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노여움)-1


분노는 인간이 가진 감정 중에서 아마도 가장 강한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분노
는 증오를 증폭시키고 사랑을 억누르는 그런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여움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하나님께서도 노여워하실 때가 있습니다.하지만 정당한
노여움과 잘못된 노여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우리가 노여워하는 대
상,노여워하게 된 동기,그리고 노여움으로 인한 결과에 따라 결정됩니다. 독선적
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교만하여 생긴 분노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 분노의 감정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결국 자신을 파탄으로 이끌고, 고통과 증오, 난폭한 행동에 이
르게 할 수 있으며 또한 동정이나 용서하는 마음을 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죄나 부정에 대해 노여워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타
오르는 불과도 같으나, 하나님의 초점은 죄를 근절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죄지은
자를 멸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분노는 상반된 결과
즉, 죄를 더 만연시키고 다른 사람과 또 때론 자기 자신까지도 파탄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분노는 악을 소진(燒盡)시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불순물을
태워 금을 만들어 내는 불과 같아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임받는 데에 적
합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왜 제게 분노의 감정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까?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
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
색이 변하니. (창세기 4장 4‐5절)

하만이 모르드개가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심히 노하더니. (에
스더 3장 5절)

분노는 보통 자존심이 상했을 때 생깁니다. 당신이 거절당하거나 무시당했다고
느낄 때, 혹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분노는 당신의 자아(ego)를 보
호하는 데 쓰이는 하나의 방어체와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당신이 저지른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가 당신을 비판하게 되면 도리어 당신이 노여워하게 되기 쉽
습니다. 이는 당신이 잘못된 행동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사무엘상 18장 8절)

분노는 때론 다른 사람들이 성취한 것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분노는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15장 1절)
분노는 대립과 말다툼으로 이어집니다.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
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게 보내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
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창세기 27장 41‐43절)
분노는 당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킵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 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사무엘상 20
장30‐31절)

분노는 악한 동기를 유발시켜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행동으로 이어지게끔 합니
다.그대로 방치해 둘 경우,분노는 폭력적인 생각을 양산하고 심지어는 살인에까
지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여움은 당신이 무엇이 옳고 선한 것인지에
대한 분별력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시기에 찬 분노는 하나님께서 다윗
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을 보시고 다윗을 다음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다윗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Life’s Questions", Ronald A. Beers & V. Gilbert Beers, 번역:복은임
 

콜럼버스여, 안녕 -전쟁이야기(19)-


5. 「콜럼버스 날(Columbus Day)에 얽힌 사연

이 날은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 「서인도 제도」의 바하마에 첫 발을 디
딘 일을 기리기 위해 정해진 국경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계실 터.
그의 항해 300 주년인 1792년 10월 12일, 최초의 축하 모임이 만찬 형식으로
있게 되지요.초기엔 주로 개신교 사람들이「콜럼버스 날」제정을 위해 노력했으
나 19세기에 들어와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이 몰려오면서 캐톨릭과 이태리계 사람
들에게 그 주도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이들이 주최한 첫 기념행사가 1866년 10월
12일 뉴욕에서 있었고, 그 이후 이 행사가 여러 도시로 퍼져나갑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가 되면서 가두행진 형식(Parade)의 기념행사가 시작되
지요. 콜럼버스와 이사벨라 여왕의 모방자(impersonator)들과 첫 항해 때 타고 갔
던 Santa Maria호, 때로는 Nina호와 Pinta호의 모형이 등장합니다.

400주년인 1892년, 캐톨릭의 압력을 받은 해리슨 대통령은 「콜럼버스 날」을
선포하지만 행사는 그 해에 그쳤고, 1937년 로즈벨트 대통령(FDR)도 이 날을 공휴
일로 정하나 정식으로 연방 국경일로 확정지어진 것은 1972년이 되어서입니다. 우
리 교회가 주님의 뜻에 따라 창립된 해보다 겨우 일 년 앞서 있었던 일이네요. 그
해에 드디어 미국회가 인준했고,그러면서 날짜를10월 12일에서 10월의 둘째 월
요일로 바꾸어 버립니다.

축하 행사의 규모가 서서히 커가지요. 1972년, 뉴욕 5번가에서 있었던 퍼레이드
엔 10만의 인원이 참가했으며 백 만이 넘는 구경꾼들이 모였답니다.
그러나 뜨겁게 달아오르던 이 축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
다.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인디언 운동가들의 목소리가 드높아지기 시작한 것입
니다.콜럼버스는 축하받을 자가 아니라 오히려 정죄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즉 그
는 정복자였고 압제자였으며 당시 토착민의 90%를 죽인 전염병을 옮겨왔을 뿐 아
니라 전 원주민 노예화의 원흉(villain)이라는 주장이었어요. 또 이런 질문도 던지고
있었습니다.자기네 조상이 그토록 오래 살아온 이 땅을 그가'발견했다(discover)'
고들 하는데 이 소리가 도대체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신대륙에 먼저 왔던 유럽인들이 있었지요. 노르스 인(Norse People) 또는
바이킹(Vikings)이라 불리우는 스캔디나비아계 사람들로 콜럼버스 보다 약 500년
앞서 뉴파운드랜드와 노바스코시아에 상륙했고 그곳에 정착해 살기까지 했다는 엄
연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이「반 콜럼버스 운동」에 많은 양식있는 미국인들(non-Indians)이 동조하게 됩니다.그 중엔 다수의 교육가들도 들어 있었지요.그들은 지금까지의 그릇된 역사
교육을 수정해야 된다는 견해를 발표합니다.

199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500주년 기념 행사가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데모대가 들이닥친 것이지요. 여기 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같은 사태가 벌어지
는데, 데모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덴버 시는 행사를 아예 취소해 버리기까
지 합니다.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시 의회는 투표를 통해 10월 12일을 「토착민의 날」
(Indigenous People's Day)로 선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즈음 미국 주류 사회의
여러 민간 단체들도 인디언의 주장에 동정의 뜻을 표하게 됩니다.

「콜럼버스 날」제정을 강력히 밀어왔을 뿐 아니라 콜럼버스는 성자가 되고도
남는다는 희극적 잠꼬대까지 하던 캐톨릭도 철이 들었는가, 일련의 변화된 조짐들
을 보이기 시작하지요. 씨애틀의 대주교는 인디언 대표들을 위한 밥상 모임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의 원통하고 슬픈 이야기를 경청했으며, 캐톨릭 「전국주교회의」는
심지어 콜럼버스가 저지른 죄악을 정죄하는 성명서까지 발표했으니 말입니다.
미국 중고등학교에서도 인디언 연사들을 초청해 학생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알도
록 했고요.

한편,라틴 아메리카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요.전통적으로 이 지역에
선 「콜럼버스 날」을 무슨 큰 명절처럼 지켜왔다네요. 여러 곳에 「콜럼버스 동
상」까지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들이 곤욕을 치르게 되지요. 예외없이 여기서도 항
의 데모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의 데모는 격렬했어요. 1992년, 알라스카로부터
남미 칠리까지의 인디언 수천명이 멕시코 시에 모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콜
럼버스 동상」을 가차없이 파괴해 버리지요. 마치 박다드 거리에 세워져 있던 사담
후세인의 동상꼴이 되고 말았으니.

1997년, 중미의 온듀라스 사람들도 「콜럼버스 동상」을 쓰러뜨리는데 이들은 그
위에 새빨간 페인트 칠을 해버립니다. 그것이 콜럼버스가 흘리게 한 자기 조상들의
피라면서.

