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을 성공시키려면
- 2010년 어린이 주일에 부쳐 -

이 땅을 사는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소원이 있다면 당연히 그 자녀들이 잘 되고 성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엔 결코 예외란 없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부모 되는 이들 자신들이 그 증거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부모들이 다 그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녀들이 다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수만이 잘 되며 소수만이 성공하는 삶을 살 뿐이다. 왜 그럴까? 모든 부모들이 다 자녀들의 성공을 바라는데. 아니 바라는 정도가 아니라 모두가 다 헌신적으로 자녀들을 위해 뒷바라지 하는데 왜 모든 자녀들이 다 성공하지 못하는 걸까.
이 버팔로에는 유학생들이 많다.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니는 유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조기 유학생들도 많다. 그들을 보노라면 그들 뒤의 부모들의 헌신과 희생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그 부모들 가운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자녀들을 유학 보내는 가정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어려운 가운데서 오직 자식 하나 잘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유학을 보낸 가정들이다.
그렇게 해서 자녀들이 잘 되면 다행이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부모들이 그렇게 헌신하고 희생한다고 모든 자녀들이 다 잘 되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럴까? 이는 자녀들의 성공은 ‘투자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녀들의 성공이 얼마나 많이 투자했느냐에 달려있다면 이 세상에 가진 자들, 부자들만이 자녀들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의 성공 여부는 결코 얼마나 많이 투자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아니, 투자 여부에 달려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물량 투자’가 아닌 ‘가치 투자’에 달려있다. 즉 자녀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쏟아 붓는 투자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을 간과한 투자는 아무리 많은 물량을 쏟아 부어도, 아무리 특별한 정성을 쏟아 부어도 대부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특별히 아무런 의식 없이 그저 이 세상 방식에 편승하여 남들 하는 대로 ‘물량 투자’만을 하게 될 경우 성공은커녕 자녀들을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만들거나 혹은 자녀들 안에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그대로 사장시킬 수가 있다.

그러면 어떤 투자를 해야 자녀들을 성공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위해서 먼저 부모들에게 바른 의식이 있어야 한다. 즉 부모 자신이 자녀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며 소중한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자녀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쏟아 부을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원’이 회사 안에서 잘 되고 성공하기 위해선 ‘기업주’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주의 마음에 꼭 들게 일을 잘 한다면, 그리고 기업주의 인정을 받는다면 그 회사원의 앞길은 훤히 열리게 될 것이다. ‘정치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대통령의 인정을 받는 정치가, 대통령의 마음에 꼭 드는 정치가가 있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그 정치가는 대통령에 의해 각료로 발탁되거나 혹은 대통령을 위해 요직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앞길은 보장이 될 것이다.
부모들이 꼭 알아야 할 ‘자녀들의 성공을 위한 기본 원리’란 바로 이것이다. 이 내용을 이 세상의 삶에 그리고 자녀들의 삶에 그대로 적용해보라.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길이 있다면, 성공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이 세상을 주관하는 분, 이 세상을 움직이는 분의 인정을 받는 삶이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잘 되는 삶, 성공하는 삶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세상을 주장하시며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운행하고 계시다. 따라서 그 하나님께 인정받고 그 마음에 들도록 살아갈 때, 특별히 자녀들로 하여금 그 같은 삶을 살도록 할 때 자녀들의 삶은 당연히 잘 되는 삶, 성공하는 삶이 될 것이다.

이제 자녀들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 성공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부모들이 해야 할 것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이 자녀들의 진정한 성공을 위해 모든 부모들이 쏟아 부어야 할 ‘투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너희 자녀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야말로 자녀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축복된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 이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그 같이 자란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을 살게 될 것이며 결국 이 땅에서 잘 되는 삶,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정말 자녀들을 ‘주 안에서’ 양육하려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녀들로’ 살게 하려면 부모 자신들이 본을 보이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다. 결코 그 이상 가는 교육도 투자도 없다. 그러나 그 같은 교육과 투자는 최고의 교육과 투자이면서 또한 가장 어려운 교육과 투자이기도 하다. 그냥 돈만 들여 잘 가르치는 교육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냥 말로만 훈계하고 가르치는 교육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 자신이 본을 보이는 교육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한다고 할 때 거기엔 부모가 본을 보이는 삶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자녀들은 결코 곁길로 가지 않을 것이며 부모들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자녀들을 크게 세우시며 축복하신다.

우리는 ‘다윗’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역사 속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또 ‘위대한 왕’으로 평가되는 사람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함으로 목동의 자리에서 한 나라의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그 같은 대단한 성공은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이는 그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같은 다윗조차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배다른 자식들 간에 통간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형제간에 살육까지 일어났고 심지어 자식 가운데 하나는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기도 하였다. 이 얼마나 엉망진창인 가정이며 또 실패한 자녀교육의 실상인가. ‘다윗’ 본인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요 또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평생 크게 쓰임 받았던 사람이었지만 정작 그 자녀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양육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면 왜 실패하였는가? 그토록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왜 그 자녀들을 믿음의 자녀들로 양육하는 데 실패하였는가? 그가 자식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녀들에게 수없이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신이 본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다윗은 가정 안에서 믿음과 삶의 본을 보이는데 실패하였다. 다윗 자신이 많은 처첩들을 거느림으로 이성문제에 있어 자녀들에게 전혀 본이 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가정 안에 늘 불화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해서 얻은 많은 자녀들을 제대로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부하 장수의 아내와 간음을 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그 부하 장수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그 같은 부정과 죄악은 자식들의 믿음과 도덕성을 망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자식들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들이 되지 못했으며 아버지가 저지른 죄악들을 반복하였고 결국 다윗은 자식들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는 쓰라린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다윗’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믿음과 삶에 본을 보이지 못함으로 자녀교육에 실패하고 말았다. 최고의 자녀 교육, 살아있는 자녀 교육, 그것은 부모 자신이 자녀들 앞에서 늘 본을 보이는 믿음과 삶에 있다. 그럴 때 자녀들은 그것을 보고 신실한 믿음과 삶을 배우게 되며 그 결과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하나님 앞에 크게 축복 받는 삶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부모들을 보면 여러 가지의 유형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식들을 바르게 가르친다고 늘 ‘잔소리하는 유형’ 혹은 부모의 권위로서 자식들을 바르게 교육한다고 늘 ‘명령하는 유형’ 혹은 자식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큰 소리 한번 제대로 못하고 자식들에게 늘 ‘끌려 다니는 유형’, 혹은 삶이 너무나 바쁜 나머지 자식들에게 돈만 대줄 뿐 제대로 관심을 두지 못하는 ‘무관심 유형’ 등. 이 가운데 어떤 유형도 결코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하는 유형이라 할 수 없다.
모든 교육 가운데 최고의 교육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자식들과 삶을 나누고 또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하는 바를 그 자신이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보고 듣는 대로 배우고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이는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믿음’에 대해 가르치는 것보다 실제로 그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또 어떻게 믿음생활 하는지를 보고 더 많이 영향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이는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비결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삶’이다. 따라서 우리의 자녀들이 정말 성공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삶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그 같은 사실을 아무리 강조하여 가르칠지라도 정작 부모 자신이 그 같은 모습의 믿음과 삶을 보이지 않는다면 자녀들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로 끝나고 말 것이다. 부모가 본을 보이지 않는 믿음과 삶의 모습은 결코 자녀들에게 진지한 것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내 자녀가 이 땅에서 잘 되는가 못 되는가 하는 것은, 성공하는 삶을 살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 하는 것은 부모들에게 달려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부모들이 제대로 믿음의 본을 보일 때 자녀들도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고 또 부모들이 제대로 믿음의 본을 보이지 않을 때 자녀들 역시 믿음의 세계에 등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부모로서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것으로 알라! 내 자녀가 장차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삶을 살 것인지 그렇지 못할 것인지를.
격려와 위로의 삶

요즘 영어 설교시간마다 ‘Daniel Yang’ 목사님께서 “교회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시리즈로 말씀을 전해주고 계시다. 하나하나 우리 모두가 꼭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는 귀한 말씀들이 아닐 수 없다.

교회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구원이 선포되는 곳이어야 한다. 아울러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교회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회란 또한 모두가 ‘형제 자매로 지내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 즉 문지방이 낮은 곳이어야 한다. 또한 교회란 결코 ‘차별이나 다툼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 모두가 ‘한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는데 거기에 어찌 다툼이나 차별이 있겠는가. 다툼이나 차별이 있을 때 이는 곧 하나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곳이 교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에 다툼이나 차별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보실 땐 얼마나 더하실까.

여기서 나는 교회에 대해 특별한 모습을 하나 더 언급하고 싶다. 교회란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란 잘난 사람들, 의인들,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죄인들, 상처 입은 사람들, 못난 사람들,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주님 곁에 찾아왔던 사람들이 다 그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같은 사라들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다.
교회는 일종의 의원(醫院)과 같은 곳이다. 즉 아픈 사람들이 나와서 치료 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를 받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문제의 해결을 받는 곳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가복음 2:17)고 하셨다. 우리 주님은 분명 병든 자를 위한 의원으로 오셨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마음에 병든 자들, 상처가 있는 자들, 고민하는 자들을 싸매어주시고 그들을 치료하시기 원하신다. 그렇다면 무슨 얘기인가? 교회는 마땅히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란 주님의 사역을 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격려와 위로가 넘칠 때 그곳이 교회다운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그 상처에 대해서 손가락질하고 험담한다면 그곳은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떠난 교회라 할 것이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격려와 위로’의 사람을 찾으라면 ‘바나바’라는 사람을 들 수 있다. 그 이름을 말할 때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와 비슷한 이름의 사람으로 ‘바라바’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빌라도에 의해 예수님 대신에 풀려난 살인자이고 ‘바나바’는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구브로(Cyprus) 섬 출신의 유대인으로 비록 열 두 사도 가운데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가까이서 예수님을 따른 사람으로 다른 사도들과 거의 동급의 평가를 받을 만한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과 더불어 이 ‘바나바’에 대해서 ‘사도’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
성경은 이 ‘바나바’에 대해서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사도행전 11:24) 착한 사람이 무슨 말인가?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면 ‘착하다’는 말을 풀이하기를 ‘착실하고 마음이 너그럽고 인정이 두텁다’고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는 한마디로 남에게 전혀 해를 끼칠 줄 모르는,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너그러운 그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사용된 이 ‘착하다’는 말은 ‘선행’과 관계된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선을 베푸는 것과 관계된 말이다. 즉 그는 단순히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운 사람이 아닌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었는가? 성경을 보면 자신의 상당한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했다.(사도행전 4:34-36 참조) 한 마디로 ‘바나바’는 구체적으로 남에게 선을 베풀 줄 아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격려와 위로의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의 가장 아름다운 성품이었다. 사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고 ‘바나나’는 일종의 Nickname(별명)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왜 그렇게 불렀는가? ‘바나바’란 이름의 뜻은 ‘격려자’라는 뜻이다. 이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그 ‘격려와 위로’가 바로 기독교 역사상 불세출의 인물인 ‘바울’을 탄생시켰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본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박해자였다. 그런데 그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적을 경험하고 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되었다. 즉 이제껏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잔해하던 자가 이제는 거꾸로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을 감옥에 잡아넣은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겐 여전히 그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있었다. 바울이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속임수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그 같은 상태에서 전전긍긍하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앞장서서 바울을 소개하고, 앞장서서 바울을 기독교 공동체 가운데 밀어 넣은 사람이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이었다. 바나바 덕에 바울은 사도들의 세계, 믿음의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만일 바나바가 아니었더라면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결국 ‘바나바’의 ‘격려하고 위로하는 은사’가 바울을 바울 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면 ‘바나바’가 어떻게 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물론 그가 본래 남보다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럴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행전 11:24)이라고 했다. 즉 그가 선행을 베푸는 착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격려와 위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그것은 그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바나바’는 성령이 다스리는 사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사람이 어디 ‘바나바’뿐인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 성령이 그 안에 머물고 계시는 사람이다.(로마서 8:9 참조) 다만 문제는 사람들이 그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뿐이다. ‘성령 충만’이란 곧 성령께서 그 사람을 강하게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누구든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삶을 살 때 ‘바나바’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 즉 ‘착한 삶’ 나아가 ‘격려하며 위로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교회는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이는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와 같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으로 알라! 우리 교회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인지 아닌지를. 내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내 삶에 ‘격려하는 삶’ ‘위로하는 삶’이 있다면, 우리 교회에 ‘격려와 위로’가 넘친다면 나와 우리 교회는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여인이 한 사람 있다. 그녀는 10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 때부터 그녀는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녀는 20세에 결혼을 했다. 그녀가 결혼한 남편은 젊고 패기 있고 장래성이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남편이 관절염에 걸려 다리가 말라버리는 불행에 직면케 되었다. 그로 인해 남편은 쇠붙이를 다리에 고정시킨 채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남편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불구자가 되었는데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그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줄 아셨나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삶이예요. 당신의 다리가 아니에요.”
이 말은 다리 불구자가 된 뒤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남편에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결국 그 남편은 다리 불구자임에도 불구하고 1932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36년에 다시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1940년에 3선, 그리고 1944년에 4선까지 되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바로 ‘루즈벨트’(Roosevelt) 대통령이다. 그리고 그 부인이 바로 ‘엘레나 루즈벨트’ 여사이다. 그녀는 남편을 격려하고 남편에게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준, 그리하여 남편을 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여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가운데 처한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넣어주는 가장 대표적인 본을 보인 사람이 되었다.
바울이 있기 위해서 ‘바나바’가 있었던 것처럼, 루즈벨트 대통령이 있기 위해서 그의 부인 ‘엘레나’ 여사가 있었다. 바나바와 엘레나 여사, 두 사람 다 격려를 통해 역사상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격려와 위로’란 이처럼 위대한 것이다. ‘격려’란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남을 격려하고 세우는 것,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남이 잘못했을 때 용서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책망하고 비난하고 기회가 있을 적마다 험담하는 그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령을 모신 사람들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삶은 용서하고 위로하고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삶이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격려자, 위로자로 오신 것을 기억하라! 주님께서는 희망이 없는 죄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초대의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니, 단지 그 같은 사람들을 초대하신 정도가 아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다. 한 마디로 우리 주님의 삶은 ‘위로의 삶’이요 ‘격려의 삶’이었다.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모습을 본 받는 삶, 즉 ‘격려와 위로의 삶’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용서의 미학


기독교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당연히 ‘사랑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종교요 또한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이는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사랑하는 삶을 가르치셨다.
‘사랑’은 사실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일 수 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위가 있다면 바로 ‘용서’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용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 둘은 결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사랑’하시기에 인간들의 죄악을 ‘용서’하셨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용서의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셉이 그 형들을 용서하는 이야기, 다윗이 사울을 용서하는 이야기,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하는 이야기 등.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이야기로 요셉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10대 소년 시절에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다. 즉 자신의 친형제들이 자신을 노예로 판 것이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있겠는가? 그로 인해 그는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즉 십 수 년 세월을 짐승처럼 노예로 살아야만 했다. 나중에 그가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된 다음 그는 다시금 그 옛날의 형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때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 형들을 참수하거나 혹은 죽는 날까지 형들을 감옥에 가두어두었는가? 혹은 그 형들에게 아주 잔인하고 시원하게 보복을 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시원하게’ 보복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라는 방법으로 보복을 했다. 그것은 그 어떤 잔인한 방법(?)보다 더욱 잔인한 보복이었다. 왜냐하면 그 형들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바로 자신들이 노예로 판 동생인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형들은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자신들이 행한 일을 생각하면 이제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감옥에서 평생 살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동생 요셉이 자신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을 형으로 극진히 대접을 했다. 모든 지난날의 과오를 다 용서한다고 하면서. 그때 자신들의 저지른 죄가 얼마나 부끄러웠겠으며 얼마나 몸 둘 바를 몰랐겠는가? 그 형들의 낯이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복수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결국 요셉은 형들에게 최고의 복수를 한 셈이다.

