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회개
‐Kite Runner 보기‐


얼마전 이 영화의 동명의 원작소설을 쓴 소설가가 UB에
초청되어 강연을 했다고 들었다. 그 소설가는 Khaled
Hosseini 이란 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이다. 원래 의사였는데 Kite
Runner 소설이 성공을 거둔 후, 이제는 아예 작가로 활동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집 둘째 아이가 그 강연을 들으러
갔었는데,상당히 상기된 모습으로 돌아왔다.소설과 영화
에 얽힌 뒷이야기들과 차별받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강연
자의 호소를 인상깊게 들었던 것 뿐 아니라, 강연자의 직업
적인 배경에도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우리 둘째는 문학에
꽤 재능이 있는데, 필자는 부모로서 아이가 문학을 전공하는 것에 대해선 조금 우
려를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 아이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에 고무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필자도 이 영화를 아주 인상깊게 보았다. 무엇보다 타문화권 배경의 이야
기가 문화의 경계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
이 좋았다.이 영화는 원작자의 모국인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그러니 그 문화에 대해 보다 깊이있는 묘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보는 이들에게는
배경이 생소한 문화라는 점이 오히려 더 흥미를 일으키는 장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나라 문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도 잘 쓰고 또 잘 만들
면,역시 비슷한 좋은 반응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그럼 우리나라 문
화도 보다 깊이있게 전달하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영화의 주인공은 아프가니스탄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소년 Amir이다. 아버
지는 정의감으로 꽉 차있는 강직한 분이었는데, Amir의 유약한 성격에 늘 좀 불만스
러워했다. 그런데 Amir는 자신을 출산하다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믿고 있었다. Amir에게는 끔찍히 자기를 위해주는, Hassan이라는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그는 그 가정에서 대를 이어 일해온 하인의 아들이었다.Amir에 대한
Hassan의 무조건적인 충성에 어떤 아이들은 노예근성이라고 놀려대기까지 했다.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의 큰 놀이인 연날리기가 있던 날, Amir와 Hassan은 Amir
아버지가 지니고 있었던 기록을 깨며 많은 연들을 끊어내고 큰 승리감을 맛본다.

그런데 이날, 늘 이들을 고깝게 여겨오던 폭력배 아이들이 Hassan을 성추행하고구타한다.승리의 전리품인 연을 내놓으라는 그들의 요구를,그 연은 Amir의 것이라며 Hassan이 거부했기 때문이었다.이 장면을 뒤따라갔던Amir가 목격한다. 하지만 그는 폭력배들에게맞설 용기가 없어 그냥 숨어 지켜보기만 했다. 이후 Amir는 Hassan을미워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죄책감을오히려 미움으로 발산한 것이다. 결국 Amir는 Hassan에게 도둑의 누명을 씌워 집에서 쫓아내고 만다.이후 Amir의 가정은 소련의 침공을 피해 달아나 미국으로 망명하고, Amir는 성년으로 자라 소설가가 되고 결혼도 한다.그동안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그런데 첫 책이 출간되는 날, Amir는 아버지의 옛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그는 Amir의 글솜씨를 알아주고 늘 격려해주던 분이었다.전화에서 그 분은Amir에게 파키스탄에 있
는 자신을 만나줄 것을 청한다.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그 청을 뿌리치
지 못해 그를 찾은 Amir에게 그 아버지의 친구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와 아주 힘든
과제를 Amir에게 남긴다.

우선 Hassan이 자신의 이복형제라는 것이었다. 또 Hassan과 그 아내가 탈레반
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들을 하나 남겼는데, 그 아들을 구해서 미국으로 데려가 달
라는 것이었다.처음엔 그토록 완벽했던 아버지의 외도 사실에 반신반의하고,또
조카의 구출작업에 예상되는 위험 때문에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하던 Amir는, 결국
그 청을 받아들이고 고향으로 잠입한다. 조카는 고아원에서 탈레반 지도자의 성노
리개로 팔려 탈레반 아지트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조카를 구하고자 탈레반 소굴까
지 찾아간 Amir는, 그를 알아본 탈레반 장교 – 그는 Hassan을 성폭행했던 이였다 ‐
에 붙들려 거의 죽을 뻔하기도 하지만,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결국 조카를 구출해
내고 미국으로 무사히 돌아온다.오랫동안 마음을 열지 않던 조카는,어느 날 연을
날리며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주는 Amir에게 마음을 열고 한 가족이 된다.

영화의 내용 중에는 약간 지나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너무 서구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라고도 여겨졌다. 소
련을 침략국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소련군이 난민 중 젊은 아녀자를
골라 성추행하려는 장면을 집어넣은 것이라던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탈레반의 모습,탈레반의 지도자가 어린 아이들을 성노리개로 삼는 부분 등은,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 영화에 출연했던 몇 아동배우들이 위험을 느끼고 아랍 에미리트로 망명을 해야했다고 들었다.

하지만,여전히 이 영화에서는 공감을 주는 소재들이 많이 발견된다.완벽주의자
아버지와 유약한 아들 사이의 갈등과 사랑. 아버지는 아들에게 불만이 있고 또 공
공연하게 나무라기도 하지만, 역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내놓을 정
도로 그를 사랑하는 존재이다. 자신의 잘못을 미움으로 감추려는 어린 마음의 시도
도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을 문제 아닌가. 그저 완벽하게만 보였던 아버지의 상
상하지 못했던 실수.이 또한 현실이다.이국땅에서 어렵게 살면서 자녀들에게 헌
신하고, 그러면서도 늘 고국을 잊지 못하는 이민의 생활도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아프가니스탄이란 중동국의 이국문화가 우리나라의 문화와 유사하다는 점에도 호기
심이 갔다. 남녀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만나는 것을 부모들이 꺼려하고 부모를 통해
결혼승락을 받는 것은, 남녀칠세 부동석 등 우리나라의 얼마 전까지의 풍속과 유사
했다.

연날리기도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놀이문화이지 않은가.이런 여러가지들을 넘어 이 영화에서 가장 크게 감동을 주는 장면을 들라면, 역시Amir가 조카를 구출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이는 어릴적 Amir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어릴 적이든 어른이든 원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그는 겁많고 소심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놀림을 당하고 심지어 주먹에 맞아도 상대에맞서질 못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 위험천만한 일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일까?그것은 아버지 친구가 했던 한 마디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Amir에게 조카를 구출할 것을 청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There is a way to be good again.”

그는 Amir이 Hassan에게 했던 못된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Amir를
정죄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Amir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는 Amir에
게 자신의 어린 시절 Hassan에게 행했던 잘못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조카
를 구출하는 것이 옛날의 잘못을 회복할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Amir는 아
버지 친구의 그 한마디 권고에 용기를 내어 회복의 길을 나섰다. 진정한 회개의 길
을 나섰다.크리스챤인 우리는 때로 회개의 의미를 죄를 뉘우치는 선으로 한계지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예수님의 조건없는 용서와 사랑에 너무 취해서일까?죄를 깨
닫고 이를 고백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까진 좋은데, 문제는 이에 그쳐버
리고 이후에 당연히 뒤따라야 할 죄의 개선이 없다는 것이다. 회개란 죄에 대해 돌
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믿을 뿐만 아니라 개선하지 않는다면 감히 진정으로 회개했
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그래서 어떤 이는“복음은 우리를 율법에서 은혜로 인
도하고,은혜를 체험한 후에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오게 한다”라고도 말했다.

나치정권에 대항하다 처형당했던 신학자 본 회퍼는 순종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를 “값싼 은혜”라고 불렀다. 참된 은혜에는 반드시 올바른 순종이 수반된다.
“은혜에 의해 순종을 면제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 올바른 순종이 비로소 시
작되는 것이다.” 돌아보면 필자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주위에 값싼 은혜가 넘쳐나
는 것 같다.믿는 이들은 많으나 믿음의 삶이 별로 보이질 않는다.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믿는 이들이 더 못됐고 매력이 없
다.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있고,언제부터인가 크리스챤이라고 밝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 뿐 아니라,
우리로 회개토록 하신 것이다.우리가 다시 선하게 될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마치
Amir의 아버지 친구가 Amir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되, 회복할 길을 제시해준 것
처럼 말이다.아무쪼록 우리 모두 진정한 회개의 믿음생활을 하길 바란다.용기를
가지고 옛 자아를 직시하고 이에 대항함으로써 옛 사람을 극복하고 이겨가길 바란
다. 그래서 Amir가 오랜 죄책감을 떨쳐버리고 해방을 맛보았듯이 진정한 구속의 기
쁨을 맛보길 바란다.

✎김성민

 

예배적 존재
- Atonement 보기 –


우연히 비디오 가게에 들렀다가 이 영화를 고르게 되었다. 2007년 아카데미 최우수 영화 수상작이라고 적힌 표지를 보니 뭔가 대단한 영화일 것이라여겨졌다. 그런데 막상영화를 틀어놓고 보니 그 시작이 지나치게 밋밋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의 도입부에 보여주는 주인공 소녀의 빠른걸음은 영화의 초반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그 걸음에 맞춘, 타이프 라이터의 소리를 이용한 배경음악이 자아내는 긴장감도 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영화의 줄거리는 이차세계 대전을 앞둔 1935년의 어느 한가한 여름, 영국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일어나는그저 일상적인(적어도 부유한 그 가정으로서는)일들로시작한다.영화의 주인공인13살짜리 소녀는 집을 방문하는 오빠의 친구에게 보일연극을 준비하고 있다. 어린 쌍둥이 사촌과 그 누나를 배우로 삼아 자신의 문학솜씨를 뽐내보려 하지만 어린 사촌들을 다루는 것이 여의치가 않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창을 내다보다 자신의 언니와 그 집에서 일하는 한 청년이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목격한다. 그 청년은 소녀의 아버지가 대주는 돈으로 캠브리지 대학을 다니고
있는, 의대지망생이었다. 이 청년과 언니는 말은 못하고 있었지만 서로 사랑하는사이였다.그런데 불행히도 이 주인공 소녀도 그 청년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아니엄격히 말하면 외사랑이었다.청년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영화는 별 중요치 않게 보이는 이야기들로 계속 이어진다. 청년은 소녀의 언니에
게 사과편지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고 있고, 쌍둥이 소년들은 이혼 수속 중인 부모
에게 돌아가겠다고 졸라대고 있다. 여러 다른 내용의 사과편지를 쓰고 버리고 하던
청년은 마침내 한 편지를 봉투에 담아 그 집으로 간다. 저녁식사에 초대받기도 했
던 터였다. 가는 길에 청년은 주인공 소녀를 우연히 만나 그 편지를 언니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한다.그런데 문제가 생겼다.그 봉투에는 정작 전달하려고 했던
편지가 아닌,장난삼아 썼던 아주 야한 내용의 것이 들어가 있었고,또 그 편지를
주인공 소녀가 꺼내보았던 것이다.소녀는 질투심에 사로잡힌다.문제는 조금 더
복잡하게 꼬여간다.잘못 전달된 장난의 편지였지만,그것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
한 두 청춘남녀가 서재에서 사랑을 나누다가 주인공 소녀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소녀의 질투심의 불길은 더 크게 타오른다.

그날 밤 어느 정점에서 그 질투심은 여러 사람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어놓는 한
사건으로 연결된다. 사실 의미없어 보이던 사소한 여러 가지 일들은 이 사건에서
한꺼번에 다 얽힌다.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어린 사촌들이 밤중에 사라져버렸고 모
두가 어린이들을 찾느라고 흩어졌는데, 사촌여자가 한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것을 주인공 소녀가 목격한다. 그런데 주인공 소녀는 성추행을 하던 그 남자
가 언니가 사랑하고 있는,자신이 외사랑하는,그 청년이라고 진술한다. 염색체 검
사 등 과학적인 수사가 불가능했던 시절, 청년은 목격자인 주인공 소녀의 진술에
의거해 아동성추행범으로 몰려 감옥으로 끌려가고 만다.

이후 영화의 줄거리는4년을 뛰어넘어 이차세계대전으로 건너간다.감옥살이를
하던 청년은 군으로 입대하면 형을 면제해주는 정부방침에 따라 군인이 되어 전선
으로 배치된다.배치되기 전 연인을 잠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그녀는 학업을 포기
하고 대신 간호사가 되어 일하고 있었다.가족과는 인연을 끊고 지낸다고 했다.그
녀는 청년더러 꼭 돌아오라면서 멋진 해변가의 한 오두막집 사진을 건네준다. 그곳
에서 만날 것을 그리면서 어려움을 참아내자고.

한편 주인공 소녀도 간호사가 되었다. 혹 부상자 중에 자신이 사랑하는청년이 끼어있을까봐 그랬을까. 아니면 언니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있으리라 기대해서 그랬던 것일까. 아무튼주인공 소녀는 어떻게 어떻게 언니의사는 곳을 알아내고 어느날 언니를 만나러 간다. 그런데 언니가 사는 초라한 한 아파트에는 언니 뿐 아니라 한남자도 있었다. 바로 그 청년이었다.전선에서 휴가로 잠시 귀국한 모양이었다. 이들을 만난 소녀는 옛 사건에 대해 사과한다.사실 성추행범은 그 청년이 아니었다고.집을 방문했던 오빠의 친구였다고. 이에 대해 언니와 청년은 무척 분개하며 그 사실을 여러 사람에게 공식적으로 밝히라고소녀에게 추궁한다.소녀는 쫓겨나듯이 그 집을 나선다.

영화는 또 수십년을 훌쩍 뛰어넘어 주인공 소녀가 노년의 나이가 된 때로 간다.
소녀는 유명 소설가가 되었다. 자신의 소설가 인생의 마무리 시점에서 그녀는 자서
전 식의 소설을 출판한다.바로 언니와 그 청년,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이었다.책의 출간을 앞둔 인터뷰에서 주인공은 말한다.이 소설은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자신은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를 쓰고 있었지만 마무리를 하지 못했는
데,이제 치매가 진행되어가고 있고,그래서 작가의 삶을 더 할 수가 없다는 사실
을 알았기 때문에 이 책을 끝내야 했다고. 그러면서 아주 충격적인 한 고백을 한
다.그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고.자신은 사실 용기가 없어 언니를
찾아가보지 못했다고.실재에선 언니와 그 청년도 서로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고.
청년은 전장에서 죽고 언니는 폭격을 피하러 지하도에 숨었다가 물탱크가 터지는
바람에 익사했다고.

영화의 줄거리를 다 이야기 해버려 아직 보시지 않은 분들에게 좀 죄송스런마음이다. 지루한 듯한 영화 초기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정신이 멍할 정도로 충격적인 결말을 소개하자니 할 수없이 영화의 그 끝이야기까지를 다 풀어놓고 말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여전히 직접 봐야지만 느낄 수 있는 여러가지 감동들이 있다. 특히 퇴각군인들이영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는 집결지의 장면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 스케일이 클 뿐 아니라, 계속 주인공의 시각으로 둘러보는 것 같은 카메라 앵글도 독특하고, 전혀 다른 곡조와 박자인데도 군인들의 합창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배경음악은 그저 전문적인 솜씨라고 하기엔 그 표현이 부족한, 승화된 예술의 경지이다.