1998년, 뉴욕 주의 수도인 어바니(Albony)에서 있었던 행사는 아무 탈없이 진행
되었는데 그것은 이 일을 주도한 이태리계 사람들이 사전에 이런 변명 비슷한 소리
를 발표했기 때문이라네요. “우리는 다만 이태리인의 가치와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이 행사를 준비할 뿐이요 콜럼버스를 기리려는 것이 아니다.”10월 달력의 둘째 월요일엔 아직도 「콜럼버스 날」이라고 적혀 있지요. 그러나
근래에 이날 무슨 그럴싸한 축하행사가 있었다는 뉴스 들어보셨나요? 그저 이름 뿐
인 국경일이 되고 말았네요.

확실히 변했습니다. 새벽안개 걷히면 드러나는 광활한 대지처럼 많은 시간이 지
난 후 반드시 그 모습을 나타내고야 마는 진실이라는 것,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을 저미고 드는 아릿함과 슬픔 또한 어쩔 수 없네요. 자그마치
500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뒤였으니...

며칠 전 저녁나절 동편 하늘에 뜬 「겹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소나기가 한 차
례 지나간 후였지요.아직은 인류에게 희망은 있습니다.영롱한 저 색깔 속에서 들
려오는 잔잔한 창조주의 음성을 들어보세요.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
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
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창세기 9:14-16)

가없는 섭리의 나래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 활동의 기록인 역사라는 것, 그
것은 옳고 바르게 쓰여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건들이 생략될 때도 있었고,
희석될 때도 있었으며, 뻥튀기에서 튀어나오는 강냉이 알처럼 부풀려질 때도 있었
고(과장), 심지어 왜곡까지 될 때도 있었으니...

역사를 기록하는 자도 사람인 이상 어느 정도 그의 입김이 서리게 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외부세력, 특히 정치단체가 큰 손을 내밀어 역사가들의 멱살을 쥐
고 흔들어댈 때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어요.

이 나라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콜럼버스의 비행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다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태리계 사람들과 캐톨릭이 같은 동족이요
같은 천주교 신자라는 어설픈 이유를 등에 업고 그들의 막강한 힘을 「콜럼버스 영
웅 만들기」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냐하면 동질의 잔인한 정
복자들인 코르테스나 피사로 이야기는 교과서마다 비교적 자세하게 실려 있기 때문
이지요.그들은 스페인 사람들이거든요.「악마의 사도」라 불리우는 이들의 짓거
리는 다음에 들려 드리겠고, 아무튼 이 교과서의 경우는 역사의 생략과 과장의 한
좋은 예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듯 싶습니다.역사왜곡(歷史歪曲)이란 말 나왔는데 이런 짓 식은 죽 먹듯 하는 저 물건너 사는 도요또미의 후예들 한번 건드리지 않고 넘어갈 재간이 없네 그려.

또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이 그들 때문에 벌집 쑤셔놓은 형국이 되고 말았으니. 한
국일보 지난 달 19일 자엔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인 도시환씨의 글이 실려 있었지요.
한일 신시대 개척을 향한 양국 정상의 결의가 위기에 직면했다. 14일 일본 정
부가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의 영유권 주장을 명기하는 방안을 확
정하여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통해 교육 받은 일본의 차세대와 이를 용인할 수
없는 한국 차세대에게 양국간 선린우호의 미래가 아닌 영토분쟁의 맹아(萌芽)
를 배태하는 것이자 신시대 개척의 토대를 허무는 일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우리의 영토임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은 독도침탈 100주년이 되던 2005년 ‘죽도의 날’을 제정한 이래, 독도 관련 역
사교과서의 왜곡 등 독도 영유권에 대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다.

지난 7월 27일자「쉴만한 물가」에 난 본 교회 조현수 선생의 ‘외롭지 않은 섬,
독도’란 글에 개스하이드레이트(gashydrate)가 소개되어 있었지요. 향후 10년 내에
세계 에너지 시장이 이 물질을 중심으로 개편될 것이라는 이 복덩어리가 글쎄 독도
주변의 울릉분지에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다니, 요 뻔뻔스럽기가 양푼 밑 같은 자들
이 기쓰며 물고 늘어질 밖에.

지난5월 타계한 소설가 박경리씨의‘일본산고(日本散考)’란 제목의 유고산문이 발견
되었다는 기사가 얼마전 신문에 실려 있었습니다.그녀는 대하소설‘토지(土地)’의 필자.
과거 일본의 역사학, 특히 국사학의 학자들은 황국사관을 공고히 하기 위하
여 역사에 무수히 많은 땜질을 했고 또 많이 쏠아내고 했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학자)개인의 사고를 그토록 붙들어 맨 일본의 국가권력은 놀랍다.
역사를 땜질했다는 것과 쏠아냈다는 표현이 재미있네요.

일본인들은 역사 뿐 아니라 한국 속담까지도 왜곡했으니. “사촌이 땅을 사면 배
가 아프다”란 속담 아시지요?사람들은 보통 “사촌이 땅을 살 경우 그것이 부러워
서 배가 아프다”라고 해석하는데 이 해석은 실제로 일제 때 일본인들이 일부러 바
꿔버린 것이랍니다. 원래의 뜻은“사촌이 땅을 샀는데 보태줄 것이 없으니 배라도아파 거름이라도 줘야할텐데...”, 그러니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라도 아파야 할텐
데...”라는 것이지요. 이웃 사랑의 미풍양속까지 해치려는 일본인들의 치사함이라니.
아메리카(America)란 이름이 지어진 연유.

사실 옛날에는 캐나다와 미국이 한국의 속국이었다. 어느날 캐나다 사람이
세종대왕을 찾아와서“저희나라 이름을 뭘로 할까요?” 하고 물었다. 대왕께
서는 잠시 고민하시더니 “가나다로 하여라.” 그래서 가나다, 가나다 하다가
캐나다식 발음으로 ‘캐나다’가 되었다.

그랬더니 같은 속국인 미국이 몹시 부러워했다. 그래서 세종대왕에게 찾아
갔다. “저희도 이름 지어주세요~~~ 네?” 세종대왕은 귀찮은지 손을 휘휘
저으며 “아무러케나 지어버려”라고 했다. 그래서 “아메리카!!”가 됐고, 오늘
날의 미국이 되었다.

다음날 어떤 섬나라 사람이 찾아왔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무니다. 조선
노 우리의 속국이 되는게 마땅하무니다. 우리나라 이름 없으니 조선이노 우
리나라 이름 지어주는 게 마땅하무니다.” 그러니까 세종대왕께서 버럭 화를
내시며“저 사람 닮은 원숭이 새끼를 줘 패보내라!”고 하셨다. 그 사람 닮은
원숭이 새끼는 실컷 볼기짝을 맞았다.배를 타고 돌아가면서 생각했다.“줘
패보내라... 줘 패보내라... 줘패? 재팬!!”
그래서 미국과 캐나다와 일본의 이름이 정해졌다는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
해져 내려오고 있다는데...

농담이지요, 물론.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i)란 이가 있었지요. 콜럼
버스와 같은 이태리인으로 부자 사업가였는데 우주구조론(cosmography)에 깊은 관
심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가 1497년에서 1503년 사이에 네 번에 걸쳐 신대륙을
여행하게 되고,그 경험담을 편지체로 썼는데 굉장한 인기를 얻었답니다.브라질을
보고난 후 내린 그의 결론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놓여있
는 전혀 ‘새로운 땅(New World)'이라는 것이었지요.

1507년, 프랑스의 지도제작자들이 새 지도를 만들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지구의 네 번째 부분,유럽,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가 아닌,
을 발견했으니 ‘아메리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그 이후에 나오는 지도엔 모두 ‘아메리카’라고 적혀 있었고 사람들도 이렇게 부
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휴,드디어 콜럼버스 이야기의 막을 내릴 수 있게 되었네요.주안에서 샬롬.