최고의 복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수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철저하게 깨닫고 회개하게 하면서 더 이상 원수 관계가 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복수가 될 것이다. ‘용서’가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조건 당한 대로 갚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보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같은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정한 보복’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로마서 12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9절)

하나하나 도저히 우리가 따를 수 없는 내용들이 아닐 수 없다. 원수는 그만두고라도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런데 ‘원수에게’ 그와 같이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곧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은 것과 같은 것이 되리라”(20절)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는 곧 요셉의 형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스스로 큰 부끄럼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용서’가 바로 그와 같이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복수는 복수대로 하고 서로 화해까지 하게 만드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처럼 깨끗한 보복, 또 최고의 보복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원수에 대해 ‘용서’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것이요, 또 친히 실천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다. 오히려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그토록 은혜를 베풀고 사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들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형의 끔찍한 죽음을 당하셨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지막 운명하시는 순간, 결코 인간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간구하셨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정신이자 가르침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그 같은 주님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같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같은 모습이 있을 때 또한 ‘화해’가 가능하다. 즉 바로 그 같은 모습이 있을 때 원수 관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그와 같이 하셨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관계가 무너지고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용서’ 없이 ‘화해’란 없다.

무엇보다 ‘용서’하게 될 때 나를 더 상하지 않게 하고 망치지 않게 한다. 용서란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사람이 용서하지 않을 때, 당한 것만 해도 큰 상처가 되는데 그것으로 인해 그 자신이 계속해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는 두 번 세 번 스스로 고통을 겪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미국의 제 20대 대통령으로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라는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188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불행히도 대통령에 취임한지 4개월밖에 안되어 저격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등에 총을 맞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의식을 잃지 않았다. 병원에서 의사가 그의 등에서 총알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총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상처 부위를 찾고 찾아도 총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대통령은 점점 건강이 악화되어갔다. 많은 의사들이 총알을 발견하려고 매달렸지만 결코 찾을 수가 없었다. 7월에 총을 맞은 대통령은 8월을 지내고 9월이 되도록 계속 병상에 누워있었으며 결국 9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통령이 사망한 것은 총을 맞은 것 때문이 아니라 총알을 찾지 못한 것으로 인해 상처부위가 부패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심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억울한 일이 그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상대방의 공격이 그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 일로 인해 보복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것이 그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화병’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누군가로부터 크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일로 인해 계속 분노하게 될 경우 그로 인해 마음의 병에 걸리게 된다. 이는 상대방의 공격 때문이 생기는 병이 아니라 스스로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혹은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미움을 이기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다. 분노하는 마음, 보복하는 마음은 그처럼 좋지 못한 것이다. 원수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것만 해도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데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망가지게 만든다면 이거야말로 이중으로 고통을 겪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분노 혹은 보복하는 마음은 가능한 한 빨리 버릴수록 좋다는 것이다.

‘용서하는 삶’을 위해 우리는 ‘요셉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요셉이 어떻게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는가? 성경을 보면 요셉이 그 형들에게 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 내용 안에서 요셉이 어떻게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50:19-21)

그는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뭐라고 말했는가?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라고 했다. 그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으나 모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로 지난날 형들이 행한 모든 악행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하였다. 즉 당신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요셉이 그 형들을 저주하고 원수를 갚을 수 있겠는가?

세 번째로 선으로 악을 갚았다. 요셉은 원수 갚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오히려 두려워 떠는 그들을 위로했다고 했다. 이 얼마나 ‘완전한 용서’인가? 그랬기에 그로 인해 ‘화해’가 있을 수 있었다. 보복이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결코 ‘화해’란 없다. 그러나 ‘완전한 용서’ ‘참된 용서’는 ‘참된 화해’를 가져온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의 미학’이다.

‘용서’를 배우라! ‘용서하는 삶’을 배우라! 그것은 자신을 살리고, 상대방을 부끄럽게 만들고, 더 나아가 그 관계를 아름답게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는 삶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용서,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Trademark와도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열심히 교회에 나온다고 감명 받지 않는다. 우리가 밤을 새워 기도한다고 감명 받지 않는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한다고 감명 받지 않는다.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때 그때 세상은 감명을 받는다. 그 때 세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인들로 안다.

용서할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용서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 용서할 때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하는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어 가시며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신다. 당신의 삶 가운데 ‘용서하는 삶’이 있는가? 그것으로 알라! 당신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김현진
 

이건 아니지 싶다



  친구 가운데 사업에 어려움을 겪는 친구가 있었다. 경기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자금회전이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주위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조금만 자금을 지원해주면 현재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겠다고 하면서. 주위의 친구들이 다 같이 어렵지만 안 되었다 싶은 마음에 힘닿는 데까지 자금을 모아 어려움을 호소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리는 소문이 그 친구의 씀씀이가 보통 헤픈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최근엔 차도 예전보다 더 좋은 고급차로 바꾸어 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업이 잘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크게 상관할 문제가 아니겠지만 사업은 조금도 나아진 것 없이 순전히 자기들이 어렵게 모아준 자금으로 그렇게 흥청망청 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생각과 함께 이건 아니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당사자를 찾아가 물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이 소문과 같았다. 오히려 그 친구는 어이없어 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자기는 본래 살아오던 대로 살고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자동차도 자기가 평소 해오던 대로 때가 되어 교체한 것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기 삶의 수준이 예전만 못한 것에 대해서 불평을 쏟아놓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찾아온 친구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같은 얘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참으로 기가 막힌 친구 아닌가?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 ‘가정’해서 생각해본 내용이다. 만일에 당신 주위에 정말로 이 같은 친구가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리고 그 친구에게 실제로 당신의 피 같은 돈이 들어갔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 친구에 대해 배신감이 들 것이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그 돈을 돌려받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 친구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도움은커녕 다시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가정’해도 황당한 일이 얼마 전 실제로 일어났다. 다른 곳이 아닌 이 미국에서, 그것도 개인이 아닌 대형 금융기관들에서, 또 온 세상이 다 알도록 말이다. 다름 아닌 ‘월가’(Wall街)의 얘기이다. 듣는 바로는 월가 금융인들이 지난해 말에 챙겨간 보너스가 자그마치 184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자기들 돈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면 보너스를 받든 돈 잔치를 하든 무슨 상관이랴! 문제는 그들이 나누어가진 돈이 국민들의 혈세로 지원한 구제금융이라는 데 있다. 이를테면 가까운 친구들이 사업자금에 쓰라고 지원해준 돈을 개인 용도로 흥청망청 쓴 것과 같다고나 할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목회자 칼럼

푸른초장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요즘 미국의 경제가 말이 아니다. 특별히 ‘월가’의 금융기관들은 현재와 같은 경제위기를 초래한 당사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경제를 살리기 위한 차원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국민들의 혈세로 그들에게 엄청난 금융지원을 했더니만 그 돈으로 자기들끼리 보너스 잔치를 한 것이다. 그로 인해 ‘월가’를 향한 미 국민들의 분노와 비난의 화살이 보통이 아니다. 이 같은 국민들의 비난여론을 의식한 듯 그들은 변명하기를 이는 월가의 ‘관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몰이해(沒理解)의 소치라고 했다는데... 월가의 오랜 관행은 “실적 있는 곳에 보상이 있다”는 원칙으로 회사의 전체적인 실적보다 개인의 성과에 더욱 무게를 두는 것이라고 한다. 그로 인해 보너스는 일종의 급여의 연장으로 취급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예외 없이 보너스 지급을 했다는 것인데. 글쎄다, 그게 과연 설득력이 있을지.

  아무리 그럴지라도 ‘때’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액수’라는 것이 납득할 만한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회사가 망해가는 마당에 그리고 망해가는 회사를 회생시키고자 나랏돈을 지원받는 마당에 184억불 보너스가 웬 말인가? 이는 1인당 평균 10만 불이 넘는 금액이라고 한다. 모든 미 국민들이 불경기에 신음하고 일자리 불안에 시달리는 마당에 국민들의 돈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10만 불 이상씩 나누어 갖는 것이 과연 ‘관행’이라는 말로 설명이 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도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기가 막힌 것은 대다수의 ‘월가 직원들’이 자기들이 받은 보너스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작년에 자기들이 받은 보너스에 비해 턱없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듣는 바로는 작년에 월가 직원들이 받은 보너스는 모두 329억 달러였다고 한다. 그때야 자기들의 돈으로 돈 잔치를 했겠지만, 지금은 자기들 돈이 아닌 국민들의 혈세 아닌가? 어찌 그것을 자기들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예전만 못하다고 투덜거린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같은 기사들을 보자니 문득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참으로 뻔뻔한 사람들 아닌가? 아니 ‘후안무치’ 정도가 아니라 이는 ‘범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의 혈세를 자기들 호주머니에 넣었으니 나랏돈을 횡량한 범죄 아닌가? 비록 정치도 모르고, 경제도 모르고, ‘월가의 관행’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는 나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싶은 생각이 든다.


  ‘월가’(Wall街)의 이 같은 후안무치한 관행을 전해 듣고서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오바마 대통령’이 크게 발끈하며 격노했다고 한다. 그는 아무리 관행일지라도 이번 월가의 보너스 지급은 ‘무책임의 극치’라고 하면서 ‘부끄러운 일’

목회자 칼럼

푸른초장



이라고 성토하였다. 그는 크게 불쾌한 표정으로 “회사의 경영진들이 이익을 내서 보너스를 받던 때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다”고 하면서 “월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제하는 모습,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일갈(一喝)하였다. 정말이지 백번 옳은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번 ‘월가’의 후안무치한 행태를 보면서 그 속에서 세상 사람들의 이기적인 사고방식과 자기중심적인 Lifestyle을 읽을 수가 있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이 사회야 침몰하든 말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어쩌면 그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의식이 아닌가 싶다. ‘월가 사람들’은 단지 그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따름이고.

  이번 일을 목격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 시대야말로 ‘상식’과 ‘양심’을 상실한 시대라는 것이다. 아무리 관행이라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국민들의 돈으로 거금의 보너스 잔치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들에게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결코 그 같은 일은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십여 년 전에 한국에서 비슷한 일들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IMF 사태로 인해 한국이 무척이나 어려울 때였다. 그때 국가 경제회복을 위해 국민들의 혈세로 많은 회사들에 공적자금을 쏟아 부었는데 개중 어떤 회사들은 그 자금으로 자기들의 호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했었다. 그것이 알려졌을 때 온 국민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허탈해 했는지... 정말이지 ‘상식’과 ‘양심’을 상실한 자들이 아닌가?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는 너무 ‘책임’이 결여된 사회인 것을 본다. ‘월가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이 지원받은 돈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가졌어야만 했다. 특별히 그것이 ‘국민들의 혈세라는 생각을 가지고’ 책임 있는 자세를 보였어야만 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어깨에 미국의 경제, 세계의 경제가 달려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임 있게 행동했어야만 했다. 그랬더라면 자기들끼리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후안무치한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그들을 향해 ‘무책임의 극치’라고 비난한 것은 매우 적절한 책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책임 의식’을 상실한 자들이 그들뿐이랴! 가만 보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책임’과 담쌓은 삶을 사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상식’과 ‘양심’과 ‘책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와 같은 것들이 점점 무너져가거나 상실된 시대이다. 따라서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들을 회복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상식과 양심과 책임의 삶’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세상 사람들을 능가하는 ‘상식과 양심과 책임의 삶’을 살아야

목회자 칼럼

푸른초장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많은 것을 보게 된다. 단지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단지 교회만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이번에 자기들끼리 돈 잔치를 벌인 ‘월가 사람들’ 가운데에도 ‘자칭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같은 생각을 할 때 가슴 한편에 답답한 생각,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요즘과 같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상식과 양심과 책임의 삶’만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희생하는 모습’이 있어야만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란 곧 희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가? 그분은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시는 삶을 사셨다. 즉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살리시고자 자신을 희생하셨다. 어느 정도로?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대신 당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 죽으실 정도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특징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의 삶, 즉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삶은 세상과 역행하는 삶이다. 세상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사회이다. 더 나아가 남을 짓밟으면서까지 자기만 잘 살려고 하는 악한 사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물론 그 삶은 결코 쉽지 않은 삶이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최소한 그 같은 삶을 흉내라도 내며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 아직은 소망이 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지금껏 ‘월가 사람들’의 후안무치한 짓에 대해 성토했지만 그 같은 일을 일삼는 자들은 단지 그들만이 아니다. 가만 보면 “이건 아니지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어쩌면 그만큼 세상이 더 살기 힘들어졌다는 혹은 더 악해졌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럴지라도 아니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정신을 차리고, 세상의 Lifestyle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어야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가르켜 ‘빛과 소금’이라 하였다. 빛이 꺼진다면 어찌 세상의 어둠을 쫓아낼 수 있겠는가!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어찌 세상의 부패를 막을 수 있겠는가! ✎김현진

 

자녀들의 축복을 위한 멍석

- Joint Service를 시작하며 -



2009년을 시작하면서 모든 이들에게 이런 저런 소원들이 있는 줄 안다. 가족들을 위한 소원, 생업을 위한 소원, 그리고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원 등. 특별히 자녀들을 키우시는 분들의 경우 자녀들을 위한 소원이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우선일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우리 한국의 부모들은 타민족의 부모들보다 그런 면에서 더욱 특별하지 않나 생각한다.