아무튼,영화를 보면서 필자는,우리가 무심코 한 작은 일들이 다른 이들에게 얼마
나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
어린 소녀가 질투심에 찬 미숙한 마음으로 저질렀던 그 거짓증언 때문에, 두 청춘남
녀의 인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파행의 길로 접어들었고, 또 안타까운 결말에까지
이르렀다. 아름답게 펼쳐질 수 있었던 그들의 사랑은 서재에서의 설익은 정사와 전장
으로 가는 길에 잠시 짬을 낸 짧은 만남으로 끝을 맺어야 했다. 언니와 가족들과의
관계도 다 깨어지고 말았다.자신의 치기어린 그 거짓말 한 마디 때문에.
최근,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인기연예인이었던 최진실 씨의 자살사건을 보면서 마
음이 많이 뒤숭숭했다. 그 자살을 유발한 동기가 사채업자 운운하는 근거없는 루머였
다고 하는데,그 루머를 인터넷에 퍼트린 당사자가 검찰에서 수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 백모씨라는 아가씨는 자신의 행위가 그렇게 큰 결과를 초래할 줄 상상이나
했을까?지금 심정이 어떨까?무척 당황스럽고 후회스럽고 막막한 심정이 아닐까?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되돌이고 싶은 생각이 꿀떡같지 않을까? 장난삼아 (추정하기
에)올렸던 그 내용을 다시 거둘 수만 있다면.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 엔터 키
대신 이스케입 키를 누를 수만 있다면.그런 심정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말 한마디,표정 하나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기가 차다는 식의 어
투,구제불능이라는 듯 빈정거리고,깔보는 듯 바라보거나, 사사건건 상대방의 꼬투
리를 잡고, 작은 잘못에도 마치 대단히 큰 실수라도 한 듯이 난리를 피우고 하는 식
의 태도는 버려야 한다. 스스로는 습관적으로 별 의미없이 그런다고 주장할 지도 모
르지만,당하는 입장에서는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듯 아픈 일일 수 있다.더우기 전
혀 근거없는 일을 두고 상대를 음해하고 비방하고 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될 것
이다.입방아를 찧는 자신은 재미로 하는 일일지 모르지만,구설수에 오르는 사람은
그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곤란을 당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
던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8:6)”라고.
한편,필자가 이 영화를 고르게 된 데에는,아카데미 상 수상작이라는 것 외에,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다. 그 제목이 독특해서였다. “Atonement”, 번역하면 구속
이라는 뜻이다. 기독교 용어이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하나
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는 구속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새로 만들어진 조어라고 알
고있다. 왜 이 영화는, 또 동명의 소설은, 이 종교적인 단어를 제목으로 선택했을
까?어떤 의미를 나타내려 했을까?필자가 추측하기로는, 영화속 주인공이 마지막
소설을, 자신이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대상인 언니와 그 청년에게 화목의
제물로, 구속의 제물로 드리기 위해 썼다는 의미에서 이 제목을 사용하지 않았을
까 생각한다.

영화 속 주인공 소녀는,풀래야 풀 수 없었던,용기가 없어서, 또 기회를 잡지 못
해 용서를 구하지 못했던,그래서 마음 속 깊이 응어리로 남아있는 그 죄책감을,
그래도 기억력이 아직 남아있을 때, 소설을 통해서나마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
겠는가?소설 속에서나마 구속의 해방감을,또 언니와 또 그 청년과 화목케 되는
회복을 느껴보고자 했던 것 아니겠는가?그래서 실재론 만나지 못했지만,언니와
청년을 만나 엄청난 꾸지람과 비난을 듣는 자신의 모습을 소설 속에 두었다. 그래
야지만 마음이 좀 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소설 속에서 언니와 청년이 마음 편
하게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비록 작은 아파트에서였지만.차마 해변가 멋진
오두막에서 만나는 해피앤딩까지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와는 너무나도 달랐
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우리에겐 다 구속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죄없는 사람
은 없다.가슴 속 응어리가 없는 사람은 없다.누구에게나 죄를 해결할 수단이 필
요하다.그래서 인류문명 어느 곳에나 제사문화가 있어왔다.며칠 전 지나간 유태
교의 오랜 절기인 Yom Kippur 절도 속죄일을 뜻하는 것이다. 이 속죄의 기회를 가
지지 못하는 이들은 참으로 불행한 이들일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현대엔 특히 이
런 이들이 많다.영화속 주인공 소녀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해결할 기회를 평생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소설을 통해서나마 그 구속의 기회를 얻기를 원했던 것이다.

우리 크리스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속함을 받았다. 그래서 속죄를 위한 제
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 구속을 다시 확인하고 기뻐하고 찬미하는
기회는 계속 필요하다고 여겨진다.우리의 기억력은 짧고,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리
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주일 드리는 예배는 너무나도 귀중한 자리이
다.새로운 용기를 얻고 안식을 경험하는 자리이다.회복의 자리이다. 우리는 예배
적 존재로 지어졌다. 우리 모두 예배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또 그 기쁨을 늘 만끽
하면 살았으면 좋겠다.
 
✎ 김성민

 

두 얼굴의 야누스, 인간복제
-The Island 보기-



며칠 전 아들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빠가 어린 시절에는 TV가 처음 나왔고 오랫동안흑백으로 보았는데, 지금은 칼라로, 그것도 얇고 큼지막한 스크린의 TV를 보고 있으니, 아들이 어른이 되었을땐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자못 기대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아들은 미래가 좀 두렵다고 했다. 특히 인공지능을갖춘 로봇들이 세상을 망가뜨리고 사람들을 해칠까봐 무섭다고 했다. 이는 분명, 터미네이터, 아이 로봇 등 인공지능 로봇을 등장시킨 공상과학영화들의 영향일 것이다.이에, 필자는 로봇보다 더 현실적인 위험이 있다고 했다.그것은 인간복제라고 했다. 인공지능 로봇이 언제 가능할런지 모르겠고, 영화에서처럼 인간을 배반하고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갈 만한로봇들이 실제 가능할런지 의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복제는 다르다. 이는 현재기술적으로 거의 가능한 단계에 와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금 공상과학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 중 가장 현실적인, 공상이 아니라 실제 곧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인간복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The island는 인간복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내용을 다 알아버리면 영화가 재
미없어질 것이므로, 자세하게 줄거리를 적지 않는 것이 좋겠다. 많은 복선과 반전,
그리고 비밀들이 영화에 깔려있다. Island, 섬이 무엇을 뜻하는 지도 영화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이 더 좋겠다. 영화가 참 재미있다. Michael Bay감독이 메가폰을 잡았
는데, The transformer를 만든 감독이기도 하다. 무슨 이유인지 The island는 미국
국내에서는 흥행에 실패했다고 한다. 영화의 재미와 흥행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비슷한 주제의 영화들이 많이 제작되어왔기 때문일까? 이후에 Michael
Bay감독이 만든 The transformer는 기록적인 흥행성적을 거두었는데, 이런 감독의
역량으로 보아서도 The island 가 재미있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안 보신 분이 계시면 꼭 한 번 보도록 권하고 싶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어느 격리된 한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세상이 다 오염
되어버려 생명이 살 수 없게 되었고, 그 중 살아남아 구해진 사람들이 그곳으로
옮겨져 왔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그 사람들은 복제된 인간들이었다. 자신의 모체인간에게 장기를 제공하거나, 아기를 낳아주기 위해 재배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목적을 다한 후 그들은 곧바로 제거되었다. 이 사실을 두 주인공이 알아낸다(Ewan
McGregor 과 Scarlett Johansson이 연기했는데, 스크린에서 이 둘을 보는 것만 해
도 참 즐겁다). 이 둘은 그 시설을 탈출하고 마지막에는 시설에 남아있는 모든 복
제인간들을 구출한다. 그 과정에 스릴 만점의 추적과 액션들이 제공된다.

얼마 전, 인간배아 줄기세포의 성공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그것도 한국의 과학자 황우석씨가 이루어낸 일이라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대단한 자긍심을 느낄만한 일이었다. 그 연구결과
가 상당히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또한 번 세상을 크게 뒤집어 놓긴 했지만. 인간이아닌 다른 포유류에서 복제는 이미 많이 성공을 거두었다. 복제양 돌리, 복제 개 스너피 등
에 대해 다 들어보았을 줄 안다. 복제는 난자에서 핵을 제거하고, 대신 체세포에서 채취한 핵
을 집어넣어 시작된다. 그러면 체세포를 제공한모체와 꼭 같은 다른 개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동물에 비해 사람의 난자에 체세포 핵을 삽입하고 성숙시키는 것은 아주 어렵
다고 한다.
 
실험 조건이나 기술에 있어 훨씬 까다로운 수준을 요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황우석씨는 한국인들이 젓가락을 사용할줄 아는 손재주 있는 국민이어서 인간배아복제가 가능했다고 인상 깊게 말하기도했다. 그의 연구결과에는 많은 결함이 있었고, 실제 성공을 했는지 하는 것도 알지못하는 상태가 되어 안타깝다. 하지만, 인간복제의 기술이 상당한 정도로까지 진전되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비록 이전 연구결과가 실패였다고 하더라도, 황우
석씨 연구팀에서 그동안 상당한 인간복제 기술을 축적했다고 믿어지고, 또 다른 연
구팀, 또는 기업에서 인간복제에 성공했다고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얼
마 안 있어서, 영화에서처럼 자신과 꼭 같은 사람을 거리에서 마주치는 세상이 올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인간복제, 또는 인간배아줄기세포에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을 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건강에 가져다 줄 이익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장기나 조직
이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을 때, 가능한 의료기술은 이식술이다. 그런데, 이이식에는 거부반응이라는 넘어야 할 큰 벽이 있다. 다른 사람의 조직, 장기가 이식
되면, 이식을 받은 사람에게서 면역기능이 발동하여 이식된 조직과 장기를 제거해
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거부반응을 줄이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사용하는데, 이
때문에 이차 감염 등 많은 부작용이 또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의 체세포에
서 복제된 조직, 또는 장기를 이식하면 이 거부반응을 원천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가히 의료에 있어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혁명적인 의료기술에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중 하나가 The
island에서 그리고 있는 문제이다. 모체의 건강을 위해 복제된 인간들의 생명에 대
해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도 인격을 지닌 한 생명체인데, 그 생
명의 존엄성은 무시해도 될 것인가? 영화에서 인간복제 사업을 하는 이들은 복제된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 상품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능과 생각과 도덕심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 인간복제 기업은 고객들에게 복제인간들이 아무런 뇌 기능이 없는 식물인간 상태로 재배된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들도 차마 복제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인간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기힘들었는지 모르겠다.

다른 어떤 소설에서는 인간복제를 통해 군대를 만들기도 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손아귀에 쥐려는 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를 단순히 소설과 영화 속의 이야기로
만 치부할 수도 있지만, 필자는 얼마든지 가능한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타
락한 본성은 어떤 도구나 기술을 선한 일보다는 악한 일에 먼저 사용하는 경향을
유지해왔다. 구리나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자 보습이나 낫보다는 먼저 칼과 창
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다이너마이트는 땅을 파고 굴을 만드는 일보다 전쟁의 폭약
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비행기의 발달은 전투기에서 더 빠르다. 인공위성, GPS,
인터넷 등은 먼저 군사적인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핵은 에너지보다 무기로 먼저 사
용되었다.

물론 이 모든 기술과학의 발달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이 많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절한 도덕적 기준, 제동장치를 마련해놓지 않는다면, 이들 문명의
발전이 인간을 망치고 인간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기준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현대가 두 세계관사이에 끼어 어정쩡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두 세계관은 유신론, 그리고 자
연주의일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에게 살아갈 기준을
제시하신다는 믿음이 자연스런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세계에서, 현재는 모든 것은
자연적으로 진화에 의해 움직인다는 전혀 다른 사고의 세계로 옮겨가고 있다. 그런
데, 그 사이에서 우리는 불안해한다. 왜냐하면 자연주의에서는 어떤 기준, 도덕성을
찾아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의 시각으로 볼 때, 복제인간을 많이 만들어 내가 필요할 때, 간도 빼다 쓰고, 신장도 빼다 쓰고, 아기를 낳기힘들면 그 복제인간으로 하여금 아기를낳도록 하는 것이 무슨 문제일 것인가?이것이 좀 끔찍하게 느껴진다면, 무슨 이유 때문인가? 실제로 비슷한 일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 시신에서 팔, 다리뼈들을 몰래 잘라내어서 시장에 파는 일이, 현재, 이 미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들에게 시신의 신체일부는 물건, 가치가 꽤 있는 상품이다. 그런 행태가 복제인간의 사업으로 연결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는가? 자연주의의 시각은 뒤집어놓고 보면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인간성을 파멸시키는 태도이다. 히틀러는 자연주의적인 믿음에서 유태인들을 몰살시키려 했다. 그에게 있어, 나쁜 인종은 제거되어야 하고 우수한 인종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대단히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인간을 특별한 존재, 영적 존재, 하나님을 닮
은 존재로 창조하시고, 인격을 불어넣으시고, 자신과 사귀며 사는 존재로 삼으신
그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간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럴 때에라야, 인간배아 줄기세포이든, 인간복제이든 간에, 악한 일로 사용하지 않
고 올바르게, 그 혜택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복제는 두 얼굴을 지닌 야누
스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잘 통제해야 할 문제다.

✎ 김성민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 The Mission 보기 -


“The mission”은 1986년에 만들어진 제법 오래된 영화인데, 최근 다시 한국 개봉관에서 상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영화가 상당히 좋은 영화라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도 이렇게 잘 만든 영화를 보기가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잘 만들었다고 하는 영화에도 자질구레한 군더더기가 있기 마련이고, 심지어 쓰레기 같은 구석들도 있지 않은가?그런데 이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대사 한마디 한마디는 거의 버릴 것이 없이, 모두 다 가슴깊이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다. 그래서이겠지만,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도, 비기독교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이 영화의 첫 장면으로 등장하는 이과수 폭포의 장엄한 광경은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한다. 그 높은 폭포 절벽을 장비도 없이 단신의 몸으로 기어오르는 선교사
를 보고 있노라면 꼭 쥔 손에 땀이 흥건해진다. 또 남미의 토속적인 리듬과 교회음
악을 잘 조화시켜 만든 이 영화 배경음악은 참으로 아름답다. 폭포 위 원주민 마을
에 도착한 선교사가 부는 오보에의 아름다운 선율은 가슴 깊은 곳을 적시는 감동이
있다.그 감동이 선교사들을 잡아죽이던 원주민의 마음을 녹게 만들었다.그 뿐 아
니다.영화 속에 나오는 원주민 소년의 아리아,교회대표를 환영하기 위해 부르는
원주민들의 합창 등은 인종을 초월하여 심금을 울리는 음악의 힘을 잘 드러내어주
고 있다.

예수회 신부로 분한 로버트 드 니로와 제레미 아이언즈의 섬세한 연기는 참으로
일품이다.두 사람 모두 아주 강한 얼굴 인상을 지닌 배우인데,신부, 선교사의 역
에 잘 어울리게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로버트 드 니로는 영화초반에 냉
혹한 노예상으로도 연기해야 했는데,정반대의 두 역할을 잘 소화해 내었다.특히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로드리고의 회심 장면은 참 인상깊다. 그는 자기가 죽이
고 노예로 팔아먹던 원주민들에게 용서를 얻기 위해, 자신의 옛 물건들을 다 싸서
굵은 밧줄로 몸에 동여맨 후, 폭포를 오르고 험난한 산길을 오르내려 그 원주민 마
을로 간다.용서의 표로 원주민이 그 밧줄을 끊고 짐을 물에 던져버리자,그는 진흙
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우는듯 웃는듯 흐느낀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냉혈한에서성자의 모습으로 바뀐다. 같은 사람이 그렇게 바뀔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다른 얼
굴이다. 죄의 무거움을, 또 구속의 희열을 시각적으로 실감있게 느낄 수 있게 해주
는 장면이다.

