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 인디언과 버팔로

전쟁이야기 (26)



무자년(戊子年)에 시작된 「슬픈 인디언 이야기」가 어느덧 기축년(己丑年)의 문턱을 넘어서고 말았네요. 갈길은 ‘상거가 먼데’ 왠지 마음 어깨에 슬며시 내려앉는 무게감, 혹 초조감 같은 것. 복받을 일만 골라 하는 내 독자들에게 정량 미달의 글만 진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맑고 고운 심성과 맛깔스런 손맛을 지닌 우리 교회 자매들, 그들이 끓여내는 국밥, 아 조선의 맛! 제 글에도 그 정도의 풍미는 들어있어야 할 터인데, 이를 어쩐다.

그러나 「소의 해」이니 그 소의 ‘유유자적함’과 나아가 ‘황소고집’을 본받아 느긋이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는 스스로의 응원 소리와 저를 위한 누군가의 기도 소리 또한 들려오고 있으니.


청교도는 슬쩍 옆으로 밀어놓고, 이번엔 「인디언 전설」쪽으로 이야기의 가닥을 잡아보지요.

이 세상에 전설 없는 족속이나 나라가 어디 있겠어요. 북미주의 원주민인 인디언들도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지요. 그들에겐 언어는 있었으나 그것을 글로 표현할 문자가 없었다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전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올 수밖에. 다행히 전설연구가들과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상당수의 전설이 문자화 될 수 있었고, 또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도 그들의 글 속에 간혹 인디언의 전설을 싣고 있었답니다.

저 광막한 대지 위에 밀어닥치는 엄청난 자연의 힘, 그 앞에 선 미약한 인간, 그들이 갖게 되는 경외심, 두려움, 때로는 연민의 정. 어떤 전설은 차라리 신화에 가깝네요.

지난 해 5월, 서북부 지역에 살고 있던 오사지 부족의 전설을 소개했었는데 혹 기억하고 계실런지. 해는 아버지요 땅은 그들의 어머니라는 것.


세네카 인디언(Seneca Indian)의 전설을 들려드릴 참인데, 우선 제가 인용하고 있는 책들을 소개하지요.

1. 「영원한 메아리(Lasting Echoes)」, 부루칵(Joseph Bruchac)이라는 인디언 문필가의 책, 「아메리카 원주민의 구전역사(An Oral History of Native American People)」란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2. 「아메리카 민담집(American Folklore)」은 「Life」지의 편집인들이 엮은 책이고.

3. 메릴(Arch Merrill)의 「세네카인들의 땅(Land of Senecas)」

그리스도인과 전쟁



4. 아터(Jack Utter)의 「아메리카 인디언(American Indians)」

5. 비스코(Jim Bisco)의 「대버팔로 회고록(A Greater Look at Greater Buffalo)」

6. 마우(Clayton Mau)의 「중서부뉴욕 발전사(The Development of Central and Western New York)」


세네카란 말은 우리에게 퍽 익숙한 이름이지요. 이 사람들이 쓰던 옛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지명, 호수명, 거리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지.

Geneseo, Ontario, Erie, Niagara, Tonawanda, Cheektowaga, Tuscarora, Gowanda, Delaware, Mohawk, Batavia 등등.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서부뉴욕이 모두 그들의 땅이었다는 것은 알고 계실터. 그 뿐이 아니지요. 뉴욕주 전체가 그들의 땅이었으니. 적어도 17세기 초까지는 그랬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막강했으면 그들의 영향력이 일리노이와 캐롤라이나까지 미쳤으리요.

그러나 1797년, 20일간의 모닥불 앞 상담 끝에 그 당시 세네카 추장이던 렏 재켓(Red Jacket)은 1.3백만 에이커의 땅을 단돈 10만불에 팔아넘기고 말았으니 원.

이 사람들의 역사 이야기 언제 자세하게 말씀드릴 짬이 있을 것인가.


Buffalo, 우리의 제 2의 고향, 이 정겨운 이름의 어원(語源)을 한번 짚어보지 않고 넘어갈 재간이 있나. 혹 알고 계세요, 버팔로란 이름이 생기게 된 유래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포함해서, 애매모호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요. 인디언의 말이 아닐까 또는 들소가 영어로 buffalo이니 거기에서 따온 것은 아닐까.

이상하게도 버팔로엔 소와 관련된 이름들이 많네요. 「Buffalo Bills」가 그렇고, 마이너 리그 야구팀의 명칭이 「Bison」이요, UB 축구팀도 「Bulls」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무슨 조화인지, 실제로는 이 서부뉴욕 일대에서 들소가 살았다는 기록이 전무하답니다. 놀라셨지요.

「대버팔로 회고록」은 이런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약 250년 전에는 이 지역을 「Buffalo Creek」이라고 불렀다. 1700년대 중반, 서부에서 이곳으로 이사온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Buffaloe」. 인디언과 백인 사이의 혼혈아였던 그는 샛강(Creek) 기슭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초기 이민자들은 그의 거처를 가르켜 「Buffaloe's Creek」이라고 불렀다. 점차 사람 수가 늘어나면서 더 넓은 터전으로 옮겨가게된 이들은 그의 이름 「Buffaloe」에서 ‘e'자를 빼고 그냥 「Buffalo」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과 전쟁



제 조카 최준홍군이 컴퓨터에서 뽑아낸 글에는 또다른 이야기가 들어있네요.

‘Beau Fleuve Theory(아름다운 강 가설)’ 백인들이 오뉴월 파리 모여들듯 하기 훨씬 전에 프랑스 탐험대가 이곳에 이르렀답니다. 나이아가라 강(Niagara River)을 본 이들은 그 아름다움에 너무나 감격해서 냅다 지른 소리가 있었으니 ‘beau fleuve(beautiful river)!' 이 프랑스 말이 와전(訛傳)되어 Buffalo가 되었다는 설입니다.

‘Riviere aux Chevaux Theory(River of Horses Theory, 말들의 강 가설)’. 가장 오래된 설로 1825년에 출판까지 되었다네요. 무슨 불법적인 연회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곳에 어디서 훔쳐온 말고기를 들소고기(Bison meat)라고 감쪽같이 속여 팔아먹은 녀석이 있었답니다. 하여, 이 연회 장소를 Buffalo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주장이지요.

참, buffalo와 bison의 구분이 애매하네요. 사전을 찾아봐도 둘다 그냥 「아메리카 들소」라고만 적혀 있으니.

「세네카인들의 땅」도 비슷한 내용 뿐인데, ‘버팔로라는 말에선 역시 인디언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란 말과 ‘inconclusive(불확정적)’란 단어로 끝을 맺고 있어요. 모두가 가설일 뿐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해답을 주고 있지 않으니, 어허 닭 쫓던 개 먼 산 바라보는 꼴이 되고 말았네그려.


세네카 인디언의 전설입니다. 「하늘 여인(Sky Woman)」이 그 제목. 어린 시절 밤 익기를 기다리며 화롯가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듣던 옛 이야기처럼 엮어볼테니 들어보세요.


먼 하늘나라 그 어딘가에 하늘 주인(Chief of Heaven)'과 대지의 어머니(Earth Mother)가 살고 있었지. 우리말로 옥황상제라고나 할까, 하늘 주인말야. 그들은 흰 집에 살고 있었는데 빛의 나무(Tree of Light)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나무가 그 집을 뒤덮고 있었어.

그 때까지 해도 없었고 땅도 없었대. 하늘 아래로는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바다 동물들과 바다 새들이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네.

빛의 나무에는 아름답게 핀 꽃들이 만발해 있었어요. 그 꽃들로부터 찬란한 빛이 나와 해 없는 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거라.

대지의 어머니는 마치 에덴동산의 이브처럼 아주 아주 예뻤대. 그녀가 아기를 가지게 되었지. 하늘 주인의 입김을 한번 마셨는데 고만 임신을 한거야. 그런데 말야, 그토록 고운 대지의 어머니에게도 문제가 있었어. 그녀의 끊임없는 호기심 때문이었지. 한번 의심을 품게 되면 반드시 그 원인을 찾아내야 직성이 풀리고 마니 이 또한 병폐라.

그리스도인과 전쟁



저 빛의 나무 뿌리 밑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글쎄 그 나무 밑을 파기 시작하네. 아무리 빛의 나무라한들 별 수가 있나. 그 큰 나무가 드디어 뿌리째 뽑혀지고 말았지. 뻥 뚫린 구멍, 하늘에 큰 구멍이 생긴거야.

하늘 주인이 노발대발,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네그려. 그렇지 않아도 제 입김 한 번에 임신한 그녀를 질투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런 엄청난 짓까지 저질렀으니.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하늘 구멍 속으로 던져버렸지.

큰일났네. 대지의 어머니가 쏜살같이 하늘에서 떨어져내려오고 있으니말야.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여 그녀에게 「하늘 여인」이란 별명이 붙여졌고.

「하늘 여인 구출 작전회의」가 열렸지. 바다 새들과 짐승들이 모두 모였어. 그녀를 받기 위해 수천수만의 새들이 날개를 활짝 펴서 서로서로 겹쳐대니 꼭 쿠션 좋은 양탄자 같이 되었네.

한편, 바다에서도 구출작전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지. 바다 속으로부터 헤엄쳐 올라온 큰 거북이 물 위에 조용히 떠있고, 사향쥐와 두꺼비는 뻔질나게 다이빙을 하는거라.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흙을 물어와서는 거북이 잔등에 쌓아 올리고 있었던 거지. 별 신기한 일도 다 있네. 흙이 자라나다니. 거북이 등에 쌓인 흙이 점점 커지더니 큰 섬이 된거야.

떨어지고 있는 하늘 여인을 살포시 자기들 날개 위에 받은 물새들은 조심조심 그녀를 섬 위에 내려 놓았지.

임신 중이던 하늘 여인이 딸을 낳았어요. 태어나자마자 어른이 된 그 딸은 정체를 밝히지 않는 연인을 만나 결혼을 하네. 그리고 곧 아기를 가지게 되었지. 쌍둥이 사내아이들이었어. 이 아이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서로 다투고 싸웠다는데, 한 아이는 살결이 희고 선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서 「선한 마음(Good Mind)」라고 불렀고, 다른 아이는 검으튀튀한 용모에 마음씨마저 악해 「악한 마음(Evil Mind)」이라고 불렀다네.

악한 마음은 어서 속히 세상에 나가겠다며 어미의 겨드랑이를 비집고 나왔다지 뭐야. 어미가 어떻게 되었겠어. 죽고 말았지. 슬픔에 젖은 하늘 여인은 쌍둥이들과 함께 야트막한 묘지에 그녀를 장사지냈어요.

그런데 신비로운 일이 또다시 일어나네그려. 그녀의 죽은 몸에서 여러 가지 식물들이 자라나기 시작한 거야.

젖가슴 위 흙으로부터는 옥수수가, 복부에선 호박이, 손가락에서는 콩이, 발가락에서는 감자가 그리고 머리로부터는 담배가.

선한 마음은 하늘나라로 힘들고 먼 여행을 떠났지.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어.

그리스도인과 전쟁



높은 산꼭대기 위에서 빛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햇님이었어.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을 다 통과케 한 후 햇님은 그를 내 아들이라 불렀지.

지상으로 돌아온 선한 마음은 온갖 종류의 좋은 것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과일도 만들고 동물과 물고기도 만들었지. 반면, 악한 마음은 계속 방해짓만 하고 있었지. 예를 들자면, 물고기에다 작은 가시들을 많이 집어넣는 것 같은 짓이었어. 사람들이 맛있는 생선을 쉽게 먹지 못하도록 그런 고약한 짓을 한거지.

악한 마음은 구약의 가인처럼 선한 마음을 죽이려고 했네. 실패했지. 그러자 그는 사악한 것들을 모두 데리고 깜깜한 지하세계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네.

선한 마음은 인간을 창조하게 되지. 진흙을 빚어서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거야.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대요.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하지?

이 모든 일이 끝나자 선한 마음은 빛의 줄기를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갔지. 하늘 여인도 하늘의 주인에게로 돌아갔고.

그 때로부터 인디언에게 땅은 어머니가 되었고, 해는 아버지가 되었다는 이야기야.


인디언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세가지가 있다고 하네요. 옥수수, 콩, 호박, 해와 땅이 어울려 빚어낸 이것들을 세 자매라고 부르면서 신성시하고 있는데 특히 옥수수를 귀하게 여기고 있지요. 나중에, 인디언의 옥수수 밭을 불태운 백인들이 있었어요. 인디언은 그들에게 신성모독의 불법자라는 욕을 퍼붓고 있네요.

흔히들 역사를 바꾼 작물로 감자와 옥수수를 들지요. 16세기 중국으로 건너간 옥수수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18세기 초랍니다.

옥수수라는 말의 뿌리는 옥수수의 중국 발음인 위슈슈에서 비롯된 것이고, 별칭인 강냉이는 전래시킨 중국 남부지방의 통칭인 강남에서 비롯되었답니다. 연전에 한국의 옥수수 박사란 분이 옥수수 씨앗을 들고 북한을 방문한다는 기사가 생각나네요.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이 강냉이 죽이라도 실컷 먹었으면 좋으련만.

다음엔 「청교도와 인디언」으로 되돌아 갑니다.

주안에서 샬롬.  ✎  이은모

 

제국의 멸망(2)
 -전쟁이야기(21)-




코르테스 이야기의 계속입니다. 그가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에 입성했다는 것까지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코르테스를 아스텍 전설의 그 신인으로 믿었는가, 국왕은 코르테스의 요구대로
아무 저항도 없이 궁전의 어느 방에 갇히고 맙니다.
이 무렵 코르테스의 방자한 짓거리를 보다 못한 큐바 총독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군대까지 보내게 되는데, 일부의 병력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간 코르테스는 오히려
그들을 격퇴해 버립니다.
한편, 코르테스가 자리를 빈 사이 수도에선 큰 사태가 벌어지게 되지요. 무엇 때
문인지 수도에 남아있던 코르테스의 부하들이 원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고,
이 일로 노한 원주민들이 대대적인 반 코르테스 폭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부랴부랴
돌아온 코르테스는 유폐된 국왕을 불러내 그들을 무마시키려 했으나 이미 비겁자의
낙인이 찍힌 국왕은 돌과 화살 세례를 받아 중상을 입고 맙니다.

수도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된 코르테스, 간신히 탈출에 성공합니다만 그동안
약탈해 모아두었던 황금과 보물들을 모조리 잃어버렸으니 아마도 그의 눈에선 피눈
물이 흘렀을 터, 더구나 부하까지 1/3이나 피살되고 말았으니. 이 사건이 멕시코 역
사에서 「슬픈 밤( La Noche Triste)」이라 일컫는 유명한 유혈 사태라는데... 이 일
이 왜 슬픈지 이해가 안가네. 아무튼 이 소용돌이 속에서 국왕이 죽게 되고, 그의 아
우 키틀라하우친(Cuitlahautzin)이 새 지도자가 되어 스페인인들에 대한 저항을 시도
하나 불행하게도 천연두가 돌기 시작합니다. 서인도 제도의 인디언들처럼 이 무서운
돌림병으로 키틀라하우친을 비롯해 수많은 원주민들이 죽어나갔지요.

일단 철수했던 코르테스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원주민 동맹군들을 더 강화한 다음
수도를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약 10개월 후의 일이었어요. 수도를 포위하여 모든
식품과 물까지 완전 차단해 버렸으니.
아스텍인들은 자존심과 애국심이 매우 강한 백성들, 성 안에 갇혀 전염병으로 죽
어나가고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싸우고 있었지요. 3개월을 그렇게
버텼답니다. 보다 못한 코르테스마저 그들에게 항복할 것을 간청까지 했다는 이야
기도 있지요.
국왕과 그의 아우가 죽자 그들의 조카인 25세의 청년 쿠아우테마크(Cuauhtemoc)가
지도자가 되어 싸우고 있었던 것. 그러나 그는 결국 스페인 군에게 체포되고 말지
요. 그는 이렇게 최후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임무를 다 했다. 그러나 나는 실패했다.
그러니 코르테스여, 그대의 칼로 나를 죽이라!
스페인 군 600명과 원주민 동맹군 10만을 거느린 코르테스 앞에 결국 무릎을 꿇
고 마는 아스텍인들, 이로써 아스테카 제국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으
니... 1521년 8월 17일의 일이었지요.
아스텍인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고, 코르테스는 황금과 보물을 한 배 가득 실어
스페인 왕실로 보냈고.
얼마 후 스페인으로 귀국한 코르테스는 넓은 땅과 많은 노예를 하사 받고 군주
못지않게 살다가 죽었다는데, 이거 뭐 잘못된 거 아닌가 싶네그려. 「악마의 사
도」의 종말이 이렇듯 순탄하다니.

유언대로 그의 시신은 멕시코로 운반되지요.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2
년이 지난 1823년, 그의 유해는 멕시코 민중의 난폭한 보복을 피해 비밀 장소로 숨겨
지는 수난을 겪게 되었고, 1946년 그것이 다시 발견되자 코르테스를 지지하는 측과
비난하는 측 사이에 격렬한 논쟁까지 불러 일으켰다는 시시한 이야기도 있네요.
피사로, 1474년생인 그도 역시 스페인 산. 코르테스보다 지체가 낮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 이외엔 별로 알려진 게 없는 그의 성장 배경. 젊었을 때 여러번 신
대륙 원정에 참가하면서 이런 저런 소문을 들은 그는 파나마 남쪽 어딘가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지요.

1522년, 수도사인 루케(Luque)와 군인인 알마그로(Almagro)와 손을 잡고 첫 탐
험길에 올랐으나 그는 실패의 잔에 고생만 그득 채워서 돌아오고 맙니다.
몇 년 후 다시 도전하는 피사로. 이번에는 페루의 북단에 있는 도시 툼부스
(Tumbus)에 당도할 수 있었지요. 숫한 고난 끝에 이르른 그들을 그곳 주민들을 다행
히도 친절하게 대했으나 상상 외로 큰 성채와 신전 그리고 질서 정연한 도시의 모양
새가 이 나라의 조직력과 군사력을 과시하고 있어 피사로는 실컷 주눅이 들어 되돌
아오고 말지만, 그러나 그가 어디 이 정도에서 순순히 포기하고 말 인간인가요.
일단 스페인으로 귀국한 그는 스페인 왕을 화롯불에 감자 굽듯 구워삶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원정군 총사령관 겸 정복자 총독 자리를 따내고 마는 것 보세요.
1531년 초, 드디어 피사로는 원정군의 배에 올라 파나마 항구와 작별하게 됩니
다. 코르테스에 비해 빈약하기 그지없는 그의 원정군. 고작 배 3척에 병사 180명,
대포 몇 문과 말 27필이 전부였으니.
에쿠아도르의 북부 해안에 상륙한 그들은 남하하기 시작하여 전에 있었던 툼부스
에 이르게 되었고, 다시 안데스 산맥(Andes Mountains)의 험산 준령을 힘겹게 넘
어 카하마르카(Cajamarca)라는 계곡에 도착하게 됩니다.

코르테스처럼 피사로도 운좋은 사나이.
때마침 잉카 제국의 황제 아타후알파(Atahualpa)가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거든요.
수도인 쿠스코로부터 천마일도 넘는 이곳에 왜 그가 와 있는지, 얼마 전까지 그의
권좌에 도전해 반란을 일으켰던 그의 아우의 군대를 뒤쫓아 예까지 온 듯 싶기도
하나 책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알 길이 없네요.

아무튼 내란은 겨우 평정됐으나 이 사태로 황제뿐 아니라 그의 부하들까지 모두
지쳐있었고, 나라 형편도 아직은 뒤숭숭하기 그지 없을 때였지요.
이 나라에도 아스테카 제국처럼 하나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어요. 천지
를 창조한 신이 있는데 이 백색 신의 이름은 비라코차(Viracocha). 그가 때가 차면
언젠가 도래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잉카의 황제는, 아스텍 왕이 코르테스를 자기들 전설 속 신인으로 여겨
신성시했던 그런 우를 범치 않네요.
백성들로부터 「태양의 아들」이라 불리며 신으로 추앙받고 있던 그는 자기만이
나라의 유일한 신이라고 믿어왔던 것이고, 또한 이 신적 권위가 그의 절대권력의
밑받침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터.
하지만, 그는 피사로를, 즉 적을 얕잡아보는 어리석음의 올가미에선 벗어나지 못
하고 맙니다.