문득 자녀들을 위한 부모들의 소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혹 학업 중에 있는 자녀를 둔 부모가 있다면 무엇보다 ‘공부를 잘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 것이다. 한국 부모들의 대단한 교육열을 생각할 때 그리 틀린 판단은 아니리라.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겠고, 혹은 직장 다니는 자녀들을 둔 부모들은 직장생활 잘 하기를 위해서, 결혼 적령기의 자녀들을 둔 부모들은 금년에 좋은 배우자감을 만날 수 있기를 소원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소원 가운데서 부모들이 정말 가져야 할 가장 귀한 소원은 자녀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부모라면 말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유일하신 신이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모든 성공과 축복은 당연히 그분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녀들이 가장 잘 되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두말할 필요 없이 자녀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많은 항목들을 조목조목 들면서 자녀들을 위한 소원을 비는 것도 좋지만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소원이요, 또 가장 현실적인 소원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바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그와 같이 양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믿게 할 수 있을까? 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물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중요한 물음에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형편이다. 특별히 이중 문화권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민교회의 현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목회자 칼럼

푸른초장



우리는 모두 이민자들이다. 즉 우리가 사는 곳은 한국이 아닌 미국이다. 말과 글, 의식, 문화 모든 것이 다른 세계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태어나는 우리의 2세들은 한국인의 피와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미국인으로서 성장한다. 그들은 처음 3-4세까지는 부모를 통해 한국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게 되는 Pre-School 때부터 아이들은 서서히 미국화 되어간다. 이는 학교를 다니면서 더 이상 한국어권의 영향력이 아닌 영어권의 영향 하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을 통해, 또래집단과의 인간관계를 통해 그 인격과 의식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의 자녀들은 본질적 한국인에서 외양적 한국인으로 변화되어간다. 즉 외모만 한국인일 뿐 미국인으로 변화되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녀들이 아주 미국화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여전히 한국 가정에서 한국 문화와 한국적 사고를 접하며 생활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자녀들은 철저하게 이중 문화권 속에서 살아간다. 즉 두 문화권의 혼돈 속에서 성장한다. 그 속에서 자녀들은 언어이든, 문화이든, 의식이든 자신이 원하는 한국적인 것은 취하고 자신이 원치 않는 한국적인 것은 버린다.


문제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결코 한국적 문화도 의식도 아닌 민족과 문화를 초월하여 이 땅의 모든 인생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문제는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마저 부모 세대에 속한 것처럼, 혹은 한국적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마저 다른 한국적인 것들을 버릴 때 함께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가만히 2세들을 관찰하면 그런 차원에서 믿음을 떠나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즉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집을 떠나면서 교회도 하나님도 함께 떠나는 2세들이 얼마나 많은가?


2009년에 들어서면서 우리 교회는 ‘Joint Service’(한영연합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Joint Service’(한영연합예배)란 예배 안에 영어와 우리말이 함께 공존하는 예배를 말하는 것이다. 즉 설교도 영어설교와 우리말 설교가 모두 있고, 다른 순서들도 서로 불편함이 없이 영어권과 한국어권이 자기들의 예배처럼 느끼도록 하는 예배를 말한다. 물론 그 동안 가끔씩 ‘Joint Service’(한영연합예배)를 드려왔다. 그러나 이는 1년에 서너 차례 중요한 절기 때마다 가졌던 것이고 이제는 매주 ‘연합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어권과 영어권 모두를 위해서이다.

사실 ‘Joint Service’(한영연합예배)를 드리는 가장 큰 이유라면 2세들, 즉 자녀 세대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즉 자녀들에게 믿음의 뿌리를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할까. 가만 보면 한인이민교회들은 늘 1세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다보니 2세들은 예배에서 늘 들러리처럼 소외되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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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조차 ‘들러리 믿음’을 지녀온 것이 사실이다. ‘믿음’에 들러리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들의 위치가 ‘중심’이 아니었다면 이는 어떤 의미에서 ‘들러리’였다는 것이다. ‘Joint Service’는 바로 그와 같은 구습(舊習)을 개정하기 위함이다. 즉 이제는 2세들도 대예배를 자기들의 예배처럼 여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더 이상 부모 세대의 것으로 혹은 한국적인 유산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그들이 성장하여 집을 떠나더라도 ‘믿음’마저 떠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를 가더라도 편안히 ‘예배’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Joint Service’를 드리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자녀 세대를 위해서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이 ‘Joint Service’를 통해서 더욱 ‘믿음’ 가운데 서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된다면 이 ‘Joint Service’는 어떤 의미에서 자녀들의 축복을 위한 참으로 소중한 ‘멍석’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Joint Service’(한영연합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꼭 자녀 세대 즉 2세만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는 우리 이민 1세와 유학생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에 살면서, 또 자녀들이 영어권이면서 정작 1세들은 여전히 ‘영어’와 낯선 것이 사실이다. 특별히 영어권 예배에 익숙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Joint Service’는 모든 1세들을 영어권에 친숙하게 만들고 특별히 영어예배에 친숙하게 만들 것이다. 이 또한 일부러 영어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모든 1세들이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귀한 소득이기도 하다.

특별히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에게는 더욱 유익한 기회가 될 것이다. 때때로 한국에서 갓 유학 온 학생들이 한국 교회에 나가지 않고 미국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들어보면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란다. 그러나 어찌 ‘예배’를 영어교육의 수단으로 삼을 수가 있는가? 이는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사는 곳에 한국 교회가 없다면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있다면 내 언어로, 내 의식으로 제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내가 100% 이해하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럴지라도 많은 학생들에게 영어권 예배를 경험하고 또 영어로 말씀을 듣고자 하는 바람이 없잖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유학생활 중에나 가질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Joint Service’(한영연합예배)가 바로 그 목마름을 해결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찬양에도 영어 찬양이 있고, 설교 또한 영어 설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 말 찬양, 우리 말 설교도 제대로 있으니 이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꼭 1세 2세 한국인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이는 영어권의 모든 민족에게 예배 문호를 개방하기 위함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우리 교회에 참석하는 미국인 교우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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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동시통역’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통역이었지 ‘영어권 예배’는 아니었다. 이제 누구든 영어만 한다면 그들 또한 한국 사람들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있을 것이다. 편안하게 ‘영어 설교’를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본인들이 원한다면 통역을 통해 한국어 설교도 보너스(?)도 듣게 될 것이고.


그러나 모든 것 가운데 ‘Joint Service’(한영연합예배)를 갖는 가장 큰 의미, 또 가장 크게 얻게 될 결실이 있다면 1세와 2세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 되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한 가족이면서도, 또 같은 신앙인이면서도 서로 다른 언어와 의식의 차이로 인해 신앙마저 Gap(차이)을 느끼고 있었던 1세와 2세가 늘 함께 예배드림으로 서로 ‘하나 됨’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양쪽 그 누구도 예배를 낯설게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자기들의 예배로 느끼면서 말이다.

그렇게 가족들과 함께 편안히 예배드리는 것이 생활화 된다면 훗날 자녀들이 집을 떠나게 될지라도 ‘교회’나 ‘믿음’을 떠나는 일은 쉬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예배’나 ‘믿음’이 부모 세대 혹은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것’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년들과 함께 편안히 예배드리는 대예배 참석이 어느 사이 ‘생활화’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언제든 다시 집에 돌아오더라도 결코 낯설지 않게 편안하게 온 식구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같은 많은 이유와 의도, 바램을 가지고 2009년부터 ‘Joint Service’(한영연합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실험적으로 시도해보는 단계이다. 예배에 실험이 어디 있냐마는 운영방식이나 순서진행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아무쪼록 최소한의 시행착오로 최대한 빨리 1세와 2세가 함께 어우러지는 가장 이상적인 우리만의 예배가 자리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자녀 세대들이 더욱 믿음 가운데 든든히 설 뿐만 아니라 미국 내 한인 이민교회에 귀한 role model(역할 모델)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현진

“부시여, 안녕!”



드디어 ‘부시’가 떠나간다. 오는 20일 정오를 기해 ‘부시’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자그마치 8년 세월이다. 다른 어떤 대통령 재임보다 길게 느껴진 세월이 아닐 수 없다. 글쎄다, 같은 시간이라도 즐겁고 좋은 일은 빨리 지나가는 데 반해 슬프고 안 좋은 일일수록 더디 가는 듯하다는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정말 다른 대통령 재임 때보다 왜 그리 길고 지루하고 힘들게 느껴진 기간이었는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가는 ‘부시’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무엇일까? 글쎄다, 이는 더 많은 세월이 지나가봐야 알 일이겠으나 모르긴 몰라도 그리 좋을 듯싶지는 않다. 아니 내 개인적인 견해까지 반영하자면 상당히 나쁠 듯싶다. 실제로 막 퇴임을 앞둔 그에 대한 여론의 평가는 그야말로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최악이다. 그에 대한 여론의 지지도는 20%대로 이는 ‘닉슨 대통령’ 이래 최저 수준이라고 한다. 지난 해 역사가 109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단 2명만이 그를 성공적인 대통령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통계로 보자면 2%가 안 되는 수준이다. 일반 여론이 20%인 것만도 최악인데 그보다 더 객관적이고 더 엄격하고 더 정확한 역사가들의 평가가 그렇다면 참담하다 못해 불행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약 한달 전쯤엔가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부시와 이라크 총리가 공동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이라크의 어떤 기자가 부시를 향해 신발을 집어던진 것이다. 그것도 한짝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한짝이 날아들더니만 연이어 또 한짝이 날아들었다. 그로 인해 회견장은 삽시간에 난장판으로 변하고 신발을 던진 기자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신발을 던지는 것은 아랍권에서는 중대한 모욕에 해당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그 기자는 부시에게 “이게 마지막 작별 인사”라는 말과 함께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부시에게 신발을 던졌다고 한다. 아마도 부시가 자기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그 같은 행동을 했던 것 같다.

그 기자가 부시에게 신발을 던진 것, 나는 그것이 부시를 향한 역사의 평가처럼 생각되었다. 부시는 ‘역사’로부터, 그리고 ‘세계’로부터 신발을 맞을 만한 대통령이 아닌가 싶다. 이는 그가 세계에 저지른 범죄(?) 때문이며, 또한 미국의 경제를 망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같은 내 글을 읽으면서 내가 마치 anti-Bush라도 되는 듯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코 안티 Bush가 아니다. 단지 그가 대통령 재임시 일으킨 전쟁과 그가 행한 많은 실정 때문에 그와 같이 평가하는 것뿐이다.




사실 ‘부시’는 그 시작부터가 쉽지 않았다. 지난 2000년, ‘엘 고어’ 전 부통령과 법정까지 가는 혈투 끝에 힘겹게 백악관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그는 8년간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격변의 시간을 보냈다. 처음 그는 ‘작은 정부’와 ‘온정적 보수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정권 출범 9개월 만에 터진 9.11 사태를 계기로 하루아침에 그는 ‘제왕적 지도자’로 돌변하였다. 9.11 사태는 그 자체로 역사와 미국의 비극이었으나 부시에게 있어서는 보통 효자가 아닐 수 없었다. 이는 9.11 사태로 인해, 턱걸이로 간신히 대통령이 된 사람이 90%가 넘는 압도적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기회였다. 만일 그가 당시의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뿐만 아니라 역사와 세계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지고 바르게 지도력을 발휘했더라면 그는 역사 속에 ‘위대한 대통령’으로 그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악수(惡手)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악의 세계를 제거하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책임”이라고 하면서 마치 도탄에 빠진 세계를 구하기 위해 출현한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처신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미국의 안전을 명분으로 세계를 미국화하려는 ‘깡패 국가’로 돌변했다고나 할까. 정말 그는 ‘깡패’마냥 전 세계를 향해 “우리 편에 서든지 아니면 테러 편에 서든지 하라”고 엄포까지 놓았다. 사실상 그때 이미 그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부시는 ‘악’(탈레반)을 응징한다고 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을 살상시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이듬해(2001년) 그는 이라크로까지 전쟁을 확산시켰다. 당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끝까지 전쟁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무대포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미국을 ‘깡패 국가’로 각인시키는 순간이었다. 그 전쟁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해 그 살상무기를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에서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라크 국민을 도탄에 빠뜨린 전쟁의 명분은 허구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야말로 범죄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로 인해 미국의 외교는 개국 이래 가장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는 전 세계 국가들이, 심지어 그 동안 우방으로 여겨졌던 나라들마저 미국에 대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은 만 7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단지 전쟁을 일으킨 것만이 아니다. 그는 미국과 세계의 경제마저 수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가 일으킨 전쟁이 ‘범죄’라면, 그가 무너뜨린 경제는 엄청난 ‘실정’이 아닐 수 없다. 부시가 빌 클린턴 전임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을 때만 해도 국가 재정은 2360억불이나 흑자였다. 그런데 2008년 기준으로 그는 그 흑자 재정을 4550억불의 적자 재정으로 바꾸어놓았다. 그 적자규모는 금년 들어 1조 달러가 




넘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나라 살림을 다 말아먹었다고나 할까. 참으로 대단한 재주(?)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이처럼 흑자 재정을 적자 재정으로 바꾸어놓은 데엔 부유층 위주의 정책을 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그는 부유층의 부의 효과가 일반 국민들에게 확산된다는 비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대기업과 부자들에게 유리한 감세정책을 폄으로 엄청난 국가재정의 손실을 초래했고, 사회적으로는 더욱 빈부격차를 늘리는 사회양극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그가 집권할 당시 빈곤층은 640만 명이었으나 현재는 76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의 경제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하였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가 잘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신흥 대국인 중국, 인도와의 관계를 공고히 한 점, 그리고 AIDS 확산을 막기 위해 아프리카에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점, 또한 ‘낙제학생방지법’을 제정해 공교육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한 점 등은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업적들은 그의 실정들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지나지 않으며 전반적으로 부시 정권 8년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리만큼 좋지 않다.

지난 목요일(1월 15일)에 부시는 퇴임 닷새를 남겨 놓고 ‘고별 연설’을 하였다. 아쉽게도 그리고 낯 뜨겁게도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업적을 열거하며 자신의 실정들에 대해 변명만을 늘어놓았다. 특별히 “마음속에 최선의 국가이익을 염두에 두고 항상 행동했으며 내 양심에 따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했다”(I have always acted with the best interests of our country in mind. I have followed my conscience and done what I thought was right.)고 말할 땐 쓴 웃음마저 나왔다. 무엇이 ‘국가 이익’이며, 또 그의 ‘양심’은 어떤 양심인가? 미국을 ‘깡패 국가’로 만드는 것이 국가 이익이며, 거짓에 근거하여 수많은 사람을 살상시키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그의 양심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자리에서조차 나는 그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왜곡된 사고와 양심에 대해서.


나는 부시를 보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맹점, 아니 민주주의 자체의 맹점을 느낀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 대다수 구성원들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바로 그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해 부시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특별히 미국은 선거인단이라고 하는 대의원 제도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다. 이 제도 때문에 총유권자 수에 있어 민주당의 ‘엘 고어’ 후보가 더 많은 득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통령은 더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가 부시가 되었다. 미국이 연방국가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한편으론 이해가 되면서도 어떻게 보면 불합리한 민주주의가 아닐 수 없다. 바로 그 같은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의 맹점으로 인해 ‘부시’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이고, 그 결과 미국이 지금처럼 ‘수렁’에 빠진 나라가 된 것이다.



