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4/26 격려와 위로의 삶
  2. 2010/04/26 사랑의 고백
  3. 2010/04/20 봄이 오는 소리
  4. 2010/04/20 용서의 미학
격려와 위로의 삶

요즘 영어 설교시간마다 ‘Daniel Yang’ 목사님께서 “교회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시리즈로 말씀을 전해주고 계시다. 하나하나 우리 모두가 꼭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는 귀한 말씀들이 아닐 수 없다.

교회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구원이 선포되는 곳이어야 한다. 아울러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교회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회란 또한 모두가 ‘형제 자매로 지내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 즉 문지방이 낮은 곳이어야 한다. 또한 교회란 결코 ‘차별이나 다툼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 모두가 ‘한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는데 거기에 어찌 다툼이나 차별이 있겠는가. 다툼이나 차별이 있을 때 이는 곧 하나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곳이 교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에 다툼이나 차별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보실 땐 얼마나 더하실까.

여기서 나는 교회에 대해 특별한 모습을 하나 더 언급하고 싶다. 교회란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란 잘난 사람들, 의인들,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죄인들, 상처 입은 사람들, 못난 사람들,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주님 곁에 찾아왔던 사람들이 다 그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같은 사라들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다.
교회는 일종의 의원(醫院)과 같은 곳이다. 즉 아픈 사람들이 나와서 치료 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를 받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문제의 해결을 받는 곳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가복음 2:17)고 하셨다. 우리 주님은 분명 병든 자를 위한 의원으로 오셨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마음에 병든 자들, 상처가 있는 자들, 고민하는 자들을 싸매어주시고 그들을 치료하시기 원하신다. 그렇다면 무슨 얘기인가? 교회는 마땅히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란 주님의 사역을 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격려와 위로가 넘칠 때 그곳이 교회다운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그 상처에 대해서 손가락질하고 험담한다면 그곳은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떠난 교회라 할 것이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격려와 위로’의 사람을 찾으라면 ‘바나바’라는 사람을 들 수 있다. 그 이름을 말할 때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와 비슷한 이름의 사람으로 ‘바라바’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빌라도에 의해 예수님 대신에 풀려난 살인자이고 ‘바나바’는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구브로(Cyprus) 섬 출신의 유대인으로 비록 열 두 사도 가운데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가까이서 예수님을 따른 사람으로 다른 사도들과 거의 동급의 평가를 받을 만한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과 더불어 이 ‘바나바’에 대해서 ‘사도’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
성경은 이 ‘바나바’에 대해서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사도행전 11:24) 착한 사람이 무슨 말인가?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면 ‘착하다’는 말을 풀이하기를 ‘착실하고 마음이 너그럽고 인정이 두텁다’고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는 한마디로 남에게 전혀 해를 끼칠 줄 모르는,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너그러운 그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사용된 이 ‘착하다’는 말은 ‘선행’과 관계된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선을 베푸는 것과 관계된 말이다. 즉 그는 단순히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운 사람이 아닌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었는가? 성경을 보면 자신의 상당한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했다.(사도행전 4:34-36 참조) 한 마디로 ‘바나바’는 구체적으로 남에게 선을 베풀 줄 아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격려와 위로의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의 가장 아름다운 성품이었다. 사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고 ‘바나나’는 일종의 Nickname(별명)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왜 그렇게 불렀는가? ‘바나바’란 이름의 뜻은 ‘격려자’라는 뜻이다. 이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그 ‘격려와 위로’가 바로 기독교 역사상 불세출의 인물인 ‘바울’을 탄생시켰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본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박해자였다. 그런데 그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적을 경험하고 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되었다. 즉 이제껏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잔해하던 자가 이제는 거꾸로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을 감옥에 잡아넣은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겐 여전히 그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있었다. 바울이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속임수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그 같은 상태에서 전전긍긍하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앞장서서 바울을 소개하고, 앞장서서 바울을 기독교 공동체 가운데 밀어 넣은 사람이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이었다. 바나바 덕에 바울은 사도들의 세계, 믿음의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만일 바나바가 아니었더라면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결국 ‘바나바’의 ‘격려하고 위로하는 은사’가 바울을 바울 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면 ‘바나바’가 어떻게 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물론 그가 본래 남보다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럴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행전 11:24)이라고 했다. 즉 그가 선행을 베푸는 착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격려와 위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그것은 그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바나바’는 성령이 다스리는 사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사람이 어디 ‘바나바’뿐인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 성령이 그 안에 머물고 계시는 사람이다.(로마서 8:9 참조) 다만 문제는 사람들이 그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뿐이다. ‘성령 충만’이란 곧 성령께서 그 사람을 강하게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누구든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삶을 살 때 ‘바나바’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 즉 ‘착한 삶’ 나아가 ‘격려하며 위로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교회는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이는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와 같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으로 알라! 우리 교회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인지 아닌지를. 내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내 삶에 ‘격려하는 삶’ ‘위로하는 삶’이 있다면, 우리 교회에 ‘격려와 위로’가 넘친다면 나와 우리 교회는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여인이 한 사람 있다. 그녀는 10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 때부터 그녀는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녀는 20세에 결혼을 했다. 그녀가 결혼한 남편은 젊고 패기 있고 장래성이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남편이 관절염에 걸려 다리가 말라버리는 불행에 직면케 되었다. 그로 인해 남편은 쇠붙이를 다리에 고정시킨 채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남편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불구자가 되었는데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그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줄 아셨나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삶이예요. 당신의 다리가 아니에요.”
이 말은 다리 불구자가 된 뒤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남편에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결국 그 남편은 다리 불구자임에도 불구하고 1932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36년에 다시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1940년에 3선, 그리고 1944년에 4선까지 되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바로 ‘루즈벨트’(Roosevelt) 대통령이다. 그리고 그 부인이 바로 ‘엘레나 루즈벨트’ 여사이다. 그녀는 남편을 격려하고 남편에게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준, 그리하여 남편을 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여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가운데 처한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넣어주는 가장 대표적인 본을 보인 사람이 되었다.
바울이 있기 위해서 ‘바나바’가 있었던 것처럼, 루즈벨트 대통령이 있기 위해서 그의 부인 ‘엘레나’ 여사가 있었다. 바나바와 엘레나 여사, 두 사람 다 격려를 통해 역사상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격려와 위로’란 이처럼 위대한 것이다. ‘격려’란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남을 격려하고 세우는 것,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남이 잘못했을 때 용서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책망하고 비난하고 기회가 있을 적마다 험담하는 그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령을 모신 사람들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삶은 용서하고 위로하고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삶이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격려자, 위로자로 오신 것을 기억하라! 주님께서는 희망이 없는 죄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초대의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니, 단지 그 같은 사람들을 초대하신 정도가 아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다. 한 마디로 우리 주님의 삶은 ‘위로의 삶’이요 ‘격려의 삶’이었다.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모습을 본 받는 삶, 즉 ‘격려와 위로의 삶’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랑의 고백

