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서 소식 전합니다



  버팔로한인장로교회 성도님들 주안에서 평안하신지요? 저는 얼마전에 어머님 병문안차 한국에 다녀온 후 이곳 인도네시아에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삶은 왜 그리도 빠른지요(미국도 마찬가지지요). 좀 더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사역하면서 살려고 하는데.... 그런데도 시간의 빠르게 지나감 속에서 이제야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우기입니다. 요즘은 하늘에 구멍이 났는가 할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립니다. 스마랑이나 자카르타 등 많은 도시에서 홍수로 인하여 고생하지만,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은 700m 이상의 고지대라 홍수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쌀쌀한 날씨와 높은 습도로 인하여 쉽게 피곤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도 온 가족이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그 은혜의 삶을 나누고자 합니다.


1. Kabar keluarku (저희 가정의 이야기)

  며칠전 아이들이 집 앞마당에서 쓰레기를 태우다가 점점 불놀이에 재미를 붙여서 집에 있는 신문과 종이 박스를 내다가 태웠습니다. 그랬더니 엄청나게 많은 연기와 재가 일어났다가 아래로 떨어졌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눈이라고 하면서 좋아하더군요. 어이가 없었지만 결국 저도 즐겁게 아이들과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잡으면서 놀았습니다. 그리고 즉석에서 감자를 구워 먹었는데 그 맛이 또 일품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신다면 눈 놀이 할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부담이 되는 아이들의 등록금이 하나님의 채워주심 속에 잘 해결이 되어, 이번 학기도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잘 생활하고 있고 아내도 공부하면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현지인들이 비가 많은 우기에 병이 걸려 고생하는데 온 가족이 건강하게 잘 지내니 감사할 뿐입니다.


2. 깔리만탄 섬의 사마린다를 다녀옴

  저는 시간이 허락되는대로 살고 있는 지역과는 많이 떨어진 교회들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7시간 이상 떨어진 교회들을 방문하여 현지 교회의 상황을 둘러본 후 함께 협력할 사항에 대해 논의를 하였습니다. 새벽에 출발하여 밤늦게 돌아오거나 며칠 동안 현지 교회에서 잠을 자면서 다녀야 하는 선교여행으로 최대한의 시간을 내어서 제가 살고 있는 자와 섬의 현지교회들을 둘러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1월 중순 중 약 2주 동안 사마린다를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혼자 가지 않고 한국에서 오신 분들과 동행을 했습니다. 제가 사마린다 지역을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분들도 요청하여 함께 다녀왔습니다. 항상 혼자 다니던 여행에 몇 분이

선교의 현장



밀림 속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함께 하니 더 정답고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한 교회를 방문하는데 10시간 이상 걸리고(어느 교회는 강을 건너는데도 몇 시간씩 걸리지만), 또 차를 타고 가다가 다시 배로 갈아타고 가야 했지만, 함께 선교여행을 하니 너무나 좋았습니다.

  현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함께 기도하고, 아픈 분들을 위해 심방 가서 기도해드리고 부항도 해드리고... 현지목사님과 기도하고 위로하니 온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하루에 잠은 2-3시간 정도밖에 못자고, 잠자리는 지저분하고, 먹는 것도 별로 없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선교여행은 저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꽉 차오르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기에 피곤한지도 모르고 다녔습니다. 설교하기 전에 말씀을 준비하면 하나님이 그때의 상황에 가장 적절한 말씀을 주셔서 설교할 수 있었고, 함께 부르는 인도네시아 찬양에 은혜의 눈물을 흘리고.....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자의 참 기쁨임을 내 삶을 통해 직접 체험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솟아오릅니다

  앞으로 3월이나 4월쯤 해서 깔리만탄의 서쪽 지역이나 슬라웨시 섬을 한 번 더 다녀올 계획입니다. 아마 그때는 저 혼자 갈 것 같은데.... 그때는 가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기도편지를 올리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위험한 상황이 저에게 다가오며, 영적으로도 더 강해야하기 때문이지요.


3. 압디엘 신학교 사역

  1월 30일에 압디엘 신학교는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30여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졸업하여 자신의 사역지로 떠났으며,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70명의 전도단을 파송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2월 첫 주부터 강의가 시작되었고 이번 학기에서도 구약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1월 중순에는 이사 알마시 교단의 총회장님과 임원들과 회의를 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논의했고, 그 부분을 하나씩 실행해 나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한 4년 동안 제가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사역을 하니 이제 현지 교회에서 저를 찾게 되고 혼자가 아닌 협력을 통해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어 감사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선교의 현장



4. 공부방 사역

  공부방이 작년까지 3곳이었으나 올 초에 다시 한 곳을 개척하였습니다. 암뻴 교회에 세웠는데 전에는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공부를 가르치다보니 무슬림들이 달가워하지 않다가 교회 마당 한쪽 편에 세워진 공부방을 보고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보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제가 그 교회에 갔을 때는 흉흉하게만 느껴지던 교회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점점 활기가 차고 있고, 단지 공부방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새롭게 변화되어지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공부방으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정말 중요한 전초기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거라 믿습니다.