원주민들의 연기도 참 자연스럽다. 영화에나오는 원주민은, 실제 현재 그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놀랍다. 아무런 배우교육을 받지 않은 그들이,어찌 어색한 표정,뻣뻣한 동작 하나없이 매끄럽게 연기해낼 수 있었을까? 하기야 나무를 오르내리고 맨발로 뛰어다니고 급물살을 헤치고 카누를 젓고 하는등 정글의 삶을 원주민이 아닌 사람들이 연기했다면 더 어줍잖았을지도 모르겠다.이러한 장엄한 광경, 아름다운 음악, 감동적인 장면들을 만끽할 수 있는 한편, 우리는 이 영화에서 아주 무거운 신앙의 한 주제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악에 저항하
는 크리스챤의 합당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는 18세기 남아메리카의 과라니 원주민 마을에 일어났던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했다고 한다. 당시 남아메리카를 지배하던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그들의 지배영역을 조정하면서 원주민 마을에 위기가 닥쳐왔다.그곳은 원래 스페인 지역이었는데,포르투칼 영으로 바뀌면서 원주민들이 노예로 잡혀갈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당시,스페인은 노예사냥을 금지하고 있었던 반면,포르투칼은 이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런데이곳은, 예수회 소속 신부들이 선교사로 와서 어렵사리 교회를 세우고 원주민들을 교화시켜가고 있던 원주민 보호지역이었다. 그선교사들은 로마 교회의 대표로 와있는 주교에게, 그 지역을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유지시켜달라고 호소한다.하지만 그 간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총과 대포를 앞
세운 군대가 원주민 마을을 소탕한다. 선교사들은 원주민들과 함께 그 곳을 지키다
모두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스페인, 포르투칼의 연합군대에 맞서 저항하는 방법의 선택에 있어, 선교
사들은 두 방향으로 나뉜다.한쪽은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즈가 연기했다)가
선택한 비폭력 평화의 행진이었다.다른 한쪽은 나머지 신부들이 선택한,로드리고
로 대변되는,무장 방어전쟁이었다.이 선택에 있어 가브리엘과 로드리고는 심한
갈등을 겪는다.로드리고에게 있어서,정의를 위해 칼과 총을 드는 것은 필요한
것이고 또 정당한 것이었다.하지만 가브리엘에게 있어,어떤 이유로든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하던 그 모든 노력을 헛것으로 만드는 배반행위
였다.누가 옳은 것인가?절대적 평화주의와 무장방어전쟁. 우리는 이 두 길 중 어
떤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절대적 평화주의의 근거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찾을 수 있다. “악한 자를 대
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태복음 5:39)”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면서 당신의 이 말씀들을 몸소 실천하셨다.
이 태도는 간디의 무저항 불복종 운동,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저항운동,또 우리
나라 3.1 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하지만, 많은 주석가들은 이 말씀이 악과 타협하고 그것을 용인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선 안된다고 해석한다. 위의 말씀은 개인적으로 원한을 품고 복수하는 것을 금하고계신 것이지,악을 다스리는 공권력–경찰,법원 등–의기능을 필요없다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도,상대의 유익을 위해,증오심이 없이 섬기려는 마음으로, 악에 대해 경계하고 저항하는 것까지 금지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확대하여 소위 의로운 전쟁의 개념도 제시되었다.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회질서 유지와 국가 수
호를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는 최소한으로, 분별해서, 방어적으
로 수행하는 전쟁을 지지하는 것이다.그러나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무고한 생명
이 손상을 당하고,폭력적이고 부당한 행위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어쩌면 의로운
전쟁이란 다소 이상적인 설정일 수도 있다.

선배들 중에서도 어느 한쪽에서 시작하여 다른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평화냐 무장항거냐 라는 문제는 어려운 주제이다. 영화 속에서 가브리엘 신
부도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아주 감동적인 말을 하는 가운데 약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그는 로드리고에게 이렇게 말했다.“무력이 옳은 것이라면, 이 세상에 사랑
이 설 자리는 없어지네.나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네.”라고. 그런데 그
두 문장의 중간에 “아마 그럴거야, 아마 그럴거야”라고 되내인다. 그도 완전히 절
대적 평화주의에 대해 확신하지는 못했던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방어를 위한 전쟁은 그래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말미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을 비교해보면,로드리고 등의 방어전쟁보다 가브리엘이 선택했던 무저항 평화행진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것을 느끼게된다. 적어도 그는 원주민들을 살육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큰 가책을 느끼도록영향을 주었다.그런 의미에서 본다면,역시 가브리엘의 평화주의가 로드리고의 무장저항보다 우선되어야 하지 않나 추측해본다.

어쩌면 우리의 대다수는 이런 고민을 할 정도의 수준도 안될 것이다. 영화 속에
는 다른 크리스챤들의 모습도 있는데, 오히려 이들의 모습이 현재의 우리 자신의
수준일 수 있다. 먼저 신앙세계도 정글의 세계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두 노예상인들
이 있다.정글의 법칙이 무엇인가?그것은 약육강식이다. 이들은 교회를 들먹여 자
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교활한 신앙인이었다. 한편, 신앙양심을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압박에 굴복하여 많은 원주민과 신부들의 생명을 노예상인들의
탐욕스런 손에 넘겨준 주교가 있다.그는 비겁한 신앙인이었다.이들은 모두 진지
하지 못한 신앙인들이다.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신앙에 진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교활한 신앙인이나 비겁한 신앙인만은 안되었으면 좋겠다. 대
신 평화의 모습으로든 의로운 저항의 모습으로든, 가브리엘이나 로드리고처럼 악에
대해 용기있게 맞서는 신앙인으로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크다. ✎김성민

 

예정, 그리고 믿음
The Truman Show 그리고 Stranger than Fiction 보기


십여년 전, 한 신앙의 선배가 “The Truman Show”를 볼 것을 권하셨다. 이 영화를 통해, 스스로 계획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당신의 삶이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이끌 어 오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그래서 감동스러웠다고 하셨다. 그런데 솔직히 필자는 이 영화에서 그런 감동을 느끼 지 못했다. 오히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세지가 그 선배께서 느끼신 감동과는 정반대의 것이 아닌가 하고도 여겨졌다.


이 영화는 태어날 때부터 아주 큰 방송 스튜디오 안에서 사는 한 사람, Truman 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스 튜디오는 너무나도 크고, 실제 마을처럼 꾸며놓았기 때문에, Truman은 그곳이 기 획된 세상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Truman의 기획된 삶은 환경에 그치지 않았 다. 아내, 직장, 이웃, 아버지의 죽음 등 모두가 다 기획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 전체는 TV 드라마로 방송되고 있었다. 그런데, Truman이 자신의 삶에 뭔가 이 상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점점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그 모든 것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영화의 말미에서 Truman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스튜디오를 탈출 한다.


그 종결을 보면서 필자는, 이 영화가 어떤 짜여진 틀에서 탈출하는 인간성의 승리를 홍보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 속박에는 종교, 하나님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영화를 보는 이들이, 필자의 선배가 느낀 감동과는 다른 해석을 많 이들 하지 않을까 추측하였다.


최근 Stranger than Fiction 이란 영화를 보 았다. The Truman Show도 좀 기괴한 내용이 었는데, Stranger than Fiction 의 이야기는 더 황당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두 영화 다 코메디언을 주인공으로 썼다. 내용은 전혀 코메 디가 아닌데.) Stranger than Fiction의 주인공 은 IRS 에서 근무하는 세무원 Harold이다. 그 의 삶은 온통 숫자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그 것 밖에 없었다. 칫솔질도 몇십번으로 딱 정해져 있고, 출근시간, 버스를 타는 곳까지곳까지 걷는 발걸음 수도 정확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다른 삶은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 었고, 취미도 없고 휴가도 전혀 가지 않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노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뒤흔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어느날,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대로 낭독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 리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그 소리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 고 있는지 조차 알아내어 낭독을 했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실제, 그 낭독자는 소설가였다. 그녀가 쓰고 있는 소 설의 주인공이 Harold였고, 그 소설의 내용이 그대로 Harold 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설가의 한 가 지 특징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마지막에 모두 죽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신의 현재를 그대로 낭독하는 소리를 이상스럽게만 여기고 있던 Harold는, 소설가의 한마디 언급에 기겁을 한다. 그녀가 무 심코 Harold가 일주일 후에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버린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낭독소리를 듣고만 있을 수 없게된 Harold는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삶을 써가고 있는, 또 자기를 죽게 하려는, 그 소설가를 찾아낸다. 그리고 자신에 대 한 소설초고를 얻어낸다.


하지만 Harold는 그 소설가를 찾도록 도움을 준 한 문학교 수에게서 절망스런 얘기를 듣게 되는데, 그 교수의 말로는 소설 속에서 자신은 죽어 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소설이 제대로 종결되려면 소설가가 쓴대로 자신이 죽지 않 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 조언에 망연자실하던 Harold는 종국에 그 조언을 받아들인다. 소설가에게 그 초고를 다시 넘겨주면서 그 소설 속의 자신의 얘기가 참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획했던 대로 소설을 마치라고 한다. 자신을 죽이라고 한다.


The Truman Show와 Stranger than Fiction 두 영화 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한 사람, Truman은 그 삶에서 탈출했고, 또 다른 한 사람, Harold는 그의 예정된 삶, 심지어 죽음까 지 받아들였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을까?


그 들에게 계획된 삶을 비교해보면, Harold의 것이 더 안좋은 결과인데도, 왜 Truman은 거부한 반면 Harold는 그것을 수용하게 되었을까?


필자는 한 가지 이유 밖에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삶을 예정한 자에 대한 믿음 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기획한 자의 의도에 대한 신뢰의 차이이다. Truman은 자신의 삶을 기획한 PD의 의도가, 자기를 이용하여 시청율 높은 드라마 를 만들고 그것으로 광고수입을 올리려는 것임을 알았다 – PD 당사자는 기필코 그 의도가 아니라고, 대신 Truman을 스타로 만들고 행복하게 해주려는 것이라고 핏대 를 높이며 주장했지만. 한편, Harold는 자신에 대한 소설을 읽으며, 그 소설가가 자 신의 무미건조한 삶을 의미있는 삶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한 여인을 사랑 하게 되었고, 어릴 적부터 하고 싶었던 꿈인 기타도 시작하게 되었다. 앞으로 일어 날 일 중에는 친구의 꿈을 이루도록 돕는 역할도 있었다. 비록 그리 대단하게 영웅 적인 죽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죽음도 꽤 괜찮았다. 바로 이 점, 즉 자신의 예정 된 삶의 의도, 그 삶을 기획한 설계자에 대한 신뢰 의 차이가 두 영화의 결말을 다 르게 만들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신앙의 주된 주제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가늠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예정론은 여전히 잘 납득이 안되는 영역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들을 창 세전부터 정해놓으셨다는 구원예정론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개인의 삶을 하나님 께서 미리 정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부분에 이르면 좀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해석은 일단 제쳐놓자. 자신의 삶만을 놓고 생각해보아도 하 나님의 작정의 명제가 안겨주는 당황스러움은 충분하다. 굴곡이 많았던 지난 날의 일들이 다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진행되어 왔던 것인가? 현재 겪고 있는 이런저런 어려움과 시련도 하나님의 의도인가? 내가 원하지 않은 일들은 자꾸 생기고 정작 바라는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야 하는가? 미 래를 두고 생각해보면 겁부터 난다. 어떤 내일을 하나님께서는 내게 예정해 놓으셨 단 말인가? 혹 전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상황이 전개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Harold처럼 곧, 갑작스레 나의 삶이 끝나버리는 종결이 예정되어있다면, 과연 나는 이를 수긍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를 두고, 우리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떠날 수도 있다. Truman처럼 탈출하 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Harold 가 그랬던 것처럼. 그 차이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통해 나로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하실 것이 라는, 그 분의 의도에 대한 신뢰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 하셨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들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그리 달가운 일들이 아 니었음을 알게된다. 그것은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이었다 (35 절).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려운 일들을 통해 그 분이 의도하시는 목적 이 선한 것이라는 믿음을 지녔다. 그 믿음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세계를 바꾸는 위 대한 선교사가 되게 하였다. 같은 믿음을 많은 신앙의 선조들에게서 발견한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에 순종하여 자신의 외아들을 제단에 바치는 아브라함에게서, 형제들에게서 버림받 고 13년간이나 노예로 죄수로 전전하며 살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했던 요셉에게서, 40년 동안 그 변덕스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생활을 이끌면서도 한 마디 불평하지 않았던 모세에게서, 질투심에 불타는 사울을 피해 십수년 동안 도망자 생 활을 하면서 수많은 믿음의 시와 찬양을 남긴 다윗에게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 을 통해 선을 이루어 가시리라 신뢰하는, 동일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더 나아 가 , 우리는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에게서 그 믿음의 절정을 본다. 온 인류의 죄 를 지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 무서운 일을 예수님께서는 끝내 순종하여 받아들이 셨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선을 바라보셨기 때문이었다. 내게 이런 믿음이 있는가 자문해본다. 당연 그렇지 않다. 하지만, 신앙의 선조들 이 모범을 보인 그 믿음의 부스러기 티끌이라도 내게 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믿 음은 과정인 것 같다.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도 과정을 통해 그 큰 믿음의 분량까지 자랐다. 비록 현재 우리의 믿음이 그 분들에게 비교할 때 턱도 없는 수준이겠지만,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자라가길 소망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던지, 어떤 내일로 이어지던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하 며 순종하는 분량에까지 다다르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김성민

 

숨겨진 생명 찾기- "Awakenings" 보기 -


의사의 기본 임무가 생명을 살리는 것이지만, 사실 이 는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의사의 역할이 그 저 죽어가는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켜주거나, 겨우 몇 개 월 혹은 몇 년 생명을 연장시키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병을 호전시키는 일조차 쉬운 것이 아니다.외과질 환인 경우에는 수술을 통해 빠른 시간 내에 병을 해결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성질환을 주로 다루는 내과의 사는 대부분 오랜 시간 병을 조절해주는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필자의 전공도 내과이긴 하지만 세부전공이 감염질 환이라, 그래도 극적으로 호전되는 질환을 종종 경험하는 편이다.감염질환은 급성인 경우가 많고,또 항생제 등 치료제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세균성 뇌수막염에 걸렸던 10대 후반의 학생이다. 필자 가 전임의 수련을 받던 시절,그 학생은 밤늦게 응급실로 실려 왔었다.온몸이 불 덩이같이 뜨거웠고 의식이 전혀 없었다. 급성 세균성 뇌수막염으로 판단하고 진단 검사와 동시에 급하게 치료를 시작하였다. 밤중이라 혼자 환자들을 감당하느라 이 리 뛰고 저리 뛰다가 잠시 눈을 붙였다.몇 시간이나 잤을까,다음날 아침 환자의 병실을 찾았던 필자는 깜짝 놀라 자빠질 뻔 했다. 그 환자가 깨어나서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망률이 절반이 넘는 질환이지만 잘 치료하면 살릴 수 있다고 는 생각했는데,그렇게 빨리 호전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아마도 항생제와 함께 투여한 스테로이드의 효과가 있지 않았나 추측되었다. 뇌수막염의 치료에 스 테로이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선 이견이 있지만, 혼수상태나 심한 신경학적 부작 용이 있는 경우에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사용했었다.


또 극적인 치료효과를 본 한 환자는,알콜중독으로 간경화에 걸린 환자였다.의 식이 혼미해져서 필자가 전문의로 근무하던 병원의 소화기 내과에 입원했었다. 간 경화 환자에서는 간성혼수가 흔하게 오기 때문에 그렇게 치료를 하다가, 열이 나는 것이 이상해서 감염내과에 의뢰를 해왔다. 필자는 환자의 혼수가 단순한 간성혼수 가 아닌 것 같았다. 혹 진균성(Cryptococcus) 뇌수막염이 아닌가 추측했다. 이 합 병증은 주로 AIDS 환자 등 면역기능이 결핍된 환자에서 자주 발생하는데, 우리나라에 서는 간경화 환자에서 가끔 발생한다는 것이 보고되었었다. 간경화 환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서구에서는 아직 보고가 되지 않은 자료였다. 검사결과 환자는 크립토코쿠스 뇌수막염으로 진단되었고,항진균제로 치료받은 후 의식을 회복하였다.


영화 "Awakenings"는 아주 희귀한 극적 치료효과를 경험한 의사가 쓴 실화소설 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저자는 Oliver Sacks라는 분인데, 현재 Columbia대 신경 과 교수로,그가 젊은 의사시절,Bronx의 한 만성질환자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경험했던 일을 적었다. 영화 속에서는 Dr. Sayer로 등장하는데, 이 역을 Robin Williams가 연기했다. 그의 어리숙해 보이면서도 열정적인 캐릭터의 의사연기가 참 일품이다.


