 성수’였다. 그는 주일을 기다리고 주일을 준비하며 주일 예배를 통해 새 힘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신앙인이었다. 당시 해리슨 대통령이 그를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하고자 했을 때에 ‘주일 성수를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장관직을 수락한 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홀히 하면서 국민이나 대통령과의 약속도 지킬 수 있겠느냐’는 말로 신임 장관의 책임감에 대해 비판적인 기자의 질문에 답하였다. 워너메이커는 ‘장관직이 주일학교 교사직만도 못하냐‘는 질문에 주저함 없이 “장관직은 몇 년 하다 말 부업이지만, 주일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입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주중에는 워싱턴 DC에서 장관 업무를 보고, 주말에는 주일학교 사역을 위해 필라델피아로 한 번도 빠짐없이 4년 동안 최선을 다해 헌신하였다.
그러나 주일성수의 문제로 워너메이커가 큰 아들 토머스와 큰 고통을 겪는 일이 있었다. 토머스가 미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일간지인 The North America를 인수해서 주일자 신문을 발행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주일성수를 목숨같이 여기는 아버지 워너메이커에게 굉장한 당혹감과 슬픔을 안겨준 사건이었고, 결국 아들 신문사의 주식을 사들여 주일자 신문을 봉쇄하기까지 했다. 그는 “주일은 사람의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설명하기 위해 이 신문 1면에 자신은 주일자 신문과 주일을 파괴하는 어떤 행위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포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계속 주일자 신문을 발행하였고 워너메이커는 자신이 사랑하고 헌신한 교회에 장로직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 사표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워너메이커가 얼마나 주일성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지키며 살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워너메이커가 주일학교 부흥과 사업 번창, 그리고 장관직 수행까지 이렇게 엄청난 일들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일에 대한 열정과 창조적인 아이디어, 탁월한 조직운영 능력, 큰 믿음과 간절한 기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등의 여러 요인이 있다. 그는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고 장관직에 오른 이후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교회 사역을 가장 우선시하며, 20살 청년 때나 80살 노인이 되어서도 교회의 어려운 가정을 심방하며 위로하고 도왔다. 그는 65년을 베다니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였고, 어린이들의 자상한 아버지이며 진정한 친구가 되고자 항상 노력했다. 가장 유명하고 가장 바쁜 사람이었지만 그는 주일학교 어린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친근하게 대하였는데, 60회 생일을 맞았을 무렵에는 4천명의 어린이의 이름과 부모의 이름, 직업까지 다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아이들에 대해 각별한 사랑과 관심이 아이들을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한다는 확신을 가진 워너메이커는 복사기가 없던 그 시절, 밤을 새우며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정성스런 편지를 쓰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매일 한 사람이라고 돕는 기회를 가진 것은 특권이라고 생각하며 어린 영혼들을 위해 나누고 봉사하였다.
이러한 그의 헌신과 열정에 힘입어 베다니 교회는 1902년 워너메이커 소유의 큰 땅위에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 건물을 건축하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다니 교회로 몰려들었고, 결국 워너메이커는 20세기의 모델 교회는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음을 예견하게 된다. 그는 베다니의 정신을 가진 새로운 교회를 더 많은 지역에 세워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형제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자신의 물질을 아끼지 않고 헌금하여 1902년 10월 필라델피아의 남쪽 지역에 ‘존 챔버스 메모리얼 교회’를 세우고, 1906년에는 ‘베다니 템플 교회’를, 1911년엔 ‘베다니 연합교회’를 세우게 된다. 또한 그는 형제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들을 건축하는 일에 재정적으로 도왔고, 오르간, 피아노, 의자, 성찬기 등을 기증하였다. 볼티모어의 ‘바울 교회’와 젠킨타운의 ‘그레이스 교회’가 바로 워너메이커의 헌금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그는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희생적으로 헌신하면서도 즐거움으로 그 멍에를 메게 해주소서.’라고 한 자신의 기도대로 삶을 살았다. 웅장한 베다니 교회를 완공하고 헌당식을 갖던 날 워너메이커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헌금할 돈이 없어 벽돌 몇 장을 드린 저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축복해주셨습니다.”
워너메이커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베다니 교회의 담임목사인 맥레난의 ‘기도 선집’이라는 세 권의 책을 통해 전해진다.
(10면에서)
워너메이커는‘기도란 하나님과 손을 잡는 것’이라고 믿었고, 기도하는 장소와 진실성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백화점 사업에 열중해 있을 때도 장관직으로 바쁠 때도 그는 항상 매일 아침을 기도로 시작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하고자 했다.
한편 워너메이커는, 당시 여성운동을 벌이고 어머니 사역 클럽을 결성하기도 했던 주일학교 교사인 ‘애나 자비스’의 노력에 감동받아, 1908년 5월 둘째 주에 백화점에서 수천 명의 직원들과 그들의 어머니를 모시고 '어머니날‘ 기념행사를 가졌다. 그는 어머니들에게 기념품을 선물하고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다. 이후 워너메이커는 어머니날 제정을 정부에 건의하고 지속적으로 홍보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으로 1914년 윌슨 대통령이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날’로 공식 선포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1930년에 청주의 한 교회 주일학교에서부터 어머니날을 기념하기 시작했고,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어머니날로 발표하여 지키다가, 1974년부터는 ‘어버이날’로 개칭하여 오늘날까지 소중히 지켜지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 “성경이 만든 사람-존 워너메이커 ”(전광, 생명의 말씀사) 요약: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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