  슬로르조 교회의 공부방은 우기 때가 되자 빗물이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옆을 벽돌로 막는 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상보다 많은 예산이 소요되었지만 지금 잘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건물이 완성이 되면 교회에서 어린이 집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전력이 약한 관계로 LCD 대신 컴퓨터로 영화상영

그리고 즐라렘 교회도 가장 뒤에 있는 공부방이 너무 지저분하고 낡아져서 다시 시멘트로 벽면을 바르고 페인트칠을 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진행하고 있는 컴퓨터교실을 위해 두 개의 모니터가 필요하고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와 램 등이 필요하여 구입할 계획입니다.

  수기와라스 유치원 아이들을 위해 햄버거 파티를 열었습니다. 현지 아이들은 햄버거를 먹어본 경험이 없어서 특별히 아이들을 위해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끄랑깽의 어린 아이들을 위해 수영장에 데리고 갔습니다. 30여명의 어린 아이들이 높은 산악지대에 살다보니 수영장을 가볼 기회가 없어서 그들을 데리고 수영장에 가니 얼마나 좋아 하든지요. 그런데 한 가지 안타왔던 일은 제가 예전에 훈련 받던 GEMF 라는 단체에서 LCD를 구입해 주었기에 그것을 가지고 공부방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기로 약속을 하였고, 100명 이상 되는 아이들이 모였는데 글쎄 전력이 약해서 LCD를 틀 수 없게 되었답니다. 얼마나 미안하던지.... 할 수 없이 저의 컴퓨터로 보기는 했지만....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전력이 약하니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네요. 그래도 컴퓨터로 보는 영화를 재미있어 하는 아이들이 사랑스럽습니다.  

선교의 현장

  



5. 치유를 위한 기도제목

  2월 첫째 주에 암뻴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현지목사님께서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한 아이는 4살인데 2년 전에 오른쪽 머리에 작은 구멍이 생긴 후 염증이 생기면서 일어서서 걸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주고 부항도 좀 놔주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한 진단이 필요한 상태라 CT 촬영을 위한 경비를 주고 다음 주에 검사 결과를 놓고 앞으로의 진료 방법에 대해 의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로 나음을 받는 것이기에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기도하려고 하오니 모든 분들께서는 이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름은 4살이 된 아이가 요수아(여호수아임)이고 2살된 아이가 다마르입니다.


  2월 16일부터 가나안 교회에서 단기팀이 저의 사역지로 옵니다. 함께 일주일 동안 사역하면서 하나님의 치유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충만한 사역이 되도록 기도해주세요. 또한 우기인 상황에서 모두 건강하고 안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좀 더 자주 사역을 보고해야 하는데 점점 더 사역의 장이 많아 지다보니 자주 연락드리지 못함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항상 모든 분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윤재남, 김미경, 요셉, 성빈, 성우 선교사 올림

 

Let the Nations Be Glad!–The Purpose of Mission(2)

(열방들로 기뻐하게 하라! – 선교의 목적)



(지난호에 이어)

한 가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 누구보다 하나님 자신이 사모한다는 사실이다. 그분의 사모하심과 열정은 그 누구도 비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 안에서 최상의 기쁨을 누리신다. 그래서 그분의 최상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사야 48장 9‐11절‐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누구보다 질투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의 백성을 택하셨다. (에베소서 1:4‐6,12,14)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다. (이사야 43:6‐7)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다 (시편 106:7‐8)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사무엘상 12:20‐22)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였다 (요한복음 1:14,18)

예수님은 모든 역사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였다 (요한복음 7:18)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고난을 감당하셨다. (요한복음 12:27,28)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다. (이사야 43: 25)

성령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6:14)

하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모든 자를 심판아래 놓아 두셨다 (로마서 1:23)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을 비출 것이다. (요한계시록 21:23)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책 “ The Dissertation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에서 그는 하나님의 역사의 위대한 목적은 단 한 가지…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들이다. 로마서 3장 23절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죽어 있다.(에베소서 4:18). 결국 우리의 인생의 종착지는 “영원한 형벌”(마태복음 25:46)과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부터 영원한 결별 “(데살로니가후서 1:9)이요 “영원한 불못 곧 두번째 사망”(요한계시록 14:11,20:10,21:8)이다.

선교칼럼



하나님의 심판이 이토록 가혹한 것은 자신의 영광을 향한 질투가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사랑과 상충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향한 질투는 우리가 완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근원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영광 앞에 나갈 수 없었던 영원한 형벌에 놓인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사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 분 안에서 영원한 기업을 얻고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며 그 영광 가운데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에베소서 1:3‐14).


로마서 5:1‐2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곧,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인간을 (로마서 3:2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완전하게 회복시키셔서, 그토록 질투하시는 그분의 아름다운 영광가운데 나아와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맛보며 그 근원이 되는 하나님이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향한 질투가 크면 클수록 우리를 향한 사랑이 커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향한 질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영광을 보여 주셨다. (히브리서 1:3 ‐ 이(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 자신이 하늘 보좌를 떠나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다. ‘선교’ 수단을 통하여 온 열방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길 원하신다. 온 열방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선교’의 목적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사모함과 열정으로 충만한 온전한 예배자로 설 때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그분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 서 있는가?

