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리
온 땅에 충만한 햇살
한참을 바라보면
빠질 것 같은 파아란 하늘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창을 열면
새들 지저귀는 소리
싱그러운 꽃나무들의 새싹 내음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앙상했던 가지들에
시나브로 생명이 움트고
수목들의 기지개 펴는 아우성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만나는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 격정의 사순절을 깊이 묵상하며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겨우내 갇혔던 심령
사망에 붙들렸던 심령이
두터운 흙더미를 뚫고 일어섬을 보며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봄이 오는 소리
그 속에서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H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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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미학
기독교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당연히 ‘사랑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종교요 또한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이는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사랑하는 삶을 가르치셨다.
‘사랑’은 사실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일 수 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위가 있다면 바로 ‘용서’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용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 둘은 결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사랑’하시기에 인간들의 죄악을 ‘용서’하셨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용서의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셉이 그 형들을 용서하는 이야기, 다윗이 사울을 용서하는 이야기,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하는 이야기 등.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이야기로 요셉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10대 소년 시절에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다. 즉 자신의 친형제들이 자신을 노예로 판 것이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있겠는가? 그로 인해 그는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즉 십 수 년 세월을 짐승처럼 노예로 살아야만 했다. 나중에 그가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된 다음 그는 다시금 그 옛날의 형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때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 형들을 참수하거나 혹은 죽는 날까지 형들을 감옥에 가두어두었는가? 혹은 그 형들에게 아주 잔인하고 시원하게 보복을 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시원하게’ 보복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라는 방법으로 보복을 했다. 그것은 그 어떤 잔인한 방법(?)보다 더욱 잔인한 보복이었다. 왜냐하면 그 형들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바로 자신들이 노예로 판 동생인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형들은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자신들이 행한 일을 생각하면 이제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감옥에서 평생 살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동생 요셉이 자신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을 형으로 극진히 대접을 했다. 모든 지난날의 과오를 다 용서한다고 하면서. 그때 자신들의 저지른 죄가 얼마나 부끄러웠겠으며 얼마나 몸 둘 바를 몰랐겠는가? 그 형들의 낯이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복수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결국 요셉은 형들에게 최고의 복수를 한 셈이다.
최고의 복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수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철저하게 깨닫고 회개하게 하면서 더 이상 원수 관계가 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복수가 될 것이다. ‘용서’가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조건 당한 대로 갚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보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같은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정한 보복’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로마서 12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9절)
하나하나 도저히 우리가 따를 수 없는 내용들이 아닐 수 없다. 원수는 그만두고라도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런데 ‘원수에게’ 그와 같이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곧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은 것과 같은 것이 되리라”(20절)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는 곧 요셉의 형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스스로 큰 부끄럼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용서’가 바로 그와 같이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복수는 복수대로 하고 서로 화해까지 하게 만드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처럼 깨끗한 보복, 또 최고의 보복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원수에 대해 ‘용서’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것이요, 또 친히 실천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다. 오히려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그토록 은혜를 베풀고 사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들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형의 끔찍한 죽음을 당하셨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지막 운명하시는 순간, 결코 인간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간구하셨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정신이자 가르침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그 같은 주님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같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같은 모습이 있을 때 또한 ‘화해’가 가능하다. 즉 바로 그 같은 모습이 있을 때 원수 관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그와 같이 하셨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관계가 무너지고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용서’ 없이 ‘화해’란 없다.
무엇보다 ‘용서’하게 될 때 나를 더 상하지 않게 하고 망치지 않게 한다. 용서란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사람이 용서하지 않을 때, 당한 것만 해도 큰 상처가 되는데 그것으로 인해 그 자신이 계속해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는 두 번 세 번 스스로 고통을 겪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미국의 제 20대 대통령으로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라는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188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불행히도 대통령에 취임한지 4개월밖에 안되어 저격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등에 총을 맞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의식을 잃지 않았다. 병원에서 의사가 그의 등에서 총알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총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상처 부위를 찾고 찾아도 총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대통령은 점점 건강이 악화되어갔다. 많은 의사들이 총알을 발견하려고 매달렸지만 결코 찾을 수가 없었다. 7월에 총을 맞은 대통령은 8월을 지내고 9월이 되도록 계속 병상에 누워있었으며 결국 9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통령이 사망한 것은 총을 맞은 것 때문이 아니라 총알을 찾지 못한 것으로 인해 상처부위가 부패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심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억울한 일이 그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상대방의 공격이 그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 일로 인해 보복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것이 그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화병’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누군가로부터 크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일로 인해 계속 분노하게 될 경우 그로 인해 마음의 병에 걸리게 된다. 이는 상대방의 공격 때문이 생기는 병이 아니라 스스로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혹은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미움을 이기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다. 분노하는 마음, 보복하는 마음은 그처럼 좋지 못한 것이다. 원수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것만 해도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데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망가지게 만든다면 이거야말로 이중으로 고통을 겪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분노 혹은 보복하는 마음은 가능한 한 빨리 버릴수록 좋다는 것이다.
‘용서하는 삶’을 위해 우리는 ‘요셉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요셉이 어떻게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는가? 성경을 보면 요셉이 그 형들에게 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 내용 안에서 요셉이 어떻게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50:19-21)
그는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뭐라고 말했는가?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라고 했다. 그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으나 모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로 지난날 형들이 행한 모든 악행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하였다. 즉 당신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요셉이 그 형들을 저주하고 원수를 갚을 수 있겠는가?
세 번째로 선으로 악을 갚았다. 요셉은 원수 갚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오히려 두려워 떠는 그들을 위로했다고 했다. 이 얼마나 ‘완전한 용서’인가? 그랬기에 그로 인해 ‘화해’가 있을 수 있었다. 보복이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결코 ‘화해’란 없다. 그러나 ‘완전한 용서’ ‘참된 용서’는 ‘참된 화해’를 가져온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의 미학’이다.
‘용서’를 배우라! ‘용서하는 삶’을 배우라! 그것은 자신을 살리고, 상대방을 부끄럽게 만들고, 더 나아가 그 관계를 아름답게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는 삶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용서,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Trademark와도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열심히 교회에 나온다고 감명 받지 않는다. 우리가 밤을 새워 기도한다고 감명 받지 않는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한다고 감명 받지 않는다.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때 그때 세상은 감명을 받는다. 그 때 세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인들로 안다.
용서할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용서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 용서할 때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하는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어 가시며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신다. 당신의 삶 가운데 ‘용서하는 삶’이 있는가? 그것으로 알라! 당신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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