✎이은모

 

나의 아버지, 박오기 님


국립묘지 애국열사 묘역에 묻히신 나의 아버지를 소개하는 글을 써보라고 하기에
처음엔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 자신이 자기 주변 사람을 자랑하는 글을 읽노라면
역겨워지고 다 읽지 않고 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쓴다면 그의 고뇌, 그의 과오, 그의 방황 같은 어두운
면을 모르니 쓸 수가 없고 그의 동족에 대한 사랑과 돌아가실 때까지 실낱같은 희
망을 버리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밝은 흔적만을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
다.몇 번 거절했지만8월, 광복의 달에 "쉴만한 물가"에 지면을 남겨놓겠다고 하기
에 결국 이 글을 쓰게 됐다.

내가 7살하고 3개월이 되었을 때 나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몇 편 안되지만 그것도 내가 자라면서 주변 어른들이 들려주신 이야기들이
각색되어 순수한 내 기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중 독립운동과 연관된다고 생각
하는 것만 기록했다.

1

도쿄 쪽에서 오는 전철열차는 열하고도 하나가 더 지나갔다. 아버지를 기다린 지
두 시간도 넘었다.우리가 살았던 도쿄 외곽 소도시의 나이든 역장은 우리 식구,어
머니, 형, 나, 그리고 사촌형 둘, 사촌 누나 둘이 오랜 시간동안 플렛폼에서 아버지를
기다릴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오늘 아침 지방 경찰서에서 형사 한 사람이 우리 집
에 찾아와서 오늘 오후에 아버지가 도쿄 본청에서 풀려나오신다고 연락해주고 갔다.
아버지는 종종 예비검속이나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여 구류되시면 이삼일씩, 어
떤 때는 십일이 넘어서 풀려 나오셨다. 우리 식구들이 전철 정거장에 미처 마중 나
가기 전에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전철역에서 다섯 여섯 시간을
기다릴 때도 있었다.

전철에서 내리시는 나의 아버지는 좀 탈색된 듯한 검은색 코트를 입고 계셨다.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대부분 이 코트를 입고 계셨다. 내가 얼른 안기자 나를 훌쩍
머리 위까지 올렸다가 내려놓으셨다.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개찰구를 나가니 대합실
에 여나믄 한인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그들을 향해 아버지가 한마디 하시니 모두들
웃었다.아버지는 유머가 풍부하신 분이었다고 한다.대합실을 나가니 역광장에도
그만한 수의 한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2

내가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나이 때에는 아버지의 건강이 몹시 나쁘셨다. 사
십대 초반인데도 귀는 거의 들리지 않아서 나팔같이 생긴 큰 보청기를 끼고 남들과
대화를 하셨지만 그것도 별 효과가 없어 어머니가 중간에서 남들의 말을 크게 아버
지의 귀에 대고 전달해 주시면 조금은 알아들으셨다.늘 피곤하시다고 하셨다.젊
었을 때 일본 헌병,경찰의 고문을 많이 받아서 건강을 잃으셨다고 한다.그래서
아침에도 늦게까지 누워계셨다.

그때에도 매일 아침 불청객(?)이 아버지께 문안드리러 왔었다. 크고 동그란 검은테
안경을 낀 젊은 형사는 형들과 누나들이 학교에 간 후에 왔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일
어나실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방은 우리집의 현관이자 사랑방이자 공
부방이었다.미취학 아동인 내가 그의 접대자였다.문만 열면 아버지가 누워계시는
방이지만 그 형사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아버지 스스로 일어나실 때까지.그
의 임무는 그날의 아버지 스케줄과 만날 사람을 미리 알고 가는 일이었다.

그는 자주 나를 아버지 방에 보내서 자기 임무를 빨리 끝내기를 원했다. 그는 나에게
환심을 사려고 애썼던 것 같다. 투명한 구슬도 주고 비행기나 탱크나 군함이나 병졸들
의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내가 그 그림을 따라 그렸더니 그림 그리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몇 달 동안 그에게 그림을 배웠더니 그림 그리기가 재미있었다.훗날 미술 선생
님들에게 회화를 전공해 보라는 권유를 받게된 것도 전적으로 그 형사덕분이었다.

3

밤에도 우리 집 주변에는 경찰들이 자주 감시했다. 어떤 때는 많은 경찰들이 집 주위
에 잠복하고 있었다. 나의 형님이 십여년 전 그곳을 방문했었는데 어렸을 적 이웃에 살
던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경찰들이 우리집을 잠복하자 이웃 주민들이 이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어보면 오늘 밤 이집에 오는 사람을 검거해야 한다면서
언제든지 이 집에 수상한 일이 있으면 경찰서에 바로 신고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고
했단다.그러면서 그 친구는 너의 아버지는 큰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했단다.

4

나의 아버지는 삼일 독립만세 사건으로 당시 중학생의 몸으로 실형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루셨다.(그것으로 정부의 훈장을 받았다.) 도쿄 유학생 시절에는 한인유
학생회 서기를 맡으셨다. 해방후 여순사건 때 형님이 그때의 유학생 명단에 민족주
의자만이 아니고 누구나 알 수 있는 공산주의자의 이름들도 있어 가택수색때 문제
가 생길까봐 태워 없애버렸다.아버지는 수학을 전공하셨지만 도쿄 근교에서 큰 창고를 세개가지고 고물상을 하셨다.

그즈음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세끼 밥 먹기도 힘들어 고향을 떠나
만주나 일본으로 가서 살길을 찾았다. 내가 장성한 후 한국에서 아버지를 고맙게
여기는 분 세 사람을 만났었다. 그분들 모두가 일자리를 찾아 일본에 갔지만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는데 박오기 님을 찾아가면 일자리를 찾아준다는 말을 듣
고 나의 아버지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전에 농사짓던 분은 어버지가 일본인
농토를 좋은 조건으로 소작하게 해주어서 끼니 걱정없이 살게 되었고 다른 두 분은
고물장사를 하게 해주셨다고 했다. 그리고 건강한 젊은 분들은 노동판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항상 자기들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친구나
형제처럼 대해주시고, 농담을 즐겨 하셔서 편안하게 해주고 어려운 일이 생겨 찾아
가면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고 곧 해결해 주셨다면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좋은 분이
었다고 늘 잊지 않는다고 했다.

5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늘 자랑하는 무사정신(사무라이 정신) 때문인지 적의 장수
에게는 자기가 모시고 있는 장수에게 대하듯 예우를 갖추었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적의 장수를 대하듯 무례하게 행하지 않았다. 이웃들도, 학교 선생님들도, 역장도,
심지어 경찰서 형사들도 그랬다.

6

한번은 아버지에게서 일했던 젊은 형이 거의 아무것도 싣지 않은 손수레를 끌고
가기에 태워달라고 졸라댔다.그는 할 수 없이 나를 태우고 꽤 먼 거리를 갔다.산
기슭에 다 쓰러져 가는 빈 집이 나왔다. 그는 나를 밖에 세워두고 혼자 그 빈집에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 나왔다. 그는 나를 데려간 것 때문에 나중에 아버지에게 심
한 꾸중을 들었다.그런 집이 가파른 강언덕 숲 속에 또 하나 있었다.

일본 경찰이 왜 아버지를 그토록 감시하고 조사했는지 어머니도 자세히는 모르셨
다. 아버지는 본인이 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주변 사람 아무도 모르게 혼자 행동하고 혼자 가슴에 묻고 가셨다. 나는 그 빈집들
이 아버지가 하셨던 일들과 연관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시 도쿄에 간다면 주일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그곳 경찰청이나 문서보관
서 등을 통해 아버지의 숨은 행적을 찾아보거나 우리가 살었던 곳들을 탐문해서 조
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한다.
✎박영휘
 

U국에서 온 감사의 소식을 전하며...


무더운 여름에 동역자님들 가정마다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김요한 이순희 문안과 함께 감사의 소식을 드립니다.
동역자님들의 기도의 동역을 통하여 우 국의 T 만민교회의 등록증을 돌려받게 되
었습니다.

