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절에는 목회자도 귀하고 성경도 귀했습니다. 선교사의 발길이 닿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면 한 교회만 돌볼 수 없는 선교사는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주일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그 외의 집회 때는 교인 중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교인을 뽑아 ‘조사’로 임명하여 그에게 성경을 한 권 맡기고 예배를 인도하게 했습니다. 그 때의 일화입니다.

경상북도 어느 산골의 예배당에 교인들이 모여들어 그 교회 조사님이 예배인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봉독할 순서가 되어 조사님은 시편 23편을 봉독했습니다. 그러나 그 옛날 산골의 예배당에 전깃불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어두침침한 등잔불 아래에서 두터운 돋보기를 끼고 겨우겨우 읽어 내려갔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한글성경에는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조사님의 한글실력이 모자라는지라 제대로 읽어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는나.....의...목 자르시니....내가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조사님은 본문을 “여호와는 나의 ‘목 자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잘못 읽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조사님은 비장한 얼굴로 이렇게 설교를 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 짜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씀네다!”

조사님이 큰소리로 외치자 온 교우들이 두 손을 들고 함께 외쳤습니다.

“내두!... 내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

성경을 사용하라



대전 엑스포가 개최되던 해였다. 어느 교회에서 주일예배 강사로 설교하게 되어 숙소에서 막 나가는데 TV 프로그램이 잠시 내 눈을 끌었다. 그 내용은 여성 경제인 연합회 임원들을 초청하여 인터뷰한 것으로, 여자들이 남자들 못지않게 기업 전선에서 수고하여 성공한 이야기이다. 그 중에서도 시선을 끈 것은 여성 경제인 연합회 부회장인 어느 모자 공장 사장님의 인터뷰였다.

“저희 회사는 오늘까지 전세계에 약 200만 개의 모자를 생산하여 팔았습니다. 이번 엑스포 대회에도 출품했고요.”

“정말 장하시군요. 기업의 성공 비결이 무엇인가요?”

“저는 교회 집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기업의 경영자라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로 모든 것을 의논하며 경영했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기업을 성공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근간에 그녀는 큰 어려움이 닥쳐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모자가 팔리지 않아 부부도가 나고 회사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몇 개월간 시골로 도망다녔다고 한다.

“어느 주일 아침이었어요. 저는 우연히 시골 조그만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지요. 너무 맘이 상하고 지쳐서 그냥 눈물만 나왔어요. 목사님 설교도 눈물로 듣게 되고 찬송도 눈물로 부르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어요. 예배당 강단에 십자가가 유난히 눈부시게 보이는 순간, 내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시관 쓰신 사진을 그날 따라 자세히 보게 됐어요. 그러던 중에 머리에 쓰신 가시관의 그 가시들이 순간, 머리 빗는 빗으로 보이는 것이었어요.”


여자들은 모자를 좋아한다. 남자들도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모자를 쓰지 않는 이유는 머리가 모자에 눌려 자국이 남을까봐 그런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모자를 써도 머리에 자국이 남지 않고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그것만 해결되면 모자는 잘 팔릴텐데...’ 그녀는 늘 그것을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순간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이었어요. 그렇다. 모자 안에 동그랗게 빗을 넣어서 만들자. 예수님의 가시관을 봐라.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이 빗을 상징하고 있질 않은가?”


그녀는 단번에 국내 특허를 냈고, 이어서 세계 특허를 냈다. 둥그런 빗이 있는 모자는 그녀만이 만들 수 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녀에게 로열티를 내야 한다. 그녀의 회사는 현재 전세계의 모자 공장에서 200만 개의 모자를 생산하는 탄탄한

감동의 샘터



기업이 되었다. 그녀는 성경은 종교경전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기적의 사업 지침서라고 말했다.

실제로 성경을 실생활에 응용하라. 그러면 거기에 놀라운 기적이 올 것이다.


미국에 모 석유회사 사장이 있는데 그는 크리스천이다. 창세기를 읽다가 노아의 방주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역청’이란 무엇인가. 배에 물이 스며들지 않기 위한 콜타르가 아닌가. 즉 석유, 가스가 아닌가 말이다.

이 사람은 노아의 방주가 있었다는 아라랏 산 근교를 찾아가서 지질을 조사해 보았다. 실로 그곳은 엄청난 매장량의 유전지대였고, 그 사실을 안 그는 터키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모든 시공은 그의 회사가 맡기로 하고 수입은 터키 정부와 51대 49로 나누기로 했다. 시추공사를 했을 때 엄청난 석유가 터져 나왔고 터키 정부도, 이 사람도 큰 부를 얻게 되었다.


성경을 그냥 지나가는 얘기로 흘려서는 안된다. 성경 안에는 무궁무진한 보화가 있다. 성경을 이용하라. 성경을 각 방면에서 응용하라. 목회자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목회 성장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 사업가에게 필요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성공의 비법이 여기에 있다. 주부에게는 가정의 평화와 자녀교유의 비법을 보여주신다. 실생활의 모범 답안이 성경 안에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 박요한

 

파인애플 이야기(2)


**** 이 『파인애플 이야기』는 네덜란드령 뉴기니아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를 통해 7년에 걸쳐
일어났던 실화입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싱그러운 재미와 함께 성경이 말하는 삶의 기본 원리를 어
떻게 생활에 적용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

마침내3년 다시 흘렀고 열매는 익기 시작했습니다.나는 아
내와 파인애플 과원을 거닐며 감동적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이제 우리도 얼마 안있으면 파인애플을 따먹겠구려.”
우리는 이렇게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
다.그런데 또다시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아십니까?그 열매들을
또 몽땅 도둑맞아 버렸습니다. 나는 낮에 원주민들이 밭에 들어
가 익은 파인애플의 위치를 알아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밤에 바로 그 위치에 가서 파
인애플을 훔쳐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병원문을 다시 닫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번엔 상점문을 닫아버려야겠군.” 이 원주민들은 성냥과 소금, 그
리고 낚시 바늘 등을 내가 경영하는 상점에서만 구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오
랫동안 그런 물건 없이도 살아왔으므로 상점문을 닫는다고 해서 그들의 생활에 치명
적인 지장을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좋소, 이젠 상점문을 닫을
테니 어디 파인애플을 마음대로 훔쳐가 보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상점문을 닫자 그들은“이곳에서 떠납시다.소금도 구할 수 없으니 저 사람
이 이 상점을 더 이상 열지 않겠다면 그와 함께 여기서 살아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역시 우리는 우리가 살던 정글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들은 그곳으로 떠나버렸습니다.

나는 파인애플을 먹으면서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없으니 전도할 일도 없
어졌습니다.나는 씁쓸하게 아내에게 말했습니다.“여보, 우리는 미국에서 얼마든지
파인애플을 먹었지 않소. 그런데 여기서는 파인애플을 먹으려고만 하면 이 지경이 되
는구려.”
마침 한 연락자가 왔길래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모두에게 돌아오라고 하시오.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가게문을 열테니까요.”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파인애플을 먹을 수 있을까? 무슨 좋
은 수가 있을 텐데... 옳지!” 마침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세퍼트를 들여놓자!”

나는 섬에서 가장 큰 세퍼트 한 마리를 구해다 풀어놓았습니다. 그들은 개를 무서
워했습니다.그렇게 큰 개는 처음 보기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몸집이 작은 비루먹
은 개들을 키우고 있었으나 그것은 잘 먹이지 않아 모두 병들고 말라 있었습니다. 그
들 가운데 이 건장한 독일산 세퍼트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안보는 틈을 타서 개에게 음식을 줘야 했습니다. 왜
냐하면 개가 먹는 음식을 보고 그들이 분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보다
개가 먹는 음식이 더 좋았던 것입니다. 개가 지키자 아무도 주위를 얼씬거리지 않았
습니다.그러나 상점문을 닫았을 때와 똑같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사람들이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얘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들의 언어를 가르쳐
줄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또 나는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락 개들과 피를 흘리며 싸우기 시작했고 굶주려 사납고 험악해져
잡종 광견 세퍼트로 변해갔습니다.의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만일 그 개가
당신의 자녀나 다른 사람을 문다면 나는 그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겠소.” 의사는 내가
원주민들에게 한 것과 똑같이 나를 대했습니다. 개를 없앤다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
는 일이었지만 결국 나와 아내는 상의한 끝에 개를 없애 버렸습니다.
개가 없어지자 원주민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파인애플도 여전히 없어졌습
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런 묘안도 떠오르지 않
았습니다.

그후 안식년이 되어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
다. 나는 거기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
니다. 성경은 “주라, 그러면 받으리라. 자신만을 위해 갖고자 하면 잃게 될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드려라.하나님은 너를 풍족히 채워줄 것이다”라고 말씀하
고 있습니다.이것이 기본 원리였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손해볼 것이 없어. 아무래도 나는 먹지 못할
파인애플이지 하나님께 그 파인애플 과수원을 드리자.” 사실 그것은 합당한 희생이
되지 못했습니다. 합당한 희생이란 자신에게 있어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기보다 그 파인애플 과수원을 하나님께 드려 하
나님께서 그것을 과연 어떻게 관리하시는가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
께서 그것을 어떻게 하시는지 보아야지!” (다음에 계속)

✎파인애플 이야, IBLP-KOREA

 

파인애플 이야기(1)


**** 이 『파인애플 이야기』는 네덜란드령 뉴기니아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를 통해 7년에 걸쳐
일어났던 실화입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싱그러운 재미와 함께 성경이 말하는 삶의 기본 원리를 어
떻게 생활에 적용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

나와 나의 가족은 부락민들과 함께 밀림 깊은 곳에서 생활하
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파인애플 몇 그루를 가져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곳 원주민들은 파인애플에 대해 들어왔고 먹
어보기도 했지만 어디서 구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나는 다른 선교부로부터 파인애플 나무 100그루 정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심기 위해 원주민 한 사람을 고용했
습니다. 그는 나 대신 그 묘목을 모두 심어주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에게 품삯을 주
었습니다. 나는 여러 날 동안 일한 그에게 품삯으로 소금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은 무
엇이든지 주었습니다.