그 병원은 만성 신경질환자들을 그냥 수용하고 수발들어주는 정도로 돌보고 있었다. 이미 신경에 심각한 손상이 온 환자들에게서 어떤 치료효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가능 성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Dr. Sayer는 몇몇 환자에서 이상쩍은 반응을 관찰한다. 아무런 표정도 없고 전혀 움직이지도 못하는 한 환자가 떨어지는 자신의 안경을 순간 적으로 줍는 것을 본 것이다.또 그 환자에게 공을 던져보니,그녀가 그 공을 붙잡는 것이 아닌가. Dr. Sayer를 이 관찰을 다른 환자에게도 적용해본다. 그랬더니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환자가 십 수 명이나 나타났다. 그 중에는 Leonard Low라는 남성도 있었다 (이를 Robert De Niro가 연기했는데, 그의 환자 연기는 정말 실감난다). Dr. Sayer가 계속 관찰해본 결과, 그들이 어떤 특정 자극에 의식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떤 이는 음악을 들으면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어떤 이는 누군가의 부 축을 받으면 걷기 시작했다. Leonard는 자기 이름을 부르면 뇌파검사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Dr. Sayer는 결론짓는다. 그들의 뇌는 완전히 마비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생각하고 있고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다.그들은 살아있다!


Dr. Sayer는 관찰에 그치지 않았다. 속에서는 살아있으면서도 바깥으로는 전혀 표정도 움직임도 없는 이들,이들의 공통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고들어갔다.그 들의 기록을 뒤지고 뒤져 찾아낸 그는 어떤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은 모두 한 때 유행했던 기면성 뇌염 (Encephalitis lethargica)을 앓았던 적이 있었다. 그들의 현 재 문제는 그 병의 합병증이었던 것이다. Dr. Sayer의 열정은 이에서 머무르지 않 았다.치료약을 찾아 나섰다.마침 파킨슨증 (Parkinsonism)의 새로운 치료제로 개 발되었던 L-Dopa라는 약에 그는 집중했다. 자신의 환자들은 파킨슨증 환자가 아니 었다.그렇지만 그 증세에 유사한 점이 많다는 점을 간파했다.병원관계자들을 설 득하고 부모를 설득해서 Leonard에게 L-dopa를 시도한다. 점점 용량을 올려가던 어느 날 밤, Leonard는 30년이 넘는 긴 마비에서 깨어난다. 다른 유사증세 환자들도 L-dopa에 같은 극적인 효과를 보였다. 수십 년 간의 무표정, 무감각, 무동작의 상 태에서 깨어나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뛰어다녔다. Dr. Sayer는 숨어있던 생명들 을 세상으로 불러내었다. 아쉽게도 L-dopa의 효과는 지속적이지는 못하여 얼마 후 Leonard를 시작으로 Dr. Sayer의 환자들은 다시 마비상태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 나,잠시 동안의 소생이었지만,그 환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 라 믿는다.적어도 그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주위사람들에게 알려주었으니까.


Dr. Sayer의 이 체험은 그 어떤 의사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극적이고 특별한 종류였음에 틀림없 다.앞서 소개한 필자의 경험은,기존에 알려진 지식을 적절하게 사용하였거나, 잘 알려져 있지 는 않았지만 다른 이보다 먼저 취득한 정보를 적 용해서 얻어낸 효과였다. 그런데도 필자에게는 참 큰 기쁨을 주었다. 그런데 Dr. Sayer는 아무 도 관심을 주지 않는,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 로 취급받던 환자들에게서 소생의 가능성을 찾아내고,새로운 질환군을 밝혀내고, 또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약을 시도하여 그 생명을 살려낸 것이었다. 그것 도 십 수 명을 한꺼번에.또 수 십 년의 공백을 깨고.그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 는 것이었으리라.


Dr. Sayer가 행운을 잡았다고 볼 수도 있다. 우연히 같은 문제를 가진 환자들이 모인 곳에서 일하여 그 문제를 파악해낼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다행히 극적 효과를 나타내는 약을 만날 수 있어 그런 경험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그의 관찰은 대단히 세심했다.그리고 그 관찰 을 잘 기획된 실험을 통해 더 구체화시켰다. 그리고는 관찰과 실험결과를 어떤 가 설로 엮어내었다.대단히 치밀한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문제들을 접근해갔다.그리 고 치료약을 알아보는 직관력을 지녔다. 무엇보다도 환자들을 살려내겠다는 신념에 열정적이었다.환자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대단했다.Dr. Sayer의 이런 요소가 일 반적인 의사로서는 도저히 경험해보지 못하는 극적인 치료효과를 그로 하여금 맛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필자는 믿는다.


가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대하셨던 방식을 보면서 참 의아스럽게 생각하곤 한 다.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기준으로 사람들을 보셨다. 권세가들, 학자들, 부자들, 명망가들, 이런 이들을 그리 좋게 보시지 않는 경향이 있 으셨던 반면, 가난한 이들, 소경, 거지, 문둥병자들, 창녀들, 세리들, 손가락질 받는 이들, 소외받는 이들, 죄인들, 아무도 좋게 보지 않는 이들을 가깝게 대하셨다. 어찌 보면 그 사회에서 죽은 자로 살아가던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관심을 보이셨다.


왜 그러셨을까?그들 속에 숨어있는 생명을 아셨기 때문이 아니셨을까?가진 자, 높은 자,잘난 자 속에는 있지 않은,오히려 못난 이, 천한 이, 궁핍한 이들 속에 숨 겨진, 아직 살아있는, 아니 다시 살기를 열망하는 생명을 바라보셨기 때문이 아니셨 을까? 예수님이 만나셨던 사람들의 변화를 보면 그런 추측에 더 확신을 갖게 된다. 작은 어촌의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 그러나 그의 숨겨진 생명이 예수님으로 인해 깨어났을 때,그는 초대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창녀였던 마리아는 예수님 으로 인해 그 삶이 변한 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순간까지 같이하는 마지막 사람 이 되었다. 난쟁이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 에서 큰 손의 기부자로 바뀌었다.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도록 살기등등했던 사울 은 예수님을 만난 후,세계 역사를 바꾸는 전도자 바울이 되었다.예수님의 숨어있 는 생명에 대한 안목은 정말 탁월하셨다.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예수님처럼 숨겨진 생명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또 그 분처럼,그 생명들을 단번에 불러일으키고 살릴 수 있는 능력도 없다.하지 만 Dr. Sayer 처럼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죽었다고 생각한 채 그냥 포기하지 말고,그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실험해보고,연구해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그들을 살릴, 그들의 숨겨져 있을 수도 있는 생명을 깨울만한 어떤 방안을 찾아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 중 다는 아니어 도, 단지 몇이라도, 혹 그들의 숨겨진 생명이 깨어난다면 그 얼마나 짜릿한 경험이 되겠는가?표정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하던 이들이,죽었다고 생각되어졌던 이들이, 일어나 웃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는 것은 그 얼마나 감격스런 일이겠는가? 아 무쪼록 우리 주위에 Dr. Sayer의 경험이 자주 재현되기를, 숨겨진 생명을 찾아 소 생시키는 극적인 체험이 빈번하게 일어나길 기대하는 마음이 크다.


✎ 김성민

 

희생의 가치 -"괴물" 보기-


이 영화의 영어판 제목은 “The Host” 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여러 차례 본 후에야 그 제목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의학용어로, Host는 기생충이나 세균, 바이러스 등을 몸 속에 지니고 있는 숙주생물을 말한다. 이 영화에서 괴물이 발견 초기에 미확인 바이러스의 숙주라고 오인되었었다. 그 괴물에 공격을 받은 한 미군병사가 심한 피부병변을 일 으켰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영어제목을“The Host”로 한 것 같은데,필자는 오히려“The Monster”가 더 적당하 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서 괴물과 바이러스 와의 관계는 핵심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이 영화는 한국영화 흥행1위를 기록한 영화이다. 일천삼백만이 영화관 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하는데, 이는 한국민 전체의 20%를 넘는 숫자이다. 만일 DVD나 인터넷으로 영화를 본 수를 감안한다면 한국의 어른이면 거의 모두가 이 영 화를 보지 않았나 여겨진다.필자도 이 영화를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또, 필자의 둘째아이 Esther는 이 영화가 지금까지 본 영화 중 최고라고 까지 평가했다. “괴물”을 보면서 왜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이제 독자들 께서 필자의 성향, 즉 영화를 쪼개어 분석해보는 버릇에 대해 익숙하리라 여겨진 다. 때로 이런 작업이 간단한 것을 복잡스럽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필자는 이런 분석이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이를 통해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깨우 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시나리오 외적인 요소를 살펴보자.두달 전 살펴보았던 한국영화“집으로” 와는 달리 “괴물”에는 유명배우들이 꽤 등장한다. 그 중 괴물에게 납치된 소녀의 아버지로 연기한 송강호씨는 한국의 최고 배우 중 하나이다. 그리 잘 생기지는 않 았기에 한류 스타에는 끼이지 못하는지 모르겠다.하지만 그의 연기는 일품이다. 필자는 송강호씨를 “넘버 3”라는 영화에서 처음 보았는데, 그의 코믹한 연기에 배 를 잡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필자가 알기론 송강호씨는 전문적인 연기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아마도 그는 타고난 배우인가 보다.다른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송강 호씨는 이 영화에서도 뛰어난 연기를 보였다. 심각해야할 곳에서는 심각하고 웃겨야 할 곳에서는 적절하게 웃겼다. 연기파 배우의 매끄러운 연기가 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요소일 것이다.


두번째로 이 영화의 성공에는 섬세한 특수효과가 한몫을 했다고 믿는다. 필자가 듣기로 이 영화 제작팀은 괴물의 모양을 만들어내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모습을 최종 결정하기까지 2000개의 시안을 시도해보았다고 하니까. 또 이 영화의 컴퓨터 그래픽은“Spy Kid 3‐D”, “The Day After Tomorrow”, “Superman Returns”, “Pirates of the Caribbean” 등의 컴퓨터 그래픽 을 맡았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 에서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영화의 특수효과는 세계 최고의 수 준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 살펴보면, 필자는 “괴물”이 영화에서 만끽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미 요소들을 한꺼번에 축약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믿는다. “괴 물”은 기본적으로 공포영화이다.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이 영화는 또한 웃긴 다. 사실 영화 전체를 통해 웃기는 장면이 심각한 장면과 구분이 안되게 섞여있다. 예를 들어 장례식장 장면을 살펴보자. 그 장면은 장례식장에서 예상되는 전형적인 분위기로 시작한다.괴물에게 납치된(잡혀 먹어 죽었다고 생각되는) 소녀의 고모와 삼촌이 도착하면서 온 가족이 울기 시작한다. 하지만 곳이어 이 장면은 법석을 떠 는 코메디(가족들이 바닥에 쓰러져 뒹구는)와 웃기는 상황 (주차관리인이 차를 잘못 세워놓았다고 한 피해가족을 나무라는) 으로 연결된다. 또다시 심각한 분위기 로 변하나 싶더니, 곧 웃기는 장면 (방역공무원이 피해가족에게 바이러스 감염을 경고하는) 으로 바뀐다. 계속되는 이런 구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를 동시에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두번째로,이 영화는 많은 사회적인,또한 정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괴물 은 주한 미군이 불법적으로 한강에 방류한 독극물에 의해 태어난 돌연변이이다. 또 한 장면에서는, 자기 딸이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아빠에 대해 마치 이해하는 척하면서, 그를 바보로 만들고 실험대상으로 사용하려는 미국의 한 관리를 보여주 고 있다.이런 장면들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증가하고 있는,특히 지난 10여년간 좌 파정권 아래에서 급증한,반미감정을 대변하고 있다.또한 이 영화는 또한 생명을 구하는 데에는 별 관심도 없고 그저 뇌물을 챙기는 거만한 공무원들을 보여주고 있 다.이 영화는 아직 한국사회에 남아있는,좋아지고 있다고 믿지만, 잘못된 관료주 의를 비판하고 있다.아울러 이 영화에서 우리는 대졸 실직자들의 좌절을 본다.괴 물에 납치된 소녀의 삼촌은4년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얻지 못해,그 분노를 달래기 위해 술에 절어 사는 젊은이이다. 이 영화는 한국의 여러 가지 사회정치적 인 문제를 풀어놓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고 있다.


세째로,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가족의 짙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괴물에 납치된 소녀의 할아버지, 아빠, 삼촌, 고모 등 가족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들이 가진 재산 전부를 쏟아 부었다. 경찰에 쫓기고 괴물과 맞서는 위험에 빠지는 것 을 마다하지 않고 구조에 나섰다.그 과정에서 할아버지는 생명을 잃기도 했다.이런 진한 가족애가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주요 요소 중 하나였다고 믿어진다.


위에 열거한 영화의 성공요소들에 필자는 한 가지를 더 덧 붙이고자 한다.그것은 영화의 종결부분이다.이 영화는 소녀 의 죽음으로 끝난다. 필자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 소녀가 생존한 채로 구조되길 바랬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괴물” 의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 속에서 그 소녀를 죽이고 있다. 왜 그랬을까?아시는 분이 있겠지만,사람들은 슬픈 이야기에 보다 감동을 받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울 때에 모종의 씻 겨지는 느낌,깨끗하게 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이를 카 타르시스라고 하는데, 카타르시스는 웃거나 재미있는 것을 즐길 때보다, 큰 슬픔이나 동정을 경험할 때 오히려 더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이 때문에 많은 연극과 영화들이 슬프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이 영 화의 작가도 그 효과를 노렸음에 틀림없다


하지만,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슬픈 종결이 아니다.필자가 더욱 인상깊 게 생각한 것은, 이 영화가 그 소녀가 한 꼬마를 살리기 위해 대신 희생되는 것으 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는 점이다. 소녀는 그 집 없는 꼬마를 괴물이 먹이를 모아 놓던 장소에서 처음 만났다.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가족이 아니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는 꼬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했다. 소 녀의 아빠가 괴물의 목구멍에 걸려있는 딸의 몸을 꺼내었을 때, 그 소녀는 꼬마의 몸을 감싼 채 숨져있었다. 소녀의 몸은 괴물의 날카로운 이빨이 꼬마를 다치지 못하 게 하는, 또는 괴물의 식도가 꼬마의 숨을 멈추게 하지 못하게 완충을 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소녀가 꼬마를 감쌀 때,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았을 것이다.그럼에도 소녀는 꼬마를 구하기 위해 그리했다.관객들이 눈치를 못했을 지도 모르지만,이 소녀의 희생이“괴물”을 감동적인 영화로 만드는 주요 요소 중 하나라고 필자는 믿는다.그리고 이런 종결이 관객을 감동시킬 것을 알고,영화의 시나리오 작가가 일부러 집어넣은 요소라고 생각한다.


사실,희생은 반가운 단어가 아니다.그것은 일종의 고통을 연상시킨다. 그 단어 는 우리의 본능에 잘 맞지 않는다. 우리의 본성은 그 단어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 이길 거부한다.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길 원치 않는다.오히려 적 은 투자로 많은 것을 얻으려 한다. 무언가를 줄 땐 적어도 비슷하게 받기를 원한 다.그것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본원칙이다.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의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면 우리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희생에 대 해 감동을 느낀다.우리는 사회에 기부하는 사람들,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 들,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왜 그런가?그들의 희생을 찬양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인가?아니면 그들의 희생 때문에 우리가 어떤 유익을 얻기 때문인가?필자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만일 그것이 단지 교육의 효과이거나 일부가 이를 통해 어떤 이익을 얻기 때문이었다면, 희생의 가치가 오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 올 수 없었을 것이라 믿는다. 만 일 그렇다면, 사람들은 희생이 부자나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 을 이용해 먹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희생의 가치는 인류역사에 서 곧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그 가치는“괴물”과 같은 최신 영화에서도 아직 사 용되고 있다.희생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감동을 주는 가치이다.희생은 그렇게 생 각하도록 교육되어지거나,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가 아니다.그것은 하나님 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간직하고 실행하길 원하시는 가 치이다.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거저 나누어주고,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라고 가르치는 교훈으로 가득차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교훈들을 따르는 데 늘 실패한다는 것이다. 오직 소수의 사람 들만이 이 가치를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가끔 우리도 희생적인 행동을 하는데 성공하지만,그 순간은 무척 짧다.우리는 희생적인 삶을 지속할 만한 능력이 없다. 하지만 필자는 적어도 우리가 그런 희생적인 삶에 대해 여전히 감사해 할 수는 있 다고 믿는다. 또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희생적인 가치를 실천하는데 조금이나마 도 움을 준다고 믿는다.