지난 주간 대전에서 저희 선교부(SEED USA, SEED CANADA, SEED KOREA)산
하 선교사들의 선교사 대회가 혜천대학에서 열렸습니다. 그 은혜로운 시간에 우 국
으로부터 교회 등록증을 돌려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황뽈리나 전도사가 종교성에 불려가서 장시간 투쟁을 벌였답니다. 오후에 불려가
서 저녁9시경에 등록증을 돌려받았으니 참 긴 시간이었습니다.결국에는 그 등록
증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 방에서 물러나지 않고 여기서 죽겠다고 농성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마지막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와서 저 위에 높은 사람이 주라고 해서
준다고 하면서 등록증을 돌려주었답니다. 힘든 시간이었는데 잘 인내하며 버티어
낸 황 뽈리나 전도사의 투쟁 정신과 기도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돈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끝까지 기도로 투쟁하여 이기게 도와주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지난 주일은 매월 첫 주일 다른 지역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성찬 예식 주일이었
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눈
물로 감사를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돌렸답니다.

이런 어려움을 통하여 교회가 더욱 강건해 진 것을 인하여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새벽기도도 전에는 15명 정도 모이던 모임이 이번 일을 통하여 40명 이상 모이
는 모임이 되고 금요 철야 기도가 다시 활성화 되고 모든 성도들이 기도로 뭉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 것이 더욱 감사를 드릴 아름다운 일입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만들어 내는 줄을 실제로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곳 만민 교회를 통해서 주변의 미전도 종족들뿐만 아니라 만민을 구원 하시려
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더욱 만민이 기도하는 교회,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 교회,만민에게 복음을 전
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SEED 유치원의 문제는 아직 해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3반의 유치원이
여름 중에도 계속 수업을 잘 하고 있습니다만 어제까지 들어 온 소식은 저희 유치원소속 군청에서 유치원에서 나온 자료를 법정으로 넘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컴
퓨터에서 나온 찬양곡과 유치원 한 반에서 나온 기독교 서적이 문제가 된다고 한
답니다.그래서 모든 학부모로부터(50명 이상) 유치원에서 종교 교육을 시킨 적이
없다는 증명서를 만들어 상정을 하고 함께 기도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계속 함께 기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직도 SEED 유치원의 원장은 저의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U 국에서 외국인이
유치원 원장으로 있는 유치원은 저희 유치원 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저를 유치원
원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려는 것이 목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유치원
부 원장이 되어도 좋고 혹은 매니저가 되어도 그곳에서 일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
가 없습니다. 이 유치원은 사립 교육 기관이며 합자 회사 아래에(OOO "SEED"회
사) 속해 있습니다. 얼마나 벌금이 나올지 혹은 유치원 문을 닫게는 하지는 않을지
염려가 됩니다만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모
든 것을 맡기고 계속 기도로 믿음으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함께 10대의 컴퓨터를 돌려받고 유치원이 조금도 어려움 없이 9월 새 학기 아이
들을 받아들이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총신에서 하는 몬테소리 유아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사미경 교수의 특
별한 배려로 이번 주간 3과목 이수가 끝나면 졸업장과 몬테소리 교사 자격증을 받
게 됩니다. 힘들게 배운 것이 우 국에 적용되어 그곳에 몬테소리 교육이 정착되도
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간은 자연농 특수 교육을 받게 됩니다. 미전도 종족 혹은 미개발 지역 창
의적 접근 지역 선교에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을 바라보고 한 주간 충북에서 훈련을
받게 됩니다.위해서도 기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한결같이 기도로 동역 해 주시고 헌금으로 함께 동역 해 주시는 동역자 여러분에
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평강을 빕니다.
✎김요한 이순희 올림

 

낙하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다보면
강변도로를 달리게 된다.
큰 강물이 그렇게 잔잔할 수가 없다.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저기 폭포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나이아가라 폭포가 가까워오면
서서히 물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는 여기저기 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돌들에 강물이 부딪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청아한 노래가 그칠 새 없다.
그리고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귓전을 때리는 엄청난 굉음
천 길 낭떠러지로 물살이 추락한다.
그로인해 온 사방엔 비명처럼
물안개가 자욱하다
그렇게 생겨난 세계 제일의 폭포
일러 나이아가라 폭포,
새삼 그 천 길 낙하가 아름답기까지 하다

사노라면 조용한 삶의 언저리에
시련의 돌들이 찾아들곤 한다.
그리하여 부딪침의 아픔을 겪는다.
그러나 그 만큼 삶은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때로는 예기치 못한 큰 낙하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절규한다.
굉음과 물안개가 그칠 새 없다.
그러나 그 낙하로 인해
훌륭한 폭포가 만들어진다.
낙하가 크면 클수록 더 큰 폭포,
더 멋진 걸작이 탄생한다.

낙하가 없이는 위대한 삶도 없다.(HJ)
 

별종


나는 골프를 치지도 못하거니와 골프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다.그러나 가끔씩TV
를 통해 골프 경기를 즐겨 시청하곤 한다. 이는 다른 어떤 스포츠 중계보다 눈을 시
원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골프를 치는 것은 아니나 마치 그 골프장을 산책
하는 듯한 ‘대리 만족’을 얻는다고나 할까. 그것도 평생 가보기 어려운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골프장들을 말이다. 그것이 좋아 자주 골프를 시청하는데 무엇보다 한국 선
수들이 대회에 출전할 때면 같은 동족으로서 마음으로나마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더
욱 그 경기들을 시청하곤 한다. 물론 1라운드부터4라운드까지 다 보지는 못한다. 볼
시간도 없거니와 그 정도까지 골프광은 아니기 때문이다. 매번 마지막 라운드만 시청
하곤 하는데 Final 라운드가 항상 주일날 열리다보니 교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으
레 남자 대회(PGA)건 낭자 대회(LPGA)건 하나쯤은 경기가 열리는 것을 볼 수가 있
다. 여자 대회의 경우 워낙 한국 선수들이 많아 전보다 흥미가 많이 줄어든 것은 사
실이지만,남자 대회의 경우‘최경주’ 선수라든가 혹은 최근 혜성처럼 등장한 한국계
미국인인 ‘Anthony 김’ 선수 등이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을 때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자주 시청하곤 한다.

최근 시청한 골프 경기 가운데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이 있다면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US OPEN’ 대회이다. 지난달 중순쯤엔가 열렸었는데 그 대회에서 골프 황
제로 알려진 ‘타이거우즈’가 우승을 거머쥐었다. 비록 한국 선수들이 선전하지는 못했
지만 불세출의 골프 스타 ‘타이거우즈’가 경기를 하기에 다른 때와는 달리 3라운드부
터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았다.그 경기를 보면서 내 입에선“과연 타이거우즈!”라는
탄성이 연발하였다. 그의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다른 선수들과 달리 중요한 고비마다
탁월한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왜 ‘타이거우즈’이며 왜 ‘골프 황제’인가
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진가는 대회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하였다. 3라운드 마지막 홀(18번홀)
에서 이글을 잡아내며 단숨에 단독선두로 뛰어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진행된
마지막 라운드-앞부분을 시청하지 못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여러 차례‘보기’
를 범했는지 다른 사람이 선두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리고 마침내 마지막18번홀, 대
부분의 사람들은 그리고 나 역시 ‘타이거우즈’의 우승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타이거우즈’가 버디를 해야만 Tie(동점)가 될 수 있는데 ‘버디’를 잡기엔 너무
먼 거리에 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단독선두를 달리고 있던 상대 선수 역시80% 이
상은 자신이 우승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타이거우즈’는 그림처럼그 볼을 홀 안에 집어넣었다. 골프 황제다운 타이거우즈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그로 인해 다음 날 다시 18홀에 걸친 연장전 경기를 가져야했지만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이거우즈’의 승리를 예감했다. 실력이면 실력, 집중력이면 집중력, 정신력
이면 정신력,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모든 면에서‘타이거우즈’가 훨씬 앞서있기 때문이
었다.게다가 상대 선수는 운(?)과 컨디션이 좋아 좋은 성적을 내었을 뿐 그의 랭킹은
랭킹 1위 타이거우즈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120위권 밖의 선수였다. 결국 예상대
로 우승은 ‘타이거우즈’에게 돌아갔다. 비록 다음날 진행된 18홀 경기에서도 상대 선
수가 선전을 해서 무승부가 되어 서든 데스(Sudden Death)라는 19번째 홀 경기에서
승부가 난 팽팽한 접전이기 했지만.