「대세계사」의 저자는 이즈음 피사로가 '기지와 용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라고 적
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기지에 찬 속임수의 미끼를 과감하게 잉카인들과 황제에게
던지고 있었기 때문인듯. 자기는 스페인 왕이 보낸 평화의 사절이며 기독교 복음을
전하러 왔을 뿐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소리를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낯선 방문객이 하는 소리와 겨우 200도 안되는 숫자를 가볍게 여겨 조롱의
말까지 하면서 피사로와의 면담을 윤허하는 황제. 바로 그 전날 밤에도 밤새 천주
교 미사를 드리는 피사로.

그들의 만남의 곳엔 수도사 한 명 그리고 인디언 안내자 한 명과 함께 피사로가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4000명이나 되는 군대를 거느리고 온 황제가 거만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요상한 손짓을 하는 피사로.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그의 군병들
이 갑자기 벌떼처럼 달려들어 황제를 묶어버리네. 동시에 굉음과 함께 연기를 뿜으
며 대포는 작렬했고, 기마병들은 말발굽 소리도 드높게 지쳐나갔으며, 병사들은 칼
을 높이 들고 일시에 달려나가니 속수무책이라, 난생 처음 보는 대포와 말에 넋을
잃은 잉카 군대는 도망가기에 바쁘네그려. 더구나 그들은 비무장 상태였으니. 이
어리석은 황제가 오만하기 그지없어 군대를 무장도 시키지 않은 채 무슨 소풍이나
가듯 대동하고 왔으니 말입니다. 2000명도 넘는 잉카군의 피로 계곡은 새빨갛게
물들고 마는데, 때는 1532년 11월이라. 스페인군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었다니.

포로가 된 황제지만 아직도 백성들은 그를 신으로 여겨 그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피사로는 황제를 교묘하게 이용해 제국을 지배하면서 전국의 황금과
은을 긁어모으기 시작하지요.
피사로는 한 때 이런 거짓 약속을 퍼뜨려 황금을 쉽게 모은 일도 있었답니다. 그
것은 황제가 갇혀 있는 방을 황금으로 가득 채우면 그를 잉카인들에게 돌려주겠다
라는 것이었어요. 이 때 백성들이 바친 황금의 양이 어마어마했답니다.
피사로가 약탈한 것들은 대부분 잉카 문명과 전통을 대표하는 뛰어난 세공품들이
었지요. 그들은 이것들을 가차 없이 용해시켜 버렸으니. 그 중 1/5은 스페인 왕실
로 보내졌고 나머지는 피사로 일행이 차지했고.
그 뒤, 증원 부대가 파나마에서 오게 되자 황제의 필요성이 없게 된 피사로는 그
를 살해해 버립니다. 그를 재판에 부쳐 반역죄라는 누명을 씌워서였지요.
Alister Cooke이 쓴 책 「America」엔 '하나의 잊어버릴 수 없는 이야기(One
unforgettable story)'가 실려 있습니다. 이 잉카 제국의 황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며 죽어갔을 듯싶어 소개합니다.

자기 종교를 부인하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거부하는 어느 원주민 왕이 분
형(焚刑)에 처해지고 있었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여져 그의 몸을 불꽃이 휩싸기
시작했을 때, 세례를 받으라는 마지막 권고가 있게 된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는 끝내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희들은 모르겠지.
내가 세례를 받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그곳에서 너희들과 같은 크리스찬들을 또다시 만나게 될 것 아니냐.
나는 그것이 두렵다.

황제를 죽인 피사로는 허수아비 황제를 왕족 중에서 뽑아세운 뒤 남쪽에 있는 수
도를 향해 진군합니다. 가는 곳마다 도시와 농장들을 파괴했으며 닥치는 대로 원주
민들을 살해하거나 노예로 만들었고, 물론 보이는 황금은 모조리 약탈하지요. 원주
민들의 반항이 있었다고 하나 신으로 믿던 황제가 죽어 이미 싸울 의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엎친데 덮친격으로 천연두마저 돌게 되었으니 그게 무슨 싸움다운 싸움
일 수 있었겠어요.
1537년, 잉카 제국을 완전히 정복한 뒤 원주민의 모든 신전을 파괴하고 그 위에
기독교 교회를 세우는 피사로.
이로써 잉카 제국은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이 땅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으며 아스테카처럼 혼혈의 나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천벌을 받았는가, 피사로의 종말은 코르테스처럼 평안한 것이 아니었지요. 동료
였던 알마그로와 그 사이에 관할권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어요. 알마그로가 일단 패
해서 추방당합니다. 그러나 1541년 6월 그의 일파가 들고 일어나 피사로를 암살하
고 말았으니까요.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첫 발을 디딘 후 50년 내에 스페인인들은 전 중미와
페루까지 정복합니다. 「대세계사」는 그들의 식민지 정책과 그 때의 상황을 이렇
게 쓰고 있습니다.

약탈과 살인이 대강 끝나자 그들은 착취를 시작했다. 너나없이 사복을 채우
기에 분주한 스페인인들은 금은광에 손을 대었고, 이로서 원주민들의 비참한
노예 노동이 시작되었다. 광산에서 그들은 과로와 낙반 등의 사고로 수없이
죽어갔다. 멕시코 일대도 페루 방면도 마찬가지였다. 반항하면 박살당하거나
화형에 처해졌다. 반란을 일으킨 마을이나 도시는 보복을 당해 폐허화 되었고
주민들은 모조리 살해당했다.

그 결과, 원주민의 수가 줄어들었다. 정복된 후 40여년만인 1570년대의 보
고는 페루 인구가 1/4로 줄었다고 되어있다.
「미국 민중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악마의 사도」이야기 끝내도록 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에게 행한 그 모든 죽음과 야만 행위로 스페인인
들은 도대체 무엇을 얻었는가? 그들은 역사의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자기 제국
의 영광을 누렸을 뿐이다. 코닝(Hans Koning)은 그의 책 「Columbus: His
Enterprise」에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금은을 그토록 많이 도둑질해갔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인들은 더 부자
가 된 것은 아니었다. 잠시 왕들이 힘의 균형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
고, 더 많은 용병을 고용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그 모든 전쟁에서 패했고, 남은 것이라곤 치명적인 인플레
이션과 기아에 시달리는 국민, 빈익빈 부익부와 농민 계급의 몰락뿐이었다.
다음엔 미주 본토로 돌아가 청교도와 인디언 이야기 들려드리지요.
주안에서 샬롬.

✎ 이은모

 

제국의 멸망
-전쟁이야기 (20)-



6. 코르테스(Hernon Cort́es)와 피사로(Francisco Pizarro)

스페인의 정복자들인 이 사람들을 「악마의 사도」라 부른다고 앞서 얼핏 언질을
드렸습니다. 「Disciples of Satan」이라고 역번역해봅니다만, 그들에게 이런 흉악
한 명칭이 주어지게 된 까닭은 이들이 인간 구원과 평화의 종교인 기독교를 빙자하
고 또 강요하면서, 오히려 약탈과 파괴와 인간 살상의 잔혹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
렀기 때문이지요. 그들을 「백색의 흡혈귀(吸血鬼)」라고까지 부르기도 하는데 콜럼
버스도 이 명칭의 범주를 물론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글쎄 흥미롭다고나 할까요. 미국 역사가들의 저서에선, 물론 제가 가지고 있는
적은 자료라는 한계가 있지만, 찾아볼 수 없는 이런 표현(명칭)들이 유독 한국인이
지은 책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대세계사(大世界史)」라는 제목의 역사책이지요. 15권짜리 전집으로 「도서출
판 마당」이 1982년에 출판했네요. 웬일인지 저자의 이름이 숨겨져 있고 다만 연
세대 홍의설 교수와 서울대 노재봉 그리고 김승근 교수 등이 감수(監修)했다고만
되어있습니다.
내 친구 김건유 장로의 이민 보따리 속에 점잖이 들어앉아 머나먼 태평양을 건너
온 책, 그 후 이사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치이다 결국 8권만 남았으니. "늙어 할
일 없을 때 읽으려고" 가지고 왔다는 이 귀한 것들을 제 「전쟁 이야기」꾸밈에 보
탬이 될 것이라며 건네주었지요.

「근대의 서곡」편인 제 8권, 그 장(章) 하나가 「파도를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악마의 사도」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리상의 발견」에 의한 유럽의 팽창과 세계 정복은 곧 아시아나 신대륙
을 지옥의 공포 속에 휘몰아 넣었다. 특히 초기의 정복자들이 하필이면 스페
인과 포르투갈인들이었다는 것은 아시아나 신대륙을 더 처참하게 했다. 문제
의 정복자들은 말 그대로 「악마의 사도」였다. 파괴와 약탈, 강제 노동과
채찍과 과로와 영양실조만을 피정복자들에게 안겨주었다.
원래 스페인인이나 포루투갈인들에게는 그들의 신앙과 관습을 강제하는 폐
풍이 있었는데 이 폐풍을 강요당하는 쪽에서는 상상 이상으로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뒤의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 같은 나라들도 예외없이 약탈과 착취를 자행했으나 공공연히 폭력을 구사했다는 점에서는 스페인과 포루투갈이 단연 압
도적이었다.

그런데도 유럽의 학자들은 대개 이때의 팽창과 지배를 장밋빛으로 채색하
고 있다. 우리들 동양인은 그럴 수가 없다.
......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황금뿐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
을 가리지 않았다. 불행히도 아스텍과 잉카의 두 문명권은 바로 이런 무리들
한테 정복된다. 그들을 당시에는 콘키스타도르(Conquistador, 정복자)라고
스스로 불렀는데 신대륙의 대표적인 이 두 문명권을 정복한 유명한 콘키스타
도르는 코르테스와 피사로다.

콜럼버스의 제 2차 항해(1493-1494) 때부터 식민지 건설을 계획해 군대를 보내기
시작한 스페인은 히스파니올라(Hispaniola)라고 이름지어 부르던 현재의 헤이티와 도
미니카 공화국이 있는 섬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했고, 뒤이어 식민자들이 몰려오게
되는데 이들에게는 토지와 노예가 배당되어 생활은 풍족했으나 그 정도로 만족할 사
람들이 아니었지요. 그들은 황금과 일확천금에 눈이 뒤집힌 자들이었거든요.
캐리비언 섬들, 즉 서인도 제도에선 더 이상 황금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
린 그들은 멕시코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1517년, 멕시코 남부의 유카탄
(Yucatan) 반도를 탐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곳에 하나의 문명이 있고
서인도제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또 그들은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
다는 보고를 큐바 총독에게 하게 됩니다.

2년 후 새로운 탐험대가 조직되지요. 이때 등장하는 자가 바로 코르테스입니다.
총독이 그를 탐험대의 지휘자로 임명한 것입니다.
코르테스, 1485년생이니 그가 이 직책을 맡은 것은 34세 때의 일이네요. 스페인
의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19세에 항해열에 들떠 헤이티로 건너갔으며 큐바
정복때 공을 세워 큐바 총독의 눈에 들게 된 것입니다. 그를 따라갔던 디아스
(Bernal Dias Del Castillo)가 쓴 연대기 「멕시코 정복사」에 따르면 코르테스는
시를 쓰는 재능이 있었고 기도와 미사에 굉장히 열심이었으며 여자를 몹시 좋아해
서 여러 번의 목숨을 건 결투까지 했다네요.
이런 자가 시를 썼다니, 허기야 20세기의 인간백정 스탈린도 시를 썼다는 이야기
가 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코르테스는 상인들과 지주들의 돈과 자신의 사재를 털어 탐험대를 조직합니다.
당시의 예대로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내려준 축복을 듬뿍 받은 것은 물론이지요. 배
11척, 부하 508명, 선원 100명, 말 16필, 대포 10문에 철포 17문.
나중에 코르테스의 지나친 야심을 눈치챈 총독은 코르테스의 임명을 후회하여 그
를 불러들이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어요. 탐험대는 벌써 멕시코 만(The Gulf
of Mexico)을 서서히 항해하고 있었거든요. 1519년의 일이었습니다.
콜럼버스의 뒤를 이어 신대륙으로 건너간 유럽인들은 그곳에 두 개의 큰 제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멕시코에 있던 아스텍(Aztecs)의 왕국 아스테카(Azteca)
와 남미 페루에 있던 잉카제국(Inca)입니다.

구대륙과 아무런 접촉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 사람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
화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은 옛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비해 시대적으로 뒤늦은
또 하나의 고대문화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지요.
아스테카 제국은 부계 씨족의 연합체인 나라로 국왕 밑에 씨족장 회의가 있었고
이들 지배 계급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답니다. 태양과 다른 자연을 숭배하는 종교
가 있어서 사제가 큰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지요. 14세기 경에 전성기를 이룬 이 문
명은 이보다 앞서 있던 마야문명(Mayas)이니 돌텍문명(Toltecs) 때문에 「후기 마
야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잉카 제국은 아스텍과 유사한 체제나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중앙 집권이 진전
되어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국왕이 전제정치를 펴고 있었지요. 11세기 경
에 세워졌고 15세기엔 에쿠아도르에서 칠리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이 되었답니다.
이 두 문명은 유사한 점도 많았으나 차이점도 가지고 있었지요. 아스텍은 천문학
이 발달되어 일년을 365일로 나눌 수 있었고 유럽보다 더 정확한 달력을 만들 수
있었으며 심지어 '0의 개념'까지 알아냈답니다. 상형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고요.
잉카 제국은 문자가 없었으나 키푸(Quipu, 결승문자)로 인구나 산업의 실태를 기
록하고 있지요. 지금도 이것을 쓰는 곳이 있다네요.

농업, 도로공사, 건축, 직물 등은 잉카 쪽이 우수한 편이나 도자기, 조각, 회화와
금은과 주석으로 만든 세공품은 양쪽 모두 발달되어 있었답니다.
「황금의 나라」를 찾아서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내려가 잉카 제국에 이르른 스페
인인들은 수도 쿠스코(Cuzco)의 장려함에 경탄을 금치 못하지요. 태양신 신전을 비
롯해 수많은 석조 건물들로 만들어진 이 도시는 유럽의 어느 도시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답니다.

태양신 신전의 본당엔 보석으로 장식된 두꺼운 황금판에 인간 모습이 새겨진 신상이세워져 있었고, 신전밖엔 순은으로 된 월신상(月神像)이 서 있었지요. 제구나 제물
을 담아두는 항아리 같은 것들은 모두 금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스페인인들은
이 제국을 정복한 후 이것들을 닥치는대로 약탈해갑니다. 이 나라에선 특히 은(銀)
이 아주 흔했던 모양, 스페인들이 뺏어간 은이 얼마나 많았는지 향후 300년을 쓰고
도 남았을 정도였다니.
아스테카 제국. 코르테스 일행이 이 나라에 도착했을 당시의 일을 디아스는 이렇
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군인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정말 옛 전설에 나오는 환상의 세계 같구나. 이
게 꿈인가 생시인가?" 너무나 황홀해서 이 도시를 표현할 방도를 찾지 못하겠다.
수도인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은 인구를 30만이나 가지고 있는 도시였고 시
장에선 매일 같이 온갖 종류의 상품들이 거래되고 있었으며 노예도 매매되고 있었
지요. 그런데, 그들의 신전을 돌아본 스페인인들은 그 제단에 사람의 피가 묻어있
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아스테카 제국은 주변 부족들을 공격해 약탈을 일삼았고, 생포한 포로들의 심장
을 꺼내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때 유럽인들은 신대륙의 인디언들을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s)」이라
고 부른 적이 있었지요. 그들은 자연과 조화된 지극히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인데 실제로는 이 사람들도 역사상 다른 여느 나라와 마찬가
지로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코르테스 일행은 드디어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북쪽에 있는 베라크루스(Vera Cruz)에
상륙하게 됩니다. 정복자들의 첫 발자국 소리가 하필이면 「성금요일」에 들려오다니...
코르테스는 억수로 운좋은 사나이, 그곳에서 마야어를 할 줄 아는 스페인인을 만
나게 되지요. 아길라(Aguilar)라는 자로 수년 전 표류해 이곳에 와서 마야족과 어울
려 살고 있던 사람입니다. 코르테스는 곧 인디언과 전투를 하게 되고 여자 인디언
몇 명을 붙잡게 됩니다. 그들 중에 뒷날 마리나(Marina)라고 불리게 되는 공주가
있었는데 그녀는 마야어와 아스텍어에 능통했지요. 그녀가 아스텍어를 마야어로 바
꾸면 아길라는 마야어를 스페인어로 통역을 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언어의 장벽이
제거된 것입니다. 이들로부터 아스텍에 대한 정보까지 얻게 되었고요. 이 마리나는
후에 코르테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수도를 향해 계속 나아가는 코르테스 앞에 아스테카 국왕이 보낸 100명의 사자
들이 금은으로 만든 화려한 세공품들을 잔뜩 가지고 나타납니다. 그들은 이것을코르테스에게 주면서 조용히 물러가 달라는 왕의 뜻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이 보물이
오히려 코르테스의 황금에 대한 욕망의 불길에 부채질만 한 꼴이 되고 말았네요.
툭하면 쳐들어와 약탈하고 자기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거나 인신 제물로 삼는 아
스테카, 그들을 향한 부근 원주민 부족들의 원한이 하늘을 찌를 듯할 때 턱 나타난
코르테스. 이런 정황을 알고 있던 그는 원주민들을 굴복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회유
도 하면서 몇몇 부족들과 동맹관계를 맺게 되지요. 하여 수천의 원주민 전사들을
동원하게 되었으니.

아스텍인들 사이엔 하나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지요.
아주 먼 옛날에 이 나라를 다스리던 신인(神人)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케찰
코아틀(Quetzalcoatl). 매우 친절했고 나라를 잘 통치했으며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인가 적들에 의해 어디로인가 추방당하고 말았다. 배를 타
고 떠나면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갈대의 해」, 즉 1519년에 나는 반드
시 동방에서 돌아와 원수들을 쳐부수고 다시 이 나라를 다스리겠노라."
철갑옷을 입고 수염이 무성한 백인 남자가 이상한 짐승(말)을 타고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국왕 몬테수마 이세(MontezumaⅡ)는 깜짝 놀라고 말지요. 그는 화가
를 보내어 이 이방인들을 그려오게 합니다. 꾀쟁이 코르테스는 공포심을 한껏 주기
위해 반드시 말 탄 모습을 그리게 했는데 머리와 어깨는 사람이나 몸뚱이는 네 발
가진 괴물처럼 보이기 위해서였지요.
같은 해 10월, 진군하는 도중 비무장한 원주민 3,000명을 죽인 엄청난 학살 사건
이 있었습니다.

전에 인용했던 진교수의 「미국 민중사」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곧이어 코스테스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며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다. 그는
속임수를 쓰고, 아스텍인들을 서로 반목하게 만들며, 급작스럽고 소름끼치는
행동으로 그들의 의지를 마비시킨다는 전략 아래 의도적인 살육을 자행했다.
촐클라(Cholcla)에서는 그 부족 지도자들을 광장으로 초대했다. 수천명의 비
무장 신하를 대동하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 광장 주위를 빙 둘러 대포를 배
치하고 석궁으로 무장한 채 말을 타고 있던 코르테스의 소규모 스페인 군대
는 이들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남김없이 살해했다. 그리고는 도시를 약탈하
고 다른 도시로 옮겨갔다.
11월, 마침내 코르테스 일행은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에 입성하게 됩니다.

주안에서 샬롬
 
✎ 이은모

 

콜럼버스여, 안녕 -전쟁이야기(19)-


5. 「콜럼버스 날(Columbus Day)에 얽힌 사연

이 날은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 「서인도 제도」의 바하마에 첫 발을 디
딘 일을 기리기 위해 정해진 국경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계실 터.
그의 항해 300 주년인 1792년 10월 12일, 최초의 축하 모임이 만찬 형식으로
있게 되지요.초기엔 주로 개신교 사람들이「콜럼버스 날」제정을 위해 노력했으
나 19세기에 들어와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이 몰려오면서 캐톨릭과 이태리계 사람
들에게 그 주도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이들이 주최한 첫 기념행사가 1866년 10월
12일 뉴욕에서 있었고, 그 이후 이 행사가 여러 도시로 퍼져나갑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가 되면서 가두행진 형식(Parade)의 기념행사가 시작되
지요. 콜럼버스와 이사벨라 여왕의 모방자(impersonator)들과 첫 항해 때 타고 갔
던 Santa Maria호, 때로는 Nina호와 Pinta호의 모형이 등장합니다.