여기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희생이 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한 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예 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분명 예수님 자신을 말한다.그리고 친구는 우리이다.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생각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셨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라 불릴 자격 이 없다.우리는 죄인이다.예수님께서는 친구라고도 할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자 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셨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고.


우리가 “괴물”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의 희생적인 죽음에 대해 감동한다면, 예 수님의 우리 생명을 구하기 위한 희생에 대해서도 감동할 수 있는 것이 합리적이라 고 필자는 믿는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불공평하다.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의 크신 사랑, 위대한 희생 아래 굴복하는 것을 머뭇거리게 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만일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친구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적 어도 그 분의 희생에는 감동할 수 있길 바란다.그 분께 나아오길 바란다.또한 믿 는 우리들도 그 분의 사랑에 늘 감사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 그 분의 희생에 적합 한 감사를 돌려드리길 원한다. 비록 우리가 아직 희생적인 삶을 살고 있지 못할지 라도, 누가 아는가? 그 분의 희생에 대해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혹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씩이나마 닮아가게 될런지.


✎김성민

 

야망인가,비전인가? ‐Ratatouille(라따뚜이) 보기‐


‘Ratatouille’(라따뚜이) 는 프랑스어라 그 의미를 금 방 알기가 어렵다. ‘Ratatouille’(라따뚜이) 는 남부 프랑 스에서 발달한 전통음식으로, 여름날 신선한 야채로 만 들어지는 가난한 농부들의 식사라고 한다. 어떤 이가 ‘Ratatouille’(라따뚜이)가 쥐를 의미한다고 해서 의아해 한 적이 있었다.너무 평이한 제목 같았기 때문이다.이 영화가 쥐를 소재로 하긴 했지만, 누가 이렇게 잘 만든 영화에 그토록 의미없는 제목을 달겠는가?


‘Ratatoille’(라따뚜이) 는 아주 호평을 받은 애니메이 션 영화이다. 2007년 애니메이션 부문 아카데미상을 포함한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대부분 이 영화를 좋아 하리라 믿는다.그런데 필자는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필자도 이 영화가 정교한 그림으로 구성된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도 재미있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가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데는 몇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필자는 음식에 대해 그리 까다롭지 않고 별로 관심이 없다. 필자는 영화속 아버지 쥐의 음식에 대한 의견, 즉 “음식은 연료일 뿐이다”라는 말에 동의한다. 라 면이면 필자에겐 충분히 족하다. 이 영화는 ‘레미’라는, 맛에 대해 특출한 재능을 지닌 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가 음식에 대해 까다로운 것은 할 수 없는 일일 것 이다.하지만 그가 그의 종족,쥐들이 왜 쓰레기 음식을 먹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필자도 동족, 즉 인간들이 왜 음식에 대해 그리 까탈스러운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필자가 이 영화를 별로라고 생각하는 두번째 이유는, 이 영화의 이야기 구성이 어색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레미가 요리사가 되는 꿈을 품 고 결국 그 꿈을 이룬다는 것이다. 좋은 내용이다. 하지만 필자가 대단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레미가 쥐의 세계가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요리사가 된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시켜왔다. 하지만 그 동물들은 그저 의인 화된 것이었고,그 영화들의 내용은 주로 그들의 세계,즉 동물의 세계에 국한되어있었다. 이 영화는 동물의 세계 와 인간의 세계 사이의 구분을 뛰어넘고 있다. 쥐가 인간세계에 들어와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식 당의 요리사가 되어 인간들에게 음식을 만들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실제 쥐가 우리를 위해 음식을 요리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이 영화가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을 안다.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이 영화가 좀 지나치게 이야기를 구성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레미가 인간 친구인 링귀니를 도 와 요리를 하도록 하는 장면을 보자. 링귀니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이 그의 팔을 움직이게 한다고?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필자는 이 영화 이야기 작가가 억지로 동물세계와 인간세계를 연결시키려다보니 너무 많은 부자연스런 요소들을 포함시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쥐대신 차라리 로봇을 등장시 켰다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앞서 열거한 이유들보다 정작 필자가 이 영화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진짜 이유 가 있다.그것은 이 영화의 메세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이 영 화의 주제는 예고편에 나오듯이, “꿈을 크게 가지라. 그리고 모험을 기대하라.”라고 할 수 있다.좋은 메세지이다.특히 젊은이들이 가슴에 품을 만한 슬로건이다. 하지 만 필자는 꿈에 대한 이런 격려가 그 다른 측면과 더불어 약간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영화에서 레미는 자신의 꿈에 대해 아버지와 말다툼을 한다. 그의 아버지는 레미 의 꿈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쥐는 인간 근처에는 얼 신 거리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심지어 쥐덫에 잡혀 달려있는 동료들을 레미에 게 보여주기도 했다.하지만 레미는 아버지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그는 아버지 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전형적인 다툼이다.) 하지 만 이 영화의 포스터를 한 번 보기 바란다. 여러 개의 칼이 날아와 거의 레미를 찔 러죽일 뻔한 이 모습.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이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하겠는 가?실제 레미는 아버지가 경고한 위험에 여러 번 맞닥뜨렸었다.레미는 행운으로 그 위험들을 벗어나고,거의 가능성이 없는 기적을 통해 그의 꿈을 이루긴 했는데, 같은 행운과 기적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젊었을 때엔 보통 꿈의 밝은 부분만을 보기 쉽다. 또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유명 하게 만들고 부자로 만들어 줄 화려한 직업들을 꿈꾸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스타 가 되기 원한다. 무비 스타, 스포츠 스타, 가수, 댄서 등. 이것들은 무척 매력적이 다.하지만 이런 번쩍이는 꿈들의 뒷면에 숨겨진 위험들을 아는가?필자도 정확히 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직업들 뒤에 여러 가지 어두운 면들이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다.이은주 라는 한국의 여배우를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그 배우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하지만 어떤 성인영화를 찍은 후 자살하고 말았다.그녀가 왜 그 런 안타까운 일을 감행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은 그것이 그녀의 마지 막 영화와 연관되어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신앙에 걸맞지 않는 어떤 일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힘들어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기독교인 배우, 기독교인 가수, 기독교인 댄서, 기독교인 운동선수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신실한 기독교인 연예인들이 절실히 필요하 다.만일 이런 직업에 대해 대단한 재능을 지녔고,그 일들을 꼭 하고 싶다면 그 꿈을 추구하길 바란다.하지만 정말 큰 재능을 지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이런 화려한 직업들에는 대단히 경쟁이 심하다.대단한 재능이 요구된다.그러므로 자신의 재능에 대해 먼저 확신이 서야한다.좋아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대 부분의 젊은이들이 노래하기 좋아하고 춤추기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 아한다.그것은 재능이 아니다.평범한 취미에 불과하다.


또한,정말 그런 직업을 갖길 원한다면,보다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특히 그 직 업에서 신앙을 지키려면 철저하게 준비될 필요가 있다. 그 직업들의 어두운 것들에 오염되지 않도록 강하게 무장될 필요가 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레미가 그러듯 이,파리의 화려함만을 넋을 잃고 바라보지 않길 바란다.파리의 애완동물들의 배 설물로 더러운 거리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도시의 교통체증과 높은 범죄율도 볼 수 있을 만큼 지혜로와야 한다.


필자가 이 영화에 동의하지 않는 또 다른 점은, 사회를 위한 일에 참여하는 행위 의 가치에 대한 견해이다. 영화에서 아버지 쥐는 아들이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을 알고는, 그에게 독이 뿌려진 음식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가려내는 봉사를 하도록 한다.레미는 그 일은 무척 싫어했다.그에게 봉사는 그저 지루하고 의미없는 일에 불과했다.이 영화는 이런 의식을 우리의 뇌에 심어주고 있다.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분명히 왜곡된 생각이다.사회봉사는 재미없고 쓸모없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그것은 대단히 흥분되는 일일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을 진정한 행복으로 채우는 일일수 있다.빌 게이츠와 테레사 수녀를 비교해보자.누가 더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고, 혹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알 수 없을 것이다.심지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알려지지 않은 채 봉사하고 있는 어떤 이를 포함시켜 생각해도, 누가 자신의 삶에 더 만족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지 말라고 한다. 사도바 울은 고린도 전서 10장 31절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해서 하라”고 우리에게 권한다.이것 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다.하나님께 축복받는 삶이다.우리 교회의 모든 젊은이들이 사회와 하나 님의 나라의 유익과 연관된 삶을 살 길 바란다. 모두가 선교사나, 목사, 사회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모두가 의사나 치과의사,변호사가 되어 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무엇을 하든지 간에,어떤 직업에 종사하던지 간에, 그것들이 이웃과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자신 만이 아닌, 다른 이들 을 위한 어떤 일에 늘 참여하도록 애쓰자.그것들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인간은 그들의 삶이 영원과 연결되기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꿈과 연관된 두 가지 단어가 있다.하나는 야망이요 다른 하나는 비전이다.야망 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꿈이라면,비전은 다른 이들에 관한 것이다.“젊은이들이 여,야망을 가져라”라는 슬로건도 있지만, 이를 자신의 것으로 삼지말기 바란다. 우 리는 야망의 사람이 아니라 비전의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자신에게 초점을 둔 꿈,야망은 자신 뿐 아니라 이웃들까지 해치기 마련이다.민중을 탄압하는 독재자 나 그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재벌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마지막 이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아버지상, 또는 부모상에 대한 이 영화 의 오해에 대해서이다.이 영화는 아버지 쥐를,절대 감동하는 법이 없고, 완고하 고, 설득하기 힘들며,툭하면 죄 없는 아들을 야단치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실제 자신의 아버지가 이 영화의 아버지 쥐와 닮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아는가?아버지들이 왜 이러는지?그것은 그들의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다. 자식들 을 최대한 안전하고 평안하게 보호 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은 한계가 뻔한 반면 책임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녀들을 끝까지 지 원할 사람들이다. 이 영화에서도 레미가 큰 곤란에 빠졌을 때 그를 도운 것은 아버 지 쥐와 또 가족들이었다.


필자가 이 글을 통해 꿈에 대해 대단히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필자는 나이 들고, 소심한 어른들의 입장에 서있다. 솔직히 말한다면 필자는 젊은이들에게 큰 일들을 꿈꾸고, 모험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부럽다.세상을 변화시킬만한 젊은이들의 힘을 부러워한다.그것은 젊 은이들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그들의 장점이다. 영화 “Transformers”에 대해 살펴 보면서 말했듯이, 젊은이들은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으로도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하지만 여전히 필자가 바라는 것은,꿈에 대해 약간의 균형된 시각을 제시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화려한 세상의 매력에 정신이 나가지 않을 만큼 지혜롭기를 바랄 뿐이다.진정한 기쁨으로 의미있는 삶을 살길 원할 뿐이다.


부모님의 말을 경청할만한 약간의 인내를 지녀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그리고 필자는 장담할 수 있다. 부모는 늘 자녀들 편이며 끝까지 자녀들을 지원할 것이라 는 사실을.


✎ 김성민

 

고향이 되자 ‐ ‘집으로’ 보기-


요즘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아시아 국가들에서 아주 인 기라 한다. 심지어 ‘한류’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그래서 앞으로 종종 한국 영화와 드라마도 다루려고 한다.


‘집으로’ 는 한국의 유명한 영화배우들을 보기 원하는 사람들에겐 별로 흥미롭지 않은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엔 한류스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 물 중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마추어이다. 이 영화 의 감독은 영화를 찍은 시골 동네에 실제로 사는 사람들 을 출연시켰다. 주인공 할머니도 역시 그 동네에 사는 분 이었다.주인공 꼬마와 그 엄마가 배우이긴 했지만 그리 유명하진 않았다.동네사 람이 아닌 나머지 한 사람은 영화 속 배터리 가게의 주인으로 잠시 등장했는데, 영 화팀의 기술 스탭이었다.


스타가 없다는 점을 빼 놓고도, 젊은이들에겐 이 영화가 여전히 매력적이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우리집 아들이 그 중 하나이다.우리 아들은 이 영화의 느린 진행 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왜 이 영화가 할머니와 꼬마가 걸어가는 장면을 그렇게 오 랫동안 보여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우리를 감동시키는 무언 가가 있다.이 영화는 한국에서 흥행순위23위를 기록했다. 400만명 이상의 한국인 이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하는데, 그 흥행성공은 유명한 배우도 나오지 않고,단순하고 느릿느릿하고 재미없는 줄거리로 구성된 것을 고려해볼 때,의외의 성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한국제목은 ‘집으로’이다. 집은 건물을 의미한다. 하지만 외국판 제목 에는 Home이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했다. 이를 한국어로 바꾼다면 고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집으로’ 보다 ‘고향으로’라 번역할 만한 외국제목을 더 선호한다.이는 이 영화의 메세지에 더 걸맞는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곱 살짜리 도시소년인 상우가 77세의 벙어리 할머니와 시골집에서 살게 되었다. 엄마가 일자리를 찾는 동안 외할머니 집에 그를 맡긴 것이다.상우는 정말 악동이었다.


할머니와 만나는 첫날, 할머니의 고무신 위 에 일부러 오줌을 싼다. 그는 벙어리 할머니 를 ‘병신’이라 불렀다. 게임기의 배터리가 다 닳아버리자 할머니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졸라대었다. 할머니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안 후엔, 할머니의 요강을 깨버리고 하나밖 에 없는 할머니 고무신을 숨기기도 한다. 그 때문에 할머니는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 돌 투성이인 산길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는 심지어 배터리를 사기 위해 할머니의 비녀 를 훔치기도 했다. 할머니가 닭요리를 해주니까 자신이 원했던 켄터키 치킨이 아니 라고 역정을 내었다.그는 정말 예의없고 이기적인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상우가 바뀌었다. 할머니의 한없는 인내와 희생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할머니는 손자의 버릇없는 행동에도 절대 앙갚음하지 않았다.상우가 철없이 화를 낼 때마다,할머니는 손짓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오일장에서 할머니는 말을 못하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야채를 파느라 고생을 했다. 상우에게 운동화와 짜장면 을 사주기 위해서였다. 손자가 짜장면을 게걸스럽게 먹는 것을 보면서 할머니는 물 만 들이키고 앉아계셨다.장에서 돌아오는 버스를 할머니는 타지 않는다.대신 그 먼길을 굽은 등을 이끌고 걸어오셨다.얼마만큼 돈을 모으기 위해서 그러셨다.여 자아이와 놀고 돌아오다,비탈길에서 넘어지고,미친 소에게 쫓기다 지쳐서 터벅거 리며 걷던 도중,상우는 그 돈을 할머니가 싸주신 꾸러미 속에서 발견한다.그 돈 은 게임기와 같이 들어있었다. 할머니는 손자의 게임기 배터리를 사주시고 싶어서 그 먼길을 걷는 고통을 감수하신 것이었다.상우는 드디어 깨닫는다.자신을 향한 할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 집을 떠나기 전날,상우는 할머니에게 글을 가르치려고 한다.할머니가 아프 시거나 외롭거나 할 때, 간단하게라도 편지를 써보내면 금방 달려오려고 그런 것이 었다.하지만 할머니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그는 또 시력이 약 한 할머니를 위해 바늘에 실을 여러 개 끼워놓는다. 예전에 부탁할 때엔 늘 시큰둥 해 하곤 했는데. 글을 가르치는 것을 성공하지 못한 상우가 무슨 수를 꾸몄는지 아 는가.그는 할머니가 그냥 보낼 수 있도록,아프거나 외로운 상황들을 그림으로 그 린 카드를 만들어 할머니께 드렸다. 그것도 그가 애지중지하던 장난감 그림엽서를 희생해서 만들었다.이제 할머니의 집은 상우에게 고향이 되었다.나는 상우가 그 곳을 그리워했을 것이라 믿는다.


이 영화를 통해 나는 왜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모든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믿는다.그건 왜일까?