파인애플 나무의 새순이 돋고 큰 과목이 되는 데는 매우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것 같
았습니다. 3년 후 파인애플 나무는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깊은 정글 속에서는 싱
싱한 과일이나 채소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신선한 과일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릅니다.
드디어 3년만에 파인애플 열매가 달린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다 익
으려면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무렵까지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무렵이 되어야 열매
들이 모두 익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던 크리스마스가 되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익은 파인애플 열매가 있는가를 보기 위해 과수원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밭에 가보니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원주민들이 익
는 족족 몰래 따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채 익기도 전에 따갔습니다. “익기 전에 훔쳐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주인의 것이 되어버린다”고 생각한 원주민들의 소행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선교사인 나는 이곳 원주민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선교사가 화를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화가 났습니다. “이봐요 당신네들! 나
는 이 파인애플 열매를 얻기 위해 3년 동안이나 기다렸소. 그런데 하나도 얻지 못했
소. 앞으로 익는 과일을 또 훔쳐간다면 나는 더 이상 당신들을 위해 병원문을 열지
않을 것이요”

아내는 나의 선교지인 이 지역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에게 약도
무료로 제공해주고 치료비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나와 아내는 그들을 돕고 환자
들을 치료하며 어린아이들을 살리는 일로 거의 지쳐 있었습니다. 하나 둘 파인애플은익어갔지만 계속해서 파인애플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맞서서 내가 그
렇게 만만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원주민들의 나쁜 버릇을 고쳐주기 위한 선의라기보다는 나의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
었습니다. 즉 그 파인애플을 내가 먹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병원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들의 병든 아이들은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관심했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독한 폐렴으로 기침을
심하게 했으며 결국 우리에게 약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돼요, 당신
들이 우리의 파인애플 열매를 훔쳤던 일을 생각해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나
는 훔치지 않았어요. 다른 녀석들이 훔친 거예요.”라고 꽁무니를 빼는 것이었습니다. 그
들의 기침은 계속되었고 간청도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
었습니다. “좋소, 내일 아침 다시 병원문을 열기로 합시다.” 결국 병원문은 다시 열렸고
그들은 다시 파인애플을 훔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몹쓸 악당들 같으니...!”
결국 나는 누가 그런 짓을 하는지 알아냈습니다. 그는 바로 파인애플 과목을 심었
던 자였습니다. 나는 그를 불러 꾸짖었습니다. “여보게 이 친구야! 내 파인애플을 훔
쳐서 무엇을 했는가? 자네는 나의 정원사가 아닌가?”

“내 손으로 그것을 심었으니 내가 그것을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는 말했습
니다. 그것이 이 정글지대의 법칙이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심으면 그것은
심은 사람의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품삯을 받고 일했으니까 소유권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 “저 파인애플 나무는 모두 내 것이요”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니 뭐라고? 그것은 내 것이야! 나는 자네에게 나무를 심은 수고비를 주었지 않
나?” 하지만 그는 왜 그것이 내 것이 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했
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나. . . 이 부락민의 법이 그렇다니 그들의 법칙을 따를 수밖
에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말했습니다. “좋아, 내가 이 밭의 절반을 자네에게 주겠네. 저기에서
여기까지는 모두 자네 것일세. 그 중에 익은 것은 모두 자네 것으로 하게. 그러나 저
편 것은 내 것이야.” 그는 그렇게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파인애플은 여전히 없
어졌습니다.
나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파인애플 나무를 모두 줘버려야 할 것 같군. 그
리고 나는 새로운 것을 심어야겠어.” 그러나 3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에 그 정원사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 파인애플 나무 전부를 자네에게 주고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네. 그 대신 자네는 밭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여기 있는 묘목들을 모두 옮겨가게나. 나는 이곳에 새 파인애플 나무를 심겠네. 자네가 저 과목들을 자네 것으로
여기는 한 내 밭에 있는 과목들을 다 옮겨가란 말일세.”

그러자 그 정원사는 말했습니다. “투-완(원주민 말로 외부인이란 뜻), 그러면 내게
품삯을 주셔야 합니다.” “아니 뭐라고?!” 내가 기가 막혀 되묻자 정원사는 “당신은
방금 우리에게 당신의 파인애플 나무를 옮겨 심어 달라고 부탁했잖아요? 그것은 노
동이니까 품삯을 주셔야지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의 말대로 그것들은 아직까지는 내 것이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좋소,
하루 일한 품삯을 줄테니 전부 옮겨가게.” 그때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밭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준비하는데도 품삯을 주셔야 하는데요?” “그만두게나!”
나는 진저리를 쳤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어쩔 도리가 없소! 사람을 시켜 파인애플 나무
를 뽑아 쓰레기 더미에 버리게 해야겠소. 그들이 원한다면 모두 가져갈 것이요.” 우
리는 파인애플 나무를 뿌리채 뽑아 풀더미처럼 던져 버렸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었고
또 그렇게 버리기엔 아까운 나무였습니다.
그 후 나는 새 과목을 샀습니다. “자, 여러분! 이제 분명히 합시다! 당신들이 이 나
무를 심는 수고비는 내가 지불하겠소. 대신 이 나무의 열매는 나의 가족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먹어서는 안돼요.”라고 말하자 원주민들은 “그렇게는 할 수 없습
니다. 우리가 심는다면 우리가 먹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밭을 가꿀 시간이 없고 다른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당신들은 여럿이지만 나는 혼자이지 않소. 나를 좀 도와주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당
신들이 나무를 심어주되 열매가 내가 먹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요.” 나는 계
속해서 말을 했습니다. “그 대신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드리겠소. 당신
들이 갖고 싶다면 이 멋진 칼을 드릴 수가 있소.”

그들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이 칼을 주는 대신 우리 파인애플을 자기
가 먹겠다고?” 드디어 그들은 승낙을 했습니다. 나는 그 후 3년 동안 새 파인애플
나무를 심은 자에게 계속 우리가 한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 열매를 누가
먹게 됩니까?” “당신이죠.” “맞습니다. 아직도 그 칼을 가지고 있소?” “예.” 그는 대
답했습니다. “잘 간수하시오.” 만약 그가 칼을 잃어버린다면 나무를 심은 대가가 없
어지므로 나는 다시 파인애플을 도둑맞게 될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 파인애플 이야기. IBLP-KOREA

 

마크가 지녔던 낡은 종이


그 아이는 세인트메리 초등학교에서 내가 처음으로 가르쳤던 3학년 학생들 중의 하나였다. 물론 내게는 그 34명의 학생이 모두 소중했다. 그러나 마크 에클런드는 특별했다. 살아있는 것이 너무 행복해 보이는 그 아이의 단정하고 밝은 모습은 가 끔씩 저지르는 짓궂은 장난들에 대해서조차 웃어넘길 수 있게 해주었다. 또 마크는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해서 나는 허락을 받지 않고 말을 해서는 안 된 다는 사실을 그에게 거듭 되새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내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은 잘 못을 지적할 때마다 매번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고 말하며 진지 하게 받아들이는 그 아이의 반응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몰랐 지만 머지 않아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말을 듣는데 익숙해졌다.


 어느 날 마크가 말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고 나는 풋내기 교사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마크를 바라보며 “한 마디만 더 하면 입에 다 테이프를 붙여줄거야!” 하고 말해버린 것이다.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다른 학 생이 “마크가 또 말을 했어요!” 하고 불쑥 말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마크를 감시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 앞에서 벌을 주겠다고 이미 말하고 말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행에 옮겨야 했다.

 나는 마치 그 일이 오늘 아침에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책상으 로 걸어간 나는 아주 의도적으로 책상 서랍을 힘껏 연 다음 테이프를 꺼냈다. 그리 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마크에게 다가가 잘라낸 두 개의 테이프를 그 아이의 입 위에 엑스(X)자로 붙여주었다. 그리고는 교실 앞으로 돌아갔다. 마크가 어떤지 돌아 보려고 내가 뒤돌아섰을 때 그 아이는 내게 윙크를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마크의 책상 앞으로 다시 걸어가 테이프를 떼어 내고 어깨 를 으쓱하자 아이들도 즐거워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 니다, 선생님!”이었다. 그 해 말부터 나는 중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게 되어 그 아이들과 헤어졌다. 세 월은 쏜 살같이 흘렀고 나는 마크를 우리 반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어렸을 때보다 더 잘 생긴 모습이었고 여전히 공손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그 아이는 수학에 대한 설명을 잘 들어야 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 때처럼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어느 금요일 그 날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우리는 수학의 새로운 개념을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이 점점 자신들에게 실망하면서 서로에 대해 날 카로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뒤틀린 상황이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번지기전에 막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종이 두 장에 같은 반 친구들의이름을 각각 띄어서 쓰라고 했다. 그런 다음 친구들 한 명 한 명을 생각하며 이름 밑에 그들의 가장 좋은 점들을 적어보게 했다. 그 작업은 남은 수업 시간 내내 계속되었고 학생들은 교실을 나가면서 그 종이를 내게 주었다. 종이를 제출하면서 찰리는 웃었고 마크는 “선생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라고 말했다. 그 주 토요일 나는 각 종이에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쓰고 그 아이에 대해 다른 아이들이 적은 내용들을 옮겨 적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아이들에게 각자의 평가 를 적은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곧 교실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정말?” 속삭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나의 이런 점이 정말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어!” “다른 아이들이 날 이렇게 좋아하는 줄 정말 몰랐어!” 그리고 그 쪽지에 대해 다시 언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업을 마친 후 아이 들이 서로 혹은 부모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게 그건 중 요하지 않았다. 그 일은 목표를 이루었기에 학생들은 다시 자신과 그리고 다른 사 람들과 행복해질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 반 아이들은 졸업을 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났다. 어느 날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부모님이 나를 공항에서 맞아 주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모님은 여행에 대한 평범한 질문들, 날씨며 건강 등에 대해 물으셨다. 그리 고 대화가 잠시 끊어졌을 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눈짓을 하며 “여보?”라고 말씀하 셨다. 아버지는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늘 하던 대로 목소리를 가다듬으 셨다. “마크 에클런드가 어젯밤에 돌아왔어!” “어머 그랬어요? 몇 년 동안 통 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궁금했었는데” 아버지는 조용히 대답하셨다. “마크는 베트남에서 전사했어. 내일 장례식을 치룰거야. 그 부모님은 네가 참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 하셨어.” 아직까지도 난 아버지가 마크에 대해 말씀하시던 그 때 우리가 지나던 도로의 정확한 지점을 가리킬 수 있다. 나는 그때까지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서 마련된 관 속 에 누운 병사를 본 적이 없었다. 마크는 너무 잘 생겼고 완전한 어른이 되어 있었 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마크, 다시 말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테이프를 다 줄거야’ 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교회는 마크의 친구들로 꽉 차있었다. 척의 여동생이 ‘전쟁가’를 불렀다. 그리고 비는 왜 하필 장례식날 오는 건지... 무덤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목사 님은 평범한 기도를 드렸고 나팔수는 음악을 연주했다. 마크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차례로 관 앞으로 걸어가 그 위에 꽃을 얹었다. 내가 마지막이었다. 장례식이 진행되 는 동안 관 옆에 서있던 한 병사가 다가와 물었다. “마크의 수학 선생님이셨습니까?”관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크가 선생님 얘기를 많이 했어요.” 라고 말했다. 장례식을 마친 후 마크의 반 친구들 대부분은 점심을 먹기 위해 척의 농가로 향 했다. 마크의 부모님은 자리를 뜨지 않고 나를 기다리며 서계셨다. 마크의 아버지 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말씀하셨다.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마크가 전 사했을 때 이게 나왔다는군요. 선생님은 아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지갑에서 꺼내 보여준 것은 여러 번 접어 테이프로 붙인 낡은 두 장의 종 이였다. 나는 한 눈에 그것이 마크의 반 친구들이 적어줬던 그의 모든 좋은 점들이 적힌 종이임을 알 수 있었다. 마크의 어머니는 “그렇게 해주셨던 걸 정말 감사드려 요. 선생님도 보셨듯이 마크가 그걸 아주 소중하게 여겼어요.” 라고 말씀하셨다. 마크의 옛 친구들이 우리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찰리는 약간 수줍은 듯 미 소 지으며 말했다. “저도 제 걸 아직 가지고 있어요. 우리 집 책상 서랍 맨 위 칸 에 넣어 두었어요.” 척의 아내가 “척은 제게 자기 걸 우리 결혼 앨범에 넣어두자고 했어요.”라고 말하자 메릴린이 “저도 제 걸 가지고 있어요. 제 일기장에 끼워 두었 어요.”라고 했다. 그러자 비키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지갑을 꺼내더니 낡고 닳은 종이를 꺼내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모두 이 쪽지를 간직하고 있을 거예요.” 결국 나는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마크를 위해 그리고 그를 다시는 보지 못 하게 된 그의 친구들을 위해.