400주년인 1892년, 캐톨릭의 압력을 받은 해리슨 대통령은 「콜럼버스 날」을
선포하지만 행사는 그 해에 그쳤고, 1937년 로즈벨트 대통령(FDR)도 이 날을 공휴
일로 정하나 정식으로 연방 국경일로 확정지어진 것은 1972년이 되어서입니다. 우
리 교회가 주님의 뜻에 따라 창립된 해보다 겨우 일 년 앞서 있었던 일이네요. 그
해에 드디어 미국회가 인준했고,그러면서 날짜를10월 12일에서 10월의 둘째 월
요일로 바꾸어 버립니다.

축하 행사의 규모가 서서히 커가지요. 1972년, 뉴욕 5번가에서 있었던 퍼레이드
엔 10만의 인원이 참가했으며 백 만이 넘는 구경꾼들이 모였답니다.
그러나 뜨겁게 달아오르던 이 축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
다.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인디언 운동가들의 목소리가 드높아지기 시작한 것입
니다.콜럼버스는 축하받을 자가 아니라 오히려 정죄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즉 그
는 정복자였고 압제자였으며 당시 토착민의 90%를 죽인 전염병을 옮겨왔을 뿐 아
니라 전 원주민 노예화의 원흉(villain)이라는 주장이었어요. 또 이런 질문도 던지고
있었습니다.자기네 조상이 그토록 오래 살아온 이 땅을 그가'발견했다(discover)'
고들 하는데 이 소리가 도대체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신대륙에 먼저 왔던 유럽인들이 있었지요. 노르스 인(Norse People) 또는
바이킹(Vikings)이라 불리우는 스캔디나비아계 사람들로 콜럼버스 보다 약 500년
앞서 뉴파운드랜드와 노바스코시아에 상륙했고 그곳에 정착해 살기까지 했다는 엄
연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이「반 콜럼버스 운동」에 많은 양식있는 미국인들(non-Indians)이 동조하게 됩니다.그 중엔 다수의 교육가들도 들어 있었지요.그들은 지금까지의 그릇된 역사
교육을 수정해야 된다는 견해를 발표합니다.

199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500주년 기념 행사가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데모대가 들이닥친 것이지요. 여기 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같은 사태가 벌어지
는데, 데모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덴버 시는 행사를 아예 취소해 버리기까
지 합니다.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시 의회는 투표를 통해 10월 12일을 「토착민의 날」
(Indigenous People's Day)로 선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즈음 미국 주류 사회의
여러 민간 단체들도 인디언의 주장에 동정의 뜻을 표하게 됩니다.

「콜럼버스 날」제정을 강력히 밀어왔을 뿐 아니라 콜럼버스는 성자가 되고도
남는다는 희극적 잠꼬대까지 하던 캐톨릭도 철이 들었는가, 일련의 변화된 조짐들
을 보이기 시작하지요. 씨애틀의 대주교는 인디언 대표들을 위한 밥상 모임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의 원통하고 슬픈 이야기를 경청했으며, 캐톨릭 「전국주교회의」는
심지어 콜럼버스가 저지른 죄악을 정죄하는 성명서까지 발표했으니 말입니다.
미국 중고등학교에서도 인디언 연사들을 초청해 학생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알도
록 했고요.

한편,라틴 아메리카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요.전통적으로 이 지역에
선 「콜럼버스 날」을 무슨 큰 명절처럼 지켜왔다네요. 여러 곳에 「콜럼버스 동
상」까지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들이 곤욕을 치르게 되지요. 예외없이 여기서도 항
의 데모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의 데모는 격렬했어요. 1992년, 알라스카로부터
남미 칠리까지의 인디언 수천명이 멕시코 시에 모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콜
럼버스 동상」을 가차없이 파괴해 버리지요. 마치 박다드 거리에 세워져 있던 사담
후세인의 동상꼴이 되고 말았으니.

1997년, 중미의 온듀라스 사람들도 「콜럼버스 동상」을 쓰러뜨리는데 이들은 그
위에 새빨간 페인트 칠을 해버립니다. 그것이 콜럼버스가 흘리게 한 자기 조상들의
피라면서.

1998년, 뉴욕 주의 수도인 어바니(Albony)에서 있었던 행사는 아무 탈없이 진행
되었는데 그것은 이 일을 주도한 이태리계 사람들이 사전에 이런 변명 비슷한 소리
를 발표했기 때문이라네요. “우리는 다만 이태리인의 가치와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이 행사를 준비할 뿐이요 콜럼버스를 기리려는 것이 아니다.”10월 달력의 둘째 월요일엔 아직도 「콜럼버스 날」이라고 적혀 있지요. 그러나
근래에 이날 무슨 그럴싸한 축하행사가 있었다는 뉴스 들어보셨나요? 그저 이름 뿐
인 국경일이 되고 말았네요.

확실히 변했습니다. 새벽안개 걷히면 드러나는 광활한 대지처럼 많은 시간이 지
난 후 반드시 그 모습을 나타내고야 마는 진실이라는 것,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을 저미고 드는 아릿함과 슬픔 또한 어쩔 수 없네요. 자그마치
500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뒤였으니...

며칠 전 저녁나절 동편 하늘에 뜬 「겹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소나기가 한 차
례 지나간 후였지요.아직은 인류에게 희망은 있습니다.영롱한 저 색깔 속에서 들
려오는 잔잔한 창조주의 음성을 들어보세요.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
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
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창세기 9:14-16)

가없는 섭리의 나래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 활동의 기록인 역사라는 것, 그
것은 옳고 바르게 쓰여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건들이 생략될 때도 있었고,
희석될 때도 있었으며, 뻥튀기에서 튀어나오는 강냉이 알처럼 부풀려질 때도 있었
고(과장), 심지어 왜곡까지 될 때도 있었으니...

역사를 기록하는 자도 사람인 이상 어느 정도 그의 입김이 서리게 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외부세력, 특히 정치단체가 큰 손을 내밀어 역사가들의 멱살을 쥐
고 흔들어댈 때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어요.

이 나라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콜럼버스의 비행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다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태리계 사람들과 캐톨릭이 같은 동족이요
같은 천주교 신자라는 어설픈 이유를 등에 업고 그들의 막강한 힘을 「콜럼버스 영
웅 만들기」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냐하면 동질의 잔인한 정
복자들인 코르테스나 피사로 이야기는 교과서마다 비교적 자세하게 실려 있기 때문
이지요.그들은 스페인 사람들이거든요.「악마의 사도」라 불리우는 이들의 짓거
리는 다음에 들려 드리겠고, 아무튼 이 교과서의 경우는 역사의 생략과 과장의 한
좋은 예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듯 싶습니다.역사왜곡(歷史歪曲)이란 말 나왔는데 이런 짓 식은 죽 먹듯 하는 저 물건너 사는 도요또미의 후예들 한번 건드리지 않고 넘어갈 재간이 없네 그려.

또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이 그들 때문에 벌집 쑤셔놓은 형국이 되고 말았으니. 한
국일보 지난 달 19일 자엔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인 도시환씨의 글이 실려 있었지요.
한일 신시대 개척을 향한 양국 정상의 결의가 위기에 직면했다. 14일 일본 정
부가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의 영유권 주장을 명기하는 방안을 확
정하여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통해 교육 받은 일본의 차세대와 이를 용인할 수
없는 한국 차세대에게 양국간 선린우호의 미래가 아닌 영토분쟁의 맹아(萌芽)
를 배태하는 것이자 신시대 개척의 토대를 허무는 일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우리의 영토임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은 독도침탈 100주년이 되던 2005년 ‘죽도의 날’을 제정한 이래, 독도 관련 역
사교과서의 왜곡 등 독도 영유권에 대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다.

지난 7월 27일자「쉴만한 물가」에 난 본 교회 조현수 선생의 ‘외롭지 않은 섬,
독도’란 글에 개스하이드레이트(gashydrate)가 소개되어 있었지요. 향후 10년 내에
세계 에너지 시장이 이 물질을 중심으로 개편될 것이라는 이 복덩어리가 글쎄 독도
주변의 울릉분지에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다니, 요 뻔뻔스럽기가 양푼 밑 같은 자들
이 기쓰며 물고 늘어질 밖에.

지난5월 타계한 소설가 박경리씨의‘일본산고(日本散考)’란 제목의 유고산문이 발견
되었다는 기사가 얼마전 신문에 실려 있었습니다.그녀는 대하소설‘토지(土地)’의 필자.
과거 일본의 역사학, 특히 국사학의 학자들은 황국사관을 공고히 하기 위하
여 역사에 무수히 많은 땜질을 했고 또 많이 쏠아내고 했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학자)개인의 사고를 그토록 붙들어 맨 일본의 국가권력은 놀랍다.
역사를 땜질했다는 것과 쏠아냈다는 표현이 재미있네요.

일본인들은 역사 뿐 아니라 한국 속담까지도 왜곡했으니. “사촌이 땅을 사면 배
가 아프다”란 속담 아시지요?사람들은 보통 “사촌이 땅을 살 경우 그것이 부러워
서 배가 아프다”라고 해석하는데 이 해석은 실제로 일제 때 일본인들이 일부러 바
꿔버린 것이랍니다. 원래의 뜻은“사촌이 땅을 샀는데 보태줄 것이 없으니 배라도아파 거름이라도 줘야할텐데...”, 그러니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라도 아파야 할텐
데...”라는 것이지요. 이웃 사랑의 미풍양속까지 해치려는 일본인들의 치사함이라니.
아메리카(America)란 이름이 지어진 연유.

사실 옛날에는 캐나다와 미국이 한국의 속국이었다. 어느날 캐나다 사람이
세종대왕을 찾아와서“저희나라 이름을 뭘로 할까요?” 하고 물었다. 대왕께
서는 잠시 고민하시더니 “가나다로 하여라.” 그래서 가나다, 가나다 하다가
캐나다식 발음으로 ‘캐나다’가 되었다.

그랬더니 같은 속국인 미국이 몹시 부러워했다. 그래서 세종대왕에게 찾아
갔다. “저희도 이름 지어주세요~~~ 네?” 세종대왕은 귀찮은지 손을 휘휘
저으며 “아무러케나 지어버려”라고 했다. 그래서 “아메리카!!”가 됐고, 오늘
날의 미국이 되었다.

다음날 어떤 섬나라 사람이 찾아왔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무니다. 조선
노 우리의 속국이 되는게 마땅하무니다. 우리나라 이름 없으니 조선이노 우
리나라 이름 지어주는 게 마땅하무니다.” 그러니까 세종대왕께서 버럭 화를
내시며“저 사람 닮은 원숭이 새끼를 줘 패보내라!”고 하셨다. 그 사람 닮은
원숭이 새끼는 실컷 볼기짝을 맞았다.배를 타고 돌아가면서 생각했다.“줘
패보내라... 줘 패보내라... 줘패? 재팬!!”
그래서 미국과 캐나다와 일본의 이름이 정해졌다는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
해져 내려오고 있다는데...

농담이지요, 물론.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i)란 이가 있었지요. 콜럼
버스와 같은 이태리인으로 부자 사업가였는데 우주구조론(cosmography)에 깊은 관
심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가 1497년에서 1503년 사이에 네 번에 걸쳐 신대륙을
여행하게 되고,그 경험담을 편지체로 썼는데 굉장한 인기를 얻었답니다.브라질을
보고난 후 내린 그의 결론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놓여있
는 전혀 ‘새로운 땅(New World)'이라는 것이었지요.

1507년, 프랑스의 지도제작자들이 새 지도를 만들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지구의 네 번째 부분,유럽,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가 아닌,
을 발견했으니 ‘아메리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그 이후에 나오는 지도엔 모두 ‘아메리카’라고 적혀 있었고 사람들도 이렇게 부
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휴,드디어 콜럼버스 이야기의 막을 내릴 수 있게 되었네요.주안에서 샬롬.

✎이은모

 

콜럼버스와 인디언 전쟁 이야기(17)


‘복음과 황금(for Gospel and for Gold)'이란 이름의 양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독 수리와 같았다고나 할까, 콜럼버스. 그가 아뿔사 복음(선교) 쪽 날개를 잃더니 드디 어 지상으로 추락해 황금 쪽 날개만 퍼덕이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하는데...

원래 콜럼버스에게는 스페인 왕실과 맺은 계약이 있었지요. 얻게 될 황금 중 열 에 하나는 그의 몫이 되고, 발견할 땅의 총독이 되며, 「대양의 제독(Admiral of the Ocean Sea)」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받는다는 것이었지요. 저번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네 차례 왕래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492년의 1차 항해 로부터 1504년의 마지막 항해까지 12년에 걸쳐 있었던 일인데, 5개월 만에 귀국한 첫 항해를 빼고는 매 2년마다 그곳에 갔고 2년씩 머물다가 돌아오곤 했네요. 3차 항해까지 그는 캐리비안 해에 있는 모든 섬들을 발견하지요. 바하마(Bahama), 큐바(Cuba), 헤이 티(Haiti), 도미니카(Dominica), 자메이카(Jamaica) 그리고 푸엘토 리코(Puerto Rico) 등 등. 4차 항해 때는 중미의 온듀라스(Honduras)와 파나마(Panama) 그리고 남미의 베네 주엘라(Venezuela)까지 발견하지만 미주 본토엔 그의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고 맙니다.

1차 항해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지요. 원주민으로부터 금부치를 수탈한 일 과 그들 몇 명을 붙잡아 새 땅과 황금 찾는데 길잡이로 써먹은 것 정도였으니까요. 1493년, 1차 항해에서 돌아오기 전 콜럼버스는 스페인에 있는 그의 협조자들에 게 편지체의 「경험수기」를 보냅니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팔아먹은 이야기보다 더 꽝 놓는 이 사설이 출판까지 되었는데 어찌나 인기가 충만했던지 여덟 번을 더 찍어내야만 했고, 그것이 전 유럽에 삐라처럼 퍼져나갔다네요. 하여 유럽인들은 그 의 업적에 대해 ‘천지 창조 이후 예수 강림과 십자가 사건 이외에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란 전대미문의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1494년에 떠나는 2차 항해는 정말 굉장뻑적지근 한 것이었지요. 선박이 17척이 나 되었고 1500명의 부하들에다 충분한 식량과 말이며 가축까지 싣고 갔으니까요. 1500명의 남자들 중엔 군인과 일확천금을 노리는 룸펜까지 섞여 있었답니다. 로마 교황청도 교세 확장의 이 호기를 놓칠세라 일군의 신부들을 따라 붙이는데 그들에 게 주어진 임무는 항해가 거룩하게 되도록 축복하는 일과 앞으로 붙잡게 될 노예들 을 개종시키는 것이었답니다.

거룩하신 성삼위의 이름으로 비옵나니 우리로 그곳에 가서 모든 인디언들을 잡아 노예로 팔 수 있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2차 항해 도중 그가 드린 기도가 이러했으니... 그의 맘 속에 있던 ‘복음과 황 금’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엔 ‘노예와 황금(for Slaves and for Gold)'이란 우상 이 아세라 신전의 목상처럼 우뚝 들어서고 말았네요. 사실 그에겐 스페인 왕실 뿐 아니라 그의 항해에 돈을 댄 많은 투자가들에게 진 빚이 있었지요. 아무리 목을 빼고 찾아봐도 그곳엔 기대했던 만큼의 황금이 없다는 것을 벌써 눈치채고 있던 콜럼버스는 인간 황금 즉 노예 장사 쪽으로 눈길을 돌리 게 된 것입니다. 완전 부장한 200명의 부하들과 함께 본격적인 노예사냥에 나서는 콜럼버스. 캐리 비안 해에 있는 섬들을 여기 저기 뒤져 원주민을 잡아들이기 시작합니다.

1495년, ‘최대의 노예 급습(A great slave raid)'이라 불리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라왁 인디언을 1500명이나 붙잡은 것이지요. 여자와 아이들까지 닥치는 대로 붙잡았다 네요. 이들 중 값나갈만한 자들만 500명을 가려내 스페인으로 보내게 되는데, 항해 도중 글쎄 200명이나 죽었답니다. 추위란 것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니 벌거벗은 몸으로 어떻게 뱃길의 추위를 견뎌낼 수 있었겠어요. 살아남은 자들은 물론 노예로 팔려갔고요. 조찬선 목사님의 「기독교 죄악사」엔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1494년 콜럼버스는 500명의 원주민들을 끌고 가서 노예로 팔려고 했는데 이사벨 여왕의 명령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 콜럼버스 일행은 닥치는 대로 잡아서 노예로 매매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노예 수입까 지 하였다. 1498년에는 또 600명의 원주민을 강제로 납치하여 스페인으로 보냈다. 날 벼락을 만난 선량한 사람들은 콜럼버스의 군대를 피하여 마을을 떠나 울면서 원시림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원주민의 마을들은 텅텅 비어갔고, 또 웬일인지 붙잡힌 노예들도 시름시름 앓다 가 많이 죽어버리게 되니 노예장사가 점점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하여 다시 황금 쪽으로 눈을 돌리는 콜럼버스. 헤이티의 어느 지방에 거대한 금광이 있다고 스스로 굳게 믿은 그는 이런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14세 이상의 남자들은 일정 양 의 황금을 3개월 마다 바쳐야 된다는 것이었지요. 황금을 가지고 온 사람의 목엔 구리 목걸이를 걸어주었고, 만약 이 목걸이가 없는 자가 발견되면 그들의 손목을 잘라 피를 흘려 죽게 하는 잔학 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답니다. 만약 도망자가 있 게 되면 사냥개를 앞세운 수색대가 쫒아가 살해해 버렸고요.

다시 「기독교 죄악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수다한 원주민을 잡아 노예로 혹사한 콜럼버스는 다음과 같은 구실로 자기 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원주민들은 잔인하고 욕심이 많은 타락한 영혼이기 에 이들을 천주교 신앙으로 무장시켜야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 방법으 로 노예들을 합숙시켜 광산으로 보냈고, 부녀자들은 땅을 개척하여 농사를 짓 도록 하였다. 이는 원주민들에게 가혹한 중노동이었다. 부부가 함께 살면 아기의 출산으로 노동력이 저하될 것이므로 서로 만나지 도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동물처럼 취급되는데 식사는 잡초였다. 영양부족으 로 산모의 젖이 나오지 않아 태어난 아이들도 굶어죽을 수 밖에 없었다. .... 노예들은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매일 죽어갔다. 이와 같이 콜럼버스 일행은 복 음전파보다는 원주민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살인강도 집단으로 변했다.

「기독교 죄악사」는 콜럼버스 일행의 만행을 증명하는 몇 가지 실화들을 싣고 있지만 그중 하라과(Jaragua) 왕국이 당한 이야기만 들려드리지요.

당시 도미니카 에는 다섯 개의 왕국이 있었답니다. 도미니카 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던 이 왕국은 비옥한 땅과 가장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문화와 예절은 그 나라 사람들의 자랑이었다. 여왕은 우아한 미인으로서 인자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다. 콜럼버스 일행 (천주교도들)이 처음 왔을 때 낯선 손님에게 베푼 호의와 콜럼버스 일행을 수 차 죽을 위기에서 구해준 이야기는 수다하다. 그런데 여기서도 콜럼버스 일행은 그들의 고마움을 배은망덕으로 갚았다. 60 명의 기병과 3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일시에 그들을 불로 태워 죽여버렸다. 계략은 이러했다. 먼저 그 나라의 유력자들 300여 명을 은혜를 갚는다는 구실 로 만찬에 초대하여 몇 채의 가옥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일시에 불을 놓았다. 불을 피해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사전에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 으로 찔러 죽였다. 도망가다 넘어진 어린애는 칼로 다리를 잘라 버렸다. 그 때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어떤 군인이 도망나온 어린애를 살리려고 말에 태우려 하였으나 다른 군인이 그 애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여왕은 경의를 표 시한다며 목매달아 죽였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카누를 타고 다른 무인도로 도피해야 했 다. 그러나 콜럼버스 일행의 지휘관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잡으라고 명령하였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악마가 바로 그들이었다.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마치 짓밟힌 지렁이가 꿈틀거리듯 최후의 발 악적 싸움을 시도하는 아라왁 젊은이들. 그러나 그것은 싸움이라 불리울 수도 없는 싸움이었어요. 갑옷 입고 장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말까지 탄 자들과 겨우 활과 대 나무 창을 든 자들의 대결이었으니...