시골의 환경이 자아내는 예술적인 분위기 때문일까?그럴지도 모른다. 영화속의 집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한 장면은 정말 장관이다. 오래되고 낡은 시골집에서 지내 는 것이 특별한 경험일 수도 있다. 요즘 세대는 이 영화에 나오는 집과 같은 곳을 본 적이 없을지 모르지만,나는 이런 집에 익숙하다.어렸을 적 많은 친구들이 비 슷한 집에서 살았었다.내가 산 집도 그리 더 나은 환경은 아니었다.이런 집에서 한 이틀 지내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장담한다. 더 오랜 시간 지내는 것은 참아내기 힘들 것이다.특히 화장실은 가장 견디기 힘든 큰 문제거리일 것이다. 그러면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고향을 그립게 만드는 이유인가? 그럴 수 있다.어릴 적 친구관계는 어른 때보다 훨씬 순수하다.사람들은 자라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그런 순수한 관계를 잃어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수한 친구관계가 아직 존재하는 곳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곳에 친척, 특히 부 모와 조부모가 계시기 때문이라 믿는다. 친 척이 없는 곳은 진정한 의미에서 고향이라 하기 어렵다. 만약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더이상 생존해 계시지 않는다면, 명절 때 사람들이 교통정체를 무릅쓰고 오랜 시간을 걸려 고향을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친척,특히 부모와 조부모는 고향의 핵심이다.그렇다면 보다 정확히 그들의 무 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 분들이 사시는 곳을 그리워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 분 들의 사랑이다.그 분들의 조건없는 사랑이다.이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그 작고, 불편하고,무료한 시골마을이 상우에게 고향이 되었던 것은,할머니의 조건없는 사 랑 때문이었다.고향은 조건없는 사랑이다.


불행히도 요즘 사람들은 고향을 잃어버리고 있다. 물리적인 면으로 뿐 아니라 그 들의 영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건없는 사랑에 대한 경험은 점점 드물어지 고 있다.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예전 같지가 않다.그러나 우리에겐 여전히 고향 이 있다.우리를 여전히 조건없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하나님은 사랑이시다.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 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 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 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일서 4장 9‐10절).”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쾌락을 위 해 탕진해버린 그 아들을 받아들였다. 그 부랑아를 용서하고 심지어 왕자처럼 대우 했다.우리도 똑같은 조건없는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우리는 바로 그 탕 자이다.우리에게는 또 돌아갈 본향이 있다.하늘나라이다. 그곳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고향이다. 이 세상에서 고향이 있던 없던 상관없이 하늘나라는 우리 모두에게 고향이다.


‘집으로’를 만든 감독은 자신의 할머니를 그리면서 이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영화를 만들기 수개월 전에 돌아가셨다. 그 할머니는 감독에게 고향이었 던 것이 틀림없다.내게도 고향이었던 할머니가 계셨다.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시절 나를 돌보아주셨다.나의 할머니도 이 영화 속의 할머니 같으셨다.참 자상하시고, 또 참 희생적인 분이셨다.나는 할머니가 그립다.언젠가는 영원한 고향, 하늘나라 에서 할머니를 만나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며 같이 살 날을 고대하고 있다.


하나님은 고향이시다.예수님은 우리의 고향이시다.만일 우리 중에 아직 고향을 찾고 있는 분이 있다면 그 분께 나아오길 바란다. 그 분의 조건없는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길 바란다.그분은 우리를 왕자로 공주로 만들어주실 것이다.또 우리의 시 선을 우리가 돌아갈 궁극적인 고향에 맞추도록 하자. 이 세상에서 크리스챤으로 사 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수 있다.하지만 용기를 잃지 말자.우리에겐 영원한 기쁨 으로 살아갈 고향이 있다.그리고 누군가에게 고향이 되자.경쟁적인 이 세상은 우 리를 이기적이고 인색하도록 몰아간다.하지만 그러지 말자.그것은 이기는 길이아 니다.아니 지는 길이다.특히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다. 누군가에게 고향이 되 는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뜻이기도 하다.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 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 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 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한복음 4장 11‐12절).”


가까운 주위의 사람부터 시작하자. 가족에게, 친구에게 고향이 되자. 우리의 가정 을 진정한 고향으로 만들자.우리교회의 영어사역의 이름이‘Aliyah‐Welcome Home’이다. Aliyah를 참다운 고향으로 만들자. 우리의 교회를 고향으로 만들자. 우 리 주위에 고향을 이룩하고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가자.


✎김성민

 

중요한 것은 생명!

-Lorenzo's Oil보기-


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 Lorenzo's oil은 상당히 곤혹스 런 영화이다. 그 줄거리가 한마디로 의사의 위신을 깎아 내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찾아내지 못한 희 귀질병의 치료법을, 의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대신 발견 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의사들의 저항과 반대 를 싸워가면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곤란을 더하는 것은 이 줄거리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실화라는 점이다.


Lorenzo는 ALD라고 하는, 지질대사에 장애를 일으키는 선천성 병을 앓고 있는 아이의 이름이다. Lorenzo가 그 병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진단받았던 1980년대 초반엔, 치료법은 고사하고 그 병 의 증상을 일으키는 기전조차 잘 밝혀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병이 시작되면 여러 곳에 신경마비가 점점 진행하여 환자는 곧 식물인간 상태가 되고, 대부분 진단받은 후2년 내에 사망했다.치료법이 없으니, 부모들은 그저 차차 죽어가는 아이를 바 라보며 오랜 기간 절망 가운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Lorenzo의 부모는 아들의 질병에 대해 그냥 지켜보며 절망만 하고 있기 를 거부했다.그 희귀질병을 연구하는 의사들을 다 만나보았다.그들의 치료법을 다 시도해 보았다.그러고서도 썩 신뢰할 만한 결과가 얻어지지 않자,그들은 스스 로 병의 치료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의학도서관 책을 뒤지고 온갖 관계논문들을 다 훑어보았다. 시큰둥해 하는 의사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학술세미나를 개최했 다. 그런 노력의 성과로 마침내 그들은 이 질병의 치료에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아 낸다. 올리브유가 나쁜 지방산의 생성을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 직 배양세포와 동물에서만 밝혀진 실험실 결과였지만,부모는 같은 방법을Lorenzo 에게 시도하려 한다.이에 대해 담당의는 상당히 주저했다.사람에도 효과가 있다 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나 부모는 치료를 감행했고,효과는 아 주 드라마틱했다.나쁜 지방산의 혈중농도가50%나 감소한 것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올리브유의 효과는 50% 감소에서 그쳤다. 다시 매일같이 밤 을 새며 연구를 거듭한 끝에 Lorenzo의 부모들은 병의 기전에 대한 중요한 가설을 한 가지 제시한다.아직 의학이 밝혀내지 못한 병의 발생 기전이었다.그리고 그것을토대로 한 가지 지방산을 더 추가하여 치료를 시도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서는 담당의사가 기를 쓰고 반대했다. 새로 추가할 지방산에 부작용이 보고되었다 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부모는 새로운 치료를 강행했고 마침내 그 나쁜 성분의 지방산을 정상 수치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Lorenzo는 아직 살아있어 작년에 29살이 되었다고 한다. 이미 망가진 신경세포는 되돌아오지 않아서 여전히 식물인간 상태에 있다. 하지만 약간의 호전이 있어서 눈 깜박거림으로 대화를 하고 손가락을 약간 움직이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Lorenzo의 담당의사는 참 앞뒤가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인다. 그리고 인정이라곤 없는 차가운 사람으로 느껴진다. Lorenzo를, 환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마치 실험 대상처럼 다루는 것 같다. Lorenzo 부모의 치료성공에는 어떡하던지 초를 치려하고,심지어 그 공로를 가로채려고 하는 나쁜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의사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같은 직업에 종사해서가 아니다. 임상시험이란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 기준 아래 시행되는지를 알고 있기 때 문이다. 특히 부작용에 대한 임상시험의 잣대가 얼마나 엄격한지를 알기 때문에 그 렇다. 시험관 실험이나 동물실험에서 효과가 증명된 약이라 하더라도 임상에 사용 하기까지엔 여러 번거로운 시험을 거쳐야 한다.임상시험엔 일반적으로3단계가 있 는데,이를 수행하기에 보통3~5년이 걸리고 경비도 수억 내지 수십억 불 소모된 다.그렇게 힘들게 연구하여 겨우 통과가 되어도,판매 이후에 심각한 부작용이 한 두 건 보고되면 금방 퇴출당한다. 그러면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경비는 하루아침에 도루묵이 되고 만다.


까다로운 임상시험 기준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병으로 잘못 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지만,약의 부작용은 인위적인 사고이다.그러므로 최 대한 피해야 한다.그 치료효과와 견주어 경중을 잘 따져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임상시험에 관계하는 사람으로서도 때론, 심사기관들이 너무 엄격하게 구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요즘 제약회사들이 꼭 필요한 약인데도 개발하기를 꺼려하고, 대신 쉽게 통과가 되고 부작용이 없을 만한 약들에 관심을 가지는 경향 이 짙기 때문이다.


어쨌건,이 영화를 통해서 율법과 사랑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임상시험의 심사기준을 율법이라 한다면, Lorenzo 부모의 태도는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율법이 객관적이라면 사랑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율법이 일반을 다룬다면 사랑은개인적인 면이 많다. 율법이 사실에 무게를 둔 다면 사랑에는 의미가 중요하다. 율법이 안전위 주인 반면 사랑은 어느 정도 실수를 감수한다. 율법이라고 해서 다 나쁘고 사랑은 무조건 좋 은 것이 아니다.둘 다 장단점이 있다.신학적으 로 맞는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율 법과 사랑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라 생각한다.


율법이 비판받는 이유는 율법 자체보다도 이를 운용하는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 이다.헌금과 기부하는 것이 잘못인가?아니다. 하지만 동네방네 떠들면서 하는 것 은 잘못된 것이다. 기도가 나쁜 것이 아니지만 마치 혼자 기도의 사람인 것처럼 행 세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계명을 지키는 것이 잘못인가?아니다. 이를 통 해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를 높이고 약한 이들을 깔아뭉개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 이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 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7)”라고 말씀하셨다.


사랑을 내세운다고 해서 다 정당한 것인가? 아닐 것이다. 훈계가 없는 자식사랑은 아이를 버릇없게 만든다. 잘못된 일을 반복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핑계로 아무런 조치 를 하지 않는다면,이는 사랑이 아닌 무관심이요 태만이다.심한 병을 앓는 가족에게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을 사용해서 잘못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그 가족을 사랑하 는 마음에서 한 일이었겠지만 풍문에 의존한 치료는 오히려 환자를 해칠 수 있다.


Lorenzo's oil 은 상당한 연구를 통해 시도된 치료이다. 다행히 큰 부작용 없이 질병 의 진행을 예방하는 데 성공을 거둔 긍정적인 사례이지만 이조차 일반화하긴 힘들다.


사실,사랑이라는 단어 자체도 상당히 오염되었다.쓰여서는 안 될 일에 이 단어 를 갖다 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그래서 필립 얀시는 그의 책“놀라운 은혜”에서 사랑 대신 은혜라는 단어를 끄집어내었다.그는 은혜가 아직 상하지 않은,오염되 지 않은 의미로서의 사랑을 설명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생명이라는 단어도 사랑의 의미를 잘 반영하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은혜가 사랑의 본질을 말한다면,생명은 사랑의 목적을 나타낸다.하나님께서 우리 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다. 그런데 그 사랑의 목적은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재미있는 것은, 사랑=생명이라는 등식 뿐 아니라, 율법=생명의 등식도 어색하지 않은 것 같다.율법도 죄에서 생명을 보호하고 구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중요한 것은 생명이다.율법이든 사랑이든 그 고유의 목적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인간에겐 핵심을 잘 놓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툭하면 어떤 거창한 원리 나 원칙,주의와 사상을 핑계로 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이 영화에서도 의사가 임 상시험의 엄격함을 들어 Lorenzo's oil을 사용하기를 반대했지만, 그것이 Lorenzo의 위급한 상태에 비추어 볼 때 꼭 곧이곧대로 지켜야 할 원칙이었는지 의문이다. 사실 암치료제라든지 AIDS치료제 등 아직 뚜렷한 완치약이 없고, 곧 생명이 위독할 수 있 는 질병에 대해서는 신약 심사의 기준을 상당히 완화시켜 준다. 그런 의미에서 Lorenzo's oil도 의료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시도했어야 옳았다.


핵심을 놓치고 핑계를 일삼는 것은 율법주의에서 흔하다.원칙을 들먹이지만,속 내는 스스로 우쭐거리거나 자신의 편리나 이익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바리새인들 이 그랬다. 영화 속 의사도 부작용의 가능성을 들어 Lorenzo's oil의 사용을 반대했 지만, 내심 의학의 문외한이 치료제를 개발했다는 데 대한 시기심이 상당히 작용했 다고 여겨진다.하지만 사랑에서도 비슷한 위험이 존재한다.잘못을 정당화하고 두 루뭉수리 어떤 이익을 추구하려고 사랑을 갖다 대는 경우가 있다. 이 또한 핑계요 사랑의 본질,목적과는 동떨어진 태도라고 하겠다.


하지만 율법보다 사랑이 더 소중한 것은 사실이다. 바울사도께서는 율법은 몽학 선생, 즉 초등선생 정도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갈라디아서 3:24). 반 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기적을 만들어낸다 (베드로전서 4:8). 우리의 구원은 그 기적을 이루어 낸 사랑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Lorenzo에 대한 부모의 사랑 이 의학으로 해내지 못한 기적을 이루어낸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무쪼록 우리 신앙 의 순례길도 생명을 살리는 이러한 사랑으로 점철되었으면 좋겠다.


✎김성민

 

진정한 트랜스포머


이 영화는 내 취향이 아니다. 장면들이 지나치게 빠르 다. 좋은 로봇인 오토봇과 나쁜 로봇인 디셉티콘 사이의 전투장면에서는 어느 것이 좋은 로봇인지 어떤 것이 나쁜 로봇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이다.하지만 우리집 아이들, 심지어 딸들도 이 영화를 사자고 졸라대었고, 여러 번 이 영화를 보았다.


개인적으로 왜 아이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컴퓨터 그래픽이 만들어내는 정밀하고 도 스케일이 큰 장면들이 그 이유일 수 있겠다. 사실 요 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은 실로 대단하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 없어 보인다. 이 영화의 장면들은 컴퓨터그래픽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안될 정 도로 생생하다. 아이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다른 이유로 그들이 우상화할만한 대 상들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재밌는 남자아이,멋진 소녀, 그리고 그들 의 사랑. 그들이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유성으로 빚어지는 불꽃놀이 아래 손을 서로 잡는 장면은 참 인상적이다.그들은 또한 용감하다.디셉티콘과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는 이들의 용기가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이 영화의 모든 매력들에 앞서, 이 영화가 성공한 주된 요소 는 바로 기발한 로봇이라고 생각한다.이 로봇들은 대단히 진보된 종류이다.그들 은 말할 수도 있고,점프하고 공중돌기를 하며,사람을 놀리기도 한다. 무척 유연하 다.그들은 마치 사람처럼 행동한다.오토봇과 디셉티콘 사이의 전투장면은 이전의 애니메이션이 전혀 구현해내지 못한 놀라운 경지이다.


사실,이 로봇의 많은 장점 가운데,한 가지는 아주 특별하다.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이 로봇들의 가장 큰 특성은 변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전에도 변신 로봇을 그린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변신능력은 한계가 많았 다. 고작 팔, 다리나 머리를 굽히거나 줄이고 늘이는 정도였다. 큰 폭의 변신은 여 러 대의 로봇이 합체를 하여야만 가능했다. 그것도 사람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었 다. 하지만 이 영화의 로봇들은 그들이 원하는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었다. 그것도 스스로의 명령에 의해서. 그들은 살아있는 로봇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변신로봇이다. 이 영화 로봇들의 이런 환상적인 능력이 젊은 관객들을 감탄하게 만 든 요소라고 믿는다.


이 영화를 통해, 개인적으로 젊은 사람들도 역시 트랜스포머로 여길 수 있겠다 생각되었다.사실 그들은 살아있는 트랜스포머들이다.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어떠 한 것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 자신을 포함한 나이든 사람들 은 쉽게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들의 몸이 뻣뻣한 것처럼 그들의 두뇌는 이미 탄력 적이지 못하다.그들의 오래된 버릇은 더 이상 고쳐질 수가 없다.하지만 젊은이들 은 변할 수 있는 큰 능력을 가졌다.