헬렌 로슬라

 

다섯손가락 기도


앤드류 목사는 캐나다 북부 산림지대를7시간째 다니고 있었다.그래서인지 저 만치 통나무 호텔이 눈에 들어오자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와 온 몸을 내리눌렀 다. 호텔 안 휴게실에는 사냥꾼과 공무원 그리고 다른 여행객들이 여장을 풀고 쉬 고 있었다. 앤드류 목사는 지금 현재 산림지대 외딴 촌락으로 부흥회를 열고자 가 는 중이었다. 그러나 길이 너무 멀다 보니 목적지까지 하루 만에 닿을 수 없어 부 득이 중간에 하룻밤을 묵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루 저녁을 조용히 묵상 하며 보낼 수 있겠다는 기대로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 지 않았다. 그가 숙박계에다 사인을 끝내자마자 지배인이 두 팔을 벌리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앤드류 목사님! 촌락에서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이 오늘 이 호텔에 묵게 될 것 이라고요.목사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저와 차나 한잔 나 누시죠!”


그렇게 따뜻한 환대를 무슨 수로 뿌리치겠는가? 앤드류 목사는 호텔 주인과 자리 를 같이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마침 그때 앤드류 목사가 도착했다는 소식 을 듣고 달려온 한 그리스도인 부부가 저녁을 대접했으면 좋겠다며 호들갑을 떨었 다. 그러자 탁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주인도 넌지시 한 가지 청을 하는 것이었다.


“갈 길이 그리 급하신 것이 아니니 내일 아침 식사 후에 이 호텔의 손님들을 불 러서 예배를 한번 드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요? 그런 귀한 일을 제가 왜 마다하겠습니까?” 앤드류 목사는 선뜻 청을 받아들였다.


“아예 호텔 종업원들도 함께 자리를 해주시지요.아참, 아까 제 방으로 짐을 나 르다 보니까 아주 처량한 얼굴로 유리창을 닦는 부인이 있던데. . . 그 부인의 눈이 얼마나 슬퍼보이던지 제 마음이 다 아팠습니다.!”


“아, 그 아주머니요!” 주인이 생각에 잠기는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녀는 인디언 출신이죠.살아오면서 숱한 불행을 당했어요. 저 역시 그 처량함 을 떨쳐주고 싶었습니다. 아, 글쎄, 때때로 일할 의욕조차 잃을 정도로 그 상태가 심각하다니까요! . . . 도무지 청소에 신경을 쓰지 않고 멍하니 있을 때가 많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가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는데.. . 괜찮을까요?” 호텔 주인은 쾌히 응낙 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아침식사 후에 간단한 예배가 있다는 소식에 투숙객들은 사뭇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외롭고 오랜 여행 때문에 교회 구경을 한지 꽤나 오래 되었기 때문이었다. 예배가 끝난 뒤 사람들은 하나하나 목사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앤드류 목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누군가 여전히 문간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슬픈 얼굴의 그 인디언 여인이었다.그녀는 무슨 할 말이 있는 듯싶 었다.


“목사님! 저. . . 한 번도 이런 부탁을 드려본 적이 없는데. . . 저에게 어떻게 기 도해야 하는지 한 마디만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전 배우지 못했지만 어쩐지 기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아, 그러세요?” 앤드류 목사가 반색을 하였다. “그럼 아주 간단한 기도를 하나 가르쳐 드릴테니 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일주 일간 매일 기도드려야 합니다!” 여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주 짧게 다섯 손가락을 꼽으며 기도드릴 수 있도록 다섯 마디만 가르쳐 드리 죠. ‘오/ 주님/ 저에게/ 저를/ 보여주세요!’” 자 한번 따라해 보세요. “오/ 주님!/ 저에게/ 저를/ 보여주세요!” 인디언 여인은 어렵지 않게 따라하였다. “네! 바로 그렇게 하면 됩니다.” 이윽고 앤드류 목사는 차를 몰고 깊은 숲 속으 로 멀어져 갔다. 그는 광활한 산림 속의 촌락에서 일주일간 부흥회를 인도하고 다 시 돌아오는 길에 호텔에 들르게 되었다. 그는 주인과 인사를 나눈 뒤 유리창 닦는 아주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주인은 한숨을 내쉬며 그 인디언 여자가 늘 울기만 하는 것이 상태가 전보다 더 심각해졌다고 불평하면서 더 이상 일을 시킬 수 없으니 해고를 시키든지 해야겠 다고 말하는 것이었다.앤드류 목사는 그 인디언 여자를 만났다.


“약속대로 돌아왔습니다.아직 그 기도를 기억하고 있겠죠?”


“오/ 주님/ 저에게/ 저를/ 보여주세요!. . . 이 기도를 드린 이후 날이면 날마다 제 가 저질렀던 잘못들이 떠올라 가슴이 너무 아파요! 늘 눈물만 나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지요?” 앤드류 목사는 그 여인을 진정시키며 새로운 처방전을 내려주었다. “오늘부터는 새로운 기도를 가르쳐 드리지요!이번에도 다섯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하는 겁니다. 오/ 주님/ 주님을/ 제게/ 보여주세요!”


“오/ 주님/ 주님을/ 제게/ 보여주세요!” 인디언 여자는 정확하게 따라하였다.


“이번에는 얼마 동안 할까요?” “하하, 이 기도는 죽을 때까지 하는 겁니다.”


그 후 몇 년이 흘렀을까? 앤드류 목사는 다시 그 촌락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 교회엔 젊은 목사가 부임을 했는데 청소년 아이들이 아주 밝다고 앤드 류 목사가 자신의 느낌을 털어놓았다.그러자 그 목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청소년 아이들을 도와주는 귀한 부부가 있답니다.그들은 최근에 결혼을 했는데 특히 그 부인되는 사람은 아이들에게 엄마와도 같답니다. 특이한 것은 그 자매가 인디언 출신에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한번 그 부인을 만나고 싶군요.”앤드류 목사의 눈이 반짝였다. 얼마 후 매력적으로 옷을 차려입은 검은 머리의 한 인디언 여인이 환한 웃음을 머금고 나타났다.앤드류 목사는 그 여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그러나 그녀는 앤 드류 목사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목사님! 저 기억 안 나세요? 저에게 다섯 손가락 기도를 가르쳐 주셨잖아요?” “아하!” 앤드류 목사는 입이 벌어지며 그때서야 대답 을 하였다.


“목사님이 떠나가신 뒤 가르쳐주신 그 기도를 날마다 드렸습니다.그랬더니 언제 부터인가 주님께서 정말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시작했어요. 자연히 전 그분을 점점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죠.”


그녀의 검은 두 눈에는 어느 새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전처럼 슬픔과 아픔으로 인한 눈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흘리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었다.


“목사님! 전 주님을 뵐 때까지 가르쳐주신 기도를 계속 드릴 거예요!”

생명의 씨앗

감동의 샘터 : 2008/04/04 18:31
 

생명의 씨앗


군대에서7년을 보내고 스물다섯 살에 제대해서 사회에 나왔지만,고등학교 중퇴의 학 력으로는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할 수 없이 탄광촌에 들어와 직장을 얻었는데,먹고 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일찌감치 인생에 회의를 느낀 나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3교대 작업대에서 병반 즉 밤12시에 굴에 들어가 아침 8시까지 일하는 순서가 되어 막장에 들어갔다.그곳에서 나는 나이 많은 고씨 아저씨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새벽4시쯤 되었을까… 중간 갱도가 무너져 내렸다,나는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무 서워서 정신이 없는데, 고씨 아저씨는 이러한 사태를 수없이 직면했는지 그리 당황한 기색도 없이 침착하셨다. 나는 냅다 소리를 지르며 삽을 들고 무너진 통로를 정신없 이 파는데,아저씨가 내 손을 붙잡았다.나는 인정사정없이 그 손을 뿌리쳤다.


“아저씨는 세상을 살 만큼 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미련이 없겠지만,나는 아직 하 고 싶은 일이 많아요.죽으려면 아저씨 혼자 죽어요!”


그러자 아저씨가 더 힘써 나를 말렸다.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기진맥진해서 앉아 있는데,아저씨가 물었다.“예수를 믿나?” 나는 어이가 없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상황에 서 무슨 쓸 데 없는 예수타령이란 말인가. 하지만 분위기는 이미 끝간데 없이 살벌해진 데다가 대항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기에“예수는 들어서 알지만 나는 안 믿어요!”하 면서 잠깐 교회에 다녔던 어린 시절,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고,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다고 했다.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내 경험상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살아나지 못할지도 몰라.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넌 죽어서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해?”