포로된 자들은 모두 교수형이나 화형을 당했고. 소망이 사라진 이 불쌍한 인간들은 집단 자살이라는 또 다른 방법의 저항을 하게 되지요. 카사바 독(cassava poison)을 먹고 그렇게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스페인인 에게 죽느니 차라리 자기 손에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부모들은 어린 자식을 스 스로 죽이는 일까지 있었고요. 2년 안에 헤이티의 인구 25만이 그 절반으로 줄었고, 1515년엔 5만으로 그리고 1550년엔 겨우 500명만 살아남게 되었다네요. 1650년엔 이런 끔찍스런 보고까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아라왁 계의 원주민은 그 섬에서 완전히 사라져 자취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지요.


인류 역사 상 유례가 없는 이 비극은 물론 콜럼버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범한 만 행에 기인하지만, 원주민들을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간 또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염병이었지요. 천연두와 홍역. 면역성(Immunity)이 전혀 없는 원주민들은 백인들 이 가져다 준 이 가공할 선물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어요. 2년 내에 인구의 1/3이 쓰러진 곳도 있다는데, 「Inventing America」란 책엔 이런 구절이 있네요. 서인도제도의 어느 부족은 이 수입된 질병으로 스페인들의 도착 이후 1세기 안에 몰살당하고 말았다.(wiped out) 수년 전 남미 페루에서 오신 선교사님의 「선교보고」자리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 다. 밀림 속에 숨어 사는 원주민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계신 이분의 ‘원주민과 전염병’이란 제목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그들과 접촉할 때는 전염병을 각별히 조심 해야 된다고 하셨지요. 까딱하면 선교는 커녕 그들을 모두 떼죽음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페루에 콜레라가 창퀄했던 일이 있었지요.


내 사랑하는 버팔로 믿음 의 형제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소냐, 돈을 모아 다량의 항생제를 사서 바로 이 선 교사님께 보낸 일도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발을 디딘 후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 료, 어떤 점에선 유일하기조차 한 라스 카사스(Las Casas)의 「서인도제도의 역사 (History of the Indies)」란 책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미국 민중사」의 저자 진 교 수(Prof. Zinn)는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량을 인용하고 있네요. 라스 카사스, 그는 본래 카톨릭 신부였답니다. 큐바 침공 때 종군했고, 한 때는 인 디언 노예들을 부리는 큰 농장의 주인이기도 했다는데 개과천선 했는가 그는 스페인 의 잔혹성(Spanish cruelty)에 대한 가장 격렬한 비판자가 되지요. 간추려 봅니다.

원주민에겐 종교가 없어 보였다. 필요에 따라 서로 주고받을 뿐 상업이라는 것이 없었고 금이나 귀금속의 중요성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평화롭고 온유 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왕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일로 너무나 초조해진 콜럼버스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다. 이 침입자들은 점차 과대망상적 안이에 빠져 길을 갈 때도 큰 거위 날개로 부채질을 받으며 인디언 등에 업혀서 갔다. 심지어 칼의 날 선 것을 시험한다 며 인디언을 서슴없이 베어보는 짓까지 했다. 스스로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자 둘이 길에서 앵무새를 가진 인디언 소년을 만났다. 그들은 새를 뺏고 그 소년 의 목을 잘라버렸다. 모든 것은 잔혹함의 극치였다. 이렇듯 원주민의 완전 장악은 완전 잔혹함으 로 몰고갔던 것이다.(Total control led to total cruelty). 산들은 밑에서부터 산정까지 몇 번이고 파헤쳐졌다. 파여진 흙에서 금을 찾 아내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해야 했다. 대개 6-8개월 일해야 주어진 황금의 양 을 채울 수 있었다. 이 강제노동으로 1/3의 남자들이 죽어나갔다. 한편 아내 들은 농장에서 중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부부가 만나는 것은 겨우 8-10개 월에 한 번 정도였으니 출생율의 저하는 물론이고, 아이가 태어난다 해도 엄 마의 젖 부족으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내가 큐바에 있을 동안 3개월 안에 7000명의 유아가 죽었다. 어떤 엄마는 절망에 빠져 자기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내 눈은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 이 참혹한 짓들을 보았다. 나는 지금 이 글 을 쓰면서 떨고 있다. My eyes have seen these acts so foreign to human nature, and now I tremble as I wirte.


원주민 어느 추장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남을 사랑하고 도우라고 가르치시는데 당신들의 하나님은 남을 죽 이고 빼앗으라고 가르치십니까? 「슬픈 인디언 이야기」보따리엔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네요.

주안에서 샬롬.

이은모

 

신대륙과 인디언 전쟁이야기(16)


4. 선교와 황금과 인디언


13세기 초반 몽골 초원의 풍운아 칭기즈칸과 그의 기마군단의 말발굽 소리가 아 시아와 동유럽의 하늘을 진동시켰던 일은 다 알고 계실 터이고, 이 무지막지한 정 복전쟁 후 동서교역의 통로인 비단길(Silk Road)이 오히려 안전하게 되어 황금을 머리에 이고 가도 무사할 정도가 되었다네요. 이로 인해 동서의 왕래와 교역이 잦 아지면서 유럽인들의 마음에 동양의 부와 신비에 대한 동경의 싹이 자라기 시작하 는데, 이 무렵 그들을 한껏 설레게 하는 한권의 책이 나타나지요.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The Book of Ser Marco Polo). 베니스의 17세난 소년 마르코 폴로가 부친과 숙부를 따라 원(元)나라까지 가서 쿠빌라이 칸의 신하가 되 어 17년 동안이나 머물게 되지요. 그가 그동안 경험한 중국 문물과 또 귀국 길에 겪게 되는 동남아시아와 인도의 풍물까지 곁들여 쓴 여행기입니다. 1298년에 쓰여 진 책으로 ‘동양은 조미료가 철철 넘쳐나고 길거리는 황금으로 덮여 있었다’라고 했으니...


Spice라고 하는 조미료(양념류, 향료) 이야기 좀 해야 되겠네요. 후추, 계피, 박 하 외에도 여러가지인 이 조미료가, 지금은 흔해빠진, 당시 유럽에선 너무나도 희 귀해서 금싸라기 값이었답니다. 예로, 후추를 거래할 때는 밀폐된 방에서 핀셋으로 한 알씩 집어 계산할 정도였다니까요. 조미료가 유럽인들에게 더욱 필요했던 이유 는 그들의 극성스런 육식 때문이었답니다. 토지가 거칠고 일광이 빈약해 곡식농사 가 신통치 않으니 자연히 가축을 많이 길러 고기를 먹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조미 료는 음식 맛을 내게 하고 그 보존에 필요할 뿐 아니라 육식자들의 악성 구취(口 臭, 입냄새)를 없애는데 필수적이었답니다. 사실 동방무역을 재촉한 것은 황금이나 비단같은 것보다 이 조미료 때문이었다는데, 그 원산지는 보르네오와 필리핀 남쪽 에 있는 여러 섬들로 몰루카 군도(Moluccas) 또는 조미료 섬들(Spice Islands)이라 고 불리는 곳이었지요. 이 먼 곳에서 물품이 유럽시장까지 이르는 길엔 수많은 위 험과 장애가 있었답니다. 하여 유럽인들은 새로운 길, 새로운 항로를 찾아나설 수 밖에 없게 되지요.


이로부터 두 세기가 흘러간 뒤 드디어 역사의 무대 위엔 황금과 조미료와 명예에 목숨을 건 사나이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희망봉을 발견하는 디아스 (Bartolomeu Dias), 신대륙을 발견하는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그리고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항로를 개척하는 다 가마(Vasco da Gama) 등이 15세기 말 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고, 16세기를 거쳐 17세가 초까지 등장하는 인물로는 태평 양을 발견하는 발보아(Vasco de Balboa), 인도양을 지나 필리핀을 발견하고 세계 일주를 하는 마젤란(Ferdinand Magellan), 중미의 아즈텍 인디언 문명을 멸망시키 는 코르테스(Hernado Cartes) 그리고 남미의 인디언 잉카문명을 완전 파괴하는 피 사로(Francisco Pizarro) 같은 사람들이지요.


콜럼버스, 코르테스, 피사로. 이들에게 「악마의 사도」라는 치욕적인 명칭을 붙 이는 학자들이 있다는 것 알아두시고, 우선 콜럼버스 이야기부터 하지요. 제노아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의 이태리 이름은 Cristoforo Columbo. 1451년 생. 붉은 머리의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이태리 거인’. 그 무렵 유럽 남자 의 평균 키는 5피트 4인치였는데 그는 6피트였답니다. 그의 사람 됨됨이를 표현하 는 말들이 여럿 있지요. 용기와 집념의 사나이, 위대한 비전을 지닌 자, 과대망상적 아집과 광신적 신앙의 소유자 등등.


그 때까지 유럽인들은 지구가, 우리 교회 권사님이 구운 맛좋은 빈대떡 같이, 평 평하게 생겼다고 믿고 있었지요. 바다 저 끝을 「암흑의 바다(The Sea of Gloo m)」라 했고, 그 곳엔 거대한 소용돌이가 있어 그 속에 빠지면 영원히 헤어나지 못 한다고 믿었답니다. 거기가 바로 지옥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 두려움 때 문에 당시 세계 최고의 항해술을 터득하고 있던 폴튜갈인들도 서아프리카를 개척할 때 깊은 바다로는 가지 못하고 해안선만 타고 오르락 내리락 했다는 것이지요. 콜 럼버스의 일차 항해 때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뱃길의 중간 기점까지는 직선으로 가다가 그 후부터는 직잭(zigzag)으로 항해했다지요. 그 이유는 곧 바로 계속 가다 가 지구 끝 그 나락으로 빠져버리는 게 아닌가 두려워진 선원들이 칼을 들이대면서 콜럼버스를 협박했기 때문이었다네요.


이런 시절에 축구공을 높이 들고 지구는 이렇게 둥글게 생겼다면서 「지구 구형 설(地球舊形設」을 외쳐대는 선구자들이 있었어요. 그 중 하나가 콜럼버스였지요. 그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심취되어 읽고 또 읽어 완전히 그 이야기를 믿어버리게 되지요.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반드시 인도와 중국 나아가 일본까지 도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스페인 여왕 이사벨을 만나게 되고 그녀를 구워삶지요. 성경 말씀까지 들먹이면서 자기는 이 일을 위해 선택된 자이며, 자기의 목적은 ‘선교와 황금(for Gospel and for Gold)'에 있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보내만 주신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을 구원할 뿐 아니라 왕실의 창고를 황금으로 가득 채우겠나이다.”


열 손가락을 꼽아보며 궁리하던 여왕은 두세번의 왕실 연회비 정도면 될 듯 싶다 는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요. 그에게 하사된 것은, 무어(Moors)와의 전쟁에 쓰던 낡은 배 세 척과 선원 120명. 출항 전 모든 선원에게 고해성사를 받게 하는 콜럼버스. 한 통의 편지를 왕에게서 받아 품에 고이 간직하는데 그게 누구에게 가는 것인지 아시면 실소를 금치 못하 실 거예요. ‘원 나라 황제 앞’이었으니까요.


1942년 10월 12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그 땅에 첫 발을 디디게 되지요. 그가 먼저 한 일은 스페인 왕실의 깃발을 꽂으며 이 땅은 스페인 영토라고 선언하는 것 이었지요. 거기 원주민이 버젓이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순진한 인종들은 제 땅 뺏긴 것도 모르고 선물을 들고와 침략자들을 반겼다고 하니 원. 햇볕에 그슬려 구 리빛 살갗을 한 원주민들에게 ‘인디언’이란 명칭을 붙여주는 콜럼버스. 그곳은 그가 철석같이 믿은 동양의 인도가 아니라 캐리비안 해에 있는 바하마(Bahamas) 섬이었 는데.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전후 네 차례나 왕래하지요.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도 자 기가 발견한 땅이 신대륙이라는 것을 몰랐답니다. 첫 번 귀국 때 그는 전시용으로 인디언 몇 명과 진귀한 새들 그리고 인디언에게서 탈취한 소량의 황금을 가지고 오 지요. 최고의 영웅 대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왕실 창고가 황금으 로 채워지지 않는 것을 눈치챈 스페인 왕실은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시골로 유폐시 켜 버리는데 그는 그곳 어느 성당에서 병사하고 말지요. 한 시대의 비극적 영웅 콜 럼버스는 이렇듯 쓸쓸하게 역사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맙니다.


수년전 국경일인 「콜럼버스 날(Columbus Day)」, 수도 워싱턴에서 대규모 반대 시위가 있었던 것 혹 기억하고 계실런지 모르겠네요. 전국에서 모인 인디언들과 이 에 뜻을 같이 하는 백인들까지 합세한 대대적인 궐기대회였지요. 저들이 「콜럼버스 날」을 반대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미국 역사라면 깜깜 밤중 과 같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아래 소개하는 두 권의 책이 그 해답을 주었습니다. 조찬선의 「기독교 죄악사」와 진(Howard Zinn)의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2000년 한국에서 출판된 「기독교 죄악사」는 기독교 역사 이래 성직자들과 교 회가 범한 과오를 지적하고 있으며, 콜럼버스 외에 많은 개척자들이, 청교도도 포 함해서,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면서 인디언에게 행한 잔혹한 짓들도 상세하게 서술 하고 있습니다. 저자 조찬선씨는 목사님이십니다.


진 교수의 저술은 한국에서도 「한국 민중 저항사」란 제목으로 1986년에 출판 된 일이 있었는데, 2년 전에 「미국 민중사」란 이름으로 다시 출판되었답니다. 보 스턴 대학교 교수인 그는 올해 89세,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와 더불어 미국 의 양대 비판적․실천적 지성으로 꼽히는 분이지요. 이 책은 콜럼버스 때로부터 1970년대까지의 미국사를 통상적 관점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취급한 선구적 역 사서로 인디언, 흑인 그리고 여성 문제, 야만적 자본주의에 종속된 노동자 문제, 멕 시코 전쟁과 시민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다루고 있어요. 1980년 초판이 나온 후 읽기가 만만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100만부가 훨씬 넘게 팔렸다고 합니다.


작년 가을 어느 날 미국 역사 자료 좀 구하려 락포트 공립도서관엘 들른 일이 있 습니다. 책 세일을 하고 있었지요. 미국 역사 이야기란 제목만 보고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이토록 귀한 책일 줄이야. 거금 2불을 지불했고. 콜럼버스 일행이 첫 발을 디딘 바하마엔 아라왁(Arawak)이란 토착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훗날 백인에 의해 멸절당하고 마는 이들은 호기심에 찬 모습으로 음식과 물과 선물을 들 고와 이 낯선 침입자들을 환영합니다. 콜럼버스는 그의 일지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녀 모두 벌거벗고 있었다. 여러 가지 선물을 들고 왔으나 무기는 지니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종으로 부리기에 알맞은 훌륭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50명 만으로 그들을 모두 복종시킬 수 있었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시킬 수 있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황금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일차 항해에서 돌아온 그는 이렇게 꽝을 놓고 있습니다. ‘꽝을 놓는다’는 말, 이 게 30년 보다 더 전에 쓰던 말인데 요즘도 쓰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허풍친다’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지요.


그곳은 기적의 땅이다. 산과 골짜기와 들판은 기름지고 아름답다. 강도 많은 데 대부분은 금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조미료가 있으며 금과 귀금 속이 있는 광도 많이 있다. 그곳 원주민은 친절하고 주기를 좋아하니 기독교 신자로 만들기에 적합하다.


나라 사이의 땅 문제에도 관여할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바티칸의 교황은 선뜻 그 땅이 스페인 영토라고 인정해 줍니다. 콜럼버스는 항해 중에 스페인 왕에게 이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 소망에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게 항해술과 천문학에 관 하여 필요한 모든 지식을 주셨습니다. …제 계획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믿어주신 분 은 폐하뿐이었습니다. 이 광명은 폐하와 마찬가지로 제게도 성령께서 주신 것 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구하라 주실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무슨 계획이든지 주님께 봉사하려는 신성한 목적을 가진 것이라면 주님의 이 름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는 콜럼버스가 뼛속까지 신앙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지 요. 그런데 그가 황금이라는 이름의 악마에게 무릎을 꿇고 드디어 천인공노할 만행 을 저지르게 되다니...


비극의 막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합니다. 주안에서 샬롬. ✎ 이은모

 

신대륙과 인디언 -전쟁이야기 (15)-


Ⅱ. 슬픈 인디언 이야기


「미국혁명의 안팎」을 넘나들며 「1812년 전쟁」과 그 와중에서 태어난 미국 국가(國歌)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말씀드렸는데 이젠 인디언 문제를 다루어야 할 차례가 되었네요.


미국 역사 속의 인디언. 이 광활한 대륙에 먼저 와 산 이 사람들을 뺀 미국역사 란 있을 수 없지요. 그것은 마치 김치 없이 차려진 한정식 같다고나 할까, 더욱이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면 도무지 남의 일 같지가 않으니... 서북부 지역에 살던 오사지(Osage) 부족의 전설을 동화처럼 엮어볼테니 들어보세요.


먼 하늘나라 그 어딘가에 오사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 그들에게 궁금증이 생겼어.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게 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지. 햇님에게로 가서 물었네. "너희들은 모두 내 자식이다"라고 하는 거야. 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이번엔 달님에게로 갔지. "너희들은 내가 낳았고 너희들의 아버지는 햇 님이란다." 그리고 "너희들은 이곳을 떠나 땅으로 내려가서 거기 살아야 한다" 라고 달님이 말하는 거야.


땅으로 내려왔지. 그런데 글쎄 온 세상이 물에 잠겨 있지 뭐야. 그러니 예전 에 살던 곳을 찾을 재간이 있나. 엉엉 울며 하늘을 떠돌다가 도움 받을 신이 라도 어디 있는가 여기 저기 찾아봤으나 헛수고였어.


그들은 짐승들을 가지고 있었지. 그 중에 아주 영물스럽게 생겼고 또 모든 생물에게 자신감을 주는 영력을 지닌 짐승이 있었어. 엘크(elk, 큰 사슴)였지. 그에게 도움을 달라고 간곡한 청을 넣었네. 그랬더니 이 엘크가 물로 첨벙 뛰 어들지 않겠어.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바람을 부르네. 그러자 사방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와 땅에 가득 차 물을 불어버리기 시작하는거야.


처음에 바위들이 나타났지. 사람들은 그 위를 걸어다닐 수 있었지만 거기 뭐 먹을 게 있나. 물이 점점 더 줄어들었지. 드디어 보드라운 흙이 나타났어. 엘크가 기분이 짱 해져서 땅 위를 막 뒹굴어대네. 그러니 털이 빠질 수밖에. 이 털들이 여기 저기 날아가 씨처럼 흙에 뿌려지자 아 글쎄 자라기 시작하네 그려. 뾰죽뾰죽 자라나서 콩, 옥수수, 감자, 호박, 땅콩이 되고 또 온갖 종류의 풀과 나무들이 되더라 그런 이야기지.


흥미롭지요?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단군신화」와 닮은 점이 있네요.


천제(天帝)이신 환인(桓因)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을 품은 아들 환웅(桓 雄)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지상으로 내려보냈다. 그는 풍백(風伯 ․ 바람의 신), 우사(雨師 ․ 비의 신), 운사(雲師 ․ 구름의 신)와 3천의 무리를 이 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인간을 다스렸다. 이 때 환웅은 사람이 되고 자 원하던 곰과 호랑이에게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쪽을 주어 먹게 한 후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호랑이는 이를 못참고 곰은 참아내어 고운 여자가 되었다. 이 웅녀(熊女)와 환웅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 왕검(檀君王儉)이시다. 단군은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고 아사달(지금의 평 양)에 도읍을 정하고 1,500여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첫 아메리카 인(First Americans)」 또는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 이라고 불리우는 인디언은 언제 어디서 와 신대륙에 살게 된 것일까 라는 질문의 고리를 풀기 위해 오랫동안 많은 고고학자들(archeologists)과 인류학자들 (anthropologists)의 연구가 있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아직 딱부러지는 해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분야의 연구를 '거대한 퍼즐 풀기'에 비유하는 학자까지 있네요.


인류의 시조에 관한 연구도 마찬가지지요. 새로운 것이 발견되면 한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학설이 장마에 흙담 무너지듯 하루 아침에 허물어져 내리는 일이 반 복되어 왔으니까요.


인류의 발생지 또는 근원지는 아시아라고 적어도 1959년까지는 믿어왔는데 그 아시아가 아프리카로 바뀌어야만 하는 일이 일어났지요. 그 해 여름 리키 박사(Dr. Louis Leakey)와 그의 아내가 사람의 두개골 두 개와 이빨 40개 그리고 쇄골 한 개를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평원(Serengeti Plain)에 서였는데 연구 결과 그 뼈들은 일백만년이 넘는 사람의 것이었답니다.