‘타이거우즈’의 우승이 결정 난 뒤 그와 연장전까지 벌인 상대 선수는 ‘타이거우즈’
에 대해“그는 괴물이다. 정말 두려운 상대였다”고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 한다. 나는 그 같은 상대선수의 소감을 보면서 정말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거우즈’와 ‘로코 미디에이트’라는 상대 선수의 차이가 있다면 위기와 고비에서의
차이였다. ‘타이거우즈’는 위기나 고비 때마다 더욱 강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집중력이 더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반면에 상대 선수는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그것이 두 선수의 차이라면 차이였다.
그것이 두 선수의 승부를 가른 것이 되었다.

사실 ‘타이거우즈’의 위기는 단순히 샷 난조로 인해 공이 페어웨이를 벗어나거나 러프
에 빠지는 것,혹은 퍼팅이 잘 안 되는 것만이 아니었다.그는 골프 시합 내내 왼쪽 무
릎 통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는 대회 2개월 전에 왼쪽 무릎 수술을 받았는데 경기가
진행될수록 그 부위에 통증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샷을 하고 난 다음 통
증 때문에 낯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이 자주 TV 화면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듣는 바로는 연장전을 앞두고는“자칫 부상이 크게 악화될 수 있다”고 하면서 경기를
포기하도록 의사가 경고까지 했다고 한다.그도 그럴 것이 이미72홀을 돌았기 때문이
었다.무릎 부상자로서 그 정도의 거리를 걷고서 또다시18홀을 돈다는 것은 사실 보통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그러나 그는 정신력으로 끝까지 경기에 임했고 결국91홀을
소화하는 엄청난 시합 후에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 같은 ‘타이거우즈’에 대해 전설적인 골프 선수 ‘잭 니콜라우스’는 ‘별종’이라고 말
했다 한다.스포츠 심리학자인‘모리스 피켄스’라는 사람도 “타이거우즈는 완전히 다른
동물이다.신체적으로 흔들리면 심리적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선수다”라고 평가하였다.‘별종’- 타이거우즈를 향한 찬사 같은 이 같은 평가는 문득 내게 ‘그리스도인’의 모
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를 향해 '별종'이라 함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그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능력,다른 투혼을 보였기 때문이다.그랬기에 그를 ‘별종’이라 부르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기’와 ‘고비’ 앞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그 위기 속에서 더
욱 탁월한 능력과 집중도를 발휘했기에 별종이라 부르는 것이다.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그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평상시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위기’나 ‘고비’가 찾아왔을 때 그 앞에
서 무너지거나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더욱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오히려 ‘위기’ 속
에서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그 위기를 축복의 계기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별종들’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그럴 수 있는 비결이 있다. 이는 이 땅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이 아
니기 때문이다. 만일에 이 땅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이라면 이 땅의 위기와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결코 초연할 수 없을 것이다.결코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그러
나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에 참된 소망을 두는 사람들이다.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
보며 사는 사람들이다.그렇기에 이 땅의 그 어떤 시련이나 고난,위기 앞에서도 흔들
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다음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 구절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
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 4:17)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의 시련과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모든 것을 주관하
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데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으며 흔들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위기를 잘 헤쳐 나가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기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별종들’인 것이다.

타이거우즈는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는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서 외부로부터 근심과 잡념으로부터 벗어나 샷에만 몰두하는 법을 배웠
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골프 스타가 되게 만들었고 ‘별종’이 되게 만들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그 어떤 고난이 주어지더라도,그 어떤 위기가 찾아올지라도
하늘나라의 소망과 하나님 아버지께만 집중할 때 우리에게 찾아드는 이 땅의 모든 위
기,시련은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김현진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 The Mission 보기 -


“The mission”은 1986년에 만들어진 제법 오래된 영화인데, 최근 다시 한국 개봉관에서 상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영화가 상당히 좋은 영화라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도 이렇게 잘 만든 영화를 보기가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잘 만들었다고 하는 영화에도 자질구레한 군더더기가 있기 마련이고, 심지어 쓰레기 같은 구석들도 있지 않은가?그런데 이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대사 한마디 한마디는 거의 버릴 것이 없이, 모두 다 가슴깊이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다. 그래서이겠지만,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도, 비기독교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이 영화의 첫 장면으로 등장하는 이과수 폭포의 장엄한 광경은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한다. 그 높은 폭포 절벽을 장비도 없이 단신의 몸으로 기어오르는 선교사
를 보고 있노라면 꼭 쥔 손에 땀이 흥건해진다. 또 남미의 토속적인 리듬과 교회음
악을 잘 조화시켜 만든 이 영화 배경음악은 참으로 아름답다. 폭포 위 원주민 마을
에 도착한 선교사가 부는 오보에의 아름다운 선율은 가슴 깊은 곳을 적시는 감동이
있다.그 감동이 선교사들을 잡아죽이던 원주민의 마음을 녹게 만들었다.그 뿐 아
니다.영화 속에 나오는 원주민 소년의 아리아,교회대표를 환영하기 위해 부르는
원주민들의 합창 등은 인종을 초월하여 심금을 울리는 음악의 힘을 잘 드러내어주
고 있다.

예수회 신부로 분한 로버트 드 니로와 제레미 아이언즈의 섬세한 연기는 참으로
일품이다.두 사람 모두 아주 강한 얼굴 인상을 지닌 배우인데,신부, 선교사의 역
에 잘 어울리게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로버트 드 니로는 영화초반에 냉
혹한 노예상으로도 연기해야 했는데,정반대의 두 역할을 잘 소화해 내었다.특히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로드리고의 회심 장면은 참 인상깊다. 그는 자기가 죽이
고 노예로 팔아먹던 원주민들에게 용서를 얻기 위해, 자신의 옛 물건들을 다 싸서
굵은 밧줄로 몸에 동여맨 후, 폭포를 오르고 험난한 산길을 오르내려 그 원주민 마
을로 간다.용서의 표로 원주민이 그 밧줄을 끊고 짐을 물에 던져버리자,그는 진흙
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우는듯 웃는듯 흐느낀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냉혈한에서성자의 모습으로 바뀐다. 같은 사람이 그렇게 바뀔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다른 얼
굴이다. 죄의 무거움을, 또 구속의 희열을 시각적으로 실감있게 느낄 수 있게 해주
는 장면이다.