나는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난 천국에 갈 수 없어요. 나쁜 놈이니까요”. 그 러자 아저씨가 내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나를 따라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단다. 만에 하나 천국과 지 옥이 있다면, 이제껏 고생하면서 가난하게 지냈던 삶을 청산하고 평화와 행복이 넘치 는 천국에 갈 수 있다면,너는 어떻게 하겠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나는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아저씨의 말을 듣기로 했다.무릎을 꿇고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했다.처음에는 주기도 문을,그 다음엔 사도신경을 따라 하고,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삼겠으니 이 제까지 지었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드리는데,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다. 급기야 대성통곡을 했고,그러다가 의식을 잃었다.깨어났을 때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하지만 고씨 아저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게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심어주 고 천국에 가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프리카 땅에서 미사이들에게 그 씨앗을 전하고 있다. ✎"들어쓰심" 안찬호

 추수감사절의 깜짝 방문



토드 짐머만은 추수감사절에 일하게 된 것에 대해서 기분이 별로 상쾌하지 않았다. 그는 메릴랜드주(洲)의 EBT 봉사 부서( Food Stamp 담당부서)의 다섯 간부직원 중 한 사람으로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 날 아침 따라 그렇게 길고 지루할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식구들이 준비하고 있을 추수감사절 음식에 대한 생각과 집안에 가득 피어나게 될 웃음소리와 이야기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전화 한통이 걸려왔는데 꽤나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할머니로부터 온 전화였다.

“여기 상점에 와서 물건을 사려는데 물건을 살 수가 없어요!” 할머니가 말했다. “여기 돈 받는 직원이 그러는데 내 카드가 말을 안 듣는답니다.”

토드는 할머니가 뭘 묻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무엇인지도 바로 깨달았다. 그 할머니 카드의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설명을 드렸지만 그 할머니는 새로운 카드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 헌데 ... 헌데 말이요. 지난 10월에 10불을 쓰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추수감사절 때 쓰려고 이번 달 잔고까지 함께 모아 두었다우.”

“정말 안됐습니다,” 토드는 측은한 마음으로 말을 하였다. “집에 먹을 것이 없나요?”

“없어요... 전혀 없어요. 오늘 쓰려고 모아두었던 것인데.  우리 식구들이 올 예정이어서 오늘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려던 참이었다우.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게 되어서 식구들이 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할머니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요.”

할머니가 전화를 끊은 뒤 토드는 그 할머니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가 단지 Mrs. B라고만 알고 있는 그 할머니가 행정상의 잘못으로 인해 20불이 없어서 추수감사절에 혼자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추수감사절 저녁까지 굶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드는 마음에 결심한 듯 그 할머니의 카드가 거부되었다는 그 식료품 가게로 전화를 걸어 자신의 크레딧 카드를 사용하겠노라고 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전화 주문은 안받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기네 가게는 배달 서비스를 안 한다는 것이었다. 그 가게 역시 간부급 직원이 일하고 있을 테고 손님들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음이 틀림없었다.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토드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것을 잊은 채 동료 직원인 킴과 나를 데리고 Mrs. B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자고 하였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쥴리 사이몬과 마크 리스만을 우리 편에 끌어들였다. 우리는 Mrs. B의 추수감사절 저녁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온통 전화통에 매달리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Mrs. B가 사는 지역 내의 식료품점은 모두 문을 닫았다. 배달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전화번호부를 뒤지는데 지쳐 있을 때 직원 중 한 사람이 체사피크 비프(Chesapeake Beef)라는 식료품 가게를 생각해냈다. 그 가게는 우리 EBT와는 업무 관계로 매우 가까운 그와 같은 가게였다.

체사피크 비프 역시 추수감사절에 문을 닫는 가게였다.

“그 주인인 스타스(Stas)씨와 마리(Mary)씨는 아주 좋은 사람들이예요.” 내가 말했다. “그들은 아마 인근의 문을 연 가게를 알고 있을 겁니다. 비록 명절이긴 하지만 그 사람들은 우리가 집에 전화할지라도 틀림없이 불쾌해하지 않을 거예요.”

“미안하네요,” 마리씨가 말했다. “문을 연 가게가 있는 것 같지 않네요. 하지만 제게 더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들어보니 Mrs. B씨가 살고 있는 곳이 이곳에서 15마일 정도밖에 안 떨어진 것 같네요. 우린 저녁을 다 먹었는데 아직 음식이 많이 남았거든요. 우리가 그 할머니에게 추수감사절 음식을 전해 드리도록 하죠. 스타스와 제가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로 하여금 추수감사절 카드를 만들도록 할께요. 아 헌데 누군가 그 할머니를 찾아갈 거라고 알려주시면 좋겠는데요. 그 할머니는 우리를 모르잖아요. 우린 그 할머니를 놀래키고 싶지 않거든요.”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EBT는 Mrs. B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국의 교환원이 기꺼이 Mrs. B에게 전화를 해서 토드의 비상라인으로 전화하도록 하겠노라고 하였다.

Mrs. B 할머니가 의아해 하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토드는 단지 친구들이 깜짝 방문을 가질 것이라고만 말을 하였다.

여러 시간이 지난 후에 스타스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식구들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좋은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는 말했다. “Mrs. B는 음식을 받고는 너무나 감사해 했어요. 그러나 정말 그 할머니에게 감동을 준 것은 아이들이 만들어준 카드랍니다. 그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 카드를 읽었어요.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한번 안아봐도 되겠냐고 물었지요. 그리고는 아이들을 꼭 안아주었답니다.”

Mrs. B 할머니도 전화를 걸어왔다. 그 할머니는 추수감사절 때 자신을 위해 깜짝쇼를 만들어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근무시간이 끝났을 때 마지못해 추수감사절에 일을 했던 우리 다섯 사람은 미소를 띠고 서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Mrs. B 할머니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크리스챤이었지요. 그런데 이제야 확실히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었어요.”

우리가 뿔뿔이 흩어져 갈 때 토드가 말했다. “멋진 추수감사절을 보내세요!” 그리고 실제로 그 추수감사절이 내가 보낸 추수감사절 가운데 가장 멋진 추수감사절이었다.

 보스턴의 피아노


 

<떡의 전쟁>을 쓴 정진호 교수. 연변과기대(科技大) 교수이자 평양과기대 부총장이다. 그분의 책에 나오는 얘기 한 토막을 소개하고 싶다.

잘 나가는 오르가니스트 아내를 데리고 거칠고 삭막한 땅 연변으로 갔다. 미국 유학시절, 보스턴에서 원 타임에 100불씩 받고 레슨을 했던 교수 아내. 그녀가 동토의 땅 연변에서 콩나물표도 모르는 코흘리개들을 앉혀놓고 도레미를 가르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랐다고 했다. 연변의 땅이 거칠면 거칠수록 아련한 보스턴 시절을 생각하며 눈물짓곤 하던 아내. 그러던 어느 해 여름. 아주 오랜만에 미국 보스턴, 꿈에도 그리던 보스턴을 아내와 함께 다시 갈 일이 있었단다. 아래에 그 책에 나오는 내용을 옮겨보았다.


고색창연한 아치형 교회 건물과 현대식 빌딩이 조화를 이룬 보스턴의 아름다운 시가지는 여전히 청명한 하늘 햇살 아래서 신비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보스턴이었기에 아내가 오랜만에 마음껏 만끽하기를 내심 기대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내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보스턴 이야기만 나와도 가슴 설레던 그녀가 정작 보스턴 땅을 밟고서도 심드렁하여 별로 웃지도 않았다.

그래도 옛날에 그녀가 다니던 학교는 한번 데리고 가야할 것 같아서 후배의 도움을 받아 찰스 강변을 따라 보스턴 대학의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건물들을 찾아갔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피곤한 듯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그녀가 오르간 독주회를 했던 마쉬 채플 앞을 지나가다가 옛 생각이 나서 아내의 손목을 잡아끌고 차에서 내렸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엄숙한 채플 안은 10여 년 전 모습 그대로 여전히 고풍스런 분위기 속에 남아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이 전면을 감싸고 우리를 맞이했다. 중앙 복도를 가로질러 앞자리에 앉아 잠시 기도를 했다. 옛날 아내가 이곳에서 연주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조금 후 아내도 그때가 생각나는지 조심스레 단 위에 올라가 오르간을 기웃거렸다. ‘아마 다시 한 번 쳐보고 싶겠지’라는 생각으로 있는데, 집사인 듯한 분이 다가와 아내에게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다. 아내는 자신이 이 학교 학생이었다고 이야기하며 오르간을 잠시 만져보아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그는 너그럽게도 흔쾌히 허락했다.

아내는 미끄러지듯 오르간 의자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중국에 처음 이삿짐을 풀던 날 가지고 간 연습용 전자 오르간으로 정신없이 『바흐』를 쳐대던 아내의 뜨거운 열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인생과도 같았던 바흐. ‘또다시 바흐를 치려나?

그러나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조용한 찬송가 반주였다. 잔잔하면서도 힘 있는 찬송가를 메들리로 치고 있는 그녀의 성숙한 모습에서 10년의 세월 속에 감추어진 눈물이 느껴졌다. 오르간 선율 속에 담긴 그녀의 아픔이 파도처럼 내 가슴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또 울면 어떡하나?’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뚝 그치며 그녀가 일어섰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에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울음을 꺾어버린 것이다. 안심과 안도. 눈시울이 붉어진 아내의 어깨를 감싸고 나오는데 그녀가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걸어가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내가 중국 땅에서 그 동안 가르친 제자들이 인근 도시들에서 교회 반주자로 활동하고 있고, 그 중에는 오르간을 배우고 유학을 다녀와서 중국 최초의 전문적인 오르간 반주자를 꿈꾸는 제자도 있다. 언젠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아내의 눈물이 씨앗이 되어 자란 그 제자들에 의해 중국의 교회가 부흥하고 곳곳에서 찬송이 차고 넘치는 그날이 오면 후세 사람들이 아내가 중국 교회음악의 어머니였다고 기억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며 그녀의 거칠어진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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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데 얼마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바깥 날씨가 무척 덥지만 삼복더위의 막바지에 내 마음, 내 가슴 속엔 더욱 더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바흐』까지지만, 우리에겐 그 다음 단계가 있다는 것을, 바흐의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찬송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김양규, 낮해밤달에서

 모든 것을 다 내어준 사랑 "MOST"



얼마 전 '독서편지'를 통해 책 속의 감동을 함께 나누는 지인에게 DVD를 한 개 선물 받았습니다. 그 DVD 타이틀의 이름은 "MOST", 얼핏 보면 친숙한 영어 단어 인 듯해 보이나 알아보니 사실은 체코어로 '다리(Bridge)'라는 뜻이었습니다.