1. 인디언의 조상은 누구며 그들이 맨 처음 신대륙에 온 사람들인가?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것 혹 기억하고 계실런지 모르겠네요. 아시아인 특히 몽골계 인종이 베링해협(Bering Strait)을 거쳐 신대륙에 건너와 살게 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학설(즉 아시아인이 인디언의 조상이라는)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선 이들이 있어요. 미국과 러시아의 몇몇 학자들로 아시아인과 인디언은 그 혈액 형부터 다르다는 것을 조사해낸 것이지요. 아시아인의 주된 혈액형은 B형인데 인디 언에겐 아예 이 B형이 없다네요.


옛 이집트의 묘나 동굴에서 발견되는 벽화나 심볼들을 연구한 학자들도 있지요. 이것들이 인디언의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아주 유사하다면서 인디언의 조상 은 이집트에서 왔다는 주장을 펴고 있어요. 이집트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디딘 인종이라고 확신하는 저명한 학자들까지 있는 모양입니다. 이 '첫 인종'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주장들이 있고, 또 아주 먼 옛날에 많은 나 라 사람들이 신대륙을 다녀갔다는, 전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지만, 설 들이 있는데 퍽 재미나는 이야기니 한 번 들어보세요.


기원전 6세기 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페니키아인(Phoenicians)의 비문 (inscription)이 1870년 남미 브라질에서 발견되었답니다.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을 때 레바논의 백향목을 공급한 이가 두로왕 히람이라고 성서에 쓰여 있지요. 이 두 로 사람들이 페니키아인인데 그들은 항해술이 뛰어나 능히 먼 바다를 건널 수 있었 으리라는 것이지요.


사도 도마(Apostle Thomas)는 인도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분이 남 미 페루를 방문하셨다는 전설도 있다네요. 서기 458년 다섯 명의 불교 승려들이 신대륙을 다녀왔다는 중국 전설도 있고 그 외에도 히랍인, 아이리쉬, 힌두인, 심지어 일본인까지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몰몬교(Mormons)의 「사라진 이스라엘 열 지파(Ten Lost Tribes of Israel)」 설 이 흥미롭네요. 그들은 그 열 지파 유대인들이 인디언의 조상이라고 지금도 철석같 이 믿고 있답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자료를 구하고 있었는데 지난 번 설교차 오신 강충욱 목사님이 두툼한 책 한 권을 주고 가셨지요. 나단 아우스벨이 편집한 「유 대 예화 보고」.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들에 두었더라. (열왕기하 17장 6절) 「유대 예화 보고」엔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살만에셀(사르곤 2세)에 의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간 뒤에 역사적 지평에서 사라졌다. 말하자면, 영원한 망각 속으로 함몰되어 버린 것이다.


열 지파로 형성되었던 북이스라엘 왕국이 패망한 해가 기원전 722년인데 남유다 왕국은 이로부터 136년을 더 지탱해 오다가 결국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되지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히브리인들은 얼마 뒤에 귀국하게 되지만 나머지 열 지파는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세 이후 이 사람들의 발견 소식이 유대인 여행자들을 통해 들려오기 시작했답니 다. 이 책엔 신대륙을 방문한 어느 유대인이 인디언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인디언 이 사라진 지파라는 확신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으며 세계 여러 곳에서 그 유대인들을 만났다는 여행기도 실려 있네요.


2. 신대륙에 들어간 경로


여러 가지 설이 있지요. 북쪽의 그린랜드(Green Land)를 거쳐 들어왔다느니, 더 따뜻한 남부 태평양이나 또는 대서양 쪽으로 배를 타고 왔을 것이라는 설 등등.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설이 「베링해협 경유설」이지요. 인 디언의 조상이 누구였든 그들은 이 해협을 건너 신대륙으로 들어왔다는 주장입니 다. 그들이 건넌 이 해협의 그 당시 상태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지요. 까마득한 옛 날 빙하기에 꽁꽁 언 얼음 위를 걸어갔다는 설과 「육교설(陸橋說, Land-Bridge Theory)」이라고 그 곳에 육지 같은 다리가 있었다는 설입니다.


베링해협은 시베리아 동북쪽 끝에 있는 조그만 척치반도(Chukchi Peninsula)와 그 건너편 알라스카의 수워드 반도(Seward Peninsula)가 서로 입맞춤 하듯 마주보고 있 는 곳(56마일)을 일컬음이고, 그 일대의 바다를 베링해(Bering Sea)라고 부르는데 이 '베링'이란 명칭이 사람 이름이라는 것 알아두시면 좋겠네요. 18세기 초 러시아 황제 「피터 대제」의 위임을 받고 이곳을 탐사한 사람이 있지요. 덴마크인 항해사로 험난 한 이 임무를 16년에 걸쳐 완수해내는데 그의 이름이 Vitus Bering입니다.


3. 신대륙에 언제부터 살았으며 어떤 형태의 삶을 살았을까?


20세기 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작 2,000 내지 3,000년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온 학회가 화들쩍 놀라버리는 일이 생겼지요. 뉴멕시코의 팔삼 (Folsom)이란 곳의 마른 개울에서 창 끝(spear head)이 박힌 버팔로(buffalo)의 뼈 가 발견된 것입니다. 맥잔킨(George McJunkin)이란 흑인 목장 노무자가 발견한 것 인데, 이 버팔로는 현재 살고 있는 버팔로와 다른 짐승으로 8,000년 전에 이미 멸 종되었다고 하니 인간이 신대륙에 산지가 적어도 8,000년은 되었다는 것 아니겠어 요. 그 때 살던 사람들을 팔삼인(Folsom People)이라고 부르지요.


8,000년 전이라면 이집트인들이 피라밋을 세운 것보다 3,000년은 앞선 것인데 어떻게 이집트인이 인디언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 발견 이후 더 많은 연구가 있게 되어 지금은 적어도 15,000년은 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답니다. 알라스카로 건너온 이들은 따뜻한 기후와 더 살기 좋은 땅을 찾아 남쪽으로 서서 히 내려오게 되지요. 북미를 거쳐 중미 그리고 남미 끝까지, 이 광활한 대륙 여러 곳에 흩어져 살게 된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상륙할 즈음인 1400년대, 인디언 수는 통털어 2천만명 정 도였다는데, 북미주엔 약 5백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600이 넘는 부족에다 500개 이상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답니다.


오랫동안 미국 학교에서의 인디언에 대한 교육은 그들이 단지 농부거나 사냥꾼 정도의 야만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나, 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 결과 인디 언은 교과서적 가르침 이상의 여러 가지 문화와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아내게 되었지요. 중미인 멕시코의 아즈텍(Aztecs) 왕국이나 남미 페루의 잉카 (Inca) 제국 같이 화려한 문명을 가진 인디언들도 있었고. 농경문화만 해도 아시아,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처럼 그 비슷한 시기에 크게 개발하게 되어 옥수수 재배법이라든가 초콜렛 만드는 법, 땅콩 재배법, 목화로 옷 짜는 법 등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비극은 그들에게 문자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문자 없는 족속이 문자있는 사람들을 무슨 수로 당해낼 수 있겠어요. 이 문자 있는 침입자 백인들이 '고상한 야만인(Noble Savages)'이라고 불렀던 인디언, 그들이 걸어가게 되는 고난의 가시 밭길, 그 이야기는 다음에 들려드릴께요.


주안에서 샬롬.


✎ 이은모

 

미국혁명의 안팎 전쟁이야기 (14)


미국 국가와「1812년 전쟁」이야기가 아직도 계속 됩니다.


1814년, 드디어 전쟁 마지막 해가 되었습니다. 그해 봄,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의 실각과 함께 오랜 전쟁에 종지부가 찍혀지지요. 따라서 더 많은 함대와 군대를 미 대륙으로 이동시킬 수 있게 된 영국은 대서양 연안의 미국 항구들, 특히 해군기지 들을 봉쇄하고 지상전투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8월, 로스 장군(Robert Ross)이 이끄는 영군이 체사피크 만으로 들어와 그 지류 인 패투센트 강(Patuxent River)을 타고 수도 워싱턴으로 진격해 들어옵니다. 기습 작전이었지요. 이를 제지하기 위한 매릴랜드 민병대(Maryland Militia)의 시도가 있 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버지니아로 난 교량을 건너 피난하는 시민들.매디슨 대 통령도 각료들과 함께 피신하지요. 그래도 그는 교량만은 끊지 않아 시민들이 피난 토록 했으니 6․25 전쟁 때 한강 철교를 폭파한 이승만 대통령 보다는 낫다고나 할 까.매디슨의 아내 달리(Dolley)는 워싱턴 사교계의 여왕이었다는데, 그녀는 또한 매우 용감한 여성이었던 모양입니다. 적군이 수도에 입성할 때까지 백악관에 남아 남은 일들을 처리했고, 유명한 워싱턴 대통령의 초상화를 시간이 촉박해 액자를 깨 뜨리게까지 해서 구해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오니 이틀 전에 도망친 대통령 남편 체면을 조금은 세워준 셈.하여 훗날 그도 우리처럼“마누라 덕에 산다”라는 농담을 하며 쓴 입맛을 다셨을지도 모르지요. 각료들은 모두 뺑소니를 쳤는지 홀로 된 매디슨은 버지니아 숲 속을 사흘이나 헤매다가 닭장에서 잠을 자기까지 했다는 데,이 일이 소문의 날개를 타고 전국에 퍼져 나갔으니...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미국 하늘에 가득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


수도를 점령한 영군은 국회의사당, 대통령 관저 그리고 다른 관공서에 불을 지릅 니다.「백악관」을 그때까지는 그냥 「대통령 관저」라고 불렀지요.뉴욕 잡지 「방관자(Spectator)」는 이런 글을 싣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치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사건을 반드시 기록해 두어야 한다. 전쟁3 년째, 단 5,000명의 하찮은 군대에 의해 우리의 정부가 있는 곳, 이 위대한 나라 의 심장부인 워싱턴이 겁탈당하고 말았다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이 일이 영국에 알려졌을 때 영국인들은 하나같이 수치스러워했다는데, 그것은 미군이 캐나다 수도 토론토를 방화했을 때 가졌던 미국인들의 생각과 같았다는 것이지요.


워싱턴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 본 함대와 합류한 로스 장군, 그의 다음 공격목표 는 매릴랜드의 벌티모어(Baltimore)였습니다. 그곳엔 이미 매릴랜드 민병대가 다시 집결해 영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두 주 전 수도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 람들이었지요.결국 영군은 이들의 필사적 방어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말지요.더구 나 이 전투에서 그들의 지휘관 로스 장군마저 전사하고 맙니다. 퇴각한 영군은 이 번엔 바다에로의 진입을 시도하게 됩니다.


맥 헨리 요새(Fort McHenry)는 벌티모어를 지키는 요새지요. 앞바다에 낡은 배들 을 침몰시켜 영군의 상륙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물길마저 얕아서 큰 군함의 접근은 불가능한 상태였답니다.


키(Francis Scott Key)는 젊은 미국 변호사. 포로된 친구의 석방을 위해 영군을 방문 중이던 그는 그들의 지시대로 그날 밤을 타고 간 배에서 지내게 됩니다. 밤새 도록 계속 되는 함포사격.걱정과 기대감으로 잠못 이루는 밤이었지요.요새가 견 뎌낼 수 있을지,요새에서 휘날리던 국기는 어떻게 되었을지... 동녘에 상서로운 빛이 비쳐오기 시작합니다.갑판으로 뛰어 올라가는 그의 발걸음.아! 거기 아직도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지 않은가!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


오 말하라 새벽 빛 속에서 그대가 본 저 깃발을, 엊저녁 석양 빛 속에 휘날리던 깃발을 우리는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던가를, 치열한 싸움 중에도 성벽 위에서 의연히 나부끼고 있는 넓은 줄에 별 박힌 깃발은 누구의 것인가? 타오르는 로켓과 작렬하는 포화로 붉게 물든 밤하늘 아래 밤새워 우뚝 서 있었음이 증명되었나니 오 그대여 말하라 성조기는 지금도 휘날리고 있음을, 자유자의 땅위에 그리고 용맹자의 나라 위에.


시를 번역하는 무모한 짓을 해봤습니다. 3절까지 있지요. 3절엔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God is our trust)'이란 구절이 들어 있네요. 벌티모어에 사는 그의 처제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그녀는 곧장 인쇄소로 가져가지요.이후 인구에 회자(膾炙)되어 오 다가 스미스(John S. Smith)란 이의 곡에 얹혀져 미국 국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작곡자에 관한 자료가 없어 답답하네요.그의 이름과 함께1778년이란 작곡연도가 적혀 있으니 퍽 오래 전에 지어진 듯 싶고, 또 일설엔 스카트랜드 어딘가의 사교 클럽에서 불려지던 곡이었다고도 합니다만.


「1812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뉴 올린스에서 있게 됩니다. 「뉴 올린스 전투 (The Battle of New Orleans)」. 「세계를 바꾼 50대 전투」중 하나지요. 뉴 올린스는 루이지애나 주의 남동쪽.미시시피 삼각주에 놓인 항만도시.이 뉴 올린즈가 속해 있는 루이지애나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야 되겠네요. 루이지애나 (Louisiana). 그 당시 이 이름이 아우르는 땅은 지금의 루이지애나 주(State) 정도가 아니었지요. 미시시피 강으로부터 서쪽으로 락키 산맥(Rocky Mountains)에 이르고, 북쪽은 오대호 중 하나인「수페리오 호수(Lake Superior)」까지이며, 남쪽으로 「멕시코 만(Gulf of Mexico)」에 이르는 참으로 광대한 땅이었지요. 서유럽 전체보 다 크고,동양으로 치면 일본으로부터 한국과 만주를 합한 땅보다 크지요.15세기 후엽 프랑스인 라 샐(La Salle)이 개척했다는데, 루이지애나란 명칭은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4세(Louis XIV)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라네요. 기절초풍할 거래, 표 현이 좀 이상한데,아무튼 이건 거래라기보다는 그저 얻은 것이라고 해야 옳지요. 글쎄 150만불이었어요. 이 무지막지하게 큰 곡창지대를 두고 나폴레옹이 제시한 거 래 액수가 고작 그것이었다니. 1803년, 제퍼슨 대통령의 안목과 용단에 의해 성사된 일입니다. 1867년, 미국은 앨라스카를 러시아로부터 720만불에 사들여 또 횡재를 합니다만 이 루이지애나 거래로 미국은 그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나게 됩니다.


뉴 올린스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지요. 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 3년 전 많은 인명 손실과 막대한 재산피해를 입힌 태풍.그 뒤처리를 잘못해 부시 정부가 아직도 욕을 먹고 있는 것 아시지요.


지난해 10월 제 비서 마르타(Martha)가 휴가를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카트리나 이재민을 도우러 간다는 것이었지요. 그녀는 락포트 성공회(Episcopal Chruch) 교 인인데 자기 교회와 다른 교파 교인 7명이 「단기선교팀」이 되어 그 먼 곳까지 차 를 몰고 간다고 했습니다.몰론 자비로 가는 것이지요.그곳엔 전국 교회에서 온 봉사자들 100여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와서 돕고 가지만 이 숫자가 계속 유 지되도록 조절하고 있더랍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주 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동시에 한국 교회 선교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하게 되었 고요. 한국 교회, 미주 한인교회도 마찬가지지만, 의 선교의 눈은 ‘예루살렘과 온 유 대와 사마리아’는 제쳐두고 ‘땅 끝’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물음. 그냥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만 하셔도 될 것을 왜‘예루살렘․유대․사마리아’란 말씀을 보태고 계신지,거기 무슨 뜻이 있는지 생각해 보셨나요?문자적으로도 이 지구에 ‘땅끝’이 어디 있어요. 지구는 둥근데 말입니다. 한 바퀴 돌면 제 자리로 돌 아올 것이니,하여 우리가 선 이 자리,우리 이웃, 이 나라, 우리 교회가 바로 ‘땅 끝’이요 예루살렘이며 사마리아가 아니겠어요.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나가는 선 교가 되기를 바램하면서 한마디 해본 것입니다.


「자원봉사 정신(Volunteerism)」이란 말이 있지요. 얼마 전에 ‘미국의 힘은 어디 서 나오는가?’라는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 필자의 답이 바로 이것이었지요. ‘이름 없이 빛도 없이’행해지고 있는 미국인들의 이런 봉사활동이 사회 저변을 흐 르는 마치 거대한 강 같다고나 할까. 우리도 이 흐름에 동참해야만 사회 주류에 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야기의 곁길 산책이 좀 길어졌지만 이왕지사가 된 마당에 제가 겪은 일 하나 더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수련의(修鍊醫) 때 일입니다. 병원 일 마치고 귀가하다 가 차가 그만 눈구덩이 속에 빠지고 말았지요. 늦은 시각 호젓한 곳에서 당황해 어 쩔 줄 모르고 있는데 차 한 대가 다가왔습니다. 연세도 지긋해 보이는 분이 사정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 차에서 삽을 꺼내더군요. 그의 차 트렁크 속엔 삽 한 자루가 더 있어서 둘이 땀을 흘리며 한 반시간 눈과 씨름한 끝에 차를 빼낼 수 있었지요. 이런 분은 아예 남 돕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것일까, 농담, 어떻게 이런 도움을 베 풀 수 있는지,그 트렁크엔 담요까지 준비되어 있었으니.눈물겹도록 고마웠던 경 험담입니다.


다시 전쟁이야기로 돌아갑니다. 1814년에 들어와서도 캐나다와의 접경지역인 이 리 호수, 온타리오 호수 그리고 동북부에 있는 챔플레인 호수(Lake Champlain) 일 대에선 서로 주고받는 전투가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그 해 여름, 벨지움의 겐트(Ghent) 라는 도시엔 이미 점잖게 차려입은 신사들이 모여들고 있었지요. 평화 협상을 위한 양국 대표들이었습니다.


영국은 엄청난 작전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뉴 올린스를 점령하고 가능하다면 루 이지애나 전체를 손아귀에 넣는다는 것이었지요. 이 낌새를 눈치 챈 미국은 잭슨 장군(Andrew Jackson)을 그곳으로 보냅니다. 그는 원래 테네시 민병대 지휘관이었 는데 그의 전투경력을 높이 산 미국 정부는 그를 정규군 장성으로 삼지요.


1814년 12월 초, 패켄햄 장군(Sir Edward Pakenham)이 이끄는 영군 8,000명이 군 함을 타고 와 뉴 올린스에 상륙합니다. 이들은 유럽 전쟁에서 싸웠던 정예병들이었지 요.잭슨 장군은 보루를 높이 쌓고 많은 포대를 설치합니다.영군에 비해 훨씬 열세인 그의 군대 4,500명, 그 모양새 또한 가관이었지요. 정규군 겨우 2개 연대에 뉴 올 린스 민병대,루이지애나 민병대,자유인 흑인 부대, 인디언들, 뱃사람들, 화려한 옷차 림의 뉴 올린스 귀족 자제들,심지어 바다에서 노략질하던 해적들까지 가담했답니다. 해가 지나 1815년 1월 8일, 자욱한 아침 안개 속을 뚫고 영군은 정면공세를 취 하게 됩니다. 20문의 대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고, 이어 소총과 장총에서 소나기처 럼 퍼부어대는 탄환세례. 어느 저자는 ‘Americans mowed the British down'이란 표현을 하고 있는데,즉 잡초 베듯 했다는 것이지요.2,000명이 넘는 영군 병사가 목숨을 잃고 맙니다.그들의 총사령관 패켄햄 장군마저 전사하지요.미군은 전사자 8명에 15명의 부상자뿐이었답니다. 부랴부랴 군함으로 도망친 영군은 뒤도 돌아보 지 않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맙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잭슨 장군은 전국적 영웅이 되었고, 나중에 제 7대 대통 령에 당선됩니다.


사실 이 전투는 불필요한 것이었지요. 이 전투보다 두 주 전인 1814년 크리스마 스 이브에 평화조약은 이미 체결되었거든요. 평화의 소식이 또 천천히 대서양을 건 너고 있었으니. 아무튼 「1812년 전쟁」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다음엔 무슨 이 야기가 나갈지, 주안에서 샬롬.


✎이은모

 

미국혁명의 안팎 전쟁이야기 (13)


미국 국가와「1812년 전쟁」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라는 속담 아시지요? 미국이 등 터지는 새우와 흡사 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어요. 영국과 프랑스라는 고래 싸움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말이지요.