‐‐‐이 글은“Let the Nations Be Glad”(by John Piper) 책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여 필자가 작성함. 임홍선

 

세네카 인디언과 버팔로

전쟁이야기 (26)



무자년(戊子年)에 시작된 「슬픈 인디언 이야기」가 어느덧 기축년(己丑年)의 문턱을 넘어서고 말았네요. 갈길은 ‘상거가 먼데’ 왠지 마음 어깨에 슬며시 내려앉는 무게감, 혹 초조감 같은 것. 복받을 일만 골라 하는 내 독자들에게 정량 미달의 글만 진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맑고 고운 심성과 맛깔스런 손맛을 지닌 우리 교회 자매들, 그들이 끓여내는 국밥, 아 조선의 맛! 제 글에도 그 정도의 풍미는 들어있어야 할 터인데, 이를 어쩐다.

그러나 「소의 해」이니 그 소의 ‘유유자적함’과 나아가 ‘황소고집’을 본받아 느긋이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는 스스로의 응원 소리와 저를 위한 누군가의 기도 소리 또한 들려오고 있으니.


청교도는 슬쩍 옆으로 밀어놓고, 이번엔 「인디언 전설」쪽으로 이야기의 가닥을 잡아보지요.

이 세상에 전설 없는 족속이나 나라가 어디 있겠어요. 북미주의 원주민인 인디언들도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지요. 그들에겐 언어는 있었으나 그것을 글로 표현할 문자가 없었다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전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올 수밖에. 다행히 전설연구가들과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상당수의 전설이 문자화 될 수 있었고, 또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도 그들의 글 속에 간혹 인디언의 전설을 싣고 있었답니다.

저 광막한 대지 위에 밀어닥치는 엄청난 자연의 힘, 그 앞에 선 미약한 인간, 그들이 갖게 되는 경외심, 두려움, 때로는 연민의 정. 어떤 전설은 차라리 신화에 가깝네요.

지난 해 5월, 서북부 지역에 살고 있던 오사지 부족의 전설을 소개했었는데 혹 기억하고 계실런지. 해는 아버지요 땅은 그들의 어머니라는 것.


세네카 인디언(Seneca Indian)의 전설을 들려드릴 참인데, 우선 제가 인용하고 있는 책들을 소개하지요.

1. 「영원한 메아리(Lasting Echoes)」, 부루칵(Joseph Bruchac)이라는 인디언 문필가의 책, 「아메리카 원주민의 구전역사(An Oral History of Native American People)」란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2. 「아메리카 민담집(American Folklore)」은 「Life」지의 편집인들이 엮은 책이고.

3. 메릴(Arch Merrill)의 「세네카인들의 땅(Land of Senecas)」

그리스도인과 전쟁



4. 아터(Jack Utter)의 「아메리카 인디언(American Indians)」

5. 비스코(Jim Bisco)의 「대버팔로 회고록(A Greater Look at Greater Buffalo)」

6. 마우(Clayton Mau)의 「중서부뉴욕 발전사(The Development of Central and Western New York)」


세네카란 말은 우리에게 퍽 익숙한 이름이지요. 이 사람들이 쓰던 옛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지명, 호수명, 거리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지.

Geneseo, Ontario, Erie, Niagara, Tonawanda, Cheektowaga, Tuscarora, Gowanda, Delaware, Mohawk, Batavia 등등.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서부뉴욕이 모두 그들의 땅이었다는 것은 알고 계실터. 그 뿐이 아니지요. 뉴욕주 전체가 그들의 땅이었으니. 적어도 17세기 초까지는 그랬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막강했으면 그들의 영향력이 일리노이와 캐롤라이나까지 미쳤으리요.

그러나 1797년, 20일간의 모닥불 앞 상담 끝에 그 당시 세네카 추장이던 렏 재켓(Red Jacket)은 1.3백만 에이커의 땅을 단돈 10만불에 팔아넘기고 말았으니 원.

이 사람들의 역사 이야기 언제 자세하게 말씀드릴 짬이 있을 것인가.


Buffalo, 우리의 제 2의 고향, 이 정겨운 이름의 어원(語源)을 한번 짚어보지 않고 넘어갈 재간이 있나. 혹 알고 계세요, 버팔로란 이름이 생기게 된 유래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포함해서, 애매모호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요. 인디언의 말이 아닐까 또는 들소가 영어로 buffalo이니 거기에서 따온 것은 아닐까.

이상하게도 버팔로엔 소와 관련된 이름들이 많네요. 「Buffalo Bills」가 그렇고, 마이너 리그 야구팀의 명칭이 「Bison」이요, UB 축구팀도 「Bulls」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무슨 조화인지, 실제로는 이 서부뉴욕 일대에서 들소가 살았다는 기록이 전무하답니다. 놀라셨지요.

「대버팔로 회고록」은 이런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약 250년 전에는 이 지역을 「Buffalo Creek」이라고 불렀다. 1700년대 중반, 서부에서 이곳으로 이사온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Buffaloe」. 인디언과 백인 사이의 혼혈아였던 그는 샛강(Creek) 기슭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초기 이민자들은 그의 거처를 가르켜 「Buffaloe's Creek」이라고 불렀다. 점차 사람 수가 늘어나면서 더 넓은 터전으로 옮겨가게된 이들은 그의 이름 「Buffaloe」에서 ‘e'자를 빼고 그냥 「Buffalo」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과 전쟁



제 조카 최준홍군이 컴퓨터에서 뽑아낸 글에는 또다른 이야기가 들어있네요.