DVD 플레이어로 보기 전에 인터넷으로 찾아본 체코 영화 'MOST'에 대한 정보는 한글 정보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습니다. 해외 영화 DB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오스카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이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에게 잘 안 알려졌을 뿐 수준급의 완성도가 있는 영화임을 알 수 있었을 뿐이죠. 메시지는 크고 무겁지만, 영화 자체는 '독립영화' 같은 분위기의 '단편영화'라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잠시 소개하자면,

도개교(다리 일부분이 열려 큰 배가 지날 수 있게 한 다리)의 근무자인 아버지(Vladimir Javorsky)와 아들(Landa Ondrej)은 비록 여유롭지는 못하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위에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여러 인생들의 모습을 아들의 눈으로 보는 듯한 카메라 워크는 마치 멈춰버린 시간을 한 프레임씩 슬로우 모션으로 돌려가며 보는 듯합니다.

대개가 그렇듯 착한 아들은 아빠의 일터에 구경 가는 것이 소원이고, (저도 어릴 적에 아빠의 일터가 궁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빠는 어느 날 방과시간에 맞춰 학교 정문으로 마중을 나가 학교에서 나오는 아들과 함께 일터로 향합니다. 행복한 모습으로 숲을 지나 강가의 다리로 가는 두 부자의 발걸음은 마냥 가볍기만 하고....

아버지의 일터인 도개교에 도착, 아들은 근처 강가에서 낚시를 하라고 하고 아버지는 강가에서 낚시하는 아들이 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작업실에서 근무에 들어갑니다. 다리를 통과하려는 화물선의 요청으로 전기 스위치를 눌러 육중한 다리는 모터의 힘으로 천천히 들어 올려집니다. 덩치 큰 화물선은 들려 올려진 다리의 교각 사이로 흐르는 강물처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고 모든 일은 순조로이 흘러가는 듯합니다. 그 순간 아들은 다리 건너에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발견합니다. 기차가 예정보다 너무 빠르게 다리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작업실 쪽에 계실 아빠를 불러보지만 기계를 점검하러 망루의 자리를 비운 아빠는 대답이 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수백명을 태운 기차가 다리 아래로 그대로 추락할 상황입니다. 안타까워하는 아들의 얼굴이 지나가고 화면에는 기계실에서 한가로이 기계를 점검하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 순간 아빠 역시 뒤늦게나마 달려오는 기차의 검은 연기를 발견합니다. 순간적으로 망루에 있는 작업실에 달려와 스위치를 조작하려하는 순간, 창밖을 내다본 아버지는 강가에 있어야 할 아들의 모습이 안보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기차가 달려오고 있는 다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다리 상판 아래에 다리를 들어 올리는 기계장치 쪽에 해치가 열려있고 그 곳에 상체를 넣고 있는 아들의 다리가 잠시 보이다가 기계 안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망루에 안계신 것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참사를 막기 위해 올려진 다리를 내려보려고 기계장치 안을 들여다보다 그만 기계실 안으로 떨어져 버린 아들... 이곳 상황에 대하여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끊어진 다리 위로 달려오는 기차... 그 차에 타고 수초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아무도 모른 채 자기만의 일상에 젖어 있는 승객들...

아들을 살리자니 기차를 탄 수백명 승객의 목숨에 눈을 감아야 합니다. 기차의 승객을 구하자니 다리를 내리기 위해 기계를 작동해 그 안에 떨어진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순간 말 한마디 못하는 아버지의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하는 비통한 대사는 보는 이의 가슴을 애이게 합니다.


이 영화는 "당신은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라고 내게 묻는 듯합니다. 짧고 슬픈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분량과 관계없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영화입니다. 특히 14분짜리 영화 말미에 소개되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로 시작되는 로마서 5장 8절은 이 한 구절을 '제대로'(!) 묵상하기 위해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깁니다.

그러나 숭고한 희생은 강한 능력을 나타내게 되는 법입니다. 아들을 잃고 초점을 잃고 걸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차창 밖으로 보게 된 기차 안의 한 여성....  그녀는 피곤한 인생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막 마약을 몸에 주사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아버지의 초점을 잃은 모습에서 무언의 메시지를 받게 되는 듯합니다. 주사 전 약을 정제하기 위해 일회용 라이터로 가열을 하던 마약은 전용 수저 위에서 다 타버리고 주사기와 도구들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다.

런타임이 30분으로 편집되어 함께 수록된 중편(?) 편집본에서는 비극의 순간 이후가 좀 더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방황과 치유가 인상적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길에서 만난 어떤 엄마에게 안겨가는 꼬마의 미소를 보며 비통의 시간 속에서 해방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치유와 축복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글보다는 그림이 사람의 감성을 강하게 움직이고, 정지된 그림보다 소리와 움직임으로 현장감을 대신하는 '영화'의 호소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버리셨다는 이야기가 '하나님'이란 단어 한번 영상 속에 나타나지 않은 채 웅변적으로 이야기되고 있음은 더욱 놀랍습니다.

✎ “콧수염 이사의 독서편지” 중에서

지금이야말로 회개할 때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선구자 길선주 목사 -



 1907년 1월 6일 저녁. 평양 장대현 교회에는 평안도 전역에서 몰려온 신자 2000여명이 운집했다. 사경회를 인도하는 길선주 목사(당시 조사)가 숙연히 자신을 쳐다보는 신자들 앞에 섰다. 그리고 이내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저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저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1년 전 임종을 앞둔 제 친구가 저를 자신의 집에 불러 부탁했습니다. ‘길 장로,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소. 내 아내는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자네가 내 재산을 정리해주면 좋겠소.’ 전 그 부인 재산을 관리하던 중 욕심에 겨워 부인의 돈 백원을 사취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라고  회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길 목사의 회개기도가 계속되자 무겁고 슬픈 마음이 회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때 한쪽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울기 시작하였고 이어 모든 청중들이 울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곧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회중들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 속에 교회당을 떠나지 않았다. 죄인을 잡으러 왔던 순사가 회개하고,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왔던 승려가 개종하고, 카톨릭 신부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감격하여 염주를 길 목사에게 기념으로 주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이길함 선교사는 그때의 광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모두 뭔가 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연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흐느껴 울기도하고 거꾸러지기도 하였다. 새벽 2시까지 회개의 울음과 기도가 계속되었다.” 이날의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부터 일기 시작한 부흥운동은 전국 각지로 퍼졌고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일대 사건이었다. 한 사람의 통절한 회개가 씨앗이 되어 한국 땅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초석을 놓은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폭제 역할 중심에는 길선주 목사가 있었다.


 영계 길선주(1869-1935)는 1869년 3월 15일 평안도 안주 성내 후장동에서 길재의 15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19세 때 진리와 영생을 찾겠다며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그리고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관성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런 그의 열심은 관성교의 주문을 일만독이나 할 정도였다.

 회심 이전의 길선주의 모습은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을 종교에서 찾으려는 종교 지향적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진리와 영생에 대한 해답은 얻을 수가

감동의 샘터



없었다. 그러던 차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평양 지역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한 사람은 마포삼열(Samuel Moffett,1864-1939)선교사였다. 길선주는 자신과 각별한 사이인 김종섭을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보내어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알아보도록 했는데 오히려 김종섭이 회심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길선주는 자신이 믿던 선도에 대한 회의와 기독교에 대한 불 확신으로 고민에 빠지게 되지만 김종섭이 건네 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마침내 1896년 가을, 길선주는 “예수가 참 구주이신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큰소리로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때 길선주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나를 살려 주옵소서.”라며 방성대곡하며 기도했다. 그 순간 길 선주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평화와 기쁨을 경험하고 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게 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길선주의 삶은 놀랍게 변화되었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을 소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는 장대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이듬해 평양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교회는 급진적으로 부흥하여 널다리골에서 장대현으로 옮겨 1900년에 2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한국식 교회건물을 마련하게 되었다.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대 부흥 운동의 불길이 점화되었다. 이미 부흥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길선주는 사경회 준비를 위한 새벽기도회 인도에 나섰다. 1905년 친구 박치록 장로와 함께 세계교회사상 최초로 시작했던 새벽 기도회의 뜨거운 열정은 평양 대부흥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첫날부터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한 평양 사경회는 집회가 계속되면서 기도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이때의 부흥 집회는 ‘사경회’라는 말처럼 성경을 읽고 그 뜻을 풀이하는 형태였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군중심리에 의한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깊은 통회와 회심에 의한 것이었다. 사경회 기간에 있었던 회개의 역사는 개인의 내면적 죄를 고백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 도덕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용서를 구하는 실천적인 회개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길선주는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9월에 장대현교회의 목사로 임명받아 실질적인 목회를 시작했고 민족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3.1운동 당시에 민족 대표 33인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고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중에서 요한 계시록을 애독했는데 일 만 독을 했다고 한다. 이는 출옥이후 그의 사역의 전환점을 맞는 계기가 되었다. 감옥생활동안 그는 남은 일생을 전도자로서 민족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사명에 전념하기로 다짐한다.

 그의 말년은 ‘말세학’과 종말론‘의 전파에 힘썼다. 그러다 그는 평남 고창 교회에 열린 평서노회 사경회의 마지막 날에 쓰러져 다음 날인 1935년 11월 26일 오전 9시 10분에 소천 하였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평양 대부흥 운동의 한 알의 밀알이 된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사에서 초기 한국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부인전도운동’인 오늘날의 ‘연선교회 운동’을 장려하고 예배시간에 남녀를 분리하는 막을 제거하는 등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박힌 당시 사회 속에서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길선주는 건전한 신앙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교인들에게 성경공부를 강력히 권하였고 기도와 교회 출석, 가정예배, 개인전도, 헌금 등을 장려하였는데 이것은 교회 발전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교회의 주요의식으로는 주일 대예배, 주일 저녁 찬양예배, 수요 삼인 기도회와 새벽기도회를 처음 실시했으며, 심방과 전도를 위한 일선 직원으로 권찰을 선임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기독교 복음 전파의 선구자요, 민족 운동가였다.


 이제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었다. 국내외 어려운 주변상황과 정체되어 있는 위기의 한국과 한국교회는 100년 전에 일어났던 강력한 대 부흥의 성령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일어나길 외치고 있다. 이러한 영적인 갈급함이 있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길선주 목사와 같이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 초기의 부흥운동은 곧 전 평양 대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길선주 목사가 다가올 부흥의 세기에 한국과 한국교회에 외친다.