1793년, 영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 혁명 정부는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 게 됩니다. 미국혁명 전쟁 때 프랑스가 도운 것을 환기시키면서 이젠 미국이 도울 차례라는 것이었지요.그러나 미국은 야멸차게도 거절합니다.중립의 깃발 (Neutrality Proclamation)을 내걸고 말지요. 아직 나라가 어려서 타국 일에 관여할 힘이 없다는 핑계를 댔지만, 양쪽 나라와 무역을 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영국의 심기를 거스리지 않으려는 숨은 속셈도 있었지요. 워싱턴 대통령의 첫 임기 때 있 었던 일입니다. ‘국익(National Interest)'을 위해서라면 신의쯤은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다는 것인데, 하여 ‘정치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라는 끔찍 스런 말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육지에선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지만 막강한 해군력으로 해상권을 쥐고 있던 영국은 프랑스 항구들을 완전 봉쇄하고, 프랑스로 가는 선박들을 나포하기 시작합 니다.프랑스도 같은 방법을 쓰게 되는데,그것은 웨스트 인디스(West Indies)에 주 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영국으로 향하는 미국 상선을 나포하는 것이었지요.


1803년, 영국은 프랑스와 또다시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번엔 나폴레옹과의 싸움 이었지요. 이때부터 1812년까지 이 두 나라가 나포한 미국 상선 수가 1,500척이나 되었답니다. 영국은 나포한 배에 선적된 화물을 압수할 뿐 아니라 타고 있던 젊은 선원들을 붙잡아 갔는데 이를 ‘impressment of seamen'이라고 하지요. 초기엔 영 국 태생에 한하더니 나중엔 미국 태생까지 붙들어 강제로 영국 해군(Royal Navy)에 입대시켜 버립니다. 1811년까지 이렇게 붙잡혀간 선원들이 6,000명이나 되었다네 요.영국 해군은 당시 심한 병력 부족상태에 놓여 있었지요.수병 생활이 하도 열 악해서 자원 입대자가 전무했답니다. 저 「트라팔카 해전(The Battle of Trafalg a)」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수장시켜버린 넬슨 제독(Admiral Horatio Nelson) 마저 이런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40세 이상 사는 해병이 거의 없으니...”


이런 군대로 어떻게 바다를 지배할 수 있었는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네요. 끌려간선원들이 자유를 찾는 길은 오직 두 가지, 그 배에서 죽어 나오던가 아니면 탈주하 는 것뿐이었지요. 탈주의 가장 좋은 기회는 군함이 외국항에 정박 중이고 근처에 미국 배가 있을 때였답니다. 그러나 탈주자 찾기에 혈안이 된 영국군은 어떤 국적 의 배에라도 올라가 검색했는데, 점점 대담해진 그들은 한 때 뉴욕항까지 막고 미 국 선박들을 모조리 수색한 일도 있었답니다.


1807년 6월, 가장 경멸적 사건이 버지니아의 제임스 강(James River) 하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지중해로 막 떠나려는 미국 군함「체사피크 호(Chesapeake)」 로 접근하는 영국 군함「레파드 호(Leopard)」. 그 배에 타고 있는 탈주자를 잡아 야겠으니 승선을 허락하라는 영국 함장의 협박적 요구가 있었고, 미국 함장의 거절 이 뒤따랐지요.느닷없이 포문을 여는 영국 군함.무방비 상태였던 미군측은 세 명 의 전사자와 함장을 포함해 18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를 당하고 말았지요. 항복한 미군함에 승선한 영국군은 네 명을 체포합니다. 그 중 한 명 만이 탈주자였다는데 그를 야만스럽게도 목매달아 죽이고 맙니다.만신창이가 된「체사피크 호」가 귀 항하자 이 소식이 재빠르게 전국에 퍼져나갔지요. 미국인들이 이 때처럼 분기를 내 며 애국심에 불탔던 때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퍼슨 대통령(3대, Thomas Jefferson) 때 있었던 사건입니다. 전쟁이라도 불사하 겠다는 국민의 심정을 잘 알고 있던 그였지만, 전쟁은 아직 어린 공화국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는 판단 하에 평화적 방법을 모색하게 되지요. 몇가지 통상법을 제정한 것 인데,그 중 하나가「출입국 금지법(Embargo Act)」이었습니다. 모든 선박의 입항 과 출항을 금지한다는 법입니다. 그런데 웬걸 이 법으로 더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어요. 항구마다 수많은 배들이 꼼짝 못하고 있었는데 뉴욕항만 해도 500여척이나 되었다니 나라 살림꼴이 어떻게 되었겠어요. 실업자 홍수가 났지요. 하 루 1,200명을 먹여야 하는 급식소(Soup Kitchen)까지 생길 정도였답니다.


나중에 이 법을 없애고 새 통상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그것은 영국․프랑스와 무역 을 허락하되 양국이 미국의 권리, 중립성, 을 인정할 때만 유효하다는 단서를 붙인 것이었지요.


1809년, 제퍼슨 대통령이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 매디슨(James Madison)이 4 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제퍼슨은 그를 친아들처럼 대했다는데 제퍼슨 정 부에서 국무총리로 일한 매디슨은 「헌법의 아버지(The Father of the Constitution)」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후세에 남깁니다. 미국 헌법을 기초한 분이기 때문이지요.


권좌의 주인공이 이처럼 평화롭게 바뀔 수 있는 전통, 이런 민주주의의 기틀을 차 근차근 다져가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을 보면 참으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국가들이 오고 갔지만 언제 이런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가 있었나요.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TV 드라마 「이산(李山)」생각이 납니다. 영조(英祖)로부터 그의 손자 정조(正祖)로 넘어가는 왕위를 놓고 얼마나 많 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지... 세종대왕 이후 가장 영명했다는 임금 정조, 이 분의 등극 년도가 공교롭게도 미국이 독립선언을 한 해와 같네요. 1776년이었지요. 미국인들의 맘터에 뿌려진 반영정서(反英情緖)의 불씨가 드디어 전쟁불사론이란 이름의 불꽃이 되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을 때, 마치 숯불에 부채질하듯 또 다른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인디언의 서북부 지역 개척자들에 대한 공격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과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가 영국군이 준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1783년, 일년 반이나 끈 끝에 맺어진 영미평화조약엔 미국 국토의 경계가 명시되 어 있을 뿐만 아니라,영국은 이 미국땅에서 완전 철수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지요.그 런데 영국은 이 조항을 어기고 있었어요. 이 넓고 기름진 땅을 잃게 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했겠어요. 상당수의 영국 지도자들은 언젠가는 미국땅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 라는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영국군은 서북부 지역(Northwest Territory)에 있던 그들의 진지들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면서 인디언과의 모피교역을 독점하고 인디언들로 하여금 개척자들과 싸우도록 계속 충동질을 하고 있었지요. 그 때 정해진 미국 영토는,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하여 동쪽으로는 대서양에 이 르고,북쪽은 오대호까지이며,남쪽으로는 플로리다와 루이지애나를 제외한 전 남 부지역이었습니다.


만약 새무엘 모르스(Samuel Morse)가 1844년보다 한 30여년 전에 전보 (telegraph)를 발명했더라면 이 전쟁은 피할 수도 있었으련만 소식이 파도치는 대서 양을 건너는 길은 오직 선편뿐이었으니...


1812년 6월 16일, 영국은 중요한 정책을 발표하게 됩니다. 미국에게 가하던 일 체의 적대행위를 금지하겠다는 것이었지요.나폴레옹과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데, 통상법으로 맞서고 있던 미국마저 전쟁준비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은 자구지책으로 정책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때는 늦었어요. 이미 상정되어 있던 대통령의 전쟁안을 통과시킨 미국 국 회는 정확히 이틀 후인 18일, 영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매디 슨 대통령도 제퍼슨처럼 평화옹호자였지요. 그러나 거센 전쟁지지자들의 압력 앞에 그는 굴복하고 맙니다.켄터키에서 온 몇 명의 젊은 국회의원들이 있었지요.「매 파(War Hawks)」라고 불리던 그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켄터키 민병대만으 로 캐나다를4주 안에 항복시킬 자신이 있다.가자, 캐나다로!”


캐나다는 원래 프랑스인들이 개척한 땅이었으나 「7년 전쟁」에 패한 프랑스가 영국에게 빼앗기고 말았지요.1763년의 일입니다. 영국은 캐나다를 두 구역으로 나 누어 통치했는데.「하부 캐나다(Lower Canada)」는 퀘벡(Quebec) 지방으로 프랑 스 말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상부 캐나다(Upper Canada)」는 온타리오 (Ontario) 지방으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상부 지역엔 미국혁 명 전쟁 때 쫓겨간 충성파(Loyalist)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네요. 당시 캐나다 인구는 고작 50만명이었고 미국은 770만명이었답니다.


그러나 캐나다는,즉 영국군은 인디언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지요.테쿰세 (Tecumseh)라는 인디언 용사가 있었습니다. 쇼니(Shawnee) 부족 추장으로 북미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인디언들을 통합해 하나의 「인디언 제국」을 꿈꾸던 전 설적 인물이지요. 영국군으로부터 장성 대우를 받게 되는 그가 캐나다로 이끌고 온 인디언군이 3,500명이나 되었답니다.


「1812년 전쟁」을 「제2의 독립전쟁(Second war of Independence)」이라고도 부르는데 영국에게 한번 더 본때를 보여줬다고 해서 주어진 이름이지요. 그러나 2 년 반이나 계속된 이 전쟁으로 미국은 별달리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영국을 자국 영토에서 몰아낸 것과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던 그들의 꿈, 미국을 다시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을 완전히 지워버리게 한 것 이외엔 말입니다.'미국의 노골적 침략 (Naked American Aggression)'으로 이 전쟁을 받아들인 캐나다인들에게 오히려 정 체성(identity)만 확인시켜준 셈이 되었고요.


전혀 준비가 안된 전쟁이었지요.군사적으로도 그랬고,전쟁을 도와야 할 국민적 측 면에서도 그랬어요.미 해군은 겨우6척의 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도 군함(frigate) 측에 드는 것은 3척 뿐이었답니다. 고작 6,700명의 정규군을 %E

 

미국혁명의 안팎 -전쟁이야기 (12)-


열두번째「전쟁 이야기」가 나갑니다. 본래 「기독교 전쟁론」이란 주제를 놓고 시 작한 담론인데, 풍파 만난 돛배처럼 흐르는 대로 떠다니다 보니 이젠 주제의 그 행선지 마저 아슴프레해진 형국이 되고 말았네요.네번째 글에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6․25 전쟁 이야기 끝내고 '전쟁 일반'에 관해서도 대충 훑어본 후 본론인 「기 독교 전쟁론」으로 지쳐 들어갈 계획이었는데 소위 글방귀깨나 뀌는 글쟁이가 아 닌 저로서는 그게 그리 쉽지가 않네요. 이미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 속엔 아직 할 말이 많고, 또 더 생기고 해서 여름 저녁 호숫가의 반딧불처럼 여기 반짝 저 기 반짝 조리가 별로 없을, 아직은 서론인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그러나 가야 할 포구의 등대 빛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 도 됩니다. 미국 전쟁 지도


자 이야기를 준비하려니 미국 역사 공부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가리늦게 무슨 공부냐구요?배움에 어디 끝이 있고 때가 있나요.죽음까지도 인간 이 배워야할 마지막 공부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낯선 땅에 뿌리 내리기 위해 바쁜 세월을 살아온 이민 일세 우리에겐 이런 것 배울 짬도 여유도 없었지만, 우리 후손이 오래 오래 살아갈 이 광활한 땅, 이 나라 역사에 대해 이젠 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카(E. H. Carr)의 말을 소개했었지요. 재독 철 학자 송두율은 더 멋진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는 역사를 서양에서는「삶의 선생(magistra vitae)」이라 했고, 동양에서는 「자기를 다스리 는 거울( 自治痛鑑)」이라고 했다.'


이번엔 제목을「미국혁명의 안팎」으로 잡아봤는데, 그 까닭은 들으실 이야기의 폭이 혁명 이전에서부터 그 한참 뒤까지를 아우르기 때문입니다.


미국 국가(國歌)가 생긴 내력과 버팔로가 불탔던 사연. 미국 독립선언문과 헌법. 영어가 나랏말이 된 연유. 슬픈 인디언 이야기.


I. 미국 국가(The Star-Spangled Banner)와 「1812년 전쟁」


'1812'하면 언뜻 생각나는 음악이 있지요?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Overture of "1812")」. 나폴레옹의 침략을 물리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지어진 곡 이지요. 러시아 찬송 '하나님, 당신의 백성을 지켜주소서'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혁명의 노래 '마르세이(Marseillaise)'가 나오고, 종소리 울리고, 대포 터지는 소 리와 함께 끝나는 이 곡은 지금도 미국 독립기념일엔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 중 하 나입니다.


「1812년 전쟁」. 미국과 영국과의 전쟁인데 그 실마리를 풀자면 「프랑스 혁 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됩니다.


이미 18세기 계몽사상에 물들기 시작한 프랑스인들에게 미국 혁명전쟁에 지원병 으로 참가했다 돌아온 많은 청년들의 미국혁명 이야기는 참으로 충격적이고 고무적 인 소식이었지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준 것입니다. 1789년 혁명의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인간이 어떤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잔학성이 나타나기 마 련인가, 혁명이 점차 과격해지더니 드디어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지요. 1793년 국왕 루이 16새와 그의 아내 마리 앙뜨와네뜨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아직 봉건군주국인 주변 국가들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지요. 혁명의 바람이 자국 에도 불어올까봐 전전긍긍하더니 드디어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프랑스 는 연전연패, 이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하는 이가 나폴레옹 (Napolen Bonaparte). 1799년, 포병장교였던 그가 구데타로 정권을 잡더니 5년 후 엔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영웅' 그리고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우던 그는 공격 위주의 전술을 쓴 장군으로, 전장에선 늘 선두지휘 했으며 병사들과 함께 생 활했다고 해서 '작은 하사'란 별명도 가지고 있지요. 그의 이런 일반병사의 특별 관리로 군대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답니다.


1806년부터 유럽 정복의 길에 오르게 됩니다. 스스로를 '혁명의 사도(Apostle of Revolution)'라고 믿었다는 그는 전 유럽을 평정해 하나의 연방으로 만들겠다 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요. 프랑스 혁명 이념(The Ideals of French Revolution)의 확산이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내건 그의 정복전쟁. 구제도의 모순에 아직 신음하고 있던 주변국 사람들, 즉 피정복 민족들이 오히려 그를 정복자가 아 닌 해방자로 받아들여 열광적으로 환영했다네요.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헤겔마저 그를 이렇게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기의 정신을 구현할 영웅이다." 러시아 침공 때는 심지어 많은 독일인, 폴랜드인 그리고 화란인들이 프랑스군에 가담했다 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순식간에 중부유럽을 휩쓴 그는 곧 남부유럽을 석권하게 되고, 점차적으로 북유 럽도 종속시키게 되지요.


1812년 6월, 미국 국회가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결정한 일주일 후에 그의 러시 아 침략이 시작됩니다. 9월에 모스코바 입성. 그러나 러시아의 항복도 받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한 그에게 저 무서운 러시아의 동토(凍土)가 기다리고 있었지요. 11월 초 진흙탕 속을 허우적거리며 걷던 병사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말까지 잡아먹었 다네요.수많은 낙오병의 얼어 죽은 시신 위에 내려 쌓이는 눈.러시아군의 반격은 점점 집요해졌고, 전설적인 코사크 기병대(Cossacks)의 습격도 더욱 잦아졌지요. 러시아 경계를 겨우 벗어난 것은 12월 중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스트리아, 프 러시아 그리고 스웨덴의 연합군이었습니다.


1814년 파리가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고 나폴레옹은 폐위되어 지중해의 외딴섬 엘 바(Elba)로 유배당하는데, 그것이 아직 그의 종말은 아니었지요. 귀신 같이 그 섬 을 빠져나온 그가 권좌에 다시 올라 군사를 일으켰으니 말입니다. 연합군과의 전쟁 이 시작됩니다. 1815년,「워터루 전쟁(The Battle of Waterloo)」. 세계 역사를 바꾼 50대 전쟁 중 하나인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Wellington) 장 군에게 완패, 이번엔 대서양 남쪽에 있는 섬, 세인트 헬레나(St. Helena)로 유배되 고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되지요. 드디어 그가 역사의 무대 위에서 영원히 사라지 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Leo Tolstoy)의 소설 「전쟁과 평화」읽어보셨나요? 전쟁문학의 최고봉이라고 불리우는 이 대하소설의 배경이 바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전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잠시 되돌아보겠습니다.구학서 가 지은「이야기 세계사」의 글 소개하지요.


동부전선 전투에서도 독일은 승승장구하였다.그래서 레닌그라드,모스코 바, 우크라이나 등지에서도 승리가 계속되어 소련의 항복은 시간문제인 것처 럼 보였다. 그러나 광대한 러시아는 항복대신에 침묵으로 응답하였고, 1941 년9월에 시작된 독일군의 공격은 겨울이 다가오자 활기를 잃어갔다.독일군 과 소련군 모두 러시아의 겨울과 나폴레옹의 망령을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희망을 가졌고,독일군은 당황하며 불안해하였다.


독일은 동부전선의 규모를 축소하고 겨울을 넘기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 다.그러자 자그마치2천만 명의 전상자를 낸 소련군은(이때 소련군과 민간 인의 피해는 유대인 6백만 명의 3.5배에 이르렀다) 이후 독일군에 대하여 보 복을 시작하였다.「손자병법(孫子兵法)」계편(計篇)엔 전쟁의 기본원칙 다섯 가지가 논해져 있지 요.이 원칙들이 조화롭게 응용되어야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道,) 천(天,) 지(地), 장(將,), 그리고 법(法.). '도'란 대의명분이요, '천' 이란 기후․기상과 같은 자연현상을 뜻하며, '지'란 지리적 조건이고, '장'은 전쟁 을 치루는 장수요, '법'이란 군이 지켜야 할 질서와 규정을 말함이지요. 참 기억하 세요? 지난번 워싱턴 장군 이야기 하면서 장수가 지녀야 할 다섯 가지 덕목에 대해 말씀드린 것 말입니다.그것도 이 계편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2천 4백여년 전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이런 불후의 병서(兵書)가 쓰여졌 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영어로는 Sun-tzu's「The Art of War」라고 하 지요. 손무(孫武)와 그의 후예인 손빈(孫臏)이 썼다고 하지만 여러 설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 황제 빌헬름2세는 이런 통탄의 말을 했다네요. "


내가 이 책을 20년 전에만 읽었더라면 이토록 참패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를 미 루어 같은 독일인인 히틀러도 읽었을 상 싶은데 그런 이야기는 없고, 이 책을 머리 맡에 둘 정도로 애독했다는 나폴레옹. 그가 '천'과 '지'의 원칙만이라도 통달했다 면 그런 무모한 전쟁은 아예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맥아더 장군도 진중에서 이 책을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와 영국, 인류 역사상 이 두 나라만큼 서로 전쟁을 많이 한 나라도 없을 겁니다. 16세기에 있었던 「30년 전쟁」을 비롯해, 14세기에서 15세기까지 자그마 치 100년을 싸운 전쟁, 「100년 전쟁」도 있었으니까요. 프랑스 혁명 때문에 전전 긍긍하던 주변국들이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영국도 1793년 전쟁에 뛰어들게 되는데 당시 프랑스는 혁명정부가 다스리고 있었지요. 그리고 10 년 후, 즉 1803년에 프랑스와 다시 전쟁을 하게 되지요. 이 때는 나폴레옹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드디어 이야기 보따리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갑니다. 그 속엔 또 무슨 이야기가 들어있을지 기대해 주시기 바라며,주 안에서 샬롬.


✎ 이은모

 

워싱턴과 미국혁명 -전쟁이야기 (11)-


혁명군과 영국군이 뉴욕에서 대치상태에 있을 때 네이던 헤일(Nathan Hale)이란 청년이 적진에 잠입 했다가 사로잡혀 목매임을 당하면서 사람들의 심금 을 울리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는 대목까지 말씀드 렸습니다.