단지 미국의 민주주의만이 아니다. 나는 ‘부시’를 보면서 민주주의 자체의 허구와 맹점을 목격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방식에 의거해서 부시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번이 아닌 두 번이나 말이다. 어떻게 부시 같은 사람을 두 번씩이나 대통령으로 세울 수가 있을까? 여기서 나는 민주주의의 맹점이라고 할 수 있는 우중정치의 실상을 본다. 그 결과 미국과 전 세계는 8년이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민주주의가 대다수 구성원들이 원하는 대로 의사를 결정하는 정치라고는 하지만 그것만이 꼭 옳은 방식은 아닌 듯하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물론 기독교는 민주주의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것인데 기독교가 그 기초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가르친다. 즉 모든 인간은 다 동등하며, 또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할 인권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친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 같은 정신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기독교가 지향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주권주의’이다. 즉 기독교는 의사결정에 있어서 다수의 의사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나님 그분이 원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뜻에 따라 움직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수를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각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가운데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민주주의이요 또 그럴 때 가장 바람직한 결정, 가장 이상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에 이 나라의 국민들이, 특별히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같은 생각으로 대통령을 뽑았더라면 최소한 ‘부시’ 같은 사람이 재선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민주주의’에 감사한다. 특별히 이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임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 민주주의 때문에 부시가 물러나게 되었고 다시 새로운 대통령,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곳이 미국이 아니고, 공산국가나 독재국가였다면 부시 정권하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지냈을 터인데 말이다. 8년이 긴 세월이긴 하지만, 그 8년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뒤틀어지고 망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8년 만에 ‘부시 정권’이 끝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부시를 떠나보내면서 문득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바른 대통령을 뽑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서 등등.

글을 맺으며 그래도 퇴임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마지막 인사는 해야 할 듯싶다. “부시여, 안녕!”  ✎김현진

링컨의 반만큼이라도 되라!

-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에 즈음하여 -



2009년 1월 20일. 이 날은 역사 속에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특히 미국 역사에 있어서. 이는 제 44대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날이어서가 아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취임한 날이기 때문이다. ‘흑인 대통령’이 취임한다는 것 이는 곧 이 나라 미국이 어떠한 나라인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즉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나라, 인종과 편견을 뛰어넘어 인격과 능력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나라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나 할까. 그렇기에 이번 대통령 취임은 다른 어떤 때보다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 선출된 ‘오바마’는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그만큼 그를 향한 미국민들의 기대가 큼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 게다. 역사상 가장 많은 군중이 국회 의사당 앞 광장에 운집하여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한 이유가. 그래서일 게다. 역사상 가장 많은 세계 인구가 TV를 통해서 ‘오바마’의 취임식을 지켜본 이유가. 언론 보도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1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취임식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는 ‘오바마’를 향한 기대가 단지 미국민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라 할 것이다.


그가 취임식을 가진 국회 의사당 앞에는 ‘링컨 기념관’이 있다. 그래서인지 TV 화면엔 자주 링컨 기념관이 비쳐졌다. 그 링컨 기념관을 보는 순간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147년 전에 ‘링컨’이 흑인노예해방을 선언했는데 오늘 그가 해방시킨 흑인 가운데서 미합중국 대통령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46년 전에 저 ‘링컨 기념관’ 앞에서 수십만의 흑인들이 운집한 가운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I have a dream”이라는 명연설을 하며 흑인 민권운동을 가졌는데, 마침내 오늘 그 민권운동이 결실을 맺어 ‘흑인 대통령’을 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번 ‘오바마’ 대통령은 ‘링컨’과 각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이번에 ‘오바마’가 대통령 취임선서를 할 때 왼손을 올려놓은 성경이 바로 ‘링컨 대통령’이 사용했던 성경이라고 한다. 그 성경은 지난 1861년 이래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국회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오바마’가 그 성경을 찾아내 자신의 선서식에 사용했다고 한다. 어쩌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만 보면 ‘오바마’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링컨 따라하기’를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실제로 오바마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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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초장



언론에 밝히기를 “요즘 링컨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있다”고 하면서 링컨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존경과 애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오바마’는 그 동안 줄곧 ‘통합의 리더십’을 내세웠는데 이는 ‘링컨’에게서 따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연설’에 있어서도 ‘오바마’는 링컨의 연설을 많이 모방하려 애썼다고 한다. 특히 그는 정적까지 껴안을 수 있는 ‘초당주의’를 역설했는데 이는 링컨의 연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단지 연설문의 모방 정도가 아니다. 이번 대통령 취임식의 주제가 “자유의 새 탄생”(New birth of freedom)인데 이는 링컨의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Gettysburg) 연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는 대통령 취임식을 3일 앞 둔 지난 17일부터 가족들이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기차를 타고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워싱턴에 당도했는데 이 또한 ‘링컨 대통령’이 가졌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행한 것이라 한다. 이 정도면 ‘오바마의 링컨 따라하기’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오바마’는 왜 그토록 ‘링컨’을 기대며 ‘링컨’을 따라하는 것일까? 그가 흑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킨 ‘구세주’와 같은 인물이어서 일까? 물론 그 역시 다른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을 추앙하며 존경할 것이다. 그러나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이는 링컨이 미국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 때문이다. ‘링컨’이 어떤 사람이며 또 이 미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과 의미를 갖는 사람인가를 알게 될 때 ‘오바마의 링컨 따라하기’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링컨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1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미국민들로부터 변함없는 추앙과 존경을 받고 있다. 한 인물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그가 죽은 다음에 할 수 있는 법이다. 링컨처럼 사후 150년이 지난 후에도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듣는 바로는 미국인 가운데 ‘링컨’에 대한 것이라면 기를 쓰고 수집하는 소위 ‘링컨 마니아’가 수백만은 족히 된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국민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가 아닐 수 없다. 링컨의 이름이 붙은 도시, 길 이름, 광장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 미국 안에 ‘링컨’ 이름이 붙은 도시만 해도 수십 개는 넘는다. 단지 지명만이 아니다. 단체나 기관, 회사, 호텔, 식당, 자동차, 택시 등등에도 그의 이름이 수없이 붙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스갯말로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링컨링컨 가에 있는 링컨 호텔에 링컨 차를 타고 가 링컨 침대에 누워 자고 일어나 링컨 식당에서 링컨 쥬스를 마시고 토스트에 링컨 잼을 발라 먹은 후 링컨 이발관에 가서 머리를 깎고 속이 안 좋으면 링컨 약국에서 약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온다. 도중에 링컨 상점에 들러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살 수도 있고, 현금이 필요하면 링컨 은행에 가서 현금을 찾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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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링컨’이 이 미국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문호 ‘톨스토이’가 ‘링컨’에 대해 이런 말을 남긴 것을 아는가? 그는 지난 1909년에 링컨 탄생 1백 주년을 맞아 이 같은 말을 하였다.

“역사상의 모든 위대한 국민적 영웅과 정치가 중에서 링컨만이 오로지 진정한 거인이다. 알렉산더, 프레데릭 대왕, 나폴레옹, 글레드스톤과 심지어 워싱턴조차도 인격의 크기, 감정의 깊이, 그리고 어떤 도덕적 박력에 있어서 링컨에게 훨씬 뒤떨어진다. 링컨이야말로 한 국민 전체가 자랑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축소된 모습이며 인간성을 풍부히 지닌 성자였으니 그의 이름은 오고 오는 세대의 전설 속에서 앞으로도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링컨’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믿겨지는가? ‘톨스토이’다운 뛰어난 문체의 ‘링컨 예찬’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링컨’이 어느 정도 대단한 사람인지. 특별히 이 미국에서 그가 어느 정도로 사람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는지. 더불어 왜 ‘오바마’가 그토록 ‘링컨 따라하기’를 했는지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이해가 될 것이다. 내 생각에, 그가 링컨을 크게 존경하기에 ‘링컨 따라하기’를 했겠지만 또 한편으론 미국민 뼛속 깊이까지 스며있는 ‘링컨’에 대한 추앙을 십분 활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의도하고서 그렇게 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오바마’에게서 ‘링컨의 그림자’를 보았으며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에 대해 열광하였다. 그런 면에서 ‘오바마’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흑인으로서 제 44대 미합중국 대통령에 선출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월 20일 ‘오바마’는 미합중국 제 44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링컨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대통령으로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것에 대해서 일일이 말하자면 아마 열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많은 역사가들이 그에 대해 평가하는 바에 의하면 무엇보다 그는 ‘정직의 사람’이었다. 우리가 위인전을 통해 링컨에 대해 늘 듣고 배운 것이 무엇인가? ‘정직한 에이브’ 아닌가? 단지 어린 시절, 젊은 시절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 세계에서도 그는 정직하였다. 그는 평생을 ‘정직함’으로 살았고 정직이 그의 최대의 무기였다.

또한 그는 ‘신념의 사람’이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또 국민을 위해 진정으로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한번 결정한 것에 대해선 굳은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추진하였다. 특히 그의 신념은 그의 민주주의 정신과 직결되어 있다. 바로 그 민주주의 신념 때문에 그는 ‘흑인 노예해방’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다음 내용은 그의 그 같은 신념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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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남의 노예 되기를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내가 남을 지배하는 자리에 서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 말이 나의 민주주의의 이념입니다”

이 민주주의 신념을 위해 그는 ‘남북전쟁’이라는 비극적인 내전을 가지면서까지 결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와 같은 사람이었다고나 할까. 그가 게티즈버그(Gettysburg)에서 행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영원히 지구상에서 멸망치 않을 것입니다”라는 선언은 그의 민주주의 신념의 꽃과 같은 것이다.


끝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나는 ‘링컨의 믿음’을 말하고 싶다. 그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되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했던 사람이었다. 바른 신념을 갖되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했던 사람이었다. 우리가 자주 들어서 아는 것처럼 그는 늘 자신의 집무실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늘 진실하게 경건의 삶을 가졌으며 하나님과 양심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행하려 애썼다. 그랬기에 그는 늘 바른 양심과 바른 신념을 가질 수가 있었고 늘 겸손하고 진실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 같은 링컨을 보며 링컨이야말로 하나님이 사랑한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랬기에 그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칭송받으며 역사 속에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가 있었다.


‘오바마’가 바로 그 ‘링컨 대통령’을 따라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이지 이야말로 고무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오바마가 링컨을 따라한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이 미국과 세계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링컨을 따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링컨을 본받겠다는 것 아닌가? 링컨의 정직과 링컨의 신념과 링컨의 민주주의 정신을 본받겠다는 것 아닌가? 언젠가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링컨의 통치술에는 지혜와 겸손이 담겨 있다”고. 그래서일까. 나는 어쩐지 그의 모습에서 ‘지혜’와 ‘겸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분명 그는 링컨의 ‘지혜’와 ‘겸손’을 본받으려 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오바마’가 링컨을 따라할 수 있기를 원한다. 만일 그가 링컨을 본받되, 단지 일리노이 출신인 것만 본받고, 단지 그의 연설문만 본받고, 단지 기차여행만 본받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링컨을 본받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링컨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는 링컨의 ‘인격’을 본받고, 링컨의 ‘민주주의 신념’을 본받고, 무엇보다 링컨의 ‘믿음’을 본받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링컨의 ‘반’만이라도 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역시 ‘링컨’처럼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대통령 더 나아가 역사 속에 길이 남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그 같은 대통령이 되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바란다.   ✎김현진

 

Football 경기와 헬멧



  오늘 드디어 전 미국인들이 고대하던, 아니 전 세계인들이 고대하던 제 43회 수퍼볼(Super bowl)이 열리게 된다. 금년엔 내셔널 컨퍼런스(NFC) 챔피언인 아리조나의 카디널스(Cardinals) 팀과 아메리컨 컨퍼런스(AFC) 챔피언인 피츠버그의 스틸러스(Steelers) 팀이 격돌하게 되었다. 특별히 이번 수퍼볼이 우리 한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피츠버그 팀에 한인 혼혈아이면서 미식축구 스타인 ‘하인드 워드’(Hines Ward)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3년 전 제 40회 수퍼볼에서 피츠버그 팀이 우승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하인드 워드가 수퍼볼 MVP가 되는 것을 목격하며 감격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록 그의 외모가 한국인 쪽보다는 흑인 쪽에 훨씬 가깝긴 하지만, 그래도 그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같은 동족애를 느끼며 그가 이룬 인간승리에 크게 감동했었다.


  매번 Football 경기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위험천만한 스포츠가 아닐 수 없다. 누구 말마따나 스포츠를 빙자한 격투기 같다고나 할까? 이는 모든 선수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또 물불 가리지 않고 온 몸을 던지며 경기를 하기 때문이다. 농구에서도, 야구에서도, 자주 주먹다짐이 일어나곤 하는 아이스하키에서도 Football에서와 같은 장면은 연출되지 않는다. 이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경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떤 땐 “저렇게까지 경기할 필요가 있나” 혹은 “너무 지나치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바로 두주 전의 경기 때만 해도 그렇다. 그 당시 내셔널 컨퍼런스(NFC), 아메리칸 컨퍼런스(AFC) 양쪽 모두 결승전이 있었는데 아메리칸 컨퍼런스(AFC) 결승전 때의 일이다. 피츠버그 팀과 볼티모어 팀이 결승에서 맞붙었는데 경기 종료 2-3분가량을 남겨놓고 양 팀의 두 선수가 크게 충돌을 하였다. 그것도 공중에서 사정없이 머리끼리 부딪쳤다. 결국 두 선수 모두 쓰러졌는데 피츠버그 팀의 선수는 잠시 후 이상 없이 일어섰으나 볼티모어 팀 선수는 결국 들 것에 실려 나가고 말았다. 그래도 손발을 움직이고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긴 했지만 처음엔 목숨이라도 잃지 않았나 크게 염려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헬멧을 썼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최소한 사망이었을 게다.


  그러고 보면 Football 경기에 있어서 ‘헬멧’은 보통 효자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헬멧 덕분에 큰 부상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멧 덕분에 더욱 격렬하게 관중을 열광케 하는 플레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Football 경기를 시청할 때마다 늘 갖는 생각이 있다면 ‘헬멧의 안전성’에 대해서이다. Football 선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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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용하는 헬멧은 분명 단단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자주 머리에 충격을 입는데도 선수들이 멀쩡할 수가 있겠는가? 또 헬멧이 얼마나 안전한가를 알기에 선수들이 저렇듯 몸을 사리지 않고 무대포로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Football 선수들이 착용하는 헬멧은 쉽게 혹은 단순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스포츠 전문가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각종 스포츠 종목에 걸쳐 많은 안전장비들이 개발되었지만 무엇보다 Football 선수들의 헬멧 연구와 개발에 많은 투자가 있어왔고 그 결과 현재와 같은 헬멧을 개발해내기에 이른 것이다.