 “한국교회에 일대 시련의 때가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앞으로 닥칠 무서운 환란을 극복할 수 없고, 비탄 가운데 빠져 있는 민족의 선두에 설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크게 회개할 때입니다!” 

(길선주 목사, 1932년 평양 서문 밖 교회 부흥회 설교 中 )

브롱스에서 시작하다

-콜린 파월 (전 국무 장관)-



 얼마 전 나는 즐겁지만 어려운 부탁을 받았다. 모교인 모리스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연설을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내가 소년 시절을 보낸 사우스 브롱스 지역을 향해 가고 있었다. 친구 진 노먼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렸던 거리를 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이 근방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위험에 대해 생각했다. 마약, 유혹의 거리, 범죄 같은 것 말이다. 애들에게 무슨 말을 해서 용기를 북돋워 줄 수 있을까?

 내가 자주 가던 햄버거 가게를 지나칠 때는 성장기 동안 이곳에서 경험했던 기쁨과 슬픔, 선택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 아이들조차도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마약이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어린이들도 마약을 쉽게 접하고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선 결정이나 선택의 여지랄 것도 없이 간단했다. ‘마약은 절대로 안 된다’였으니. 마약 복용은 어리석은 일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가장 나쁜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자메이카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의류제조 공장에서 아버지는 선적 담당자로, 어머니는 재봉사로 일했다. 부모님은 나와 누이에게 규율과 지시사항을 따르게 했고, 그런 만큼 그분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또 아이들이란 대개 부모의 기대에 보답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서 항상 우리를 지켜보는 고모, 삼촌, 사촌들은 물론, 모든 친지 가족들이 우리 부모님의 가르침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언제나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군가’가 단지 우리 친척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열일곱 살 때, 나는 여름 방학 일자리로 시간당 90센트를 받고 음료수 제조공장에서 일했다. 나는 신이 났다. 새로 고용된 십대 소년들과 어울려서 일을 시작한 첫날, 나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음료수를 담는 기계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거기는 백인들만 일했다. 나는 청소부로 고용되었고 감독관은 나에게 긴 자루가 달린 걸레 하나를 주었다. 나는 일을 시작했다. 끈끈한 콜라로 얼룩져 더러워진 넓디넓은 마룻바닥을 걸레질했다. 오늘날 좌절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얘기할 때 나는 이런 내 경험을 거울삼아 이야기 한다.

 도랑을 파는 세 사람의 일꾼이 있었다. 이들은 매일 일하러 나갔는데 한 사람은 삽에 몸을 기댄 채, 언젠가는 자기가 그 회사의 사장이 될 거라고 말하곤 했다. 두 번째 사람도 역시 삽에 몸을 기댄 채, 회사가 충분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고 불평만 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은 열심히 도랑만 파고 있었다.




몇 해가 지난 후 첫 번째 사람은 여전히 삽에 기댄 채, 언젠가는 사장이 될 거라고 말만 하고 있었다. 두 번째 사람도 여전히 시간당 임금이 적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은 이제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또 여러 해가 지났다. 첫 번째 사람은 이제 머리가 허옇게 샜는데도 여전히 삽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언젠가 내가 이 회사의 사장이 될 거야.” 두 번째 사람은 원인이 불분명한 부상을 입고 장애인이 되어 퇴직했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은 어떻게 됐느냐고? 바로 그 사람이 사장이 된 것이다.

이 예화는 내게 하나의 교훈을 주었다. 즉 내가 무엇을 하든지 누군가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교훈 말이다. 십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깨달았던 덕분에 나는 최고의 청소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열심히 걸레질을 했다. 어느 날 누군가 콜라 50상자를 시멘트 바닥에 떨어뜨려 갈색의 끈끈한 거품이 바닥 전체에 퍼졌다.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걸레질을 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여름방학이 끝날 때 감독관이 내게 말했다. “자네, 마루를 참 잘 닦는군.”

“제가 배울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셨던 거죠.” 나는 대답했다. 다음 해 여름 그는 내게 음료수를 채우는 기계에 병을 놓는 일을 맡겼다. 그 다음 여름에 나는 부감독이 되었다.

훨씬 중요한 누군가가 역시 나를 지켜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우리 파월가 사람들은 브롱스에 있는 성 마가렛 성공회 교회에 다녔는데, 아버지는 그 교회 당회위원으로 계셨다. 입교예배 때 주교님이 내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안수기도 했던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하리라. 그분은 기도했다. “오 하나님이시여, 주님의 이 아이를 주님의 은총으로 보호하시고, 그 은총이 영원히 계속되게 하소서. 또 하나님의 성령 가운데 그 은총이 날마다 더해져 마침내 주님의 영원한 천국에 이르도록 하여 주소서. 아멘.”

이 기도는 내 마음 속 깊이 새겨졌다. 그 후로 매년 이런 기도를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느낌은 더욱 굳어졌다. 더불어 하나님의 기대에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고, 또한 그러려면 될 수 있는 대로 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는 게 부모님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나는 네가 나보다 더 많이 배우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이렇게 강조했다.

나는 39번 공립학교 4학년생 치고도 진도가 느린 반에 속했고, 고등학교에서도 성적이 ‘C급’에 속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간신히 뉴욕 시립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학교의 장점은 수업료가 1년에 10달러라는 것이었다. 성적이 최고는 아니었지만, 학도 군사훈련단에서는 잘했다. 사실 ROTC가 아니었다면 졸업할 수 있는 성적을 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군대생활은 내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았고, 졸업하자 소위로 임관했다. 우리 친척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촌 조니는 법대에 가고, 세실리아는 의대에 갔는데, 콜린은 하필이면 군대로 갈게 뭐야. 뭐가 잘못된 거 아냐?” 하지만 부모님은 나에게 잘해 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1958년에 졸업한 후, 4년 만에 나는 월남으로 배속됐다. 거기서 나는 전쟁이란 필요악이며 너무나 무서운 일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1963년 나는 조지아 주 포트 베닝으로 전속됐고, 다음에는 택사스 주 포트 레븐위스에 있는 군 지휘 참모대학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면서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더 높은 학위를 취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나의 빛나는 목표가 되었고, 비록 대학성적은 중위권 정도였지만 대학원에 지원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더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인식하게 되었다. 사실 그때쯤 나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특별히 더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지휘참모 대학에서 나는 1,244명의 졸업생 중 2등을 했다. 1968년 졸업한 후 나는 다시 월남으로 파견됐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 타임스’지에서 지휘참모대학을 졸업한 최상위 다섯 명의 학생들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또다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월남에 있는 내 사단장이 이 기사를 보고 나를 일선에서 빼내어 자신의 작전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1969년, 드디어 대학원에서 공부할 기회가 왔다. 나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입학해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여러 지휘관의 경력을 쌓고 국방부와 백악관에서도 근무했다. 1989년, 부시 대통령은 나를 합동참모부 의장으로 임명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나는 줄 곧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탄 승용차가 계속 달리고 있었다. 운전기사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장군님, 도착했습니다.” 내가 다니던 낡은 학교를 바라보았다.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낯익은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나는 학교종이 치는 소리를 듣고 달려 올라가던 때가 떠올랐다. 내가 학생들에게 연설할 장소는 체육관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저는 이 장소를 기억합니다. 육상팀과 함께 밴 코트랜드 파크를 가로질러 달리던 일도 기억합니다. 나는 그 길로 켈리 가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매일 다녔지요. 또한 이런 기억도 납니다. 때때로 ‘너는 안 돼’라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죠.” 나는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랄 때만해도 기회가 한정되었지만 지금 여러분은 원하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꿈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합니다. 그것을 위해 여러분은 전심전력으로 공부하고 노력하고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여러분을 막을 수 없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학생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꿈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누군가가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게 되기를 원했다.

✎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에서

육이 죽어 영이 산 사람

-후쿠시게 다카시의 간증-


세계 정상의 전자과학 기술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적같은 방법으로 만났다. 일본 국적의 후쿠시게 다카시(54)씨, 세계 최초로 초박형 LCD를 개발한 주역으로 일본 히다치사의 기술 분야에서 30년을 근무했다. 5개 국어를 구사하고 여러 건의 세계 특허를 소유할 만큼 초일류 기술자인 그는 NHK, 일본정부와 함께 히다치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하이비전을 개발한 주인공이다. 여기에 LCD-TV 검사장치를 만들었고 중국 싱가폴 미국 등 히다치 공장이 들어서는 나라마다 책임자로 근무하곤 했다.

일본 가고시마현 출생인 다카시씨에게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란 이름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존재였다. 기독교인이 1% 미만인 일본에서 50년이 넘게 살도록 다카시씨가 알고 있는 기독교 관련 지식은 검은 표지의 두꺼운 책은 성경이라는 정도였다. 빈틈없는 성격과 치열한 노력으로 세계 정상의 기술을 가진 그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놀랍게 임한 것은 지난해 2월 21일이었다. 모처럼 휴가를 내어 첫 개장한 나가노의 해븐 스키장 정상에서 갑자기 뇌경색(중풍)으로 쓰러진 것, 나가노 세구치신경외과병원에 옮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2시간 30분여, 그가 회생할 것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뇌의 50%가 이미 기능을 상실했고 이후 21일간을 혼수상태로 죽음 직전에 있었다. 여기서부터 다카시씨의 간증은 시작된다.

“의사가 아내에게 죽음이 임박했으니 가족에게 연락하라는 말이 들렸어요. 무엇보다 5살 난 딸과 작별인사를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순간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면… 하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제가 사막 위에 쓰러져 있어요. 그곳에 나를 향해 걸어온 분이 자신이 예수라고 하는데 친구 같은 포근한 기분이 들었지요. 물 좀 달라고 했더니 아름다운 빛깔의 물을 주어 이것을 받아먹는 순간 온몸에 생기가 돌면서 일어났어요”

그가 3주 만에 간신히 의식을 차린 것만으로도 일본병원에서는 엄청난 기적으로 여겼다. 이후 일본의 뇌경색 전문병원 3곳을 전전했지만 그가 치유될 희망은 전혀 없다는 진단이었다. 전신마비나 반신불수, 언어장애로 살아야 할 상황이었다.

“제 통역을 해주다 만나 결혼한 아내(장혜림씨)가 한국인이예요. 장인의 요청으로 한 때 한국에서 살기도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게 한국으로 가라고 하셨고 한방병원으로 인도해 주셨어요”

한국에서 다카시씨는 놀라운 회복세를 보였다. 말을 하고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글씨를 쓰고 예전의 기억을 모두 되살렸다. 그런데 성경을 전혀 몰랐던 그가 성경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고 자신이 치료될 부분을 의사보다 미리 이야기 하곤 했다.