내가 원통해 하는 것은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나에게 단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워싱턴은 뉴욕전투에서 패배합니다. 후퇴하는 길목 에 가로놓인 동강(East River). 때마침 여명의 안개가 자욱이 끼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는데 식민지인들은 이 안개를 '섭리의 안개'(Providential Fog)라 이름 지어 불렀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좀 의아해 하실 것 같아 그 사연을 말씀드리는 것 입니다.동양에서라면 천우신조(天佑神助), 즉 하늘과 신이 도왔다라고 했겠지요. 혁명군은 델라웨어 강(Delaware River)을 건너 그 서쪽까지 후퇴합니다. 펜실베 니아와 뉴저지를 경계해 흐르는 이 강의 동쪽엔 트렌턴(Trenton)이라는 작은 도시 가 있지요. 영국군의 보급기지였고 3,500여명의 헤시안(Hessians)들이 주둔하고 있 었습니다.이들은 영국 왕이 고용한 용병,당시 식민지인들은 나쁜 사람을 가리킬 때"저 헤시안 같은 놈"이라고 했답니다.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은 이곳을 기습공격하기로 작전을 세웁니다.


1776년 1월과 12월, 설객 타마스 페인(Thomas Paine)이 '상식'(The Common Cense)이란 팸플렛을 내어 식민지 사람들의 애국심에 불을 지릅니다.


우리는 영국인이 아니다.우리는 미국인이다.!


We are not Englishmen; We are Americans!


워싱턴은 이 팸플렛을 병사들에게 배포해 모두 읽게 합니다.


한 겨울 강 위에 떠다니는 얼음장들이 문제였지요. 다행히 뉴잉글랜드 출신 뱃사 람들이 있어서9시간에 걸친 도강작전에 성공합니다.그 다음 눈보라 속 9마일의 강행군.눈비에 젖어 장총(musket)이 쓸모없게 되었다는 일선 지휘관의 보고를 받고워싱턴은 이렇게 지시합니다.


"설리반(Sullivan) 장군에게 전하라. 대검(bayonet)을 쓰라고."


1776년 성탄절 다음날 새벽, 공격이 시작됩니다. 명절이라 전날 밤 실컷 먹고 마 신 적들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요. 우왕좌왕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하고 항 복하는 그들. 많은 군수품을 노획했고 1,000여명의 포로를 잡는 대승이었습니다. 케이시(William J. Casey)는 그의 저서 「혁명전쟁은 어디서 어떻게 싸워졌는 가」(Where and How the War Was Fought)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심리적 목적(psychological purpose)이 중요했던 것이다. 워싱턴은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군의 결집과 국민의 적극적 참여와 더 강한 국회를 만들기 위 해서 그는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만약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혁명은 계속 될 것이나 진다면 혁명은 끝장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곧 이어 트렌턴 북쪽에 있는 프린스턴(Princeton)에서 이기게 되고 빼앗겼던 뉴 저지의 대부분을 되찾게 됩니다.


혁명군은 1777년을 전후해 외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많은 유럽인들 이 건너와 군인이 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군 엔지니어로 일하기도 합니다. 특히 슈토이벤(Steuben)과 라파옛(Lafayette)의 공이 컸지요. 슈토이벤은 프러시아 (Prussia) 육군 대위로 포지 계곡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워싱턴을 도와 많은 일 을 했지요.병사들을 유럽식으로 훈련시켜 정예화하고 군사학도 가르쳤습니다.대 륙회의는 그 공을 기려 훈장을 수여합니다. 라파옛은 19세의 프랑스 귀족, 자비로 구입한 군수품을 배에 가득 싣고 왔을 뿐 아니라 후에 혁명군이 되


어 혁혁한 전공 을 세우게 됩니다. 지금까지 미국 동북부 지방에서의 전투 이야기를 드렸는데 혁명전쟁은 이 지역에 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아팔라치 산맥(Appalachian Mountain) 너머 그 서 쪽 변경, 일리노이, 오하이오, 오대호, 켄터키와 테네시, 그리고 버지니아 남쪽에 있는 남북 캐롤라이나와 조지아,이 넓은 지역에서도 변경 식민지인들(frontier settlers)이 민병대를 조직해 영국군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1776년 겨울에 있었던 트렌턴 전투 이후 혁명군은 두 차례의 대규모 전투를 치 르게 됩니다.



사라토가 전투(The Battle of Saratoga, New York)


년 겨울 1777 영국군은 뉴욕주를 점령해 혁명 세력을 남북으로 갈라낸다는 대담한 작전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캐나다에 있던 버고인(John Burgoyne) 장군은 남쪽으로 진격해 내려오고,필라델피아에 있던 하우위(Howe) 장군은 북진해서 얼바니(Albany, NY)에서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연락 차질로 하우위는 도리어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버렸지요.홀로 된 버고인은 사라토가에서 혁명군과 맞서게 됩니다.


혁명군 사령관은 샤일러(Philip Schuyler) 장군. 영국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접 한 뉴욕과 뉴잉글랜드 청년들이 샤일러 장군 휘하로 속속 모여들었고 워싱턴도 새 병력을 그곳으로 급파합니다.단 두 번의 전투뿐이었지요.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영국군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승전은 그동안 망설이고 있던 프랑스로 하여금,당시 황제는 루이16 세,혁명전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하는 계기를 주게 됩니다.이미 프랑스는 비 밀리에 돈과 무기를 혁명군에게 제공하고 있었지요. 그 다음 해인 1778년 미국과 프랑스는 공식적 동맹조약을 맺게 되는데 그 배후엔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에 주재하고 있던 그는 연을 이용한 전기 실험 이야기와 그 의 저술로 유럽사회에선 이미 유명인이 되어 있었지요.


1778년 영국군 총사령관 하우위가 사표를 내고 본국으로 돌아간 후 클린턴(Sir Henry Clinton) 장군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되지요. 필라델피아에 있던 그는 뉴욕으 로 가서 일 년이나 머문 다음 함대를 거느리고 남부지방 공략길에 오르게 되는데 남캐롤라이나와 조지아 일대에서 몇 차례 승전을 거둡니다. 그러나 무슨 속셈인지 그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지요. 떠나면서 이 지역의 책임을 콘월 리스(Charles Cornwallis) 장군에게 맡깁니다. 이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 다. 콘윌리스는 상관인 클린턴에게 나중에 버지니아로 후퇴하는 것조차 보고하지 않았다니까요.


콘윌리스는 1780년에서 1781년 초까지 몇 번의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만 민병 대의 끊임없는 게릴라식 공격에 너무나 시달린 나머지 북쪽 버지니아로 후퇴할 것 을 결심하게 됩니다.이즈음 등장하는 이가 라파옛이지요.기억하세요? 19세의 프 랑스 귀족. 23세가 되었네요.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버지니아 혁명군 사령관이 되 어 후퇴길에 오른 영국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힙니다. 1781년 8월 영국군은 드디 어 욕타운에 진을 치게 됩니다.



욕타운 전투(the Battle of Yorktown, Virginia)


혁명전쟁의 승리를 사실상 매듭짓는 전투였지요. 체사피크만(Chesapeake Bay)과 대서양이 만나는 곳으로 제임스 강(James River)과 욕강(York River)이 흘러들고 그 강들 사이에 있는 반도 그 하구에 욕타운이 있습니다.


뉴욕의 클린턴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워싱턴은 뉴포트(Newport, Rhode Island)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 총사령관 로샴보(Count Rochambeau)를 만나 숙의 끝에 합동 작전을 펴기로 합니다. 수륙협공작전이었지요. 캐리비안(Caribbeon)에 있던 드 그 라세(De Grasse) 제독의 프랑스 함대도 작전에 참여하기로 한 것입니다.


클린턴을 속이기 위해 소수의 병력만 남겨놓고 양국군은 뉴저지를 지나 필라델피 아를 거쳐 욕타운에 당도했고 일부는 뱃길로 이곳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반도의 목 부분,즉 그 입구에 포진합니다.한편 프랑스 함대는 영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 해 체사피크 만에 정박하지요.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된 영국군.10월 6일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초반에 단검을 든 육박전도 있었으나 주로 포격으로 결판을 내는 그런 싸움이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하늘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폭 탄.그 포격이 아흐레 동안 계속되어 욕타운의 반 이상이 파괴되었을 때,‘사격 정 지’를 요구하는 영국군의 나팔 소리가 성루에서 울려 퍼지게 됩니다.이 때 쏜 대 포알 수가 15,000이었다는데 어떻게 그걸 다 세어서 기록해 두었는지.


콘월리스는 조건부 항복의 뜻을 워싱턴에게 전하는데 자기들을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이었지요.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워싱턴,무조건 항복뿐이라고 응답합니다.


10월 19일 오후 성 밖으로 나와 진열한 양국군 앞을 비통한 표정으로 빠져나가는 영국군. 그러나 그들은 전쟁엔 졌지만 명예롭게 행동했고 승자들도 그들을 명예롭게 대우합니다. 당시 “세상이 거꾸로 되었네”(The World Turned Upside Down)라는 노 래가 유행했는데 영국군 군악대가 성문을 나오면서 이 곡을 연주했다는 자못 낭만적 인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8,000명의 포로를 잡는 등 실로 혁명전쟁의 절정을 이룬 전투였지요.이 싸움 이후 다시는 이런 대규모의 전투는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1783년 9월 3일, 프랑스 파리, 미국과 영국은 드디어 평화조약에 서명하게 되지요. 마침내 대영제국은 미합중국의 독립이라는 깃발 아래 무릎을 꿇고 만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 장군,오합지졸과 같은 병사들과 부족한 무기며 군수품을 가지고,8 년이란 긴 세월을 싸워 최후의 승리를 이끌어낸 그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 그 답을 찾아 몇 가지 자료들을 뒤적여 봤습니다.


나라의 독립이란 영광스런 목적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용기를 가진 그는 과감한 전략가이면서도 자기의 결점을 인정하고 고칠 줄 아는 유연성을 지녀 여러 번의 전략적 후퇴(tactical withdrawal)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깊은 신앙의 사람으로 19세기 미국 역사가들은 그의 성품과 천재성 안에서 ‘Divine Providence' 즉 ‘신적 섭리’ 또는 ‘하나님의 뜻’을 읽어낼 수 있었다고 말하 고 있습니다.군목제도도 그가 도입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카리스마(charisma)를 가진 사람이었지요. 번역하기 힘든 단어여 서인지 한국에선 그냥 카리스마라고 쓰는 모양인데, 국어사전엔 ‘비범한 통솔력’이 라고 적혀 있고,영어책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The magnetic aura of leadership that moves others to extraordinary effort'(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의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지도자의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기운). 자고로 위 대한 인물들은 예외없이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들이었지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이 있듯이 워싱턴의 긍정적 사고와 성품은 그의 건강에서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43세에 총사령관이 된 그는 6피트의 키에 180파운드 정도의 몸무게에다 전설적인 육체의 힘(legendary physical strength)을 가지고 있었다네요. 문제는 그의 치아. 당시에도 틀니가 있었던 모양인 데, 50대부터 끼기 시작한 그의 틀니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 “나무로 만든 것이다”, “상아로 만든 것이다”라는 논란까지 있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두 주 전인가 김목사님께서 ‘아둘람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시면서 한국의 최명신 장군 이야기 한 것 기억하시지요. 그가 덕장(德將)이라고 하셨습니다. 손자 병법 계편(計篇)엔 장수가 지녀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지(智), 신(信), 인(仁), 용(勇), 엄(嚴). 워싱턴은 이 조건들을 두루 갖춘 명장임에 틀림없습 니다.


아름다운 봄날의 뉴욕, 1789년 4월 30일, 초대 대통령의 선서식 날입니다. 워싱 턴이 탄 배가 드디어 허드슨 강(Hudson River)에 나타났습니다. 그를 맟기 위해 모 여든 시민들의 환호성. 교회마다 종소리는 울려 퍼지고 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천지 를 진동하는 축포 터지는 소리. 사람들의 눈물진 얼굴엔 기쁨과 감격과 자랑스러움 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선서식장.성경 위에 오른 손을 놓고 워싱턴은 뉴욕 대법관 리빙스턴(Robert Livingston)을 따라 이렇게 선서합니다.


나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서약합니다. 그리고 내 능력이 자라는 한까지 최선을 다해 합중국의 헌법을 보존하고, 보 호하며 지킬 것입니다.


I do solemnly swear that I will faithfully execute the office of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nd will to the best of my ability, preserve, protect and defend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워싱턴이 성경에 입 맞추려고 몸을 구부릴 때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있습 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So help me God). 이 짧은 기도가 전 통이 되어 현재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시민권 선서문에도 들어 있습니다. 선서식이 끝난 후 리빙스턴은 발코니로 나가 시민들에게 외칩니다.


“미합중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 만세!” (Long Live George Washington,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된 지 14년, 그의 나이 57 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귀향하려는 그를 붙잡는 손길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3선’ 을 권고하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왕이 되어달라고 간청하는 자들까지 있었다네 요.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드디어 버지니아의 마운트 버난(Mount Vernon)으로 돌 아갑니다.그가 그렇게 그리던 농장생활을 한2년 반 가량하게 되지요. 그동안 그 는 이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밀가루를 만들기도 하고 팔기도 하고, 허물어진 집을 수리도 하고, 종종 친구도 만나고, 해뜰녘에 일어나고 밤엔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날씨가 매우 궂은 12월 12일, 농장을 둘러본 후 병상에 눕고 맙니다. ‘기관지 염’(tracheal infection)이었다고 하는데 각혈을 계속 했답니다. 자기가 회복되지 못 할 것을 알았는지 주치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누구라도 진 빚은 갚아야지. 나 는 죽음이 두렵지 않네.”


이틀 후, 1799년 12월 14일, 그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가 신문 ‘호외’에 실려 전 국에 재빠르게 알려집니다.전 국민이 깊은 슬픔에 빠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네요.2 주 후 버지니아 국회의원 헨리 리(Henry Lee)는 국회에서 그를 기리는 연설을 이 렇게 합니다.


워싱턴은 전쟁에도 일인자였고,평화에도 일인자였으며,민족의 가슴에도 일인자였다.


Washington was 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 of his countrymen.


이 소식이 유럽에 전하여졌을 때 프랑스의 나폴레온이 한동안 묵념을 드렸다고하며 도버 해협에 있던 영국 함대는 20발의 예포를 쏘았다고 합니다.


이 나라의 수도와 50주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고, 전국의 거리와 교량과 지명에 붙여진 그의 이름은 셀 수 없을 정도지요.금년 일본 요코스까 미7 함대 기지에 전진 배치될 핵 항공모함의 이름도 '조지 워싱턴호'. 그의 생신을 축하 하기 위해 정해진 국경일이 곧 다가오네요.수도 하늘 높이 서있는 그의 기념탑, 「Washington Monument」에 영구히 새겨진 그의 이름. 국부(國父)라 불리우는 그 에 대한 미국인들의 존경심과 애착이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조국 근대사의 비극적 인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승만, 기독교 장로이면서 권력이란 이름의 우상 앞에 무릎을 꿇은 그. 영구집권의 망상을 가지고 헌법을 유린하고 부정선거까지 저질렀으니 백성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요.불화산처럼 타오른4.19혁명. 그 해 예과에 들어간 나도 데모대를 따라가며 "독 재자 이승만 물러가라!" 외쳤었지요. 사담 후세인의 동상처럼 이승만의 동상도 거꾸 러져 서울 거리에 질질 끌려 다녔고. 박정희, 그래요, 이 사람도 비슷한 목적과 방 법으로 영구집권을 꾀했던 인물인데, 그이야 원래 군대 출신이니 그렇다손 치더라 도, 민주주의 나라 미국에서 최고 학부를 나온 이승만이 어떻게 그런 독재자가 될 수 있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연전에 본교회 청년회가 주최해 어느 캠프장에서 수양회를 가졌던 일이 있습니 다.강사는 한완상 선생.그가 하바드대 총장과 입씨름을 했다는 이야기가 기억납 니다.당신들은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기에 제3국에서 온 학생들이 제 나라로 돌아 가면 하나같이 독재자가 되느냐고 따졌다는 것이었지요.


사랑하는 조국에도 국부라 불릴 수 있는 대통령과, 생신을 기념해 국경일로 삼을 만한 대통령이 어서 나타나기를 소원해 봅니다.


✎ 이은모

그들이 믿는 하나님 안에서 (In God They Trust)

-전쟁이야기(10)-



미국 전쟁 지도자 이야기의 계속입니다.


1776년 여름 패배한 워싱턴 장군의 군대(Continental army)가 영국군을 피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섭리의 안개(providential fog) 덕택이었다. 그 후로부터 미국 전쟁 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신적 간섭(Divine Intervention)에 크게 의지해 왔다. 인간이 처참한 전쟁터에서 신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계속 있어온 일이지만, 특히 미국에 있어서 신과 전쟁과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다.

전쟁 대통령들이 신을 찾는 것은, 물론 전쟁의 승리를 위해 도움을 구하고자 함이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려는 것과 전쟁 책임자로서의 외로움을 위안 받으려는 속셈도 있는 것이다. 신적재가(神的裁可, Divine Sanction)란 말은 본래 헌법상 평등의 원리를 논할 때 쓰여지는 말이지만, 때로는 인종말살(genocide)이 행해질 때에도 그 합리화를 위해 이용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신과 전쟁을 뒤섞고 싶은 충동은 미국민의 기질과도 관계가 있다. 현재 미국인 10명 중 9명이 믿는 자(신앙인)라고 말하고 있는데, 2.3세기의 짧은 역사를 가진 이 나라가 한 다스가 넘는 전쟁을 치러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Onward, Christian Soldiers"(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란 찬송을 부를 때 스릴을 느끼지 않는 늙은 전사는 없을 것이다.


때때로, 유대인이나 모슬렘은 기독교인 못지않게 호전적이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The God of Abraham)은 항상 전쟁신(martial God)이셨다. 그렇다면 성서적 이웃 사랑과 전쟁이란 폭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조화시킬 것인가? 어거스틴(Augustine)이나 아퀴나스(Aquinas) 같은 초기 기독교 학자들은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을 정립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정당한 전쟁’의 전제 조건들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첫째, 정당한 이유와 의도가 있어야 된다. 정당방위, 평화회복, 정의옹호 등.

둘째, 합법적인 선전포고가 있어야 되고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셋째, 승리의 가능성이 있어야 되고 비전투원의 피해가 적어야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셨다고 믿는 ‘미국 예외론’(American exceptionalism), 이 주장이 우리들의 지도자들을 전쟁으로 몰고 갔을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이 정당하다고 믿도록 해왔다. 재작년 독립기념식 때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하고 있다.

“‘자유는 신의 선물’(freedom is the gift of God)이니 미국은 그 자유와 민주주의를 멀리 멀리 전파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좌파 반전론자들의 항의가 드세게 일어났다. 과거 이런 정책 때문에 실패한 많은 경우를 알고 있느냐면서.

보스턴 대학 교수 Howard Zinn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1630년 메사츄세쯔만 군락(Massachusetts Bay Colony)의 초대 지사 John Winthrop이 예수님을 환기시키며 그 곳이 ‘언덕 위의 도시’(city on a hill)(마 5:14)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얼마 후 식민지 무장패들이 몰려가 Pequot 인디언들을 학살한 일이 있었다. 미국은 ‘증명된 하나님의 뜻’(manifest destiny)이라면서, 1848년 멕시코를, 1898년 큐바와 필리핀을 침략한 일과 전 19세기를 통해 아메리칸 인디언을 말살한 일들을 정당화 하고 있다. 계속해서 Zinn 교수는 1899년 맥킨리 대통령의 전쟁장관이었던 Elihu Root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역사 이래 미국 군대는 다른 어떤 나라 군대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왔다. 그들은 자유와 정의, 법과 질서, 그리고 평화와 행복을 지키는 수호자들이었다.”

자주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대의 대통령들은, 부시를 포함해서, 전쟁을 종교에 의지해 정당화 하는 것을(religious justification) 거부하고 있다. 부시는 Woodward에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나는 전쟁을 하나님께 의지해 합리화하고 싶지 않다.” 대신, 그들의 신앙과 나라의 힘을 가지고 미국의 젊은이들을 위험한 길로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sending American men and women into harm's way). 대통령 집무실(oval office)에서 만들어지는 정책들은 이토록 당연한 것들이 되고, 때로는 치명적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면 대통령들은 지고한 목적(higher purpose)을 수행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George H. W. Bush(부시의 아버지)는 2005년 Newsweek지 편집인과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적어도 나에겐, 희망을 주고 내 임무를 수행해 나가게 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나타내지 않는다. 나타내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 맘 속 깊은 곳에서 그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재미 없지요? 원본이 너무 비약적이고 생략적이어서 번역하는 저도 진땀깨나 흘리고 있는 판이니, 이것 잠시 접어두고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George Washington 이야기 들려드리지요.