원주민들의 연기도 참 자연스럽다. 영화에나오는 원주민은, 실제 현재 그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놀랍다. 아무런 배우교육을 받지 않은 그들이,어찌 어색한 표정,뻣뻣한 동작 하나없이 매끄럽게 연기해낼 수 있었을까? 하기야 나무를 오르내리고 맨발로 뛰어다니고 급물살을 헤치고 카누를 젓고 하는등 정글의 삶을 원주민이 아닌 사람들이 연기했다면 더 어줍잖았을지도 모르겠다.이러한 장엄한 광경, 아름다운 음악, 감동적인 장면들을 만끽할 수 있는 한편, 우리는 이 영화에서 아주 무거운 신앙의 한 주제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악에 저항하
는 크리스챤의 합당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는 18세기 남아메리카의 과라니 원주민 마을에 일어났던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했다고 한다. 당시 남아메리카를 지배하던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그들의 지배영역을 조정하면서 원주민 마을에 위기가 닥쳐왔다.그곳은 원래 스페인 지역이었는데,포르투칼 영으로 바뀌면서 원주민들이 노예로 잡혀갈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당시,스페인은 노예사냥을 금지하고 있었던 반면,포르투칼은 이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런데이곳은, 예수회 소속 신부들이 선교사로 와서 어렵사리 교회를 세우고 원주민들을 교화시켜가고 있던 원주민 보호지역이었다. 그선교사들은 로마 교회의 대표로 와있는 주교에게, 그 지역을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유지시켜달라고 호소한다.하지만 그 간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총과 대포를 앞
세운 군대가 원주민 마을을 소탕한다. 선교사들은 원주민들과 함께 그 곳을 지키다
모두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스페인, 포르투칼의 연합군대에 맞서 저항하는 방법의 선택에 있어, 선교
사들은 두 방향으로 나뉜다.한쪽은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즈가 연기했다)가
선택한 비폭력 평화의 행진이었다.다른 한쪽은 나머지 신부들이 선택한,로드리고
로 대변되는,무장 방어전쟁이었다.이 선택에 있어 가브리엘과 로드리고는 심한
갈등을 겪는다.로드리고에게 있어서,정의를 위해 칼과 총을 드는 것은 필요한
것이고 또 정당한 것이었다.하지만 가브리엘에게 있어,어떤 이유로든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하던 그 모든 노력을 헛것으로 만드는 배반행위
였다.누가 옳은 것인가?절대적 평화주의와 무장방어전쟁. 우리는 이 두 길 중 어
떤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절대적 평화주의의 근거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찾을 수 있다. “악한 자를 대
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태복음 5:39)”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면서 당신의 이 말씀들을 몸소 실천하셨다.
이 태도는 간디의 무저항 불복종 운동,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저항운동,또 우리
나라 3.1 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하지만, 많은 주석가들은 이 말씀이 악과 타협하고 그것을 용인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선 안된다고 해석한다. 위의 말씀은 개인적으로 원한을 품고 복수하는 것을 금하고계신 것이지,악을 다스리는 공권력–경찰,법원 등–의기능을 필요없다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도,상대의 유익을 위해,증오심이 없이 섬기려는 마음으로, 악에 대해 경계하고 저항하는 것까지 금지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확대하여 소위 의로운 전쟁의 개념도 제시되었다.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회질서 유지와 국가 수
호를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는 최소한으로, 분별해서, 방어적으
로 수행하는 전쟁을 지지하는 것이다.그러나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무고한 생명
이 손상을 당하고,폭력적이고 부당한 행위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어쩌면 의로운
전쟁이란 다소 이상적인 설정일 수도 있다.

선배들 중에서도 어느 한쪽에서 시작하여 다른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평화냐 무장항거냐 라는 문제는 어려운 주제이다. 영화 속에서 가브리엘 신
부도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아주 감동적인 말을 하는 가운데 약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그는 로드리고에게 이렇게 말했다.“무력이 옳은 것이라면, 이 세상에 사랑
이 설 자리는 없어지네.나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네.”라고. 그런데 그
두 문장의 중간에 “아마 그럴거야, 아마 그럴거야”라고 되내인다. 그도 완전히 절
대적 평화주의에 대해 확신하지는 못했던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방어를 위한 전쟁은 그래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말미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을 비교해보면,로드리고 등의 방어전쟁보다 가브리엘이 선택했던 무저항 평화행진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것을 느끼게된다. 적어도 그는 원주민들을 살육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큰 가책을 느끼도록영향을 주었다.그런 의미에서 본다면,역시 가브리엘의 평화주의가 로드리고의 무장저항보다 우선되어야 하지 않나 추측해본다.

어쩌면 우리의 대다수는 이런 고민을 할 정도의 수준도 안될 것이다. 영화 속에
는 다른 크리스챤들의 모습도 있는데, 오히려 이들의 모습이 현재의 우리 자신의
수준일 수 있다. 먼저 신앙세계도 정글의 세계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두 노예상인들
이 있다.정글의 법칙이 무엇인가?그것은 약육강식이다. 이들은 교회를 들먹여 자
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교활한 신앙인이었다. 한편, 신앙양심을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압박에 굴복하여 많은 원주민과 신부들의 생명을 노예상인들의
탐욕스런 손에 넘겨준 주교가 있다.그는 비겁한 신앙인이었다.이들은 모두 진지
하지 못한 신앙인들이다.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신앙에 진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교활한 신앙인이나 비겁한 신앙인만은 안되었으면 좋겠다. 대
신 평화의 모습으로든 의로운 저항의 모습으로든, 가브리엘이나 로드리고처럼 악에
대해 용기있게 맞서는 신앙인으로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크다. ✎김성민

 

맑은 고딕... 포인트 10!


이 곳 Buffalo에 온 기념으로 남편은 정말 작고 귀여운 노트북을 선물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매사에 덜렁거리는 저는 약 다섯 달 만에 화면(screen)을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말도 못하고 게다가, 특별히 바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도 아
니어서 그냥 깨진 화면을 통해 이것, 저것을 하고 있는데 남편은 그런 제가 안쓰럽
다고 또 새로운 노트북을 선물했습니다. 이번엔 색깔마저 빨갛고 예쁘게 생긴 녀석
이어서 아이들의 질투가,특히 딸아이의 질투는 장난이 아닙니다.

깨어진 화면을 통해 보이는 것들은 모두가 깨어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까지도 하나님 앞에 조각난 마음인 것만 같아 때때로
우울했었습니다.하지만 이제 저는 넓고 깨끗한 화면 위에‘맑은 고딕’의 글씨체를
선택하고 포인트는 10으로 설정합니다. 아... 딱 적당하고 너무나 보기에 아름답습
니다! ‘맑은 고딕’으로 글을 쓰고 있으면 그 글자가 영어든 한글이든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저는 제가 쓰고 있는 글자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합니다.이름 그대로
맑은 그 모습에 또 한동안 들떠서 마음을 홀딱 주고 맙니다.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
너의 영혼 우리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
너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 된 백성 너의 영혼,
너의 영혼 우리 볼 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 루~야!”

축복송의 노랫말처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영혼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저절로 미
소 지어지는 사랑스러움이 있을까... ‘맑은 고딕’ 10포인트의 글자 앞에서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는 나처럼 하나님도 나를 어여삐 보고 계실까...

물론 전혀 그럴 수 없는 모습인 줄 잘 알지만 늘 실수투성이면서도 또 다시 배시
시 웃으며 다가와 아빠를 안고 볼에 뽀뽀를 해대는 아이들처럼 저도 그렇게 늘 넘
어지면서도 또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아버지............” 하고 가
만히 부르면 우선 마음이 포근해집니다.그 앞에 응석을 부려봅니다.때로는 온갖
불평도 하고, 울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합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토라져서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너무나 감사함으로 즐거움으로 책상 앞에 앉아있는
남편을 붙잡고 춤을 추기도 합니다.두 손 들고 찬양을 합니다.

그 분은,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기댈만한 든든한 나의 언덕이므로,모든 부끄러
움에서 나의 숨을 만한 은신처이므로, 나의 은밀한 모든 죄악까지도 이미 알고 계
시는 유일하신 분이므로 저는 그 안에서 너무나 편안하고 자유롭습니다. 오직 그
분만이 나의 모든 문제를 치유하실 수 있음을 알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나의 연약
함을 처음부터 알고 계시므로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나의 모습이 때로는 마른 나뭇
가지 보다 못할지라도 그런 저를 향하여‘나의 사랑스러운 현주야!' 하고 부르시는
주님을 기억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시 88:14)

시편 기자의 고뇌에 찬 고백처럼 저도 이 한 주, 아니 오늘 하루... 또 얼마나 많이
스스로 실망하고 하나님 앞에 고민하며 불평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유일
하게 나의 모든 구석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므로
나의 약한 것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에게 들려주는 엄마의 잔소리들...