‘Beau Fleuve Theory(아름다운 강 가설)’ 백인들이 오뉴월 파리 모여들듯 하기 훨씬 전에 프랑스 탐험대가 이곳에 이르렀답니다. 나이아가라 강(Niagara River)을 본 이들은 그 아름다움에 너무나 감격해서 냅다 지른 소리가 있었으니 ‘beau fleuve(beautiful river)!' 이 프랑스 말이 와전(訛傳)되어 Buffalo가 되었다는 설입니다.

‘Riviere aux Chevaux Theory(River of Horses Theory, 말들의 강 가설)’. 가장 오래된 설로 1825년에 출판까지 되었다네요. 무슨 불법적인 연회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곳에 어디서 훔쳐온 말고기를 들소고기(Bison meat)라고 감쪽같이 속여 팔아먹은 녀석이 있었답니다. 하여, 이 연회 장소를 Buffalo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주장이지요.

참, buffalo와 bison의 구분이 애매하네요. 사전을 찾아봐도 둘다 그냥 「아메리카 들소」라고만 적혀 있으니.

「세네카인들의 땅」도 비슷한 내용 뿐인데, ‘버팔로라는 말에선 역시 인디언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란 말과 ‘inconclusive(불확정적)’란 단어로 끝을 맺고 있어요. 모두가 가설일 뿐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해답을 주고 있지 않으니, 어허 닭 쫓던 개 먼 산 바라보는 꼴이 되고 말았네그려.


세네카 인디언의 전설입니다. 「하늘 여인(Sky Woman)」이 그 제목. 어린 시절 밤 익기를 기다리며 화롯가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듣던 옛 이야기처럼 엮어볼테니 들어보세요.


먼 하늘나라 그 어딘가에 하늘 주인(Chief of Heaven)'과 대지의 어머니(Earth Mother)가 살고 있었지. 우리말로 옥황상제라고나 할까, 하늘 주인말야. 그들은 흰 집에 살고 있었는데 빛의 나무(Tree of Light)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나무가 그 집을 뒤덮고 있었어.

그 때까지 해도 없었고 땅도 없었대. 하늘 아래로는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바다 동물들과 바다 새들이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네.

빛의 나무에는 아름답게 핀 꽃들이 만발해 있었어요. 그 꽃들로부터 찬란한 빛이 나와 해 없는 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거라.

대지의 어머니는 마치 에덴동산의 이브처럼 아주 아주 예뻤대. 그녀가 아기를 가지게 되었지. 하늘 주인의 입김을 한번 마셨는데 고만 임신을 한거야. 그런데 말야, 그토록 고운 대지의 어머니에게도 문제가 있었어. 그녀의 끊임없는 호기심 때문이었지. 한번 의심을 품게 되면 반드시 그 원인을 찾아내야 직성이 풀리고 마니 이 또한 병폐라.

그리스도인과 전쟁



저 빛의 나무 뿌리 밑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글쎄 그 나무 밑을 파기 시작하네. 아무리 빛의 나무라한들 별 수가 있나. 그 큰 나무가 드디어 뿌리째 뽑혀지고 말았지. 뻥 뚫린 구멍, 하늘에 큰 구멍이 생긴거야.

하늘 주인이 노발대발,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네그려. 그렇지 않아도 제 입김 한 번에 임신한 그녀를 질투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런 엄청난 짓까지 저질렀으니.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하늘 구멍 속으로 던져버렸지.

큰일났네. 대지의 어머니가 쏜살같이 하늘에서 떨어져내려오고 있으니말야.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여 그녀에게 「하늘 여인」이란 별명이 붙여졌고.

「하늘 여인 구출 작전회의」가 열렸지. 바다 새들과 짐승들이 모두 모였어. 그녀를 받기 위해 수천수만의 새들이 날개를 활짝 펴서 서로서로 겹쳐대니 꼭 쿠션 좋은 양탄자 같이 되었네.

한편, 바다에서도 구출작전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지. 바다 속으로부터 헤엄쳐 올라온 큰 거북이 물 위에 조용히 떠있고, 사향쥐와 두꺼비는 뻔질나게 다이빙을 하는거라.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흙을 물어와서는 거북이 잔등에 쌓아 올리고 있었던 거지. 별 신기한 일도 다 있네. 흙이 자라나다니. 거북이 등에 쌓인 흙이 점점 커지더니 큰 섬이 된거야.

떨어지고 있는 하늘 여인을 살포시 자기들 날개 위에 받은 물새들은 조심조심 그녀를 섬 위에 내려 놓았지.

임신 중이던 하늘 여인이 딸을 낳았어요. 태어나자마자 어른이 된 그 딸은 정체를 밝히지 않는 연인을 만나 결혼을 하네. 그리고 곧 아기를 가지게 되었지. 쌍둥이 사내아이들이었어. 이 아이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서로 다투고 싸웠다는데, 한 아이는 살결이 희고 선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서 「선한 마음(Good Mind)」라고 불렀고, 다른 아이는 검으튀튀한 용모에 마음씨마저 악해 「악한 마음(Evil Mind)」이라고 불렀다네.

악한 마음은 어서 속히 세상에 나가겠다며 어미의 겨드랑이를 비집고 나왔다지 뭐야. 어미가 어떻게 되었겠어. 죽고 말았지. 슬픔에 젖은 하늘 여인은 쌍둥이들과 함께 야트막한 묘지에 그녀를 장사지냈어요.