  듣는 바로는 현재 선수들이 사용하는 헬멧 개발은 ‘딱따구리 새’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딱따구리 새’는 우리가 잘 알듯이 나무를 쪼아 먹이를 잡아먹는 새이다. 딱따구리가 먹이를 찾기 위해 나무를 쪼아대는 속도는 자그마치 1초에 약 15회나 된다고 한다. 1분이 아닌 1초에 말이다. 이는 기관단총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속도로서 그처럼 빠르게 나무를 쪼기 위해서 딱따구리의 머리는 총알 속도의 두 배 이상의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딱따구리가 머리에 받는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하는데... 그런데도 매일 같이 십년 넘게(딱따구리의 수명은 약 15년가량 된다고 한다) 나무를 쪼아대어도 뇌진탕 하나 걸리지 않는다니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한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닐 수 없다.

  헬멧 연구가들은 바로 그 같은 딱따구리 새를 보고서 그 새들이 머리에 충격을 받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연구하게 되었고 마침내 딱따구리 새의 두개골 구조가 오밀조밀한 스펀지 같은 두개골로 이루어져 아무리 큰 충격이라도 잘 흡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연구가들은 바로 그 연구 결과를 토대로 마침내 오늘날의 Football 헬멧을 만들어내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는 지난 1976년 UCLA 연구팀에서 이루어낸 연구 성과라고 한다. 딱따구리 새의 신비도 놀랍지만 그 동물의 특성을 연구하여 안전한 헬멧을 개발해 낸 인간의 지혜 또한 감탄할 만하다 하겠다. 이 같은 연구 결과 Football 선수들은 부상을 염려하지 않고 마음껏 몸을 던질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공중에서 상대팀 선수와 머리를 부딪치는 상황조차 개의치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TV를 통해 Football 경기를 시청하면서 그토록 거친 태클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기발한 헬멧 개발 때문이라고나 할까.


  비록 Football 경기가 온 몸을 내던질 정도의 거친 경기라지만 어디 그 같은 격렬한 전투장이 Football 경기뿐이겠는가? 그리고 Football 헬멧이 선수들의 안전을 지켜준다지만 선수들을 지켜주는 헬멧이 어디 Football 헬멧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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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otball 경기만큼이나 거칠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격렬한 경기가 있다면 바로 ‘인생’일 것이다. Football 선수들이 터치다운을 위해, 즉 승리를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내어 던지듯, 모든 사람들이 이 땅의 성공을 위해, 인생의 승리를 위해 전력투구하지 않는가? 물불 가리지 않고 온 몸을 내어던지는 최선의 삶으로 말하자면 누구 하나 Football 선수 이상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Football 경기는 그 어떤 스포츠보다 인생의 거친 싸움을 상징하는 스포츠라고도 할 수 있다. 아니 이 땅의 인생살이가 Football 경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Football 경기가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위험한 경기이기에 헬멧이 필요하다면, ‘인생’이라는 더 거친 경기엔 더욱 ‘헬멧’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안심하고 온 몸을 던지는 전력투구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 같은 안전장비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많은 것 같지 않다. 단지 ‘몸뚱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토록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기발한 장비를 개발해내면서도 정작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인생’이라는 경기를 위해서는 아무런 안전장비를 준비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 아닌가 싶다.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라는 거친 경기, 격렬한 경기에서 큰 부상들을 입고 여기저기 나뒹굴곤 하는가? 이 땅의 실패한 인생들, 낙오한 인생들, 절망한 인생들, 상처 입은 인생들이 바로 그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면 무엇이 ‘인생’을 위험에서 보호할 수 있는 ‘헬멧’인가? 즉 인생을 위한 ‘안전장비’는 무엇인가? 나는 ‘믿음’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하나님을 나의 ‘지킴이’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위험에서 지켜주고 건져줄 수 있는 존재란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 스포츠 연구가들이 연구하고 연구하여 기발한 Football 헬멧을 개발해냈듯이, 정말로 우리 인생을 위한 안전장비가 무엇인가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분명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나의 보호자로, 나의 방패막이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들이 오늘 열릴 ‘수퍼볼’을 즐길 것이다. 무엇보다 선수들이 자신들의 몸을 사리지 않고 터치다운을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것을 즐길 것이다. 그들이 격렬하게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특별히 저들이 쓴 ‘헬멧’을 주목하라. 그것이 바로 선수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경기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지 않는 이유이다. 내게도 그런 ‘헬멧’이 있는지, 즉 내 인생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믿음’이라는 ‘인생의 헬멧’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혹 아직 ‘헬멧’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장에 ‘믿음의 헬멧’을 준비하라. Football 경기보다 10배는 더 위험한 전투장에 어찌 ‘헬멧’도 없이 나가려고 하는가? ✎김현진

 

역사의 새 장을 열다
-첫 흑인 대통령의 탄생을 보며-



1

드디어 이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였다. ‘바락 오바마(Barack Obama)’라는
아프리칸 어메리칸(African American)이 마침내 제 44대 미 합중국 대통령으로 선
출되었다. 나는 밤늦은 시간에 CNN News를 통해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혼자서 감격에 잠겼다. 이는 새삼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력을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미국이 살아있음을 더 나아가 미국의 미래가 그리
어둡지만은 않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출 개표 실황을 시청하면서 나는4년 전의 개표 실황을 떠올렸다.당시
나는 ‘알래스카’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 알래스카의 깊고 추운 밤에 혼자서 대
통령 선출 개표 실황 중계를 시청하며 얼마나 아쉬워하고 얼마나 분통을 터뜨렸는
지. 당시 비록 투표권은 없었지만 내가 마음으로 지지했던 대통령 후보는 민주당의
‘케리(Kerry)’ 후보였다. 이는 내가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케리가
미국을 위한 최상의 대통령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라, 또 다시 ‘부시’가 대
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내가 볼 때 부시는 잘못된 대통령이었다. 스스로 기독교 신앙인임을 자처하며 하
나님의 이름까지 팔아가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보면서는 더욱 부아가 치밀었었
다. 잘못된 한 사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하고 있으며 또 전 세
계가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가. 결코 그 같은 사람이 또 다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해서 당연히 ‘케리’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
였다.그를 통해서 전쟁의 종식을 기대하면서.그러나 미국민은 또 다시 부시를 대
통령으로 선택하였다.그 밤 나는 이 미국에 대해서,그리고 미국민에 대해서 너무
나 큰 실망을 하였다.미국에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우리만큼.

그로부터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버팔로’에서 4년 전의 좌절과 실망을 깨끗이
치유하고 있다. 미국민에 대한 실망을 그리고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을 깨끗이
치유하고 있다. 아니 실망을 치유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진일보한 미국의 민주주
의를 목격하며 한껏 고무된 가운데 있다. 이는 미국민이 이번엔 제대로 대통령을 선
출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정말 국민과 국가와 세계를 위해 바른 선택,성숙된 결
정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엔4년 전과 달리 나도 한 표 행사를 했지만.

나는 이번에 낙선한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에 대해 ‘부시’ 대통령에 대해 가졌던
것과 같은 악감정(?)은 없다. 목사의 입장에서 볼 때 오히려 ‘매케인’이 ‘오바마’보
다 더 안심되는 후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는 ‘오바마’가 꽤 진보적인 사람인
데 반해 ‘매케인’은 보수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신앙고백 또한 ‘매케인’
이 더 분명하고. 그러나 ‘매케인’이 현 부시 대통령과 거의 노선이 같다는 것은 보
통 불안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라크 전쟁을 계속 수행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나로 하여금 그에 대해 고개를 돌리게 했다.미국의 장래를 위해서도,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밝히지만 그 같은 이유로 나는 ‘매케인’이 아닌 ‘오바마’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럴
지라도 내 신분이 목사이기에 공적으로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를 언급할 수는 없었
다. 그럴 경우 개인이나 교회가 법적인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대통령 당선자가 확정된 마당에 더 이상 말하지 못할
것이 뭐가 있으랴!

2

내가 ‘오바마’를 지지하는 것은 단지위와 같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그가 대통령이 될 경우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무엇보다 이야말로‘미국 민주주의의 진일보’를 보여주는 코페르니쿠스적사건이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흑인이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된다? 이거야말로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야말로 꿈같은얘기 아닌가? 언젠가 TV 시리즈에서 ‘24시’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 드라마에서 흑인이 대통령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어딘가 어색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드라마 자체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하였다.드라마에서조차‘흑인 대통령’이란 전혀 이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는데 실제로‘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 우리가 사는 이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요 또 법적으로 인종차별이 없는
평등한 나라이다. 그러나 잠재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아직 인종차별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우리가 잘 알듯이 백인들이 여전히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그 같은 이 나라에서 어떻게‘흑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무리‘오바마’가 똑똑하고 탁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선거를 하루 앞두고 많은 언론들이 오바
마의 승리를 점치면서도 소위 ‘브래들리 효과’(겉으로는 흑인을 지지하는 백인들이
실제 투표장에서는 백인에게 투표하는 현상)를 우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오바마’를 무너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는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 역시 미국의 민주주의는 대단하였다.
실제 뚜껑을 열어본 결과 여론 조사를 통해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바마의
압승’이었다. 즉 ‘흑인’인 오바마가 거짓말처럼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그
것도 어렵게 당선된 것이 아니었다. 270명의 선거인단만 확보하면 승리하는 선거에
서 오바마는 그보다 훨씬 많은 364명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유권자의
표에 있어서도 수십 년 만에 가장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당선자가 되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엄청난 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써 미국민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백인만의 민주주의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더 이상 차별과 편견이 없는 진정한
민주주의임을 보여주었다.대통령 당선자인‘오바마’ 역시 당선이 확정된 다음 자신
의 정치 고향인 시카고에 운집한 수많은 청중을 향해 행한 연설에서도 그와 같은
말을 하였다. 어쩌면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
른다고.오늘 미국민들이 그들의 의구심에 대해 답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고.정말이
지 미국 민주주의가 큰 걸음을 성큼 내딛는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이 같은 엄청난 역사적 의미 때문에 나는 ‘오바마’를 지지했던 것이다.

또한 내가 ‘매케인’보다 ‘오바마’를 지지한 것은 ‘오바마’의 당선이 인종간의 화
합, 계층간의 화합 더 나아가 세계의 화합을 가져오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매케
인’은 사실상 ‘부시’ 정권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이 전쟁을 일으
킴으로 인해, 또한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함으로 인해 얼마나 세계의 화합을
저해하였는가?화합은커녕 갈등과 긴장과 분쟁만을 초래하였다.그 옛날 평화의 사
도였던 미국이 언제부터인가 세계 곳곳에서 분쟁의 당사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미국은 진작 세계 모든 나라들로부터 인심을 잃었다. 만일에 ‘매케인’이
대통령이 된다면 그 같은 흐름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평화
와 화합은 계속해서 요원한 문제가 되고 말 것이다.

반면에 ‘오바마’는 그 출신이 ‘케냐’(아버지가 케냐인)이면서 한때 ‘인도네시아’에
서 성장하였고 게다가 흑인이다. 또한 그 자신이 밑바닥의 삶을 경험하였고 대학
을 졸업한 다음엔 오랫동안 빈민층을 위해 봉사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 자신이기독교인이면서 중간 이름으로 ‘후세인’이라는 모슬렘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실 그것 때문에 공화당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이름을 선거 전략에 사용하려
애썼던 것도 사실이다.마치 그가 중동의 테러리스트와 연계라도 되는 듯.혹은 그
를 선택할 경우 미국에 큰 위기라도 찾아오는 듯- 해서 그를 언급할 때마다 늘 강
조하여‘바락 후세인 오바마’라고 부르곤 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민은 압도
적으로 ‘오바마’를 지지하였다. 이는 결코 잘못된 흑색선전에 넘어가지 않는 미국민
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생각할 때 나는 ‘오바마’야말로 인종간, 계층간, 국가간의 화합
을 가져올 수 있는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을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게다가 ‘오바마’는 실제로 이 사회와 세계의 화합을
줄곧 자신의 선거 케치 프레이즈로 내걸곤 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 같은 사람이 미
합중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나는 ‘오바마’야말로 이 사회의 화합과 또한 세계의
화합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세우신 ‘종’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오바마’가 대통령이 됨으로 미국은 더욱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로 자리매
김하게 될 것이다.미국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무엇인가?‘아메리칸 드림’ 아닌가?
그런데 언제부터부터 그것이 서서히 빛을 잃어간 것이 사실이다. 이 미국마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빈익빈 부익부’요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자들은 계속해서 일어
서지 못하는 그 같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그런데 밑바닥에서 일어선 사람이,
게다가 이민자의 자식이며 심지어 부모조차 없이 조부모 밑에서 성장한 사람이, 혼
자 힘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 그것도 흑인이, 단지 성공한 정도가 아니라 이 나라
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 이거야말로 이제까지의 모든 아메리칸 드림 가운데 절
정의 아메리칸 드림 아닌가? 즉 ‘오바마’는 이제 ‘아메리칸 드림’의 Role model(역
할 모델)이 된 셈이다. 이제 ‘오바마’의 성공 실화는 이 땅에 사는 모든 힘없는 자
들,가진 것이 없고 배경이 없고 미래가 불투명한 모든 사람들,특히 자라나는 2세
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얼
마나 그 의미가 큰 것인가.

끝으로 나는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야말로 모든 흑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내는 역사적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흑인들이 누구인가?이 땅에 노예로 붙들려
온 이래 참으로 오랜 세월을 억압과 고난과 굴욕의 삶을 살아온 이들이 아닌가? 듣
기로는 흑인들이 노예 시절 이 땅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만 1억 명이 넘는
다고 한다.참으로 불쌍한 인종이 아닐 수 없다.그들이 노예의 자리에서 해방된
것이 고작 146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흑인민권운동’을일으킨 것이 불과 45년 전이고. 그 ‘민권운동’이란 것도 의회에서 상하원이 되겠다
는 것도 아니고,잘 살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다.그들은 단지 인간다운 삶, 자유
와 평등의 보장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자신들의 자녀들이 백인들의 자녀들과 한
상에서 식사하게 되는 그것만을 소원했을 뿐이었다. 그들 가운데서 누군가 이 나라
의 대통령이 나온다는 것-이는 결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아니, 오랜 세기 동
안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으리라.

그런데 2008년에 ‘흑인’인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것도 억지로 사정해서가 아니라, 인종을 초월하여 압도적인 전국적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말이지그들이 꿈꾸었던 것보다 너무나 빨리그들 가운데서 대통령이 나왔다. 아니,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레대통령이 탄생하였다.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이야말로 그들의 한이 한 번에 풀리는 대사건이 아닐 수없으리라.그들의 눈물이 한 번에 닦이는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으리라.