1. 친구이야기

...너의 곁에는 지금 어떤 친구가 있니?
아니,다시 돌려 물어볼까?바로 너는 어떤 친구니?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이야기를 너를 붙잡고 저녁마다 억지로 읽으며 새삼 ‘친구’
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단다.
흔히 세상에서는 말하길 친구에는4가지 분류가 있다고 하더구나.그리고 이렇게
들 분류하는구나.

... 꽃과 같은 친구가 있단다.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그 아름다움에 온갖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지?
그러나 꽃이 지고 나면 어떠니? 돌아보는 이 하나 없듯이
자기가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가 있단다
그런 경우를 바로 꽃과 같은 친구라고 하더라.
저울과 같은 친구가 있단다.
저울은 무게에 따라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기울지 않니?
그와 같이 나에게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가 있단다.
그건 바로 저울과 같은 친구란다.
산과 같은 친구가 있단다.
이 곳 버팔로에는 산이 보이지 않지만
우리 한국에 많은 산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니?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가 되며
멀리 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늘 그 자리에서 반겨주지 않니?

그처럼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내가 조금 실수해도 그냥 좀 괜찮을 것 같은
그런 마음 든든한 친구가
바로 산과 같은 친구란다.
땅과 같은 친구가 있단다.
땅은 많은 생명의 싹을 틔워주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 없이 대하지?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고...
그런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를 지지해 주는 친구가
바로 땅과 같은 친구란다.
부디... 네가 먼저 하나님 안에서 생명보다 소중한 멋진 친구가 되고, 또한 그런 친구들
을 가질 수 있기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늘 기억하길 바란다.

2. 살면서 기억해야할 이런 지혜들이 있단다... 아들아!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전쟁터라고 한단다.
그러나 이 전쟁터를 얼마든지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게 있단다.
우선 너의 습관을 최대한 다스려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습관이 너를 지배하게 되니까.
부디 주변을 좀 정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양말은 땡 도나츠처럼 둘둘 말아 던져 놓지 말길...
산속의 적은 물리치기 쉬워도
마음속의 적은 그렇지 못하지.

남에게 속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남보다 영리하다고 굳게 믿는 것이야
이해가 잘 되니?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단다.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옳은 사람과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 죄인...
아무리 어려움과 곤란에 처해도 당황하지 말아라!
사방이 다 막힌 것처럼 생각되어도 위쪽은 언제나 뚫려있고,
하늘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기거든.
젊음은 마음의 상태이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란다.

하나님 주신 너만의 매력은 눈을 놀라게 하고,
아름다운 마음과 행동은 영혼을 사로잡는단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의 모습이 너무 어리지만
우리의 모습이 사실은 죽음과 부활의 기로에 서 있음을 안다면
좀더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우리가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우리 모두는 시간이라는 모래밭 위에
남겨놓아야 하는 발자국이 있단다.

하나님 앞에 주어진 절대적인 시간 앞에
우리는 어떤 모양의 발자국을 남길까

오늘도...
두려움은 적게 희망은 많이,
먹기는 적게 씹기는 많이,
푸념은 적게 호흡은 많이,
미움은 적게 사랑은 많이 하기를 애를 쓰자, 사랑도 노력하는 것이거든...
오늘 엄마는 스웨덴의 속담을 읽으며 몇 가지 이야기들을 인용하여 이 글을 써본단다.
오늘도 멋진 하루가 되기를 기도하마... ✎이현주
 

거짓말 세상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거짓말 실태를 조사하였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얼마나 하는지 보기 위해
조사 결과 한 사람당 하루에 200번
즉8분마다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했을 때
"차가 많이 막혀서"였다고 한다.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는 직업으로는
점원,정치인,언론인,변호사
세일즈맨,심리학자 등의 순서이고-

조사 대상자의 91퍼센트는
작은 일이라 여겨지는 것에 대해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36퍼센트는 중요한 일에 거짓말을 하고
86퍼센트는 부모에게 늘 거짓말을 하고
75퍼센트는 친구들에게
69퍼센트는 배우자에게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물론 이는 조사 대상자의 경우일 뿐

당신은 얼마나 정직한가?
혹시 거짓말이 자연스럽지는 않은가
8분마다 거짓말을 하는
세상 보통사람은 아닌가?
마귀는'거짓의 아비'1)라 했다.
그리스도인은 정직한 자들이다
"거짓을 버리고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2) 했나니
당신은 마귀의 자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인가
당신의 세치 혀에 그 답이 있다. (HJ)

1) 요한복음 8:44 2) 에베소서 4:25
 

알라모 전투


1830 텍사스는 멕시코에 속해 있었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이 적은 돈으로
넓은 땅을 살 수가 있었기 때문에 텍사스로 이주를 해오고 있었다. 멕시코 정부는 이
주자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로마 가톨릭 교도가 되기를 요구했으며 멕시코 전통
을 따르기를 강요하였다. 텍사스에 미국 이주자들이 계속해서 늘어나자 텍사스 주민
들은 멕시코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였다.그러나 당시 멕시코의 지도자였던‘산타 아
나’ 장군은 스스로를 절대 권력자로 자처하며 결코 텍사스의 독립을 용납하지 않았
다.오히려 독립을 요구하는 텍사스 주민들을 위협하였다.텍사스 주민들의 독립운동
이 무르익어가자 1836년 마침내 멕시코의 ‘산타 아나’ 장군은 텍사스의 독립을 저지
하기 위해 약7천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텍사스를 침공,텍사스 군대가 후퇴한 ‘알라
모’(Alamo)를 포위하였다.

그때 ‘제임스 본햄’(James Bonham)이라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혈기왕성한 젊
은 변호사가 텍사스에 머물고 있다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텍사스 독립전쟁에 함께
가담하게 되었다.산타 아나 장군이7천의 병사로 ‘알라모’를 포위했을 때 알라모에는
188명의 병사들밖에는 없었다. 이제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제임스
본햄은 기적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다른 도시로 달려가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제
임스의 원병 요청을 전해들은 타도시의 장군들은 그 위급함을 인정하면서도 생각해
보겠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그 말은 곧 거절을 뜻하는 것이었다.제임스는 심히 분노
한 얼굴로 말을 타고 다시 알라모로 달려갔다.자기라도 싸워야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는 상당히 똑똑한 젊은 변호사였다. 사태가 얼마나 위급한지 그리고 자신이 돌아
갈 경우 그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얼마든지 다시 돌아가지 않
을 수도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알라모로 돌아갔다.왜냐하면 그곳에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신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그들만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조
금도 주저하지 않고 다시 포위망을 뚫고서 그 불구덩이 같은 알라모로 들어갔다. 결
국 그는 다른 알라모의 병사들과 전혀 승산이 없는 전투를 벌였고 그곳에서 자신의
최후를 장렬하게 마쳤다.

이는 역사 속에 실제 있었던 그 유명한 텍사스 ‘알라모’ 전투의 이야기이다. 물론
나중에 지원 군대가 알라모에 당도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알라모의 병사들이 한
명도 남지 않고 모두 전사한 뒤였다. 그러나 알라모 병사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
았다. 알라모 병사들의 장렬한 최후는 모든 텍사스 병사들에게 더욱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게 만들었고, 결국 목숨을 걸고 전쟁에 임한
결과 텍사스 군대는 자기들보다 훨씬 전력이 강한 산나 아나 장군의 멕시코 군대를
물리치고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였다. 텍사스 군대가 멕시코와 전쟁할 때 모든 군인
들이 외쳤던 구호는“알라모를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그 같은 구호를 외칠 때마
다 얼마나 그들의 피가 끓었겠는가!