지금 현재로는 그들은 그렇게 중요하거나 강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스 스로 평범하고, 작고, 미 숙하고, 조잡하게 여길지 도 모르겠다. 심지어 문제 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들은 변할 수 있다. 변신 이 가능하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겨자씨에 대한 비유를 말해주신 적이 있다. 마가복음 4장 30‐32절에 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 들일 만큼 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젊은이는 겨자씨이다. 그 씨와 마찬가지로 크고 열매를 많이 맺고 쉴만한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다.


그러면 어떻게?어떻게 변하며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가?그것은 모방이다. 어 떤 이를 닮음으로써 가능하다. 영화에서 트랜스포머들은 그들이 원하는 어떤 대상을 모 방함으로 변신을 했다.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이다.그들은 어떤 사람을 닮음으로 변신할 수 있다.나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닮으라고 권하고 싶다.부모님을 모방할 수 있다.선생님들을 모방할 수도 있다.교회 분들을 그리고 목사님을 모방할 수 도 있다.사실 완벽한 사람은 없다.그러므로 그들의 좋은, 존경할만한 성품만을 닮아야 한다. 그들에게서 어떤 결점이 발견되면 그것은 닮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삼으면 된다. 그 분들의 결점은 따르지 않기로 함으로써 그 부정적인 면에서도 여전히 배울 수 있다.


알거니와 변신의 능력은 정반대의 두 가지 가능성을 제공한다. 우리는 오토봇, 좋은 로봇이 될 수 있다.하지만 역시 디셉티콘,나쁜 로봇이 되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악한 것들을 모방하지 않기를 소망한다.이미 많은 이들이 따르고 있기 때문에 악한 것들은 따르기 쉽다. 그것들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 같기도 하다.


이들 중 두 가지 대표적인 것들이 마약과 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의 치유 적 혹은 쾌락적인 겉모습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그것들은 환상이다.그것들이 어 떤 즐거움을 제공할 수도 있다.하지만 그것은 잠시잠간에 불과하다.실제로 남는 것은 손상뿐이다.그 손상은 영원할 수 있다.또 다른 예는 욕심이다. 대부분 남을 섬기는 일보다 권력을 추구한다. 많은 이들이 나누고 다른 이에게 내어주기 보다는 더 많이 가지려고 애를 쓴다.모든 것을 다 가지는 것은 잠시 만족을 주는 반면, 다른 이들을 섬기고 대가없이 주는 것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우리를 채운다.


여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완벽한 대상이 있다.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바울 사 도는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우리의 궁극적인 모범은 예수 그리스 도시다.온전히 그 분처럼 되는 것은 우리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그 분 은 완벽하시다.그 분은 하나님이시다.그러나 우리가 그 분의 본을 따르기로 결심 할 때 아주 조금씩이나마 우리는 그 분을 닮아갈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 은 어려움을, 고통을, 심지어 희생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로 성숙하 게 하여 어떤 특별한 존재가 되게 할 것이다. 소멸되지 않는 진정한 기쁨을 안겨줄 것이다.


올해로 우리 교회는 35주년을 맞는다. 이제 우리 교회가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중년의 때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이라 믿는 다.젊은이들은 우리교회의 희망이다.우리교회의 미래이다. 설령 그들이 학업을 마 치고 떠난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책임지고 갈 자들이다. 우리 교회가 이들로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살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존재로 변 신해가도록, 돕고 가르치고 격려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


✎ 김성민


새로운 상륙작전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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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첫 부분의 전투장면은 정말 실감난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찍는 촬영 기법을 이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전투에 실제 참여하고 있는 느낌이 나도록 하였다. 뛰어난 컴퓨터 그래픽과 분장술을 사용하여 총알에 맞는 장면, 포탄에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장면,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온 장면 등을 진짜처럼 찍어냈다. 실감나는 만큼 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전쟁은 정말 참혹하고 무섭기 짝이 없다. 주인공이 끝까지 살아남아 적을 다 죽이고 늘 우리 편의 승리로 전투가 끝나는 상투적인 시나리오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에게 이 영화의 전투장면은 생소하기까지 하다.


때는 종반을 치닫던2차 세계대전. 전쟁을 연합군 측의 우세로 크게 반전시켰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영화의 배경이다. 상륙보트의 앞문이 열리자마자 적의 기관총에서 쏘아대는 총알이 쏟아져 들어온다. 말 그대로 빗발치듯 총알이 날아오는데, 앞의 몇 줄에 있던 병사들은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희생되고 만다. 총알을 피해 바다로 뛰어들어보지만, 그 중 많은 수가 무거운 군장을 벗겨내지 못해 익사하거나 물살을 가르며 날아든 총알에 목숨을 잃는다. 겨우 해변으로 내려선 병사들에게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몸을 숨길 곳은 낮은 모래톱이나 겨우 폭이 10 cm 될까 말까한 십자모양 철제구조 뿐이다. 잘려나간 자신의 팔을 찾아 들고 갈팡질팡하는 병사, 화염방사기가 터져 불길에 휩싸인 병사들을 쳐다보고 있던 주인공은 잠시 감각을 잃는다. 아무 소리가 들리질 않고 멍한 느낌만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은 마치 딴 세상 일 같다. 현실 같지가 않다. 현실이라고 느끼기엔 너무나도 참담하고, 그 현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오감을 압도한다. 그러나 현실이다. 용케 총탄이 철모를 스치고 지나가 목숨을 건졌나했더니, 곧이어 날아온 총알로 머리에 구멍이 난다. 일초 정도 될까 말까한 짧은 시간에 내려진 군의관의 판정에 따라 살려질 목숨과 버려질 목숨이 결정된다. 바다는 핏빛으로 물들고 해변은 온통 시체로 뒤덮인다.


크리스챤을 하나님의 군사로, 그리고 그 삶을 영적 전투에 비유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 비유에 동의한다면, 이 세상에서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는 것을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그 삶은 노르망디의 해변처럼 아슬아슬하고 치열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잠시 한 눈 팔고 멈칫거리다간 적의 총구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은폐와 엄폐를 이용해 적의 공격에서 자신을 잘 방어해 내야한다. 화기에 모래가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 평소에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한다. 체력을 키우고 사격연습을 하고 총이 녹슬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한다. 싸우다 부상당할 수 있다. 심지어 전사할 수도 있다. 훈련이 안 되어있고 준비가 안 된 상태라면 그 위험은 더 커진다.


우리의 일차적인 싸움터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적은 우리 영혼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자신들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시켜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우리는 늘 조금씩 그 영역을 잃었다가 되찾았다가한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성품이 준비된 자가 아니면 쓰시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많은 신앙의 선진들이 각기 나름대로 고통과 인내의 광야를 거쳐야 했던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그 분을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내게 있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로 왔으며, 나는 소유주가 아니라 청지기요 관리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그 분은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준비시키시는 것이다. 조지 맥도날드는 이렇게 썼다. “어리석은 인간 - 그런 인간이 많은데 – 은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없애기 위해 세상을 바로잡고 주변의 악에 대해 싸움을 걸지만, 정작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 곧 세상의 중요한 일부인 자기 성품과 행위를 바로잡는 일을 무시하는 자다.”라고.


크리스챤의 삶은 또한 소명의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인지… 헨리 나우엔은 소명과 직업에 대한 그의 묵상을 이렇게 적었다. “소명에 대한 순종의 표현인 직업은 구체적인 방식으로 재능을 신앙공동체가 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공동체라는 단어가 소명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알게 하는 것 같다. 소명은 자기를 높이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려는 야망과는 다른 것임을 알게 해준다. 야망은 아무리 거창하고 위대해보여도 결국 이웃과 자기를 망치는 결과로 이어진다. 소명에 대한 이 정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요구와도 일맥상통하며, 예수님께서 요구하셨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과도 연결된다. 공동체는 교회와 같이 유형의 공동체일 수도 있고 무형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정일 수도 있고, 직장과 지역사회와 나아가 나라와 민족, 또는 그 범위를 벗어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의 기초와 목적이다. 신앙공동체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며 하나님의 진리가 적용되는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소명은 그 신앙공동체와 연결되어야 하며, 우리의 구체적인 삶은 그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 크리스챤이란 단어는 사실 세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라는 단어는 수백 번 등장한다. 우리가 크리스챤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예수님의 제자와 동일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가 되는 조건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보면 때로 너무 극단적인 표현을 하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누가복음 14장 25절에 보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무리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도전하신다.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하셨다. 아무든지 당신을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한다고도 말씀하셨다. 충격적인 말씀이다.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이 더 사랑하지 말아야한다는 뜻이라는 설명으로 어느 정도 그 충격이 감쇄되긴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기준은 턱없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감당해야 할 임무가 어떤 종류의 적과 맞붙어 싸우는 전투라면 그 분이 말씀하신 기준은 적절한 것이 아닐까? 단단한 각오 없이, 무장되지 않고 훈련되지 않은 상태라면 전투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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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가이어는 이 영화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적은 총알을 장전한 채 참호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저 바다 멀리서 사소한 일에 매달려 있는 한 적은 기꺼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둔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교두보에 올라서는 순간, 적의 시선은 우리에게 고정된다. 히긴스 보트가 오마하 해변에 접근했을 때 독일군 병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적은 자기 휘하의 모든 화력으로 총공세를 가해온다… 그 분은 아셨다. 우리가 무장 없이 그 분을 뒤따르다가는 결국 부상이나 전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꼭 그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좀 편하게 믿어도 내 한 몸 구원받는데 지장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조국을 위해 싸우고 희생하는 것을 올바른 것이며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새해는 우리가 또 다른 땅에 상륙을 하는 시점이다. 이 상륙작전에서도 역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이곳저곳에서 터지는 전장을 이겨가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가 더 용기백배 하고 잘 준비되고 또 스스로를 강하게 훈련시켜서, 이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하나님의 깃발을 이 땅에 꽂아 높이 펄럭이는 감격을 맞보길 기도드린다. ✎김성민

 

그분을 만나러 가는 특급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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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독특한 영화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같으면서도 실제로 찍은 것 같기도 하다. 알고 보니 모션 캡쳐라는 최신 기법을 이용했다 한다. 연기자의 몸 여러 군데에 센서를 붙여서 실제 동작을 컴퓨터에 입력한 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처럼 변환시키는 방법이다. 그래서 배우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톰 행크스가 다섯 사람의 연기를 했다고 하는데, 차장, 아버지 등 쉽게 그인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역 말고도, 산타크로스, 기차의 유령, 그리고 심지어 꼬마 주인공의 역도 그가 했다고 한다. 화면을 파스텔 톤으로 처리한 것도 참 특이하다. 동화다운 분위기를 잘 살렸다 싶고, 최근 지나치게 정밀해지고 선명해지는 애니메이션 화면에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신선하다고도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는 자칫 식상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 싶다. 산타크로스의 존재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리저리 많이 돌아다니지 않는가. 꼭 동화나 영화가 아니어도 주위에서 흔히 듣게 되는 이야기이다. 실제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에는 산타크로스가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산타크로스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산타크로스의 선물을 기대하며 벽난로 옆에 양말을 걸어둔 기억이나,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서 그 밑에 놓인 선물을 발견한 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까지 산타크로스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나이가 되면 대부분 산타크로스의 존재가 허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물은 부모님들이 사다놓은 것이며, 산타크로스는 아이들이 말을 잘 듣게 하려는 부모님들의 전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잠시 약간 혼돈스러워 하고 실망할 수 있지만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이미 머리가 큰 아이들에게 굳이 산타크로스가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사실 그는 지어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산타크로스가 가짜라는 것을 알아도 사는 데 큰 문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새삼스레 산타크로스의 존재에 대한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다. 영화 중 나오는 대사처럼 “꼭 보아야지 믿는 것은 아니란다.” 라는 주장을 하면서 말이다. 왜 그리 했을까? 왜 케케묵은 문제를 영화의 주제로 삼았을까? 첨단 영화 기법과 대형배우를 동원한 만큼 얼마든지 더 새로운 내용으로 영화를 만들만도 한데. 북극의 산타마을로 가는 기차 여행이라는 아이디어, 롤러코스터 타는 것처럼 기차가 오르락내리락 하도록 만든 장면 등 재미있는 요소가 있긴 하지만, 그런 재미를 유지하면서도 보다 기발한 시나리오를 개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설마 이 영화를 보고서 산타크로스를 믿지 않던 아이들이 그 존재를 믿게 되리라고 기대했을까? 그랬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이 이야기를 만든 작가와 영화제작자는 독자에게 또는 관객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일까? (이 영화는 같은 이름의 동화를 각색한 것이다.) 단순히 재미를 위한 글, 오락영화로 만든 것이 아니라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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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산타크로스의 존재에 대한 믿음 자체가 아니라, 자라나는 세대들이 그 믿음을 잃으면서 함께 놓쳐버리고 있는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한 아쉬움과 우려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치들은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 친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 다른 이들을 격려하여 일으켜 세우는 리더쉽, 계속 배우고 자라가야 할 필요에 대한 깨달음, 믿음의 중요성 등이다. 산타크로스를 만나러 가는 기차여행을 통해 꼬마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이러한 가치들을 배웠다. 영화 속 아이들은 아마도 이 가치들의 중요성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산타크로스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가치들의 정당성과 존엄성을 뒷받침하는 존재를 만나보았기 때문이다. 그 기차여행 이후에 그들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산타크로스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그런 가치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산타크로스의 허구를 끄집어내어서라도 이런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믿기 어려워한다.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불가사의의 하나님에 대해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몇 십억 광년이나 되는 거리로 펼쳐진 우주, 또 최근에는 그 너머에 또 다른 우주가 있다는 증거도 발견되었다는데, 그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큰 우주를 말씀 한마디로 지으셨다니? 또 동일한 하나님이 그 광활한 우주에 비해 먼지보다 못한 작은 존재인 우리를 하나하나 돌보시고 간섭하고 계시다니. 이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산타크로스가 어린이들의 행동거지를 늘 지켜보고 있고 또 그 소원을 다 듣고 있다가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준다고 하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황당한 소리 아닌가? 산타크로스가 그 많은 어린이들을 어떻게 다 살펴보며, 작은 수레로 그 많은 선물을 어떻게 다 운반한다는 말인가? 이 영화에서는 많은 어린이들을 지켜볼 수 있게 방 하나 가득하게 설치한 모니터, 또 크레인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큰 선물주머니 등 재밌는 설정을 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한 설명엔 턱도 없다.     

심지어 크리스챤도 간혹 이 문제로 시험에 빠진다. 특히 큰 어려움을 당할 때, 믿음이 있던 사람도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가 의문을 가지고 그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있다. 주위에 간혹 기적 같은 하나님의 간섭을 경험했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체험들은 어쩌면 우연히 일어난 일을 두고 괜히 하나님의 섭리 운운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엔 역부족이다. 직접 꼼짝달싹할 수 없는 증거와 함께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한다면 모를까. 그러나 그런 일은 사실 기대하기 어렵다. 내 앞의 어려움은 여전하고, 세상은 신앙과는 상관없이 굴러가는 것 같다.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가치에 대한 믿음도 함께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도덕적 삶에 대한 강조는 지배계급이 하류계층을 조종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만다. 헌신과 기부에 대한 미화는 종교계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만들어낸 족쇄이다. 겸손은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마약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현대는 자신을 믿고 자기를 성취하라고 한다. 정직, 순결, 봉사, 희생 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귀한 가치로 여겨지던 것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유물 취급을 받고 있다. 대신 자신의 안녕과 이익, 즐거움의 추구가 최고의 선이 되어가고 있다. 하나님을 버린 이 세대는 가치의 준거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산타크로스와 같은 허구를 내세워서라도 그 가치를 붙들어야 할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살아계셔서 눈으로 확인한 믿음의 대상이 있다. 우리에게 제시되고 요구되는 가치의 준거가 되는 존재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경험한 적이 있다. 하나님이셨으나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오셨던 분, 바로 예수님이다. 그 분의 능력은 하나님이 아니시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자연을 말씀 한 마디로 다스리셨고, 질병과 귀신을 한 순간에 쫓아 보내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다. 그 분의 성품은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도 흉내조차 내볼 수 없는 경지였다. 한 점 흠 없는 순결한 삶을 사셨다. 그 분의 말씀은 천국에서 오신 분이 아니라면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지혜였다. 모든 권위자, 지혜자들이 그 분 앞에서 말문을 닫았다. 그 분 스스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나님과 당신은 하나라고. 당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우리의 신앙은 가상의 존재, 허구의 신을 내세워서 인간에 족쇄를 채우는 그런 류가 아니다. 역사 속에서 실존하셨던 분,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 것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산타크로스의 존재를 믿지 않던 주인공의 부모는 산타크로스 수레에서 떨어진 벨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직 산타크로스를 믿었던 주인공과 아직 나이가 어렸던 그의 여동생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여동생도 나이가 들면서 벨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주인공은 계속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차이는 산타크로스를 만났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분을 만나러 가는 특급열차를 탔던 적이 있다. 그 분의 벨소리는 여전히 우리 귀에 아름답고 쟁쟁하게 들린다. 혹 그 분을 만나지 않은 다른 이들은 못 듣고 있는지 몰라도.