어느 봄날 오후의 묘지
목사가 하관예배를 집례 중이었다.
50년을 함께 산 70대 중반의 노인이
관 위에 엎어지며 소리쳐 울었다.
“여보!난 당신을 정말 사랑했소!”
장례식의 엄숙한 정적이 깨어졌다.
중년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말렸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얘들아,난 정말 네 엄마를 사랑했단다!”
노인은 주위의 만류와 위로에도
계속 울부짖을 뿐이었다.

관이 땅으로 내려가고
마지막 그 위에 흙이 뿌려졌다.
노인은 울부짖음은 더욱 커졌다.
목사가 다가와 노인을 위로하였다.
“어르신,고인께서는 좋은 곳에 가셨습니다.
이제 그만 진정하시지요.”
노인은 비통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로 내 아내를 사랑했다오!
그런데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
난 한 번도 그 말을 하지 못했소!”

사랑은 장식용이 아니다.
사랑은 색 바랜 앨범이 아니다.
기회 있을 적마다 다정히 손을 잡으라!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라!
무덤에 들어간 후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땐 회한의 눈물만 있을 뿐이다.
쓰라린 통곡만 있을 뿐이다.
아직 살아있고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이
마음껏 사랑을 고백할 때이다. (HJ)

봄이 오는 소리


온 땅에 충만한 햇살
한참을 바라보면
빠질 것 같은 파아란 하늘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창을 열면
새들 지저귀는 소리
싱그러운 꽃나무들의 새싹 내음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앙상했던 가지들에
시나브로 생명이 움트고
수목들의 기지개 펴는 아우성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만나는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 격정의 사순절을 깊이 묵상하며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겨우내 갇혔던 심령
사망에 붙들렸던 심령이
두터운 흙더미를 뚫고 일어섬을 보며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봄이 오는 소리
그 속에서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HJ)

용서의 미학


기독교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당연히 ‘사랑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종교요 또한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이는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사랑하는 삶을 가르치셨다.
‘사랑’은 사실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일 수 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위가 있다면 바로 ‘용서’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용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 둘은 결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사랑’하시기에 인간들의 죄악을 ‘용서’하셨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용서의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셉이 그 형들을 용서하는 이야기, 다윗이 사울을 용서하는 이야기,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하는 이야기 등.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이야기로 요셉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10대 소년 시절에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다. 즉 자신의 친형제들이 자신을 노예로 판 것이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있겠는가? 그로 인해 그는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즉 십 수 년 세월을 짐승처럼 노예로 살아야만 했다. 나중에 그가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된 다음 그는 다시금 그 옛날의 형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때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 형들을 참수하거나 혹은 죽는 날까지 형들을 감옥에 가두어두었는가? 혹은 그 형들에게 아주 잔인하고 시원하게 보복을 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시원하게’ 보복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라는 방법으로 보복을 했다. 그것은 그 어떤 잔인한 방법(?)보다 더욱 잔인한 보복이었다. 왜냐하면 그 형들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바로 자신들이 노예로 판 동생인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형들은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자신들이 행한 일을 생각하면 이제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감옥에서 평생 살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동생 요셉이 자신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을 형으로 극진히 대접을 했다. 모든 지난날의 과오를 다 용서한다고 하면서. 그때 자신들의 저지른 죄가 얼마나 부끄러웠겠으며 얼마나 몸 둘 바를 몰랐겠는가? 그 형들의 낯이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복수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결국 요셉은 형들에게 최고의 복수를 한 셈이다.