오바마가 시카고의 그랜드 팍(Grand Park)에서 당선 연설을 하던 날- 나는 그곳
에 모인 수많은 흑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토크 쇼의 여왕‘오
프라’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오랜 세월 흑인 민권 운동을 주도했던 ‘제시 잭슨
목사’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리고 검은 피부색을 원망하며 살았을 수많은 흑
인들 또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
었다. 그 눈물은 오랜 세월 그들이 흘렸던 아픔과 설움의 눈물을 씻어내는 눈물이
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흑인됨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리라. 그렇다면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 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적 의미
가 있는 것인가. 이는 미국이 진 빚을 한 번에 갚는 사건이며 수많은 이들의 한을
한 번에 풀어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3

이제 선거는 끝났다.이제 대통령은 결정되었다.‘바락 오바마’라는 흑인이다. 이
제 남은 것은 맞닥뜨려야 할 냉혹한 현실이다.당장 무너진 경제를 되살려야 하고,
또한 선거로 인해 찢어진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무엇보다 ‘오바마’는이 나라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가 국민들과 한 약속이기 때
문이다. 사실 그가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은 그가 ‘변화’를 약속했기 때문이고, 또 그가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
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변화에 대한 열망’- 그것이 그가 대통령이 된 이유이
다. ‘오바마’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과제이다.

나는 44대 미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된 ‘바락 오바마’를 보며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생각해본다.우리가 할 것이 있다면 그가 바른 대통령이 되도록‘기도’하는
것이다.사실 이번 선거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오바마’보다는 ‘매케인’을 더
많이 지지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매케인’이 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
유에서였다.어떻게 보면 답답한 사고들이 아닐 수 없다.진정한 신앙은 얼마나 하
나님을 잘 믿느냐,얼마나 성경을 잘 믿느냐가 아니다.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을 두
려워하는 자세’이다. 그 같은 사람이 참된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사람이 정치할 때 바른 정치를 할 수 있고, 그 같은 사람이 대통령을 할 때 바른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나는 보수-진보를 떠나 ‘오바마’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본다. 하나님 앞에
서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겸손한 신앙인이요,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바르게 정치
할 사람이라고 본다.그렇기에 그를 지지하는 것이다.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할
것이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래야 하는 것은 그의 양 어깨에
이 미국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양 어깨에 세계의 평화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바라기는 그가 향후4년간 제대로 나라를 다스림으로 앞으로 4년 뒤에
지금보다 더 전폭적인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재선까지 될 수 있기를 마음으로 기
대해 본다.

✎ 김현진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삶
 -금융 쓰나미를 겪으며-



요즘 두 사람이라도 모이면 예외 없이 나오는 얘기가 ‘경제 걱정’이다. 지금 소위
‘가을 잔치’라 할 수 있는 온갖 스포츠가 한창이건만 스포츠 얘기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게다가 전 미국의 관심사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사라 할 수 있는 ‘미
대통령 선거’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건만 그저 방송에서만 연일 떠들어댈 뿐 정작 사
람들의 대화에서는 ‘대통령 선거 얘기’조차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경제 걱정뿐이다. 이는 미국의 경제가 한없이 곤두박질치고 있기 때문이
다. 더 나아가 온 세계가 ‘금융 쓰나미’ 사태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사는 웬
만한 사람들은 크든 작든 다 증권에 발을 담그고 있다고 한다. 그 같은 사람들의 경
우 모두가 이번에 큰 손실을 당했다고 한다. 그 뿐인가? 경기 침체로 인해 비즈니스
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 한숨이 그칠 날이 없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 직장
이 잘못 될까 하루하루 불안한 가운데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경제 위기는 결코 미국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예외 없이 하나 같이 중병을 앓고 있다. 유럽을 보아도, 일본을 보아도, 중국을 보아
도, 남미를 보아도 모두가 다 ‘악!’ 소리를 내고 있다. 이는 전 세계의 증시가 연쇄
도미노 붕괴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전 세계의 자본이 뿌리째 흔들리
고 있다. 듣는 바로는 그 동안 전 세계 증권 시장에서 시가 총액 10조 달러 이상이
증발되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지난 1930년대 당시의 대공황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
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닌 듯싶다.

물론 우리 한국도 이번 ‘금융 쓰나미’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아니 비켜가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보다 그 타격 정도가 더 심한 것 같다. 이는 한국의 경제
구조 특성상 외국의 자본을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외국 특히 미국
의 경제가 어려울 적마다 한국 경제는 늘 큰 타격을 받곤 하였다. 그래서일까, 이번
에 미국이 금융대란을 겪으며 경제적으로 크게 휘청거리자 한국 경제의 취약성을 너
무나 잘 아는 외국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한국 자본시장은
패닉 상태를 지나 거의 공황 상태에까지 빠지고 말았다. 많은 이들이 제 2의 IMF 사
태를 우려했을 정도로.

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이 있다면 다름 아닌 유학생들이다. 이는 졸
지에 ‘환율 폭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많은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당
장 ‘달라 보유 부족 현상’을 빚자 순식간에 환율이 폭등하게 된 것이다. 예전 같으
면 하루에 단돈 10원만 변동이 생겨도 난리였을 텐데 요즘엔 10-20원이 아닌100-200원을 들락거리는 널뛰기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로 인해 많은 유학생들이
요즘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가운데 있다. 우리 교회에도 유학생들이 많은 바 그들
이 자주 하는 얘기가 요즘엔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다는 것이다. 환율만 생각하면 걱
정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고, 늘 가슴이 꿍꽝거린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안타까운 얘기들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환율’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조차
연일 안타까운 마음으로 환율을 들여다보곤 한다. 환율이 크게 올라 있으면 나조차
걱정에 마음 졸이고, 환율이 크게 떨어져 있으면 크게 감사한 마음이 들곤 한다. 어
쩌다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번 금융대란 그리고 글로벌 증시 위기를 지켜보며 몇 가지 귀중한 교훈을 얻는
것이 있다. 우선, ‘욕심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글로벌 증시 위기 사태는 미
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경제에 대해 별 지식이 없는 나지만 자주 언론매체를 통
해 듣는 바로는 지난해 봄에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부터 사실상 현재의
재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즉 부동산 호황의 붐을 타고 능력이 안 되는 많은 사람들
이 너도 나도 집을 사게 되고 나중에 금리가 오르면서 그것을 갚을 능력이 없게 되
자 그 모든 짐을 금융회사들이 떠안게 되면서 그 과부하를 이기지 못해 현재와 같은
엄청난 금융 쓰나미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 괜한 욕심을 부려 집을 장만한 것도 문제려니와 또한 많
은 사람들이 집을 담보로 Second 모기지를 얻어 그것으로 여행도 다니며 흥청망청
쓰다가 결국엔 대출금을 갚지 못하게 된 그 같은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결국 무슨
얘기인가? 자신의 능력과 형편을 생각지 못하고 ‘욕심’에 이끌려 무조건 누리려고만
한 데서 개인의 파산이 찾아오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은 오늘과 같은 전 세계적 재난
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역시 ‘욕심’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개인과 사회를 파멸로 이
끄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의 만고불변의 진리 즉 ‘재물에 우리의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새삼 배우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재물관(財物觀)’이 있다
면 재물은 ‘필요한 것’이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물을 중요한 것으로 여
기게 될 때 그 사람은 재물의 노예가 되고 만다. ‘욕심’이란 다른 게 아니다. 재물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자세이다. 그러다 보니 그 재물에 소망을 두게 되고, 재물만을
전부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재물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결국 큰 실패와 절망에 이르게 된다. 나는 이번 경제
위기, 특히 금융 쓰나미를 목격하며 재물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이 어
떠한 것인가를 보았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혹은 평생 모은 재산이 한 순간에 반 토막 나거나 한줌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
나 많은가? 그들 모두 재물에 소망에 두며 산 사람들이자 또한 욕심에 이끌려 더 많이
벌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
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었다. 재물에 소망을 두며 살아온 사람들의 종국이라고나 할까.
이번 금융 대란으로 큰 손실을 본 사람들 가운덴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재물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이 아니길 바란다. 그럴 경우, 큰 손실을 본
것으로 인해 잠시 실망하고 낙담하다가도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
설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재물에 소망을 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경제 위기를 겪으며 ‘이 땅에 재물을 쌓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즉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보이는 곳에 쌓은 재물은 언젠
가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다. 이번에 10조 달러 이상의 가치가 증시에서 증발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 얼마나 아까운 재물인가? 그렇게 잃어버릴 양이라면 좀 더 소중한
곳에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지금 후회해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겠지만. 새삼
우리 주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여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19절-20절)

다른 어떤 때보다 요즘 이 말씀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웬일인가? 가만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할 뿐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은 별로 많은 것 같지 않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했다. 사람은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빈손이 아니라 우리의 가진 것을 하늘에까지 가지고 가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가진 재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다. 어떻게 하늘에 쌓을 수 있는가? 그것
은 선한 곳에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 같은 재
물은 결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고스란히 내 상급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우리의 가진 재물을 하늘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제 위기로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요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정
신을 차리고 그리스도인다운 의식과 삶을 가지고 더욱 이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갔으
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김현진



 

집중현상


미국의 심리학자인 리처드 와이즈만(Richard Wiseman)이라는 사람이 쓴 "고릴라
를 보셨나요?"(Did you spot the gorilla?)라는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번은 일리노이 대학과 하버드 대학의 두 심리학자가 '집중현상'과 관련한 이런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일단의 사람들에게 농구 시합을 참관하도록 하면서 한 가지
과제를 내주었는데 이는 한쪽 팀의 사람들이 전부 볼을 몇 번이나 패스하는지, 그리
고 볼을 얼마나 드리볼 하는지(즉 땅에 몇 번이나 볼을 튀는지) 세도록 하는 것이었
다. 그러자 과제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오직 그 일에만 몰두하여 누가
우산을 들고 실내를 지나갔는지, 심지어 일부러 고릴라 옷을 입은 사람을 그 경기장
옆에 지나가도록 만들기까지 했는데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아니
지나간 정도가 아니라 그 고릴라 변장을 한 사람이 중간에 멈춰 서서 고릴라처럼 가
슴을 두드리기까지 했는데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볼을 패스
한 횟수와 드리볼한 횟수를 정확하게 세는 사람에게 상금까지 걸었더라면 절반 정도
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가 그 경기장을 오갔는지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사람이 주의를 집중할 경우, 그 집중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다른 것이 보이
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
을 경우 아무리 커다란 움직임이 그 사람 주위에서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음을 보여주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종종 보면 자녀
들 가운데 책에 한번 붙들리면 옆에서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심지어 자기 이름을 불러도 알지 못하고 책 속에 푹 빠지는 그런 아이들이 있다.
모두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이 갖는 장점이 있다면 두 가지를 들 수가 있다. 하나는 '높은 성취
도'이다. 사실 역사상 큰일을 이룬 사람들, 특히 학문적인 일에 있어 큰 업적을 이
룬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상당한 집중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집중도가 높았기에 그만큼 남보다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었고 또 남보다 더많은 것을 깨닫거나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집중도가 높은 만큼 주변 환경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것이다. 앞의 실험
이 보여주듯이 자기 일에 특히 몰두하는 사람은 남이 뭐라고 하든 남의 말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환경이 열악하든 말든, 환경이 어렵게 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한다. 물론 환경이 좋아진다고 해서 그 하는 일이나 의식이 해이해지지도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은 뜻한바 자신들의 일을 크게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집중현상'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다른 누구보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
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인의 그 같은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
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장 8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든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엔 '집중현상'
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다
른 모든 주위의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자연히 주위
의 것들 혹은 환경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고백은 참으
로 의미심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빌립보서 3장 7-8절 참조) 즉 이제껏 자기 삶에 가장 중요
하게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전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집중현상'엔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엔 단점 또한 크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주위에 특기할만한 큰 움직임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이기심과 결합될 때에 그 결과는 자못 심각하다.
즉 철저하게 주위에 대해, 다른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자기밖
에 모르게 되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제품이 하나 있다면 iPod라는 것이다. 손 안에 들
어오는 핸드폰 반 토막만한 크기의 작은 전자제품인데 그 안에 수천 곡의 노래를 담을
수 있고 심지어 웬만한 영화까지 그 안에 넣을 수 있다고 한다. 그 같은 기기(器機)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대단한 시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시대가 시대인
지라 우리 아이들 역시 iPod를 가지고 있는데 늘 그것을 휴대하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결과 함께 차를 타도, 함께 어디를 가도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
이들은 그 iPod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일부러 대화하려면 그 iPod를 끄
게 한 다음에 대화해야 한다. 그 아이들은 '집중현상'으로 인해 바깥 세계와 차단되어
있다. 아니, 이제는 '집중'을 넘어서서 '고립'의 세계에 들어가 있음을 보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집중현상'의 장점을 취할 필요는 있지만 이 '집중현상'의 단
점은 철저하게 멀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집중현상'을 가져야 하지만 교회생활에
있어서는 '집중현상'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생활에 있어
집중현상이 나타날 경우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차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자
신만 알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
스도인다운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자신만 알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것-
이는 죄성에 사로잡힌 인간의 본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 같은 모습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더 이상 죄성에
사로잡힌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다
음은 그것을 보여주는 몇 구절들이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립보서 2장 4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라디아서 6장 2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브리서 10장 24절)

이상의 내용들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내용
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교회생활에 있어선 결코 '개인적인 집중현상'을 가져서
는 안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히려 '집중현상'을 가질 것이라면 남들을 돌아보고,
남들의 짐을 지는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꼭 기억할 것- 그것
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최첨단의 테크놀로지로 인해 점점 더 '관계'가 사라지고
점점 더 자기에게로 고립되는 그 같은 시대가 되었다. 이 같은 시대 속에서 우린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저절로 남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는 그 같은 삶을 살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삶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시대
와 세월을 역행하는 삶이다. 아니,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 우리만의 삶
이다. 그것은 스스로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열
려있는 삶, 다른 사람들을 살피고 돌아보는 삶이다. 모두가 그 같은 삶을 살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 듣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 김현진

 

인조 가을잔치


10월의 중순, 이제 본격적인 가을에 들어섰다. 날씨도 완연한 가을 날씨이고 거
리거리마다 나무들의 색깔 또한 화려한 총천연색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아마 한 두
주후면 온 세상이 아름다운 단풍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찾아온 것이다.