그런데 신비로운 일이 또다시 일어나네그려. 그녀의 죽은 몸에서 여러 가지 식물들이 자라나기 시작한 거야.

젖가슴 위 흙으로부터는 옥수수가, 복부에선 호박이, 손가락에서는 콩이, 발가락에서는 감자가 그리고 머리로부터는 담배가.

선한 마음은 하늘나라로 힘들고 먼 여행을 떠났지.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어.

그리스도인과 전쟁



높은 산꼭대기 위에서 빛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햇님이었어.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을 다 통과케 한 후 햇님은 그를 내 아들이라 불렀지.

지상으로 돌아온 선한 마음은 온갖 종류의 좋은 것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과일도 만들고 동물과 물고기도 만들었지. 반면, 악한 마음은 계속 방해짓만 하고 있었지. 예를 들자면, 물고기에다 작은 가시들을 많이 집어넣는 것 같은 짓이었어. 사람들이 맛있는 생선을 쉽게 먹지 못하도록 그런 고약한 짓을 한거지.

악한 마음은 구약의 가인처럼 선한 마음을 죽이려고 했네. 실패했지. 그러자 그는 사악한 것들을 모두 데리고 깜깜한 지하세계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네.

선한 마음은 인간을 창조하게 되지. 진흙을 빚어서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거야.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대요.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하지?

이 모든 일이 끝나자 선한 마음은 빛의 줄기를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갔지. 하늘 여인도 하늘의 주인에게로 돌아갔고.

그 때로부터 인디언에게 땅은 어머니가 되었고, 해는 아버지가 되었다는 이야기야.


인디언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세가지가 있다고 하네요. 옥수수, 콩, 호박, 해와 땅이 어울려 빚어낸 이것들을 세 자매라고 부르면서 신성시하고 있는데 특히 옥수수를 귀하게 여기고 있지요. 나중에, 인디언의 옥수수 밭을 불태운 백인들이 있었어요. 인디언은 그들에게 신성모독의 불법자라는 욕을 퍼붓고 있네요.

흔히들 역사를 바꾼 작물로 감자와 옥수수를 들지요. 16세기 중국으로 건너간 옥수수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18세기 초랍니다.

옥수수라는 말의 뿌리는 옥수수의 중국 발음인 위슈슈에서 비롯된 것이고, 별칭인 강냉이는 전래시킨 중국 남부지방의 통칭인 강남에서 비롯되었답니다. 연전에 한국의 옥수수 박사란 분이 옥수수 씨앗을 들고 북한을 방문한다는 기사가 생각나네요.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이 강냉이 죽이라도 실컷 먹었으면 좋으련만.

다음엔 「청교도와 인디언」으로 되돌아 갑니다.

주안에서 샬롬.  ✎  이은모

 

성경이 만든 사람(3)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이야기-



제 3부 최고의 평신도 사역자

  사람, 교회, 비즈니스 등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고 믿었던 워너메이커는 자신의 사업과 주일학교 사역을 통해 이 신념을 입증시켰다. 1858년 27명의 어린이와 함께 시작한 베다니 주일학교가 10년 후에 1천 명을, 15년 후에 2,248명으로 꾸준히 성장하였고, 그가 체신부 장관을 지내던 1892년에는 3천명 이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워너메이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삶의 원칙이 있었는데, 바로 ‘주일 성수’였다. 그는 주일을 기다리고 주일을 준비하며 주일 예배를 통해 새 힘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신앙인이었다. 당시 해리슨 대통령이 그를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하고자 했을 때에 ‘주일 성수를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장관직을 수락한 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홀히 하면서 국민이나 대통령과의 약속도 지킬 수 있겠느냐’는 말로 신임 장관의 책임감에 대해 비판적인 기자의 질문에 답하였다. 워너메이커는 ‘장관직이 주일학교 교사직만도 못하냐‘는 질문에 주저함 없이 “장관직은 몇 년 하다 말 부업이지만, 주일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입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주중에는 워싱턴 DC에서 장관 업무를 보고, 주말에는 주일학교 사역을 위해 필라델피아로 한 번도 빠짐없이 4년 동안 최선을 다해 헌신하였다.


  그러나 주일성수의 문제로 워너메이커가 큰 아들 토머스와 큰 고통을 겪는 일이 있었다. 토머스가 미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일간지인 The North America를 인수해서 주일자 신문을 발행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주일성수를 목숨같이 여기는 아버지 워너메이커에게 굉장한 당혹감과 슬픔을 안겨준 사건이었고, 결국 아들 신문사의 주식을 사들여 주일자 신문을 봉쇄하기까지 했다. 그는 “주일은 사람의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설명하기 위해 이 신문 1면에 자신은 주일자 신문과 주일을 파괴하는 어떤 행위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포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계속 주일자 신문을 발행하였고 워너메이커는 자신이 사랑하고 헌신한 교회에 장로직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 사표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워너메이커가 얼마나 주일성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지키며 살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앙의 거장들