최고의 복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수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철저하게 깨닫고 회개하게 하면서 더 이상 원수 관계가 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복수가 될 것이다. ‘용서’가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조건 당한 대로 갚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보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같은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정한 보복’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로마서 12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9절)

하나하나 도저히 우리가 따를 수 없는 내용들이 아닐 수 없다. 원수는 그만두고라도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런데 ‘원수에게’ 그와 같이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곧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은 것과 같은 것이 되리라”(20절)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는 곧 요셉의 형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스스로 큰 부끄럼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용서’가 바로 그와 같이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복수는 복수대로 하고 서로 화해까지 하게 만드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처럼 깨끗한 보복, 또 최고의 보복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원수에 대해 ‘용서’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것이요, 또 친히 실천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다. 오히려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그토록 은혜를 베풀고 사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들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형의 끔찍한 죽음을 당하셨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지막 운명하시는 순간, 결코 인간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간구하셨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정신이자 가르침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그 같은 주님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같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같은 모습이 있을 때 또한 ‘화해’가 가능하다. 즉 바로 그 같은 모습이 있을 때 원수 관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그와 같이 하셨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관계가 무너지고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용서’ 없이 ‘화해’란 없다.

무엇보다 ‘용서’하게 될 때 나를 더 상하지 않게 하고 망치지 않게 한다. 용서란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사람이 용서하지 않을 때, 당한 것만 해도 큰 상처가 되는데 그것으로 인해 그 자신이 계속해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는 두 번 세 번 스스로 고통을 겪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미국의 제 20대 대통령으로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라는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188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불행히도 대통령에 취임한지 4개월밖에 안되어 저격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등에 총을 맞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의식을 잃지 않았다. 병원에서 의사가 그의 등에서 총알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총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상처 부위를 찾고 찾아도 총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대통령은 점점 건강이 악화되어갔다. 많은 의사들이 총알을 발견하려고 매달렸지만 결코 찾을 수가 없었다. 7월에 총을 맞은 대통령은 8월을 지내고 9월이 되도록 계속 병상에 누워있었으며 결국 9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통령이 사망한 것은 총을 맞은 것 때문이 아니라 총알을 찾지 못한 것으로 인해 상처부위가 부패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심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억울한 일이 그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상대방의 공격이 그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 일로 인해 보복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것이 그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화병’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누군가로부터 크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일로 인해 계속 분노하게 될 경우 그로 인해 마음의 병에 걸리게 된다. 이는 상대방의 공격 때문이 생기는 병이 아니라 스스로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혹은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미움을 이기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다. 분노하는 마음, 보복하는 마음은 그처럼 좋지 못한 것이다. 원수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것만 해도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데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망가지게 만든다면 이거야말로 이중으로 고통을 겪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분노 혹은 보복하는 마음은 가능한 한 빨리 버릴수록 좋다는 것이다.

‘용서하는 삶’을 위해 우리는 ‘요셉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요셉이 어떻게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는가? 성경을 보면 요셉이 그 형들에게 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 내용 안에서 요셉이 어떻게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50:19-21)

그는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뭐라고 말했는가?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라고 했다. 그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으나 모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로 지난날 형들이 행한 모든 악행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하였다. 즉 당신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요셉이 그 형들을 저주하고 원수를 갚을 수 있겠는가?

세 번째로 선으로 악을 갚았다. 요셉은 원수 갚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오히려 두려워 떠는 그들을 위로했다고 했다. 이 얼마나 ‘완전한 용서’인가? 그랬기에 그로 인해 ‘화해’가 있을 수 있었다. 보복이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결코 ‘화해’란 없다. 그러나 ‘완전한 용서’ ‘참된 용서’는 ‘참된 화해’를 가져온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의 미학’이다.

‘용서’를 배우라! ‘용서하는 삶’을 배우라! 그것은 자신을 살리고, 상대방을 부끄럽게 만들고, 더 나아가 그 관계를 아름답게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는 삶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용서,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Trademark와도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열심히 교회에 나온다고 감명 받지 않는다. 우리가 밤을 새워 기도한다고 감명 받지 않는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한다고 감명 받지 않는다.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때 그때 세상은 감명을 받는다. 그 때 세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인들로 안다.

용서할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용서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 용서할 때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하는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어 가시며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신다. 당신의 삶 가운데 ‘용서하는 삶’이 있는가? 그것으로 알라! 당신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김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