가을 색깔이 한창인 요즘, 사방팔방에서‘가을잔치’가 분주하다. 무슨 ‘가을잔치’?
이는 각종 스포츠 경기를 이르는 말이다. 요즘 TV를 켜면 채널들마다 온통 스포츠
경기로 도배질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 프로야구가
본격적인 플레이오프(Playoff)를 갖는 중에 있다. 지금 현재 아메리칸 리그(AL)와
내셔날 리그(NL)의 결승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내셔날 리그에서는 LA ‘다
저스’(Dodgers) 팀과 필라델피아의 ‘필리스’(Phillis) 팀이 맞붙고 있고, 아메리칸 리
그에서는 템파 베이의 ‘레이즈’(Rays) 팀과 보스턴의 ‘레드 삭스’(Red Sox's) 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갖고 있다. 특히 LA 다저스의 경우 우리 한국의 ‘박찬호 선수’가
뛰고 있기에 더욱 더 관심이 가는 경기이기도 하다. 아마 다음 주부터는 양대 리그
의 챔피언이 결정되어 그 유명한 ‘월드시리즈’(World Series)를 가지게 되지 않나
싶다.그렇게 되면 전 미국은 물론 온 세계가 흥분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어디 야구뿐인가? 약 한달 전부터 미 프로 풋볼(Football) 경기가 시작되어 전 미
국이 또한 풋볼 열기로 들썩거리는 중에 있다. 특별히 풋볼은 미국인들의 열정을
담고 있는 가장 미국다운 스포츠 아닌가? 그래서인지 프로 풋볼 시즌의 시작과 함
께 온 매스컴이 난리인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가 사는 버팔로의 경우 요즘 버
팔로 Bills의 성적이 워낙 좋아 온 버팔로 주민들이 크게 흥분한 가운데 있기도 하
다. 현재 성적이 4승 1패라고 한다. 그것도 지난주에 졌기 때문에 4승 1패이지 그
전까지4승을 내리 달려 아주 오랜만에 최고의 성적을 내는 중이라고 한다.이제
시작한 지 갓 한 달밖에 안 되는 프로 풋볼은 가을을 뜨겁게 덥히며 내년 2월에 슈
퍼볼이 있기까지 전 미국을 또한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것이다.

프로 풋볼은 그렇다 치고 ‘대학 풋볼’(College Football)은 또 어떤가? 오히려 TV를
보노라면 대학 풋볼이 프로 풋볼보다 더 뜨거우면 뜨거웠지 결코 그 인기가 프로 풋볼
에 뒤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로 풋볼은 고작해야 일요일과 월요일에만 경기가
열리는데 대학 풋볼은 날마다 그 경기가 TV로 중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팀이
워낙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만큼 대학 풋볼이 인기가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
니겠는가?유명 스포츠 채널인‘ESPN’ 방송사가 아예 채널을 하나 더 늘려서 대학 풋
볼만을 중계해 주는 것을 보면 대학 풋볼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가를 가히 짐작케 된다.
야구나 풋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스하키’ 시즌이 이미 막 대장정에 돌입했
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 프로농구’(NBA) 역시 본격적인 시즌을 앞두고 현재
Pre-season 경기를 갖는 중에 있다. 이제 바야흐로 농구팬들의 계절이 왔다고나
할까.그런데도 워낙 큰 스포츠 경기들이 많아 현재 농구Preseason은 TV에 명함
조차 내밀지 못하는 중에 있다.정말이지 엄청나지 않은가?입이 떡 벌어질 만큼
온통 사방팔방에 굵직굵직한 스포츠 경기들이 넘쳐나고 있다. 과연 ‘가을잔치’라 불
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얼마나 흥미진진한 스포츠 경기들이 많은지 요즘 같아서는 TV 앞에 한번 엉덩이를
붙이게 되면 쉽게 일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볼만한 스포츠들이 끊임없이 줄을 서
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땐 놓치기 아까운 경기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 채널을 여
기저기 돌려가며 시청하기까지 할 정도이다.단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한국에
서도 요즘 ‘가을잔치’가 한창인데 이는 프로야구 포스트시즌(Post-Season)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일본 역시 마찬가지이고.그러고 보면 ‘가을잔치’는 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다.그 잔치의 내용은 하나같이‘스포츠 경기들’이고.

그러다 번쩍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가을잔치’가 스포
츠 잔치를 이르는 말이 되었단 말인가? ‘가을잔치’란 본디 풍성한 ‘가을의 결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가?혹은 온 세상을 화려하게 총천연색으로 수놓는‘자연의
잔치’를 이르는 말이 아니었는가?더 나아가 계절의 을씨년스러움을 온 몸으로 호
흡하는 가운데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묵상의 풍성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었던
가?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내가 늘 생각해오던‘가을잔치’의 의미였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그 같은 의미의 가을잔치가 사라지고 철저하게 ‘오락’과 ‘재미’의 가을잔
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우리에게 단지 즐거움만을 안겨주는‘스포츠 경기’가
‘가을잔치’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즉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진정한 가을잔치’,
‘아름다운 가을잔치’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인기와 즐거움으로 포장된 ‘인조 가을잔
치’에 빠져 살고 있다.가뜩이나 기계화된 문명 속에서 인간성이 소외되어 가는데
이제는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유일한 계절인 ‘가을’마저 빼앗기게 된 것이다. 정
말이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가을이 될 적마다 내가 빼놓지 않고 늘 애송하곤 했던 한국의 유명시가 하나 있
다. ‘김현승’님의 ‘가을의 기도’라는 시이다. 아마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시일 것이
다.그 시는 시를 넘어서서‘가을’에 가져야 할 우리네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기도 하다.그 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정말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가 아닌가 싶다. ‘가을’과 ‘기도’ 아마 그것처
럼 잘 매치가 되는 단어도 없을 듯싶다. 즉 ‘가을잔치’는 우리의 살아온 날을 돌아
보며 ‘반성하는 기도’를 드리는 자리여야 한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
데 베푸신 많은 것들을 돌아보며‘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자리여야 한다. 더 나아
가 하나님 그분께‘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드리는 자리여야 한다.
‘가을의 기도’의 두 번째 단락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이 또한 가을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노래가 아닌가 싶다. 기계화된 문명 속에서
우리 역시 쇳소리 나는 삶을 살기가 쉽다.메마르고 딱딱한 삶을 살기가 쉽다.무
엇보다 ‘사랑’을 상실한 삶을 살기가 쉽다. 아름다운 계절 ‘가을’을 맞으며 무엇보
다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소중
하고 아름다운 선물이 아닌가 싶다.
‘가을의 기도’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가을을 가리켜 ‘고독의 계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혼자 있는 계절을 뜻하는 말
이다.이는 곧 혼자서 인생을 생각하며,혼자서 자신의 삶을 깊이 돌아보는 ‘묵상’을
일컫는 말이다. 가을은 역시 ‘묵상’이 제격이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것이 있
다면 바로 그 ‘묵상’이 아닌가 싶다. ‘묵상’할 때 우리는 사람다운 존재가 되는 것이
며, 더 나아가 ‘신의 형상’을 가진 자다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을’은 우리에게 그
잃어버린 ‘묵상’을 회복시켜주는, 이를테면 인간다운 삶을 회복시켜주는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을’은 얼마나 소중한 계절이며 축복된 계절인가!

금년 가을은 더 이상 ‘인조 가을잔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즉 아무 생각 없
이 ‘재미’와 ‘오락’에 이 가을을 잃어버리는 불행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 가을에 ‘묵
상하는 삶’을 가짐으로, ‘사랑하는 삶’을 가짐으로, 무엇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감으로 모두가 축복된 이 계절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김현진

 

잃어버린 축복


빗줄기가 몇차례 흩날리더니 버팔로에 불쑥 가을이 찾아왔다. 가을은 우리를 을
씨년스럽게 하지만 요즘 같아서는 더욱 을씨년스러움을 느낀다. 이는 갑작스레 들
이닥친 ‘금융대란’으로 전 세계가 들썩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지 금융회사
나 증권가의 문제라면 얼마나 다행이랴! 문제는 그 여파가 서민들의 삶에 큰 위협
을 준다는 데 있다. 실제로 Business를 하는 사람들이 피부에 와 닿게 경제적인 어
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환율폭등으로 인해 유학생들이 공부와 생활
에 큰 지장을 겪고 있다. 우리 교회에 있는 많은 유학생들을 생각할 적마다 마음에
이는 안타까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 중에 한국에서 들려오는 최근의 소식은 충격적이고도 우울한 소식들 투성이
이다. 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바람 잘 날이 없는 한국이지만 요즘 들어서
는 더욱 그런 것 같다. 특별히 최근엔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고 있는데 지난 주중엔 한국의 간판급 여배우인 ‘최진실’씨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
이 들려왔다. 한국 뉴스를 열어보았더니 온통 그 소식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약 한달 전쯤엔 ‘안재환’씨라는 또 다른 유명 연예인이 자살을 했
다 하고. 그로 인해 지금 한국 사회는 매우 뒤숭숭한 분위기라고 한다. 무엇보다
이 같은 사건들로 인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심약한 사람들의 모방 자살사건이 잇
따르지나 않을까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중에 있다 한다.

정말이지 왜들 그렇게 극단적인 길을 택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죽은 사람들의 경
우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속 깊은 사정들이 있겠지만 그럴
지라도 자살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며 탈출구도 아니다. 이는 그 자신의 삶을 ‘실패’
로 끝내는 것이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지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는 것이고 특별
히 유명인의 경우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이기도 하다.
뉴스를 보는 가운데 나를 더욱 안타깝게 만든 것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다 ‘그리
스도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자살한 ‘최진실’씨도, 그리고 얼
마 전에 자살했다는 또 다른 연예인인 ‘안재환’씨 역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교회 주관으로 장례식을 갖는 것을 뉴스를 통해 들을 수가 있었다.
정말이지 불행하고도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자살’을 선택한 그들. 그들은 정말 ‘그리스도인’이었
을까? 그들은 어떤 ‘그리스도인’이었을까? 그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살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사는사람들이고(로마서 8:9), 그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을 ‘평강’ 가운데 인도하시기 때
문이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그 평강은 좋을 때만 갖는 평강이
아니다. 여건을 초월하여, 심지어 죽음 앞에 직면해서라도 가질 수 있는 ‘평강’이
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순교를 당하는 자리에서도 ‘평강’ 가운데 초연히 죽음을
맞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어찌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
단 말인가? 내 생각에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기보다는 단지 ‘교회를 다니
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만일 그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참으로 불
행한 삶을 산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축복을 제대로 누리
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문득 ‘오스카 와일드’라는 미국의 유명한 문학가가 쓴 글이 생각난다. 그가 쓴 글
가운데 이런 우화적인 단편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그 후 세월이 지나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그 같은 내용의 글이다.
처음에 예수님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한 주정꾼을 만나게 되었다. 예수님께
서는 그에게 왜 그처럼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원래 앉은뱅이였는데 당신이 일으켜주어서 걷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걸
어 다닌들 뭐하겠소.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이요. 그동안 직업을 찾아보았지만 만
족한 직업이 하나도 없었소. 해서 세상을 비관하며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오.”
그 다음 예수님은 한 창녀가 남자들 틈에서 희롱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
자는 한 때 예수님으로 인해 새 생활을 가지게 된 여자였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다가가 왜 또 이와 같이 생활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 창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창녀의 자리에서 건져주어 새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지만 창녀에
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 여전히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
았습니다.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 수가 없었지요. 해서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한 젊은 불량배가 이웃 사람들과 정신없이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께서는 그 청년에게 물었다. “이보게 젊은이,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나?” 그때 그 청년은 예수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준, 예전에 소경이었던 사람이오. 그러나 눈을 뜨고서
도대체 무엇을 보란 말이오. 처음엔 세상이 아름다운 것 같았는데 점차 보이는 것
들이란 나를 화나게 만들고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들뿐이었소. 해서 결국 나
는 분통을 터뜨리며 아무나 싸움질을 하는 생활을 가지게 된 것이오.”

물론 이상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한 작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가상으로
써본 글이다. 사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이 글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냐
하면 작가 개인의 상상력으로 주님께서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마음대로 망치고 있
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이 같은 글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부조리와 현실의
어려움을 고발하려고 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 세상은 못 배우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얼마나 어려운 곳인가?

그러나 무엇보다 이 글이 보여주는 사실이 있다면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음에
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랄 수 있다. 주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셨다. 주님께서 걸을 수 있도록 불구의 다리를 고쳐주셨다. 주님께
서 더러운 창녀의 생활에서 건져 주셨다. 그 다음엔 그 자신이 그 축복을 잘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밥상을 차려주었다. 그렇다면 먹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입에 떠서 넣어주는 것까지 기대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가만 보면 마찬가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무엇보다 ‘평강’에 있어서
그러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가져다 주셨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
히 얻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시는 평강이며, 세상이 주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평강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것이다. 성경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면 그 같은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
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강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5장 1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
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우리 인생들에게 선물
하신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평강’이었다. 다음은 그것을 보여주는 말
씀이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
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한복음 20:19)
즉 ‘그리스도인’이란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일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평강의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다.
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축복인가! 이제 우리가 할 것이 있다면 주님 안에서 그
평강을 누리기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평강’을 제대로 누리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가 않다. 이는 곧 자신이 받은 놀라운 축복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이 없어서 ‘평안’하지 않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지
못해서, 또 어떤 사람은 비즈니스가 잘 되지 않아서 ‘평안’하지 않다고 말한다. 어
떤 사람들은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식들이 속을 썩여서 ‘평안’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어떤 사람은 심각한 스트레스에 빠지게 되며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최
근에 자살한 연예인들처럼 극단적인 불행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평안’은 그런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며 외
적인 조건에 의해 생기는 평안이다. 진정한 평안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데서
오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자신이 천국의 시민임을 알게 될 때, 그리
고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평안함’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때 가진 것이 없어도, 건강이 좋지 못해도,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남편이나 아내,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늘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어차피 지나가는 것이며 나그네 삶이기 때문이
다. 지나가는 나그네 삶의 불만족이 어찌 최고의 축복을 보장받은 우리에게서 ‘평
안’을 빼앗아 갈 수 있겠는가?