역시 기독교를 몰랐던 부인 장혜림씨 입장에서는 이 모든 일들이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부인의 간증이다.

“사고로 의식을 잃었다가 전혀 딴 사람이 됐다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성경 이야기나 되어질 상황을 예언하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성령님이 알게 해 주셨다고 하곤 했지요. 신앙이 없던 제 입장에서는 너무 놀랐는데 어느 날 제게 ‘이사야 50장을 읽어봐.’ 하는 것이었어요”

장씨가 성경을 찾아보니 다카시 씨의 현 상황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다. 또 다카시씨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이사야 43장에 기록돼 있노라고 했다. 이 중에 1절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읽으며 장씨도 두 손을 들고 주님을 뜨겁게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카시씨가 입원해 있는 성인천병원 최병전 원장은 환자가 다 알아서 처방을 하는 것이 너무 기이하고 이렇게 빠르게 회복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며 확실히 하나님께서 직접 치료해 주고 계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카시씨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은 일본의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한국 성도들을 바르게 인도하라는 것”이라며 “아직 인간적인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남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안에 상업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고 교회에서 모이기만 할 뿐 흩어져 사명을 감당하지 않아 슬퍼하신다.”며 “한국은 무늬만 크리스천인 성도가 너무 많으며 신앙을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인간의 기준으로 평가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경을 공부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맡기는 신앙을 원하신다”고 덧붙였다.

이제 다카시씨의 비전은 자신의 달란트를 살려 일본 디즈니랜드에 기독교 테마파크를 설계, 세우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비용과 숱한 어려움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전 일본인이 평균 7번을 다녀온 이곳에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 성경의 내용을 집대성한다면 분명 이곳에서 일본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또 한국과 일본을 연계한 호텔과 병원, 학교 등을 설립, 시설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복음이 자연스럽게 전파되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성경은 인간이 만든 과학으로는 해석이 안 된다. 그러나 세계 정상의 과학자인 후쿠시게 다카시씨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보석보다 귀한 신앙의 유산(3)

-전의식(서울 십대선교회(YFC) 이사장)-


지난글 요약: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부모님의 훌륭한 믿음 아래 자라난 전의식 장로는 가난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하고 이십대의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중 큰 어려움에 처하여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이런 엄청난 고통을 주신 것이라는 판단이 서자 이 고통은 이내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다. 물질 역시 하나님께서 빼앗고자 하시면 이렇게 순식간에 잃어버리게 하실 수 있듯이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오직 신앙으로 재기에 나섰다. 없어진 것에 대한 미련을 모두 털어버리고 이제 또 새롭게 시작한다는 자신감을 스스로 가졌다.

 ‘내 나이 이제 32세가 아닌가. 아직 내 인생은 창창하다.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만을 모시고 그분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사업을 해 나가자.’

 모든 것이 거의 날아갔지만 다행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바탕은 남아 있었다. 나는 사업을 재개하는 한편 그 동안 이사로 몸담고 있던 서울 십대 선교회(YFC) 활동에 좀 더 적극적으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내가 청소년 선교에 적극 나서기로 결심한 것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 십대선교회(YFC)에서 활동한 경험 때문이다. 당시 몹시 어려운 생활을 했던 나는 YFC 서클에서 매주일 모여 찬양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여간 즐겁지 않았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현실에 대해 원망하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신앙을 통해 얻어낼 수 있었다. 내 경우뿐만 아니라 전도한 동창생의 경우를 보더라도 청소년 시절의 전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기에 나는 다른 어떤 선교보다도 YFC 활동에 큰 비중을 두기로 한 것이다.

 한 차례 호된 연단을 거친 후에야 나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선교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에 83년 서울 십대 선교회 이사장직을 맡았다. 사실 YFC는 청소년 선교단체이므로 수입은 큰 기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사장직은 재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예전보다 훨씬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 일을 기쁘게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직책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며 또 꼭 필요한 것이라는 사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업은 점점 안정권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내가 주님의 뜻과 사명을 생각하고 주님 앞에 헌신하겠다는 순종된 믿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주님은 놀라운 아이디어와 예측할 수 없는 지혜를 통해 넘치는 복을 부어 주신다는 사실이었다. 신앙은 사업이 안정되고 성장할수록 나태해지는 것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몇 번의 고난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다시 예전처럼 사업을 확대해 나가던 85년, 나는 또 한 차례의 사업위기를 통해 이 세상에서 진정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발행한 어음을 막기 위해 은행에 담보대출 신청을 했다. 서류상으로 전혀 하자가 없으므로 대출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담당자의 말을 믿었는데 대출이 예정 기간보다 늦어졌다. 차선책을 강구할 생각도 했으나 곧 대출금이 나온다는 말만 믿고 기다렸다. 그래서 어음 결제 일까지 미뤄지고 말았는데, 담당자는 당일 아침 이사회에서 최종 통과되고 난 뒤 바로 입금이 되니 어음결제는 문제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오전 10시경 담당자가 새파랗게 질린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이사회에서 액수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부결시켰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그것을 따지고 고함칠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 날이 토요일이라 3시간 안에 3억원을 마련치 못하면 나는 부도를 내고 마는 것이다. 일단 은행에 부도처리가 되면 사업처는 일말의 여지없이 풍비박산이 나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또 당신보다 은행의 신용을 믿은 저의 무지를 용서하옵소서. 이제 저의 사업은 또 한 차례 기로에 섰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옵시되 다시 일어선 이 사업체가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절박하다 못해 가슴이 저미는 기도를 쏟아 놓았다. 그러나 그 시간에 그 돈을 마련해 은행에 입금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갑자기 모처에 있는 친구가 생각나 전화를 했더니 자리에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달려가 은행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된 나의 처지를 설명했다. 은행의 횡포로 해석한 친구의 도움으로 이번 일의 부당성이 권력기관을 통해 은행장에게 강력하게 전달되었고 이로 인해 부도처리가 보류되는 한편 사상 유례없는 임시 이사회가 은행 마감 시간 이후에 열려 대출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귀중한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뜨겁고 간절한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을 거듭 확신하게 되었다.


 항상 바쁜 일과를 보내는 나 때문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힘든 편이다.

그러나 매일 아침 6시 40분에는 어머님을 비롯해 아내와 아이들(1남2녀)이 어김없이 가정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응접실에 모두 모인다. 아버님의 영향으로 학창시절부터 계속돼온 아침 가정 예배는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원천’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우리 집 아이들은 만 한 살이 조금 넘어 말을 더듬거리며 시작하게 될 때부터 일부러 깨워서라도 가정 예배에 참석하게 만들었다. 매 예배 시에는 성경을 1장씩 꼭 읽는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읽는데는 약 3년 반 정도가 걸렸다. 따라서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은 그간에 성경을 3회 반 정도 통독했는데 그 뜻은 비록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 할지라도 생활과 태도에서 성경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가정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이 시간을 통해 온 가족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고부간의 갈등이나 다툼이 이 시간을 통해 모두 용해되기 때문이다.

 아내와 약간의 말다툼을 가졌더라도 가정 예배가 끝나고 나면 서로 먼저 사과를 하게 되며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게 되는 것을 늘 느끼게 된다.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먼저 기도로 시작하고 온 가족이 은혜 가운데 하나 될 수 있는 가정 예배를 기독교인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활 속에서 깊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기도생활 덕분이다.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내어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세미한 음성이나 지혜, 방법을 통해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태도를 갖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적인 욕심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은 처음엔 성공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더 큰 손해가 다가옴을 몇 번이나 체험했다.


 YFC에 관계하다 보니 자연 청소년 문제와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서울 십대 선교회의 이사장이란 중책을 맡겨 주셨는데 후원만 하는 자리가 아닌 청소년 선교에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도움이 될 부분이 어떤 것인지 찾고 개발해야 한다고 느꼈다.

 매일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온갖 범죄 중 청소년이 저지르는 범죄가 30%에 달한다는 통계는 청소년 문제의 심각성과 선교의 중요성을 동시에 일깨워준다. 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이 십 대들이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만나기 위해서는 ‘청소년의 날’ 제정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판단, 일들을 추진해 나갔다.

 청소년 문제가 발생하는 가장 큰 요인은 입시의 과중한 압박, 가족 간의 애정결핍, 무분별한 향락문화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사랑과 관심이야말로 청소년들이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가장 명확히 인식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가정이 장호원에서 어렵게 살던 시절, 아버님은 교회의 문제 청년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맛있는 것을 해주시며 격려하고 또 성경을 가르치셨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버님의 이런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왕이면 착하고 가능성 있는 젊은이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지 하필이면 별 볼일 없는 젊은이들을 데리고 오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님의 사랑과 정성이 정말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20여 년이 훨씬 지난 후였다. 그때 아버님의 지도를 받았던 청년들이 안수집사 혹은 장로가 되어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던 것이다. “전 장로님, 장로님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던 시절, 오직 장로님만이 저희를 이해해 주시고 사랑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지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서야 우리 형제들은 사랑으로 심는 씨앗이 귀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버님에 대한 존경심을 더욱 느낄 수 있었다.

 사업을 해 오면서 나름대로 느낀 몇 가지 신앙 법칙이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내가 교만하고 자만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노력하고 땀 흘려 성실하게 돈 버는 일을 원하시지 부동산투기나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사업은 그것이 성공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복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아울러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는 것임을 성경뿐만 아니라 실생활을 통해 항상 느끼게 된다.

 또 물질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물질 개념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는 반짝하는 아이디어 하나로 엄청난 부를 일으키게도 하시지만 이는 한순간 아무것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분이심을 깨달을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며 최선을 다해야 함을 인정하게 된다.

 남보다 많이 빠르게 수북이 쌓아놓고 교만했던 내가 서너 차례 사업의 심한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음을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 뒤에는 깨달음과 영적 성장이 항상 뒤따라 주었기 때문이다.