오늘 우리는 또 다시 그 분이 탄생하신 마을로 가는 특급열차를 탄다. 아직 그 분을 만나본 적이 없다면 이 열차에 한 번 올라 타 보는 것이 어떤가?  ✎ 김성민

다른 문화가 만나는 종점

-나비부인 그리고 The Terminal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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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로 이 두 작품을 며칠 사이로 보게 되었다. 서로 무척 다른 작품들인데도, 그 둘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였기에 이를 묵상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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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작품은 서로 쟝르가 다르고 만들어진 시기가 다르다. 나비부인은 잘 알려진 푸치니의 오페라이고, 1900년대 초에 만들어졌다. 터미널은 톰 행크스가 주연하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최근 영화이다. 두 작품의 시대배경도 다르다. 나비부인은 제국주의 경쟁에 나선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 서로 태평양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아귀다툼을 하던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했다. 터미널은 현재의 미국이 배경이다. 그런데 이 두 작품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다는 것인가?


이 두 작품을 보면서 발견한 공통점은 두 다른 문화의 만남이었다. 나비부인에서는 미국으로 대변되는 서구문화와 일본으로 대표되는 아시아의 문화가 만났다. 터미널에서는 역시 미국문화와 이와는 이질적인 문화, 한 불가리아인을 통한 다른 문화가 만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문화접촉의 전개와 해결은 무척 다르다.


나비부인에서 나타나는 이질문화의 만남은 거의 일방적이다. 서구문화는 한 몰락한 가문의 일본 여인에게 이상향으로 다가온다. 그녀에게 청혼한 미국 해군 장교는, 그녀에게는 동양의 전통과 관습에 눌려 찌그러진 자신의 삶을 부활시킬 구원자이다. 하지만 미군 장교의 생각은 다르다. 그에게 한 동양인 여성은 잠시 데리고 노는 노리개에 불과하다. 비록 정복자의 오만에까지 가진 않지만, 일본 여인에 대한 그의 태도는 하위문화를 자신의 낭만에 이용하는 한량의 그것이다.


결국 그 하위문화는 상위문화에 모든 것을 빼앗긴다. 자신의 젊음을 바치고, 꿈을 뺏기고, 가족에게 버림받고, 아들을 빼앗기고, 결국 생명까지 버리고 만다. 작품의 내용이 서구문화의 비도덕성을 고발하는 성격을 포함하고 있긴 하지만, 이 오페라는 당시의 문화 흐름의 일방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동양은 상위문화라고 여겨졌던 서양을 배우기에 바빴고, 서양은 하위문화를 요리해 먹기에 혈안이었다.

터미널에서 나타나는 문화의 만남은 나비부인과는 많이 다르다.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미국인이 아직 스스로 불가리아라는 후진국가의 것보다는 앞선 문화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영화의 초반에는. 하지만 점점 그 간격이 좁아진다. 영어도 거의 못하고, 나라의 정권이 바뀌어 여권이 무효가 되면서 오갈 데가 없어진 국적 없는 한 이방인. 하지만 그에게는 생존의 임기응변이 있었고, 인내의 능력이 있고, 따뜻한 인간미가 있었다. 소위 스스로 상위문화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기계적이고 피상적인 생활, 메마른 그들의 인간관계와는 다른 힘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 지니고 있던 한 깡통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이 이방인의 인간성은 절정에 다다른다. 그리고 소위 상위문화의 비인간성은 적나라하게 그 알몸을 드러낸다. 그러고 보면 이 터미널은 두 문화의 평가가 엇갈리게 그어지는 끝점이다. 단층 지어져있던 두 문화가 가까스로 만나 이해의 평행선을 만들어내는 종점이다. 문화의 일방적인 평가, 한쪽으로 흐르던 방향은, 이제 같은 높이로 위치를 옮겼고 서로의 방향으로 섞이며 흐를 여지를 만들어내었다.


최근 문화, 또는 문명의 충돌, 문명들 간의 갈등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 한다. 동서로 나뉘어졌던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이젠 이데올로기 대신 서로 다른 문화, 문명이 새로운 세계구도를 형성할 것이라는 전망이 주장되고 있다. 어떤 이는 이를 갈등 또는 대결구도로 예상하는가 하면 혹은 공존, 병합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그 모든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시대를 새로운 기회의 시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혹 갈등과 충돌을 불가피하게 겪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종국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평화를 엮어내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다른 문화권에 와서 6년을 넘게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어떤 문화이던 다 장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미국에 왔을 즈음에는, 이 강한 영향력의 거대국가가 지니고 있는 문화를 막연하게 높게만 쳐다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약점들, 아픈 구석들을 많이 보게 된다. 상대적으로 내가 살아왔던 문화가 발휘할 수 있는 장점들도 또한 발견하게 된다. 때론 우리의 단점이라고 여겼던 것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미국인들이 지나치게 느린 일하는 속도에 비해, 빠릿빠릿하게 일하는 우리네 태도는 장점이 될 수 있다. 속도만 신경 쓰다가 치밀하게 일하지 못하는 단점만 보완한다면. 개인주의의 경계선을 분명히 그어놓고 생활하는 미국인들의 문화에 비해, 끈끈하고 인간적인 친밀감을 중요시하는 우리네 인정문화는 장점이 될 수 있다. 비합리적인 연고주의, 당파 짓기,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는 단점 등을 개선한다면 말이다. 열심히 하고, 끈질기고, 예의 바르고, 윗사람을 존중하고,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개인의 인격적인 수양을 높이 평가하는 점들은 우리의 남다른 장점이 될 수 있다.


요즘 미국에서는 많은 인도인들이 좋은 직장에 진출하고 미국 내에서의 경제적인 수준이 급하게 상승하고 있다고 한다. 컴퓨터 지식과 기술이 뛰어나고 또 성실하기 때문이다. 영어가 능통한 것도 한 요인이기도 하고. 한편, 얼마 전 캐나다에서는 한 중국 여성이 시대표로 선출되었는데, 취임연설을 중국어로 해서 그 사회에 놀라움을 던져준 일이 있었다. 이제 서구문화가 타문화를 하류로 취급하던 때는 지나가고 있다. 또 비서구인들이 서구문화의 기세에 눌려, 그 문화에 동화되고 예속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의식도 바뀌고 있다.


그래서 종속이론에 대해 조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종속된 문화로 규정하고, 상대를 착취하는 상위문화로 자신을 억압받는 하위문화로 고착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상대 문화에 대해 반응한다면 쓸데없는 피해의식이나 의기소침, 과민한 반응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적절히 반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초기에는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을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살아갈 한인의 후예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좀 더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으면 좋겠다. 미국에서 살려면 미국문화에 동화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문화의 좋은 점들은 받아들여 소화하고, 또 우리네 좋은 점들은 적극적으로 발휘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미국인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전파하여, 두 문화가 하모니를 이루고 시너지를 이루었으면 좋겠다.


현재 워싱턴 주 상원의원이신 한 한국 분은 어릴 적 고아로 자라다가 미국에 입양되어 오신 분이다. 주어진 기회를 열심히 선용하여 상원의원에까지 이르렀다. 그 분은 늘 하시는 말씀이 우리 당대에 한국인 미국 대통령이 나와야한다고 하신다. 어찌 들으면 황당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안 된다는 절대적인 법이 어디 있는가?

✎ 김성민

쓸모없는 존재들의 사회

- Finding Nemo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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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영화에는 다른 쟝르의 예술, 또는 비애니메이션 영화에선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이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비현실적인 영상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리라. 사실 연극 등 무대예술에 비할 때 현장성이 없다는 점에서 영화 자체가 일종의 픽션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은 그 픽션에 픽션을 한층 더한다. 허구인 동화에서 줄거리를 따오거나 동물을 의인화한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거나 하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애니메이션 영화의 또 하나의 특성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 영화들이 이야기의 초현실성 뿐 아니라 등장 캐릭터에 있어서도 아주 극단적인 설정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현실과는 거리가 먼 만큼 캐릭터의 성격도 더  황당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 배우를 등장시켜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예외적인  캐릭터를 제시함으로써, 에니메이션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메세지를 보다 분명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토이 스토리에서는 주인공 우디를 통해 질투심이 많고 자신이 늘 리더가 되어야만 하는 유형의 성격을 그리고 있다. 토이스토리 2에서는 자신을 추켜주는 분위기에 약해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약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 성격 때문에 때론 실수하고 미움도 받고 하지만 한편으론 장점도 있다. 속깊은 정이 있어서 끝까지 남을 미워하지는 못한다. 좌충우돌 부딪치며 때론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결국 올바른 방향을 향해 키를 움직일 줄 아는 결정적인 동력을 지니고 있다. 어느 정도 성격적인 결함이 있어도 이웃과, 친구와의 부대낌을 통해 정련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이다.


벅스 라이프의 플릭은 보다 골치 아픈 존재이다.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는 발명을 한다고 늘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다니고, 조심성이 없어 온갖 사고를 다 저지른다. 지나치게 긍정적이어서 웬만해서는 포기하지 않고, 남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동체를 심각한 위기에 빠트리는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골치 덩어리, 사고뭉치가 자신을 왕따시키던 공동체를 구하는 큰 역할을 해낸다.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남다른 신념, 즉 함께 뭉치면 압제자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자신이 속한 개미공동체를 메뚜기의 부당한 착취에서 구해내었던 것이다. 때로는 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괴짜 같은 사람이 오히려 그 공동체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이 글에서 묵상하고자 하는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 에선 또 다른 극명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니모의 아빠 말린과 우연히 만난 그의 길동무 돌린. 이들이 보여주는 정반대 성격의 대비는 전체 이야기의 재미와는 별도로 이 영화 감상하는 맛을 더하는 감미료 역할을 한다. 


말린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강박증 성격의 소유자.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걱정이 많고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성격유형이다. 그런 성격이 상어에게 아내와 수많은 자식을 잃은 과거 때문인지, 타고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여하튼 이런 아빠의 성격이 아들 니모에게 은근한 반발심을 유발시키는데, 물 위에 떠있는 이상한 물체에 접근하지 말라는 아빠의 경고를 무시하고 안전구역을 벗어났다가, 니모는 그만 관상용 물고기 채집을 하는 사람에게 잡혀 어디론가 팔려가고 만다.


에 비해 돌린은 무사태평인 성격이다. 걱정도 없고 스트레스도 느끼지 않고, 늘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는 성격이다. 어찌 보면 정신 나간 사람(물고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기억력을 가졌다. 물고기는 기억력이 몇 초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물었던 잇갑을 다시 물기도 하고 어항 안에서도 지루해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하더니, 이런 특성을 돌린의 성격으로 포함시킨 모양이다.


말린에게 이런 성격의 돌린은 도대체 도움이 안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길을 물으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해놓고는, 잠시 후에 왜 자기를 스토킹 하느냐며 따라오는 말린을 피해 달아난다. 칠흑같이 어두운 깊은 물 속을 지나며 무슨 위험스런 동물이 나타날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는 말린에게, 자신이 죽었냐는 둥, 말린이 자신의 양심의 소리이냐는 둥 뚱단지 같은 소리를 해대며 부아를 돋운다. 고래와 대화를 하겠다며 이상한 목소리로 고래 소리를 흉내내다 둘 다 고래 뱃속으로 꿀꺽 잡혀 먹히는 변을 당하게도 했다.


말린은 돌린을 떼어놓으려 수차례 시도를 해보는데 결국 실패하고, 아들이 팔려간 시드니를 찾아가는 긴 여행길을 동행하게 된다. 그런데 희한한 아이러니는 그토록 부담스런 짐으로만 여겨지던 돌린이 아들을 찾는데 아주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심해 바닥의 물고기에게 잡아먹힐 위험을 겨우겨우 피하면서 찰나적으로 보았던 시드니의 주소를 돌린이 기억해낸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충격요법을 가하면 기억력이 좋아지는 것인지?


고래 뱃속에서 빠져나올 때도 돌린의 낙천성이 도움이 되었다. 고래 입 속에서 빠져나가려고 한참 애를 쓰고 있는데, 바깥에서 뱃속을 향해 높은 물길이 몰려온다. 이제 끝장이 나는가보다 하고 낙담하고 있는데, 돌린이 괜찮으니까 물을 따라  몸속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고래가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슨 소리를 듣고 그런 태평한 착각을 하는 것인지? 고래와 실제로 대화를 했을리 만무한데. 하지만 다른 수가 없어 반신반의 하면서 그 말을 따랐는데, 그 물길은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한 동작이었고 둘은 고래 숨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덕분에 둘은 마침내 시드니 해변에 도착하고 니모도 찾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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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존재 같았던 돌린. 그런 존재가 정작 어떤 목표를 이루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것을 보면서, 삶의 비밀 하나를 발견하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면서 일반적으로 들이대는 효용, 또는 가치의 기준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로 얼마나 부한지, 얼마나 힘이 있는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얼마나 성격이 좋은지 등에 의해 사람의 가치와 효용을 평가한다. 그런 기준이 일반적으로는, 통계적으로는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질지 모르지만, 과연 모든 일, 모든 경우에 있어 그러한 객관적(?)인 기준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적어도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가치와 효용에는 그런 기준들이 전혀 잘못된 잣대일지도 모른다. 같은 판단기준으로 평가하셨다면, 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그토록 비루한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하셨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왜 베드로와 같은 덜렁이를 당신의 수제자로 삼으셨는지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왜 사회에서 버림받고 어두운 곳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당신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셨는지 알기가 어렵다.


고린도전서 1장 27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바울 사도께서는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약한 지체를 명예롭게 더 아름답게 꾸미지 않느냐고 반문하신다 (고린도전서 12장 22‐23절).


나아가 바울사도께서는 몸의 비유를 통해 신앙공동체의 참다운 모습을 제시하신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1절)."


별별 사람들이 다 모인 곳, 세상적으로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는 곳, 이질적이고 무척 다른 사람들이 섞여 있는 곳, 그냥 섞인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 그런 모습이 참 신앙공동체의 모습이다. 서로가 서로의 가치와 역할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약한 사람들을 더 아름답게 여기고 귀하게 대접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일치를 이루어가는 모습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다. 크리스챤 가정, 교회, 또한 기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모여 이루는 모든 집단이 이런 모습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이상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크리스챤 가정, 교회, 신앙공동체는 물론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이상을 불완전하나마 조금씩 실천해나갈 때, 그 곳에서 작은 희망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보여주지 못하는 희망의 지평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절망으로 어두워져가는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공동체 내에서도 혹 존재할 지 모르는 돌린이 (또는 말린이), 그들의 독특함 때문에 따돌림 받지 않고, 오히려 그들만의 독특함 때문에 사랑받고 관심을 더 받는 풍토가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누구 하나 쓸모없다 여김을 받지 않고 몸의 각기 다른 지체처럼 나름대로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어갔으면 좋겠다.   ✎ 김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