왜 느닷없이 ‘알라모 전투’ 이야기인가? 이는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알라
모 병사들’의 아름다운 희생을 생각하기 위해서이다.그리고 ‘제임스 본햄’이라는 한
젊은이의 아름다운 용기와 헌신을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오늘날의 텍사스가 존재하는
데에는 바로 그들의 아름다운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아름다운
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영적인 전쟁에 뛰어들고 있는 우리 교
회의 젊은이들이다.

지난 목요일 저녁 늦은 시간 나는 ‘UB’(바팔로 소재 뉴욕주립대학)를 찾았다. 이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기 때문이었다. 듣는 바로는 학생수가 워낙 많아서 학과별
로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이틀에 걸쳐 약 한달 반 가까이 신입생들을 위한 오리엔테
이션이 진행이 되고 있는데 지난 목요일이 그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 달 보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제껏 우리 교회의 Frank 장로님과 교회 젊
은이들이 그 신입생들에게 전도하고 또 교회를 안내하기 위해 수고를 해오고 있던
터였다.참으로 아름답고 귀하고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내가 지난 목요일 학
교를 찾은 것은 수고하는 교회 젊은이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저녁9시가 조금 넘자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학생들이 강당에서 쏟아져 나왔다.오
리엔테이션이 있는 건물 로비(Lobby)에는 이미 온갖 써클들, 온갖 기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을 맞으며 자신들의 모임을 소개하는 가운데 학생들
유치에 힘을 쏟고 있었다.그 모습은 흡사 전쟁터와도 같았다.서로 자기들 모임으로
하나라도 더 데리고 가려는. 그 전쟁터 안에는‘버팔로 한인 장로교회’ 젊은이들도
들어 있었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 역시 이 학생 저 학생을 만나고 대화하며 열심히
전도에 힘쓰고 있었다.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고 귀하고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텍사스의 독립을 위해 싸운 ‘알라모의 병사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수효는 멕시코의7천명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188명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멕시코의7천을 모두 전멸시키는 기초가 되었다.우리 젊은이들 역시 몇 명 되지 않
았다.그러나 그들의 헌신과 수고로 인해 결국UB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께 나
아오는 큰 역사가 있게 되리라.

또한 그들은 모두 ‘제임스 본햄’과 같은 젊은이들, 아니 그보다 더 귀한 젊은이들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임스 본햄은 텍사스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
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였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영혼구원은 얼마나 더 귀하고 더
가치 있는 것인가? 한 주(State)의 독립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한 영혼
이야말로 ‘천하’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가는 수많은 학생들을 대하며 반짝이
는 눈으로 학생들을 찾고 만나고 대화하며 수고하는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은 한 영
혼이라도 더 구하고자 하는 구령전쟁(救靈戰爭)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제임스 본햄’이 굳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알라모 전투에 가담할 필요가 없
었듯이, 얼마든지 자신을 위해 더 잘 먹고 잘사는 미래를 가질 수 있었듯이 우리 젊
은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얼마나 좋은 시절인가?얼마나 할 것도 많고 놀 것도 많
은 때인가? 얼마든지 남들처럼 자기들을 위한 다른 일들을 가질 수도 있었건만 그들
은 그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그 영혼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우리 하나
님께서 그들의 그 같은 중심을 귀히 보시며 축복하시리라.

우리가 사는 세상 곧 ‘영적인 전쟁터’와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는 사단과의 전쟁-
그리고 우리들은 바로 그 군사들로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우린 과연 얼마나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가! 알라모의 병사들은 항복을 요구하는 멕
시코 군대에“승리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모두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리
고 모든 텍사스의 병사들은“알라모를 기억하라!”고 외치며 비장한 각오로 싸움에 임
하였고 그 결과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영적인 전쟁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영혼들을 구해내는 일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땅의 전쟁보다 더
비장한 각오로 싸우며 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한 알의 밀
알’이 될 때 그때 많은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비장한 결심과 각오들이 있기를 바란
다. 그럴 때 우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영혼들을 건질 수가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텍사스의 독립이 아닌 사단에게 매인 수많은 영혼들을 독립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김현진

나태

신앙과 사색 : 2008/10/02 21:36
 

나태




게으름과 휴식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힘든 일을 열심히 하고 나서 또는 어떤
일에 성과를 거둔 후 취하는 휴식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손쉬운 방법만을 찾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것 또한
모두 게으름에 속합니다.나태함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산적이고 보람된 삶을 살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서는 우리에게 타인을 사랑하고, 가족을 보살피며, 교회를 섬기고, 생계를 꾸리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도우며,굶주린 자를 먹이고,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
의 본보기가 되고, 다른 사람을 전도하며 사는 그런 활기찬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
다.반면에 게으름을 피우면 당신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비건설적이며, 태만하고
경솔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또한 게으름은 아무 것에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므로 당신에게 어떠한 결과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아무 일
도 하지 않는 것에 만족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이 변화
되는 것을 볼 때 당신은 더욱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성심성의
껏 일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실 것이며 이로인해 당신이 하는 일들에 놀라
운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게으름을 피는 것이 죄입니까?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
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에스겔 16장 49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
는 자들이 있다 하니. (데살로니가후서 3장11절)

우리는 보통 게으름을 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죄란 우리가 하
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소홀하는 것 또한 죄입니다.나태함 역시 죄입니다.왜냐하면 나태함
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신 일할 수 있는 재능과 능력, 당신에게 주어진 현세에서
의 시간, 그리고 하나님과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들 모두를 허비하고 있
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나태함에 빠지면 당신은 남들이 당신을 위해 뭔가를 해주기
만을 바라게 되며, 또한 당신에게 남는 시간들로 인해 온갖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
다.뚜렷한 목표 의식이 나태함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당신에게 뚜렷한 목표가
세워져 있을 때, 비로소 당신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들
을 뿌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나태함은 어떠한 결과를 낳나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잠언 10장 4절)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
느니라. (잠언 13장 4절)

나태함으로 인해 당신의 삶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열심히 일하는
자는 다가올 문제들에 항상 조심하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게으른 자는
문제거리를 미리 보지 못하거나 또는 대책을 미리 세워놓지 않기 때문에 항상 가장
큰 타격을 받습니다. 게으르고 항상 제자리 걸음만 하기 보다는 열심히 일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편이 훨씬 더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잠
언 12장 24절)
나태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운명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하느니라. (잠언 21장
25, 25절)
행동하지 않고 바라기만 해서는 절망과 공허함만 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게으
름은 자신이 달성하지 못한 것들만 두드러져 보이게 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는 동기부여가 되지는 못합니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찌라도 얻
지 못하리라. (잠언 20장 4절)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펴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덥었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
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네가 좀더 자자,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
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24장 30‐34절)
게으름으로 인해 나쁜 습관에 젖기 쉽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런 습관에 빠져들
다 보면 결국엔 당신의 생활 자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게으른 사람
들은 자신의 생활 방식으로 인한 결과, 즉 굶주림, 가난, 혼란, 무의미한 삶 등을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제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태함 대신 책임감을 심어줄 수 있을까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언 6장 6‐8절)

성공한 사람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요. 무엇이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했습니까?그들이 어떻게 나태함에 대항해 싸웠습니까?이로 얻은 교훈
들을 어떤 식으로 당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배운 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또한 자극을 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나태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37장 30, 31절)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
언 12장 15절)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
라 지식의 말씀을. (고린도전서 12장 8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적있는 삶을 살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당신에게 게으르게
행동하는 습관이 있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게으르다고 책망한다면 아
마도 그 게으름의 근원이 되는 다른 어떤 문제,이를 테면 우울증,또는 병(病)과
관련된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의사나 상담가와 같은 전문가의 조
언을 구하십시요.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특별한 재능과 영적인 은사(恩賜)를 주셨
습니다.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귀기울여 보십시요.

✎"Life’s Questions", Ronald A. Beers & V. Gilbert Beers, 번역:복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