  워너메이커가 주일학교 부흥과 사업 번창, 그리고 장관직 수행까지 이렇게 엄청난 일들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일에 대한 열정과 창조적인 아이디어, 탁월한 조직운영 능력, 큰 믿음과 간절한 기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등의 여러 요인이 있다. 그는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고 장관직에 오른 이후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교회 사역을 가장 우선시하며, 20살 청년 때나 80살 노인이 되어서도 교회의 어려운 가정을 심방하며 위로하고 도왔다. 그는 65년을 베다니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였고, 어린이들의 자상한 아버지이며 진정한 친구가 되고자 항상 노력했다. 가장 유명하고 가장 바쁜 사람이었지만 그는 주일학교 어린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친근하게 대하였는데, 60회 생일을 맞았을 무렵에는 4천명의 어린이의 이름과 부모의 이름, 직업까지 다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아이들에 대해 각별한 사랑과 관심이 아이들을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한다는 확신을 가진 워너메이커는 복사기가 없던 그 시절, 밤을 새우며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정성스런 편지를 쓰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매일 한 사람이라고 돕는 기회를 가진 것은 특권이라고 생각하며 어린 영혼들을 위해 나누고 봉사하였다.


  이러한 그의 헌신과 열정에 힘입어 베다니 교회는 1902년 워너메이커 소유의 큰 땅위에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 건물을 건축하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다니 교회로 몰려들었고, 결국 워너메이커는 20세기의 모델 교회는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음을 예견하게 된다. 그는 베다니의 정신을 가진 새로운 교회를 더 많은 지역에 세워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형제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자신의 물질을 아끼지 않고 헌금하여 1902년 10월 필라델피아의 남쪽 지역에 ‘존 챔버스 메모리얼 교회’를 세우고, 1906년에는 ‘베다니 템플 교회’를, 1911년엔 ‘베다니 연합교회’를 세우게 된다. 또한 그는 형제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들을 건축하는 일에 재정적으로 도왔고, 오르간, 피아노, 의자, 성찬기 등을 기증하였다. 볼티모어의 ‘바울 교회’와 젠킨타운의 ‘그레이스 교회’가 바로 워너메이커의 헌금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그는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희생적으로 헌신하면서도 즐거움으로 그 멍에를 메게 해주소서.’라고 한 자신의 기도대로 삶을 살았다. 웅장한 베다니 교회를 완공하고 헌당식을 갖던 날 워너메이커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헌금할 돈이 없어 벽돌 몇 장을 드린 저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축복해주셨습니다.” 

  워너메이커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베다니 교회의 담임목사인 맥레난의 ‘기도 선집’이라는 세 권의 책을 통해 전해진다.

(10면에서)

워너메이커는‘기도란 하나님과 손을 잡는 것’이라고 믿었고, 기도하는 장소와 진실성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백화점 사업에 열중해 있을 때도 장관직으로 바쁠 때도 그는 항상 매일 아침을 기도로 시작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하고자 했다.


  한편 워너메이커는, 당시 여성운동을 벌이고 어머니 사역 클럽을 결성하기도 했던 주일학교 교사인 ‘애나 자비스’의 노력에 감동받아, 1908년 5월 둘째 주에 백화점에서 수천 명의 직원들과 그들의 어머니를 모시고 '어머니날‘ 기념행사를 가졌다. 그는 어머니들에게 기념품을 선물하고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다. 이후 워너메이커는 어머니날 제정을 정부에 건의하고 지속적으로 홍보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으로 1914년 윌슨 대통령이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날’로 공식 선포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1930년에 청주의 한 교회 주일학교에서부터 어머니날을 기념하기 시작했고,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어머니날로 발표하여 지키다가, 1974년부터는 ‘어버이날’로 개칭하여 오늘날까지 소중히 지켜지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  “성경이 만든 사람-존 워너메이커 ”(전광, 생명의 말씀사) 요약:정재은

 

Now, That's a Good Question!



질문: 구약에서는 기생 라합이나 히브리 산파들 또는 다른 이들이 사람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대가로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이 축복할 만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있지 않을까요?


  간단히 말해 제 대답은 “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백성들이 사실이 아닌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겠지요. 많은 기독교 윤리학자들이 거짓말에 대한 금지가 절대적이고 어떤 경우로도 선의의 거짓말(White lies)로 불리는 등 정당화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반면 다른 이들은 라합과 히브리 조산원들의 예를 들면서 그들의 거짓말이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들의 거짓말에 대해 축복했다든지 용서를 했다든지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문맥상으로 그들의 부정직에 대해 꾸짖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거역하는 그런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야곱의 어미 리브가가 에서보다는 야곱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그 아비 이삭을 속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결국 에서보다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라고 하고 이 리브가의 속임수가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나이 많은 이가 나이 어린이를 섬긴다는 것을 이루는데 도움을 줬다고 하며 그 속임수를 정당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리브가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도왔다는 것이지요. 결국 가룟유다가 했던 것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적의 손에 넘겨줬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뤘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배신에 대해 엄중히 심판하셨습니다. 저는 리브가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또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것은 절대로 거짓말 때문에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라합도 같은 맥락에서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수세기 동안 교회에서 진리의 윤리학은 정의와 연관되어져서 개발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사실들을 말하도록 해야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정말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거짓말이 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며 그런 상황들은 전쟁이나 살인, 또는 범죄행위와 관련된 분명히 극한 상황일 것입니다. 만약에 한 살인자가 집에 들어와서 아이들이 침실에 있는지 알고자 한다면 또 그 살인자가 아이들을 죽이리라고 확신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최대한의 기지를 발휘해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한 도덕적 의무일 것입니다.