 밀턴이 눈이 멀지 않았으면 <실락원>이라는 불굴의 고전을 쓸 수 없었다. 역경이 오히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신앙 경력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나는 앞으로 사업 전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내게 맡겨진 청소년 선교의 사명을 다하는 기독 실업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당신의 뜻이 있었기에"

                                보석보다 귀한 신앙의 유산(2)

-전의식(서울 십대선교회(YFC)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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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글 요약: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부모님의 훌륭한 믿음 아래 자라난 전의식 장로는 가난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하고 이십대의 젊은 나이에 조경업을 시작하여 아무런 자본도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 공사를 따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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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노임이 후한 우리 공사에 훌륭하고 부지런한 인력이 많이 모여들었고 자재대금을 선불로 지급하는 만큼 공사에 차질을 빚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건설업자들과 정반대되는 행동이었다. 이것은 공사경험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예상보다 빨리 공사대금이 부족하게 된 나는 또다시 부딪친 자금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기도하던 중 배짱 좋게 김영배 회장을 또 찾아갔다.

“회장님, 저희 회사가 다른 시공회사보다 가장 공사를 많이 진척시켰으며 일도 깨끗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직 공사대금을 주실 날짜가 되지 않았지만 미리 좀 지급해 주시면 공사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김 회장은 공사현장을 직접 둘러본 뒤 아주 만족해하며 비서에게 대금을 미리 지급해 줄 것을 지시했다. 나는 또 한 차례 위기를 넘긴 것이다. 매일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고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다.

드디어 1년여 만에 그 엄청난 골프장 공사를 완공시켰다. 그것도 다른 시공업체보다 우리가 훨씬 더 많은 공사를 했고, 결국은 공사 진척이 빨라 추가공사 부문을 모두 우리가 맡게 되었다. 나의 데뷔작품은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사실 경험도 전혀 없는 내가 이런 대공사를 거뜬히 치루어 낸 것은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같이해 주시고 지혜를 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판단된다.

나는 이 공사로 수천만원의 목돈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이 공사로 인해 「부림원」이 조경건설업체 대열에 당당히 낄 수 있는 명성을 얻게 됐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골프장 조경공사하면 부림원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만큼 회사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나는 늦기 전에 대학에 입학, 공부를 더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성균관 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이번에는 입시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했음에도 합격이 되었다. 나는 사업과 대학공부를 병행하기로 했다. 사업은 계속 승승장구였다. 가만히 있어도 공사요청이 들어왔다. 나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적지 않은 부를 소유한 청년실업가가 된 것이다.


당시에 보기 힘든 외제 고급자가용을 운전기사까지 대동해 타고 다녔던 나는 한없이 높아지는 자만심과 반비례해 신앙은 곤두박질하기 시작했다. 나는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골프장 조경공사의 50%정도를 맡아 시공했다.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 어려움 없이 풀려나갔다. 적지 않은 부를 소유하게 된 나는 사업을 다른 쪽으로도 확장시켜 나갔다. 운수업체를 하나 인수했고 목재사업에도 손을 댔으며 묘목을 키우기 위해 농장 부지를 매입했다. 단자회사의 증권도 상당수 보유했다.

스물세 살의 나이에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니며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내 모습을 주위에서는 대단하게 평가했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에서 내가 제일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대로만 나가면 40대에 가서는 국내 굴지의 회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가장 능력 있는 것으로 착각했으며 모든 면에 자신이 넘쳐흘렀다. 정계·재계의 내노라는 분들과 교제를 하며 나의 사업적 능력이 오늘의 성공을 이룩한 것으로만 판단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항상 사업이 우선이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내 생각과 의지가 앞섰다.

더구나 남보다 앞서서 쌓아놓은 부가 나에게 우상이 되어 신앙생활이 사업의 성장과는 반비례했다. 그러나 신앙이 나약해질 때마다 무언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그것은 부모님의 뜨거운 신앙을 항상 보고 자라 온 탓이었다.


1975년 조선 호텔 조경공사를 맡아 공사를 끝냈다. 그런데 당시 총지배인인 데이비드 씨가 10만 달러가 넘는 공사비가 너무 비싸다며 2만 달러 정도를 깎자고 제의해 왔다. 정식 계약서를 주고받은 상황에 공사비를 깎아 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한국 사람을 무시한 처사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나는 즉시 면회 신청을 해 데이비드를 만났다.

“공식 절차를 밟은 공사가 아닌가. 공사를 잘 끝낸 마당에 이제 와서 공사비를 깎자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한국에서 가능한 일이 아닌가. 다른 공사도 깎은 예가 있다. 너무 비싼 것 같으니 우리가 요구하는 만큼 깎아 달라.”

나는 데이비드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줄 아는 고자세가 더욱 기분 나빴다.

“나는 단 1원도 깎아줄 수 없다. 당신은 한국인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만약 당신이 공사비를 전액 내놓지 않을 경우 국제변호사를 동원해 당신이 아닌 미국에 있는 조선호텔 체인본부 사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

큰 소리를 치고 나오자 데이비드는 몹시 당황한 모습이었다. 전혀 상상치 못한 태도였기 때문이다. 이후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됐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일이 결혼 전 아내와의 교제시절 큰 플러스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얼마 후 당시 교제 중이던 현재 아내와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이 모습을 수행원을 데리고 순회 중이던 데이비드가 발견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호텔의 총지배인이 내 앞에 와서 깍듯이 인사하며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자 깜짝 놀란 지금의 아내는 나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했던 것이다.

1979년, 30세의 나이로 결혼을 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아내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어려움 없이 자라온 터라 나와는 전혀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낸 처지였다. 결혼할 당시 나는 제법 상당한 수준의 실업가로 부각되었고 재산도 상당 수준에 이르렀으므로 혹시 아내가 물질을 풍족하게 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물질관이 조금은 일반인들과 달랐다.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은 기업주 개인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되며 이웃과 사회, 선교를 위해 쓰이거나 더 큰 사업과 고용증대에 재투자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결혼을 앞둔 아내에게 우리 가정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 함을 다짐 받음과 동시에 매달 최소한의 생활비만 가계부를 근거로 지급할 것을 이야기했다.

“돈이 없어서 못 쓰는 것은 결코 고통이 아니오. 그러나 있으면서 쓰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오. 그 고통을 이겨낼 용기와 자신이 있다면 나와 결혼합시다.”

이 말을 다짐받았던 터라 아내는 결혼 후에 적은 생활비로도 큰 불평을 하지 않았다. 대단한 생활을 할 줄 알았던 친구나 이웃들도 우리 집의 생활규모를 보고 깜짝 놀라곤 했다. 나의 물질관은 이후 몇 번 거듭된 호된 시험을 통해 더욱 변화되었다. 결론은 간단하다. 재물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그 쓰는 방법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방법으로 쓰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업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81년 4월이었다. 고위급 권력기관에 있으며 나와 절친한 관계에 있던 학교 선배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전 사장, 돌아오는 일요일 재계의 거물급 몇몇 회장들과 골프 약속을 했소. 내가 자연스럽게 그 분들을 소개할 터이니 함께 참석하시오. 발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오.”

“죄송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이어서 주일엔 꼭 교회에 나갑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주일 성수가 가장 중요하지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뒤로 미루겠습니다.”

그러나 그 선배는 이미 약속이 다 돼 있는 상황이라고 강조한 뒤 아침 일찍 만나 골프를 치고 바로 교회에 가도 괜찮다고 덧붙였다.

나는 나중에라도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는 말에 할 수 없이 승낙을 하고 말았다. 아버님으로부터 주일 성수만큼은 기독교인이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덕목임을 누누이 강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명목으로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난생 처음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된 나의 마음도 개운치 않았다. 원래 계획은 오전 10시 30분경에 골프를 끝내고 교회로 갈 예정이었으나 11시가 훨씬 넘어서야 경기가 끝났다. 교회 행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고 일행과 함께 점심식사를 위해 음식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내 차의 운전기사가 골프장 입구를 막 벗어나 횡단보도에 잠시 정차해 있는 동행한 모 그룹회장의 차를 사정없이 받아 버린 것이다. 우리 차의 운전기사는 10년 이상의 경력자로 당시 차를 빠르게 운전 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속력을 내어 이런 사고를 낸 것이다. 다행이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차가 대파돼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자동차 충돌 사고로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소개하려던 분위기가 영 반대로 되고 말았다. 순간 전광석화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통해서 발람에게 경고하신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주일 성수를 하지 않고 사업을 한다고 그것이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오늘 사고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작은 경고일 뿐 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날인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때서야 나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사고로 몸이 다치지 않은 것도 감사했고 깨달음을 갖게 된 것도 감사했다. 이날 이후 나는 그 어떤 중요한 일도, 그 누구의 요청도 주일만은 양보치 않고 거룩하게 지키고 있다.


그런데 이 일과 연이어 나는 그 해에 엄청난 시련을 맞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예정된 사건이라고 여겨져 감사한 마음을 갖지만, 당시로서는 인생을 포기 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것은 당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J금융 사건에 내가 휘말리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내가 힘들게 쌓아올리며 벌어들인 수많은 재물이 이 사건으로 인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 이렇게 쉽게 내가 허물어질 수 있단 말인가. 10년 동안 그 누구 보다 빠르게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나는 밤잠을 못자며 괴로워했다. 상대를 믿고 돈을 투자한 것을 후회했으나 현실은 냉정했다.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었다. 처음에 나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깊이 성찰하게 됐고 나의 신앙에 문제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됐다.

나는 사업의 계속적인 성공과 발전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란 단순한 생각을 가졌다. 젊은 나이에 막대한 부를 가진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 기고만장했고 남 앞에 드러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교만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두문불출하고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이 사건이 나의 자만과 교만을 깨뜨리기 위한 섭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성경을 펼쳤는데 시편 66편 10~12절의 말씀이 크게 클로즈 업 되며 가슴에 빨려들듯 들어왔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집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니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 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이 고통의 과정이 저의 잘못된 신앙을 깨뜨리고 교만을 버리게 하기 위한 연단인 줄 믿습니다. 인내와 지혜로 이 역경을 극복하게 하시고 참된 믿음을 소유하게 하소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내 앞에 닥친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했다. 내가 빌려준 액수는 모두 잃더라도 내가 남의 돈까지 중계해 빌려준 금액을 모두 책임져야 할 때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기도할수록 내가 지은 가장 큰 죄는 남보다 앞서 갔다는 교만함과 남보다 많은 것을 쌓아 올렸다는 우월감, 내가 최고라는 자신감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들이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란 성경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또 새겨 넣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늘 기도하는 가운데 신앙적으로 많이 달라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 무렵 나는 성경을 많이 읽었는데 나의 폐부를 찌르며 감동을 주는 내용이 너무나 많았다.

특히 욥기의 마지막 장은 나의 현재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감탄사가 터져 나올 정도였다. 욥이 모든 고난 끝에 여호와께 드리는 이 고백은 바로 나의 고백이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다음에 계속) ✎"새롭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