우린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과연 그리스도인답게 ‘평강’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늘 불안과 불만과 스트레스 가운데 살고 있는가? 만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라고 하면서 ‘평안’을 상실한 삶을 살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장하
신 축복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처럼 불행한 그리스도인
의 삶은 없을 것이다. 바라기는 이 가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모두가 ‘평강의
삶’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성경에 자주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인사로 글을 끝맺을까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 김현진

 

‘흠집 없는 벽’


나는 예배당 아래층에 있는 남자 화장실에 들어설 때마다 매번 신기한 생각으로
벽을 바라보곤 한다. 이는 흠집 하나 없는 벽이 너무나 놀랍기 때문이다. ‘흠집 없
는 벽’이 무슨 놀라운 일인가 의아한 생각이 들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는 지난 5월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당시 주일 모임을 다 마치고 집에 돌아갈 즈음에 남자 화장실에 물이 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얼른 달려가 보았더니 이게 웬 난리인가? 남자 화장실에 홍수가
난 것이 아닌가? 바닥이 온통 물에 잠겨 있었다. 게다가 물이 Hallway까지 새어나
오는 것이 아닌가! 일단 수도를 잠가 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긴
했는데 도대체 어디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날 다급히 Plumber(배관공)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자 곧바로 Plumber
두 사람이 교회를 찾아왔는데 그들은 수도를 다시 틀고는 물이 새는 여부를 곧 확
인하였다. 그러더니 자기들도 어디서 물이 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사방 벽을 다 뜯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덜컹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보통 대공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급한 대로 그들은 어디서 물이
새는지 나름대로 진단을 하더니 화장실 내 한쪽 벽을 망치로 사정없이 부수는 것이
었다. 옆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속으로 기겁을 하였다. “아니 저렇게 벽을
망가뜨리면 나중에 공사가 커질 텐데..” 내심 걱정이 앞섰다.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
였다. 그들이 벽을 부수자 그 안에 있는 파이프라인이 드러났는데 정확하게 그 지
점의 파이프가 터져있는 것이었다. 그들 말로는 파이프가 동파(凍波) 되었다는 것이
었다. 즉 겨우내 얼었던 파이프가 봄이 되면서 팽창되어 터졌다는 것이었다. 그들
은 뚝딱뚝딱 파이프를 교체하더니만 30분도 안되어 작업을 마치고 돌아갔다. 그렇
게 해서 화장실에 물이 새는 문제는 깨끗이 해결이 되었다. 정말이지 보통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대단한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어디가 어떻게 잘못
되어 물이 새는지도 모르는데 그들은 그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데 30분도 채 걸리
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화장실의 물새는 문제는 무사히 해결을 했는데 이제는 흉하게 훼손된 벽
이 문제였다. 수도관 공사를 마친 기술자들에게 벽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만
자기들은 알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한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
들은 배관 공사를 하는 사람들일 뿐이고 수도관 수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벽을 부
순 것뿐이니 벽을 수리하는 일은 우리가 알아서 ‘목수’에게 연락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흉하게 뜯겨진 벽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큰 공사가 되겠거니 걱정부터 앞섰다.
내 생각엔 벽을 모두 뜯은 다음 새로 벽을 세워야 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다음날 목수에게 연락을 했더니 바로 목수가 달려왔다. 그는 부서진 벽을 보더니
큰 문제가 아니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에
화장실 벽을 보았더니 말끔하게 깨끗이 고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언제 벽을 부순 적
이 있기나 했었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참으로 신기하고도 놀랄만한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정말 ‘목수’란 대단한 기술자구나 나는 혼자서 연신 감탄을 쏟아내었다.
그때 이후 나는 남자 화장실에 갈 적마다 그 고친 벽을 보고는 매번 혀를 내두르곤
한다. 그리고 우리 삶엔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곤 한다.
지난주일 회보에 김성민 장로님께서 ‘도구’란 제목의 칼럼을 적어주셨다.

최근 집을 여기저기 수리하면서 도구(장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너무나 엄청
난 것을 경험하셨다는 내용의 글이었다.(9월 21일 회보 칼럼 참조) 특히
Drive-Way를 수리한 내용에 대해 적어주셨는데 사실 난 그 글을 읽으면서 김 장로
님에 대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떻게 전문가도 아니면서, 해본적도 없는
집 앞 Drive-Way를 혼자서 수리할 생각을 다할 수가 있을까? 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다 무조건 사람을 부르고 말았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장로님은 적합한 장비를 가지고 혼자 힘
으로 집 앞 드라이브웨이 공사를 다 끝마치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새삼 모든 일에
있어 ‘장비’의 있고 없고의 차이가 무척이나 중요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사실 이는
백번 옳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장비’의 있고 없고는 일의 진척여부에 큰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어떤 땐 일의 성사 여부까지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도구(장비)란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비가 있다고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장비도 사용할 줄
알 때 ‘장비’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장비라 할지라도 무용지
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김성민 장로님이 홈디퍼(Home Depot)에서 빌
려서 사용했다는 그 장비를 내가 빌렸다면 나 역시 장로님처럼 집 앞 드라이브웨이
를 수리할 수 있었을까? 어림없는 얘기이다. 이처럼 장비도 쓸 줄 아는 사람의 손
에 들려야 제대로 장비구실을 하는 것이다. 또한 장비를 쓸 줄 안다고 해도 모든
일이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장비를 가지고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문가’란 꼭 필요한 것이다. 이는 일반 사
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전문가’는 훌륭히 해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파이프
공사’나 ‘벽 공사’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이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얘기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장
비’란 꼭 필요하다. 장비가 있으면 그만큼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얻을 수가 있다.
모든 장비 가운데 가장 유익한 장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꼭 구비해야 할 장비가
있다면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유익과 성장에 있어
서 또한 그리스도인이 천로역정을 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장비’보다 더 확실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얻는 것이라 할 것이다. 말했듯이 아무리 장비가 뛰어나도 전문가가 하는 것만 하
겠는가? 이는 영적인 일에 있어 더욱 적용되는 얘기이다. 생각해보라! 세상일조차
‘장비’를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수월치 않은데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오죽하겠는
가? 따라서 삶의 문제, 믿음의 문제에 있어선 더더욱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면 삶의 문제,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찾아야 할 ‘전문가’는 누구인
가? 바로 모든 것의 해결사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못하실 것이란 없는 분
이시다. 그분이 한번 개입하시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깨끗이 해결되고야 만다. 이
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얘기이리라. 그러면 어떻게 ‘전문가’ 되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가?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회보에 김성민 장로님께서 ‘기도’를 믿음생
활의 소중한 장비로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러하다. ‘기도’야말로 모든 장비 가운데
‘최고의 장비’이자 또한 모든 장비를 초월한 최고의 길에 해당하는 것이다. 왜냐하
면 그것은 우리 삶 가운데 모든 것의 전문가 되시는 ‘하나님’을 불러들이는 ‘하늘
직통전화’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도’란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사노라면 우리 삶 가운데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길 수 있다. 어떤 땐, 수도가 터져
물 난리가 나듯 우리 삶 가운데 이런 저런 난리가 터질 수도 있다. 혹은 흉하게 부
서진 벽처럼 우리의 삶이 흉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것이 있
다면 스스로 서투른 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곧바로 ‘하늘 직통전화(기도)’를 통
해 모든 것의 전문가 되신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요청을 받자마자
곧바로 우리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가 처한 ‘난리’를 수습하시고 우리의 흉한
삶의 상황을 깨끗이 수리하실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최고의
솜씨로 말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최고의 전문가’이시기 때문이다. 그 같은 전문가와
함께 하는 삶은 얼마나 감사하고 신나는 삶인가? 아무나 이 같은 삶을 경험하는 것
이 아니다. 오직 ‘전문가’를 찾는 사람들 그들만이 이 같은 삶을 경험할 수 있다.

✎ 김현진

 

도 구


요즘 집수리를 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4년간 현재의 집에 살면서 이곳저
곳 여러가지 작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언젠가 시간이 나면 해야지 하면서 미루어
두었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사정이 생겨 몰아서 한꺼번에 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제일 큰 문제거리이다. 한나절이면 되려니 생각하면 하루
꼬박, 하루면 되겠지 하면 이틀 사흘이 걸리는 것이 예사이다. 예상한 시간보다 보
통 두세배는 더 걸리는 것 같다. 미리미리 해둘걸 하는 후회가 막심이다.

지금까지 한 수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콘크리트 드라이브웨이 끝자락을
고친 일이다. 도로와 턱이 있는 탓에 차가 오르내리면서 충격을 많이 주어서인지
이사온 후 얼마 안되어 깨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여러 조각으로 깨져, 지날 때마
다 덜렁덜렁 거렸다. 작은 크기의 수리라 용역을 맡길 수도 없었다. 믹서기 차량
등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크기가 되어야만
일을 시작한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해보기로 했다.

재어보니 12‐3 피트 거리에 8인치 정도 폭으로 얼마 안되는 크기이라 하루 정도면 해
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덜렁거리는 조각은 쉽게 떼어내었는데, 약간이
라도 땅에 묻혀있는 조각은 주위를 호미로 파고, 물로 적셔보고해도 꿈쩍을 하지 않았다.
아들 녀석이 이제는 제법 커서 힘깨나 쓰기 때문에 불러내어 둘이서 힘을 다해 보았는데
도 한계가 있었다. 곡괭이가 있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
니 윤신원 장로님께 그런 도구가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연락드렸더니 와서 필
요한 것들을 가져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달려가 곡괭이와 그외에 장도리 등 쓸모있
을 것 같은 여러 도구들을 빌어왔다. 역시, 그것들을 사용하니 그렇게 단단하게 박혀있
던 콘크리트들이 쑥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아들과 하이 파이브를 하며 자축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위에 부러진 콘크리트들을 치우고 보니 아래쪽에
또 다른 큰크리트 바닥이 버티고 있었다. 아마 이전 주인이 깨진 콘크리트를 다 파
내지 않고 대충 그 위에 땜빵을 해놓았던 것 같았다. 그러니 그렇게 쉽게 깨어졌
지. 드라이브 웨이 콘크리트는 최소 6인치 깊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상적으로
는 그 아래로 6인치 정도를 더 파서 자갈 등으로 깔아주어야 한다. 이 버팔로 지역
은 겨울에 땅속의 수분이 얼면서 팽창하기 때문에 그냥 땅 위에 콘크리트를 깔면
팽창하는 지반에 밀려 쉽게 깨지게 된다. 파낸 부분을 재어보니 한 4인치 정도 깊
이가 된다. 그러니 그 콘크리트를 깨고 8인치나 더 파야했다.

바닥에 깔린 콘크리트는 망치, 곡괭이 등 손으로 하는 도구로는 끄떡이 없었다.
이런 저런 시도를 하다보니 시간은 하루 이틀 자꾸 지나가고, 이래선 안되겠다 싶
어 홈디포의 장비를 빌리는 곳으로 가서 데몰리션 해머라는 기계를 빌렸다. 건물
등을 부술 때 두두두두 하면서 콘크리트를 깨는 장비이다. 영화 등에서나 보았지
실제 그런 종류를 직접 써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작은 것, 큰 것 두
종류 중에 경비를 아끼느라 작은 것을 가져왔더니 이건 콘크리트 표면에 흠집만 내
고 간에 기별도 안가는 것 같았다. 결국 불필요하게 대여료를 축내고 큰 해머를 빌
리고 나서야 작업을 제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상적인 깊이로 다 파지는 못하고
한 10인치를 파고는 자갈을 깔고 큰크리트를 덮었다. 그러기를 한 나흘이 걸렸나?
그래도 일을 마치고 나니 뿌듯한 느낌이었다. 덩달아 메일박스의 기초부분도 새로
콘크리트를 했는데, 일을 완성한 기념으로, 차마 드라이브웨이 수리한 부분에는 못
하고, 메일박스의 기초에 필자와 아들의 이름을 새기고 준공(?) 연도를 적고는 작
업을 마무리 했다.

집수리를 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점은 도구가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
무리 힘이 세어도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있는 반면, 아무리 힘이 약한 사람이라
도 적절한 도구가 있으면 못할 일이 별로 없다. 설사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라
도 도구를 사용하면 더 빨리 더 쉽게 일을 해낼 수 있다. 사실 인류문명의 발전은
도구의 발달과 획을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돌로 만든 낫으로부터
현대의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등에 이르기까지, 도구는 인간생활의 규모와 질을
크게 향상시켜왔다. 이를 빗대어서 신앙생활에도 도구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보
았다. 스스로 애써서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일이 참 많은데, 신앙의 도구를 잘 사
용하면 더 쉽게 더 빠르게 더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럴만한 신
앙의 도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기도일 것이다.

필자는 기도를 통해 일이 해결되는 경험을 남과 다르게 많이 해보았다고 여기지
는 않는다. 그래도 기억남는 것이 있다면, 이곳 버팔로로 오기 전, 미국에 더 체류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할 때의 일이었다. 연수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시점
이었다. 아이들은 미국에 남아 교육받고 싶어하고, 사실 필자 자신도 더 훈련받은
후에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기회만 있다면 체류를 연장하
고 싶었다. 몇 군데 지원을 해보았지만 반응이 아예 없거나, 자리가 없다는 반응이
었다. 한군데 인터뷰를 했지만 최종 응답은 자신들이 제시할 수 있는 보수에 비해
자격이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막막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3일 금식기도를 하기로 했
다. 짧은 금식기간이라 생각할 지 모르지만, 실제 한 번 해보시라. 삼일이라도 그리쉽지 않다. 끝날 때쯤이면 최종식사 후 72시간이냐, 다음 끼니부터의 72시간이냐로
스스로 따지게 된다. 조금이라도 금식시간을 줄여볼까 하는 심산인 것이다. 아무튼
그 금식기도가 끝난 후 혹시나 해서 반응이 없었던 곳들에 연락을 해보았다. 그런데
버팔로에서 연락이 왔다. 이전의 메일을 못보았다고. 한 번 만나보자고.

기도를 일을 쉽게 해결하는 어떤 도구로 비유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기도는 그저 수단으로 여기기에는 그 차원이 다른 신앙행위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통로요, 교제의 장이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면, 기도를 통
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귀울이고 그 분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리라. 또한 하나님의
사역의 과정은 우리가 주도하고 하나님께서 힘을 보태어주는 식이 아닐 것이다. 하나
님께서는 그 분의 정하신 뜻을 당신께서 주도하셔서 일을 해가신다. 사실 우리가 신
앙의 삶을 통해 그 분의 행하시는 사역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 볼때, 하나님께 구하고 그 분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
또한, 여전히 기도의 주요 기능 중 하나라 여겨진다. 사실 우리는 기도 때마다 하
나님께 무언가를 구한다. 예수님께서도 구하라고 하셨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셨다.
그럴 때 주실 것이고 문이 열리리라고 약속하셨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
도할 때까지 그 분께서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을 조금 미루어두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마도 우리의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닐까?

필자는 지금 혹 제대로 된 도구없이 콘크리트를 깨겠다고 무식하게 덤비는 것처
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반성해본다. 기도없이 내 힘으로 한 번 해보
겠다고, 결과가 뻔한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힘에 버거운 큰 문제들이
당장 눈 앞에 널려있는데, 깊이 기도하지는 않고 어쩔줄 몰라 하며 공연히 힘낭비
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들 문제들을 주신 것은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일텐데.
내려놓고 이야기 하고 듣고 교제하자고 하시는 것일텐데... 아무쪼록 지금 맞닥뜨린
많은 문제들을, 또 앞으로 만나게 될 크고 작은 일들을, 호미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계속 끌적거리고 있지 말고, 곡괭이, 데몰리션 해머보다 더 강력한 도구인 기도로
해결해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 김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