성경 Q&A



  저는 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풋볼 게임에서 쿼터백이 상대팀에게 어떤 공격을 할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면 전쟁에서 어떤 사람이 그 적들에게 자기편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절대로 알려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쿼터백은 속임수나 가장하는 행위를 게임을 하는 동안 사용할 수 있지요. 일종의 풋볼구장에서의 전쟁이지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유태인을 보호하기 위해 나치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는 거짓말이 그런 류의 악을 막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Now, That's a Good Question!" R.C. Sproul 번역:유진희

 

이건 아니지 싶다



  친구 가운데 사업에 어려움을 겪는 친구가 있었다. 경기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자금회전이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주위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조금만 자금을 지원해주면 현재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겠다고 하면서. 주위의 친구들이 다 같이 어렵지만 안 되었다 싶은 마음에 힘닿는 데까지 자금을 모아 어려움을 호소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리는 소문이 그 친구의 씀씀이가 보통 헤픈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최근엔 차도 예전보다 더 좋은 고급차로 바꾸어 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업이 잘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크게 상관할 문제가 아니겠지만 사업은 조금도 나아진 것 없이 순전히 자기들이 어렵게 모아준 자금으로 그렇게 흥청망청 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생각과 함께 이건 아니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당사자를 찾아가 물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이 소문과 같았다. 오히려 그 친구는 어이없어 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자기는 본래 살아오던 대로 살고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자동차도 자기가 평소 해오던 대로 때가 되어 교체한 것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기 삶의 수준이 예전만 못한 것에 대해서 불평을 쏟아놓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찾아온 친구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같은 얘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참으로 기가 막힌 친구 아닌가?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 ‘가정’해서 생각해본 내용이다. 만일에 당신 주위에 정말로 이 같은 친구가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리고 그 친구에게 실제로 당신의 피 같은 돈이 들어갔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 친구에 대해 배신감이 들 것이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그 돈을 돌려받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 친구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도움은커녕 다시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가정’해도 황당한 일이 얼마 전 실제로 일어났다. 다른 곳이 아닌 이 미국에서, 그것도 개인이 아닌 대형 금융기관들에서, 또 온 세상이 다 알도록 말이다. 다름 아닌 ‘월가’(Wall街)의 얘기이다. 듣는 바로는 월가 금융인들이 지난해 말에 챙겨간 보너스가 자그마치 184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자기들 돈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면 보너스를 받든 돈 잔치를 하든 무슨 상관이랴! 문제는 그들이 나누어가진 돈이 국민들의 혈세로 지원한 구제금융이라는 데 있다. 이를테면 가까운 친구들이 사업자금에 쓰라고 지원해준 돈을 개인 용도로 흥청망청 쓴 것과 같다고나 할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목회자 칼럼

푸른초장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요즘 미국의 경제가 말이 아니다. 특별히 ‘월가’의 금융기관들은 현재와 같은 경제위기를 초래한 당사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경제를 살리기 위한 차원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국민들의 혈세로 그들에게 엄청난 금융지원을 했더니만 그 돈으로 자기들끼리 보너스 잔치를 한 것이다. 그로 인해 ‘월가’를 향한 미 국민들의 분노와 비난의 화살이 보통이 아니다. 이 같은 국민들의 비난여론을 의식한 듯 그들은 변명하기를 이는 월가의 ‘관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몰이해(沒理解)의 소치라고 했다는데... 월가의 오랜 관행은 “실적 있는 곳에 보상이 있다”는 원칙으로 회사의 전체적인 실적보다 개인의 성과에 더욱 무게를 두는 것이라고 한다. 그로 인해 보너스는 일종의 급여의 연장으로 취급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예외 없이 보너스 지급을 했다는 것인데. 글쎄다, 그게 과연 설득력이 있을지.

  아무리 그럴지라도 ‘때’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액수’라는 것이 납득할 만한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회사가 망해가는 마당에 그리고 망해가는 회사를 회생시키고자 나랏돈을 지원받는 마당에 184억불 보너스가 웬 말인가? 이는 1인당 평균 10만 불이 넘는 금액이라고 한다. 모든 미 국민들이 불경기에 신음하고 일자리 불안에 시달리는 마당에 국민들의 돈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10만 불 이상씩 나누어 갖는 것이 과연 ‘관행’이라는 말로 설명이 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도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기가 막힌 것은 대다수의 ‘월가 직원들’이 자기들이 받은 보너스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작년에 자기들이 받은 보너스에 비해 턱없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듣는 바로는 작년에 월가 직원들이 받은 보너스는 모두 329억 달러였다고 한다. 그때야 자기들의 돈으로 돈 잔치를 했겠지만, 지금은 자기들 돈이 아닌 국민들의 혈세 아닌가? 어찌 그것을 자기들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예전만 못하다고 투덜거린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같은 기사들을 보자니 문득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참으로 뻔뻔한 사람들 아닌가? 아니 ‘후안무치’ 정도가 아니라 이는 ‘범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의 혈세를 자기들 호주머니에 넣었으니 나랏돈을 횡량한 범죄 아닌가? 비록 정치도 모르고, 경제도 모르고, ‘월가의 관행’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는 나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싶은 생각이 든다.


  ‘월가’(Wall街)의 이 같은 후안무치한 관행을 전해 듣고서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오바마 대통령’이 크게 발끈하며 격노했다고 한다. 그는 아무리 관행일지라도 이번 월가의 보너스 지급은 ‘무책임의 극치’라고 하면서 ‘부끄러운 일’

목회자 칼럼

푸른초장



이라고 성토하였다. 그는 크게 불쾌한 표정으로 “회사의 경영진들이 이익을 내서 보너스를 받던 때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다”고 하면서 “월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제하는 모습,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일갈(一喝)하였다. 정말이지 백번 옳은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번 ‘월가’의 후안무치한 행태를 보면서 그 속에서 세상 사람들의 이기적인 사고방식과 자기중심적인 Lifestyle을 읽을 수가 있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이 사회야 침몰하든 말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어쩌면 그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의식이 아닌가 싶다. ‘월가 사람들’은 단지 그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따름이고.

  이번 일을 목격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 시대야말로 ‘상식’과 ‘양심’을 상실한 시대라는 것이다. 아무리 관행이라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국민들의 돈으로 거금의 보너스 잔치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들에게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결코 그 같은 일은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십여 년 전에 한국에서 비슷한 일들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IMF 사태로 인해 한국이 무척이나 어려울 때였다. 그때 국가 경제회복을 위해 국민들의 혈세로 많은 회사들에 공적자금을 쏟아 부었는데 개중 어떤 회사들은 그 자금으로 자기들의 호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했었다. 그것이 알려졌을 때 온 국민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허탈해 했는지... 정말이지 ‘상식’과 ‘양심’을 상실한 자들이 아닌가?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는 너무 ‘책임’이 결여된 사회인 것을 본다. ‘월가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이 지원받은 돈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가졌어야만 했다. 특별히 그것이 ‘국민들의 혈세라는 생각을 가지고’ 책임 있는 자세를 보였어야만 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어깨에 미국의 경제, 세계의 경제가 달려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임 있게 행동했어야만 했다. 그랬더라면 자기들끼리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후안무치한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그들을 향해 ‘무책임의 극치’라고 비난한 것은 매우 적절한 책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책임 의식’을 상실한 자들이 그들뿐이랴! 가만 보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책임’과 담쌓은 삶을 사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상식’과 ‘양심’과 ‘책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와 같은 것들이 점점 무너져가거나 상실된 시대이다. 따라서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들을 회복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상식과 양심과 책임의 삶’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세상 사람들을 능가하는 ‘상식과 양심과 책임의 삶’을 살아야

목회자 칼럼

푸른초장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많은 것을 보게 된다. 단지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단지 교회만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이번에 자기들끼리 돈 잔치를 벌인 ‘월가 사람들’ 가운데에도 ‘자칭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같은 생각을 할 때 가슴 한편에 답답한 생각,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요즘과 같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상식과 양심과 책임의 삶’만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희생하는 모습’이 있어야만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란 곧 희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가? 그분은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시는 삶을 사셨다. 즉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살리시고자 자신을 희생하셨다. 어느 정도로?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대신 당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 죽으실 정도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특징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의 삶, 즉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삶은 세상과 역행하는 삶이다. 세상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사회이다. 더 나아가 남을 짓밟으면서까지 자기만 잘 살려고 하는 악한 사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물론 그 삶은 결코 쉽지 않은 삶이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최소한 그 같은 삶을 흉내라도 내며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 아직은 소망이 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지금껏 ‘월가 사람들’의 후안무치한 짓에 대해 성토했지만 그 같은 일을 일삼는 자들은 단지 그들만이 아니다. 가만 보면 “이건 아니지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어쩌면 그만큼 세상이 더 살기 힘들어졌다는 혹은 더 악해졌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럴지라도 아니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정신을 차리고, 세상의 Lifestyle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어야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가르켜 ‘빛과 소금’이라 하였다. 빛이 꺼진다면 어찌 세상의 어둠을 쫓아낼 수 있겠는가!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어찌 세상의 부패를 막을 수 있겠는가! ✎김현진

 

Airplane Crash


밤 12시가 넘은 시각

TV를 켰더니 웬 뉴스 속보였다.

버팔로 지역에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만 보니 낯익은 지역이었다.

끔찍하게도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한다.

아닌 밤중에 이 웬 날벼락인가

새벽 2시경 사고현장에 달려가 보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애도라도 하고자

현장은 온통 화마에 덮여있었다.

희생자들이 겪었을 고통이 오버랩 되었다.


비행기가 추락한 곳은 민가였다.

비행기가 혹 민가를 휩쓸기라도 했다면

엄청난 인명피해가 일어날 뻔 했다.

천우신조로 지역 희생자는 한 명뿐이라 한다.

주변 집들은 혼비백산했을 게다.

주변 집들뿐이랴!

그 비행기는 내 집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불과 6마일밖에 안 떨어진 곳이었기에

그러고 보면 사람의 살고 죽는 것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비행기는 추락해도 모두 무사한데1)

어떤 비행기는 생존자가 없다 하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사람 목숨 한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살아있으나 내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낮까지만 해도 따스한 봄이더니

하늘도 대형참사를 슬퍼하는가

온 사방에 저리 눈발이 날리는 것이. (HJ)


  1) 지난 1월 16일 뉴욕 허드슨 강에 비행기가 추락했으나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