오,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거기서 속삭인 그의 기도 말들을,

그의 열정적인 기도로

조국의 운명이 바뀌었네.

그러나 그대는 아는가?

거기 외홀로 걷는 이가 누구인가를,

가서 읽으라, 하늘책에 기록된 워싱턴의 기도를


Oh! who shall know the might

Of the words he utter'd there?

The fate of nation there was turn'd

By the fervor of his prayer,

But wouldst thou know his name

Who wandered there alone?

Go, read enrolled in Heaven's archives,

The prayer of Washington.


혁명전쟁이 시작되고 어느덧 한 해가 지난 1777년. 필라델피아를 탈환하기 위해 뉴욕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오는 영국군을 맞아 워싱턴은 두 번을 싸우게 되는데 모두 다 패배합니다. 영국군 총사령관은 Sir. William Howe장군. 필라델피아는 대륙회의가 열리는 곳이었지요. 겨울이 왔습니다. 워싱턴 장군은 포지 계곡(Valley Forge)에서 겨울을 나기로 작전을 세웁니다. 아직 국회(Continental Congress)가 세금을 거둬들일 힘이 없을 때였으니 돈이 문제였지요. 병사들은 맨손으로 오두막을 지어야 했고 침대와 담요가 없어서 밀짚 위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땔감과 양식이 부족해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는 병사들. 글쎄 9천명의 병사 중 3천명이 도망치는 일까지 벌어졌다네요.


워싱턴 일대기를 맨 처음 쓴 이는 Mason L. Weems. 그는 성공회 신부이면서 1800년대에 매우 인기 있는 작가였답니다. 워싱턴 사망 후 그가 쓴 ‘1777년의 겨울 속에서’(‘In the winter of 1777')란 글 안에 거의 신화화한 '포지 계곡에서의 워싱턴의 기도' 이야기가 실려 있지요. 위의 시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누군가가 쓴 것입니다.


워싱턴이 그의 군대와 함께 포지 계곡에 진을 치고 겨울을 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워싱턴의 친구요 쾌이커(Quaker) 농부인 Isaac Potts는 본부 근처의 숲속을 혼자 거닐곤 했다. 그 날도 숲속을 걷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다. 점점 가까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그것은 사람의 음성이었다. 조심스럽게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아, 거기 미국 군대의 총수가 눈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 워싱턴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기도를 마친 워싱톤의 얼굴에서 풍기는 평온함과 고요함. 워싱턴이 본부로 들어갈 때까지 꼼짝 못하고 서있던 Potts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부인을 소리쳐 부른다.

“새라! 내 님 새라! 잘 될거야! 모든 것이 다 잘 될거야! 조지 워싱턴이 승리할거야!” (Sarah! my dear Sarah! all's well! all's well! George Washington will yet prevail!")

"왜 그래요, 이삭? 당신 오늘 무슨 특별한 일 있었어요?"

“그렇고말고, 이 일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어. 오늘 전혀 예기치 못한 광경을 봤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칼과 복음은 함께 할 수 없다고 믿어왔잖아. 그런데 워싱턴은 오늘 내 잘못을 깨우쳐 주었어. 조지 워싱턴은 하나님의 사람(a man of God)이 아니라고 생각해온 나는 속고 살아온 거야.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미국을 구원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나는 정말로 큰 오해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야.”


사람들은 이곳을 ‘워싱턴의 겟세마네’(‘Washington's Gesthemane')라고 부른답니다. 퀘이커 신자들은 평화주의자들이지요.


광대한 토지와 수많은 노예를 가진 부농의 아들로 워싱턴은 1732년 2월 22일 버지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이 어린 시절에 있었던 ‘도끼 사건’ 기억나세요? 중학교 땐가 배운 것 같은데 이젠 기억이 희미해졌네요. 그의 타고난 성품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니 한 번 들어보세요.


어느 날 어린 워싱턴이 하인과 놀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이런 몹쓸 짓을 한 놈이. 내가 그토록 소중히 가꾸어온 벚나무를 자르다니!”

아버지의 불호령을 듣고 워싱턴은 그 앞으로 달려갔다. 거기엔 어린 벚나무가 무참히 잘려 있었고 그 옆엔 반짝이는 도끼가 놓여 있었다.

“조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넌 모르겠니?”

워싱턴은 그 말에 똑똑히 대답했다.

“아버님, 그 나무는 제가 잘랐습니다.”

갑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왜 그랬지?”

“저 도끼가 하도 반짝이고 잘 잘라질 것 같아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놈, 그런 짓을 하고... 네가 어떤 벌을 받을지 각오는 되어 있느냐?”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벌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엔 점점 놀라운 빛이 떠오르고 그것이 차차 부드럽게 변해갔다.

“음, 잘했다. 조지. 나는 네가 용감하고 정직하게 말해주어 정말 기쁘다. 자, 용감하고 정직한 아이에게 주는 상이다.”

아버지는 워싱턴에게 꾸지람 대신 그 빛나는 도끼를 주었다.


워싱턴이 혁명군 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 of Continental Army)에 임명된 것은 1775년 7월, 그의 나이 43세 때였지요. 제 2차 대륙회의는 만장일치로 그를 선출한 것입니다. 수락 연설에서 자기는 군사 경험이 짧지만 영광된 목적(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과 정열을 쏟겠노라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군대는 군대라고 부를 수도 없는 오합지졸. 훈련이 안된 것은 물론이고 툭하면 도망병까지 생기고 장교들까지 종종 명령을 어겼답니다. 무기와 대포 부족에다 유니폼도 없었고 먹을 양식마저 부족했다니...


참, 바로잡고 가야할 말이 있습니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이란 말입니다. 누가 번역했는지 크게 오역하고 있네요. 원래 ‘독립전쟁’을 책에선 ‘American Revolution'이라고 되어 있으니 ‘미국혁명’ 또는 ‘혁명전쟁’이라고 불러야 되고, ‘남북전쟁’도 ‘Civil War'라고 하니 '내란'이라고 해야 옳겠지요.


‘건전한 방임’이란 정책을 식민지 통치의 틀로 삼아오던 영국은 조지 3세의 즉위와 함께 그 정책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 식민지인들에게 더 큰 부담을 주게 되지요. 1767년 영국 의회는 식민지가 수입하는 차, 종이, 유리 등의 물품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합니다. 드디어 일이 벌어졌지요. ‘Boston Tea Party'. 1773년, 식민지인들이 인디언으로 변장하고 보스턴 항구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회사 선박에 침입해 싣고 있던 차 상자를 모두 바닷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화가 난 영국군은 보스턴 항구를 봉쇄했고 보스턴 외곽도 포위해 버립니다. 이 사태는 식민지인들을 흥분시켜 보스턴 시민 구출을 위해 무기 사용을 고려하게 됩니다.

1774년 9월 식민지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를 열어 본국 의회의 식민지에 대한 입법권을 부정하고, 본국과의 통상중지를 결정합니다. 워싱턴도 이 회의에 참석했지요.

드디어 혁명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게 됩니다. 1775년 4월 18일, Lexington, Massachusetts. 갑자기 요란스런 말발굽 소리가 잠든 마을을 뒤흔듭니다.

“영국놈들이 온다!”(The British are coming!")

집집마다 다니며 사람들을 깨우는 Paul Revere라는 은세공가.

붉은 군복을 입은 700여명의 영국 정규군 앞에 당당하게 서있는 민병대원 70명. 그들의 지휘자 John Parker가 말합니다.

“저 놈들이 먼저 쏘지 않는 한 기다려. 그러나 저놈들이 전쟁을 원한다면 바로 여기서 한번 붙어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을 뿜기 시작한 총격전. 단 2분여 만에 끝난 이 싸움에서 Parker를 비롯해 8명의 민병대원이 전사합니다. 영국군은 근처에 있는 Concord를 경유해 물러가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여러 마을 민병대에 의해 273명을 잃었지요.

보스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은 이곳에 있는 민병대가 가지고 있던 다량의 화약을 빼앗고 또 여기 숨어 있던 독립운동가 Samuel Adams와 John Hancock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던 것입니다.

Lexington은 보스턴 근교에 있는 도시지요. 연전에 그곳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보스턴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큰 애가 렉싱턴한인감리교회를 다니고 있었지요. 놀랍게도 그 교회에서 장세중 선생 내외분을 만났어요. 이 분들은 우리교회 창립멤버이시지요.


1776년 보스턴에서 물러나 캐나다로 갔던 Howe 장군의 영국군이 뉴욕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보스턴에 있던 워싱턴의 군대도 뉴욕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영국군은 Hessians라고 불리우는 독일인 용병을 3만이나 고용하고 있었고 또 많은 수의 충성파들도 가지고 있었지요. 혁명 초기의 상황은 해방 후의 남한과 비슷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투닥거렸지요.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 이들을 patriots라고 불렀음, 과 아직도 영국을 모국이라고 생각해 충성을 바쳐야 된다고 하는 충성파. 이 충성파는 소수였는데 Loyalists 또는 Tories라고 불리웠지요. 이들은 독립파 사람들의 구박 때문에 영국으로 되돌아가거나 캐나다로 쫓겨 갔답니다.


영국군과의 대치 상태, 워싱턴은 적진을 살피기 위해 Nathan Hale이라는 젊은이를 학교선생으로 변장시켜 적진에 침투시킵니다. 결국 체포되어 다음날 교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는 이런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내가 원통해 하는 것은 나의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내게 단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I only regret that I have but one life to lose for my country.")

진정한 애국자의 뜻을 담고 있는 그이 이 마지막 말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 이은모

그들이 믿는 하나님 안에서 (In God They Trust)

-전쟁이야기(9)-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이 나라는 새롭게 태어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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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대통령의 마지막 사진

-April 10, 1865-


  1863년 7월의 펜실베니아주 게티스버그(Gettysburg).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인가 남북이 갈려 서로 싸운 지 어언 2년. 남북전쟁 중 가장 치열한, 가장 결정적인 전투가 여기서 벌어지게 됩니다. '게티스버그 전투(The Battle of Gettysburg)'라고 부르지요. 수세에 몰린 남부군(Confederate) 총사령관 Robert E. Lee 장군은 전세의 만회를 위해 과감한 작전을 펴게 되는데, 북군(Union) 지역인 이곳에 75,000의 병력을 투입합니다. 북군 병력은 88,000. 3일간의 전투였고 북군의 승리였습니다. 전사자요? 남북 합해 5만 명 이상이 생명을 잃었다니 그 싸움의 치열함이 어떠했을지...  사실 양측엔 육군사관학교(West Point) 출신의 장교들이 많았는데, Lee 장군도 이 학교 출신, 결국 동창생끼리 목숨을 건 싸움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1월 9일, 새로 마련된 전몰자 국립묘지 봉헌식이 바로 이 전쟁터 위에서 있게 됩니다. 링컨 대통령의 저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Gettysburg Address)이 여기서 있게 됩니다. 아직 전쟁의 와중에 있어 불안에 떨고

그리스도인과 전쟁



있는 미국인을 향한 연설이었지만, 이 연설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멍에를 아직 벗지 못하고 있던 온 누리 만민에게도 주어져 민주주의의 횃불을 밝혀주는 구실을 하게 됩니다.

  앞서 소개한 글은 그 연설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언어 경제학의 백미(白眉)요,  완벽한 본보기지요. 짧고 간결하면서도 그 안에 하려는 말과 뜻이 다 들어 있으니까요. 2005년 11월 21일자 한국일보엔 이계성 논설위원이 쓴 '게티스버그 연설'이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3분이 채 걸리지 않은 이 연설에는 272개 단어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짧은 연설은 미국의 건국이념, 남북전쟁의 명분, 민주정부의 원칙을 담음으로써 미국사의 기념비적 문서가 되었다. 동시에 뛰어난 문학작품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예수의 산상보훈에 비교하기도 한다. 이 연설은 천재적 영감에 의해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사전에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것이라고 한다. 미국은 이 연설을 통해 연방의 분열을 극복, 통합된 나라로 거듭났고 오늘날 초강대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 때 많은 신문들이 이 연설을 혹평했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지요. 시카고 타임즈(Chicago Times)는 이런 기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 유치하고 단조롭고 싱거운 연설을 읽고 있을 때 모든 미국인의 뺨은 부끄러움으로 따가워졌음이 분명하다.(cheek of every American must tingle with shame as he reads the silly, flat, and dish-watery utterance)

  봉헌식의 주강사는 Edward Everett란 유명한 연설가였답니다. 링컨에 앞서 그는 두 시간의 긴 연설을 했다네요. 얼마 후에 링컨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는데, "내가 두 시간 걸려서도 전달 못한 주제(central idea)를 당신은 단 2분 만에 해냈습니다. 축하합니다."


  "내 평생 지금처럼 옳은 일을 한다는 신념이 강한 때는 없었습니다." 1863년 1월 1일 떨리는 손으로 노예해방선언문에 서명한 후 링컨이 한 말입니다.

  링컨 대통령의 정치가로서의 노정은 참으로 험난했지요. 대통령 취임을 위해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를 떠나 수도 워싱턴으로 가는 길목, 벌티모어(Baltimore)에서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정보를 접수하게 됩니다. 그곳을 가로질러 갔지만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한밤중에만 달려 워싱톤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6시. 취임식은 1861년 3월 4일이었지요. 취임한지 달포반 만에 4월 21일, 드디어 그가 그토록 염려하던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맙니다. 그는 전쟁대통령(War Time President)이 된 것입니다.


  1864년 경 사람들은 그의 재선을 기대하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워싱턴은 독립을 주었고 링컨은 남북통일과 노예해방을 주었다.'

  1865년 3월 4일 그는 두 번째 대통령 취임연설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원한을 품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며,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의에 굳게 서서 각자의 사명완수에 힘쓰고, 나라의 상처를 싸매며, 참전용사들과 미망인, 고아들을 돌보고, 국내의 정의와 세계의 영구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맙시다.

  1865년 4월 9일 드디어 남군 총사령관 Lee장군의 항복의 전보가 날라들자 벌떡 일어나면서 링컨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제 남은 일은 서로의 화해와 국가의 재건뿐입니다."


  그로부터 5일 후인 1865년 4월 14일, 성금요일, 포드극장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립니다. 봄비가 내리는 다음 날 아침 링컨은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되지요. 암살자의 이름은 John W. Booth, 26세, 배우요 노예제 주창자. 수개월 전에도 두 번이나 암살자의 탄환이 그의 검은 굴뚝 모자를 뚫고 나가 그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일까, 관 속에 누운 그의 모습은 너무나 평화로왔다고 합니다. 그의 전쟁장관이었던 Edwin Stanton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영원에 속합니다." (Now, he belongs to the ages.)

  오두막 통나무집에서 태어나 백악관 주인으로 4년 40일을 살고 56세를 일기로 귀천한 그를 '작은 예수'라고 부르기도 한다지요.

  역사가 Merill Peterson은 링컨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구원자('the Savior' of the Country),

위대한 노예해방자('the Great Emancipator'),

민주적 민중의 사람(the democratic "Man of the people"),

최고의 아메리칸("the First American"),

그리고 자수성가한 사람("the Self-made Man").





  부러움이었습니다. 미국역사 특히 대통령사를 처음으로 조금 공부해 봤는데 그 결론이랄까 느낌이랄까 맘속에 앙금처럼 남는 것이 부러움이었습니다. 운이 좋아서만은 아닐 터인데 어떻게 이 나라 백성은 저토록 탁월한 지도자들을 가질 수 있었는지...  물론 불행했던 한반도 현․근대사를 미국사의 지평에 올려놓고 비교의 눈으로 봤을 때의 느낌이지요. 부럽다는 것 말입니다.

한반도 역사 안에서 태어난 내가 이민자가 되어 버팔로에 와 산 햇수가 어언 한국에서 지낸 햇수보다 더 많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아시아 동쪽 끝 내 조국의 하늘을 떠날 수 없는 의식. 그것은 이민 일세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주위에 몰려들고 있는 강대국의 입김이며, PAX AMERICANA의 그늘 아래 미국 지도자의 상황판단과 인식에 따라 언제라도 전쟁에 휘말려들 수 있는 내 조국. 분단 반세기가 훨씬 넘는 대립과 고통과 슬픔. 과연 뉘 있어 이 짙게 드리운 어두움을 걷어내고 참다운 평화와 안정과 번영의 길로 내 조국을 이끌어 나갈 것인가?


  “모두 좋아해요” 며칠 전 한국을 다녀오신 홍청일 장로님의 말씀입니다. 이명박씨의 대통령 당선을 사람들은 그렇게 좋아하더라는 것이지요. 다행입니다. 지지난 주 회보에 김목사님께서 ‘새 대통령에 바란다’라는 글을 올리셔서 더 이상 군살 같은 이야기를 할 까닭이 없겠지만 뭔가 걱정스럽고 조심스럽고 한심스럽고 씁쓸한 입맛 같은 것이 있어서 한 두마디 하고 지나가야 되겠습니다.

‘점 보러 다니는 기독교 신자들’

‘사학법 순교할 각오로 투쟁-목사 25명 삭발 투쟁’

‘이명박 후보 「법명 해명 발언」 일파만파!’

‘또 「장로 대통령」만들기 나서나?’

  지난 9월 10일자 크리스천 월드(기독교 신문)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지요.

  한국 SBS TV의 ‘천인야화’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전직 무속인 A씨의 인터뷰가 방영되었다.

  점을 보러 온 사람들은 어항 속의 물고기다. 이미 점을 믿을 준비가 된 그들에게 ‘살이 끼었다.’, ‘삼재가 끼었다’는 식으로 미끼를 던지면 십중팔구는 다시 점을 보러 오게 된다. 이때 점술가들은 이를 장삿속으로 이용한다.

한국 성인남녀의 50%가 점을 보러 다닌다. 그중 기독교 신자도 25%는 포함되어 있다.




몰래 점집에 다니는 기독교 신자들, 점집은 가지 않으나 목사에게 무당 노릇해달라고 부추기는 신자들, 모두 불량하다.


  점(占)이 무엇인지 궁금해 사전을 폈더니 이렇게 적혀 있네요. 팔괘(八卦), 육효(六爻), 오행(五行) 따위의 특별한 방법으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판단하는 일.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고 따라가야 할 크리스천이 점을 치러 다닌다니......


  재작년 고국에선 소위 사학법 개정 시비로 한동안 떠들썩했던 일이 있었지요. 섬뜩했습니다. ‘목사-25명-순교할 각오로 삭발 투쟁’이란 제목과 그들의 삭발하는 장면을 봤을 때의 느낌이었죠. 민주주의 나라에서 데모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만 꼭 머리를 박박 밀어붙이고 해야만 하는지, 이젠 붉은 머리띠 정도로는 안된다는 것인지, ‘장’짜 벼슬을 가지고 나이깨나 먹어 보이는 목사님들이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바리깡을 든 젊은이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는 모습. 이발할 돈이 없어서는 아닐 터인데, 그 흔한 데모에 이 분들 따라 모두 삭발을 하게 되면 이발관 모두 문 닫아야 되겠네. 농담. 말의 오용도 유분수지, 국어교육이 잘못 되었는가 거룩한 말 ‘순교’를 어떻게 삭발투쟁에다 갖다 붙이는 것인지...


  한창 대선 유세 때의 일이지요. 작년 11월 7일자 크리스찬 투데이(기독교 신문)지는 이런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법보신문(불교)은 이명박 후보 부인이 법명(法名) '연화심‘을 받았다는 것과 108산사 기도회에 참석한 것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반대당의 대변인들은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이 후보는 그의 부인이 법명 받은 것을 아예 부인해 버렸다. 능수능란하게 말바꾸기를 하다보니 이번에는 스님 말씀까지 바꿔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후보에게는 종교는 종교가 아닌 표밭일 뿐이다.”

  그의 부인이 교회 권사님이라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지...


 돈 문제와 관련된 일은 접어두지만 그의 위장전입 문제는 조금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문제요 그가 장로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이 일이 해결되지 않는 한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면목으로 백성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얼마 전 대구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위장전입을 시도했던 학부모들이 당국에 적발되자 강력히 항의하고 나서더라는 것인데, “어떤 대통령 후보는 다섯 번이나 위장전입을 했는데 그의 위장은 ‘자식 사랑’이 되고 힘없는




사람들이 하면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하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작년 8월 2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글 하나 소개합니다. 조윤성 논설위원이 쓴 「하나님의 고민」

  서울의 한 초대형교회 주일 대예배. 담임목사가 설교를 통해 반공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정부기관 각료 중에 빨갱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친북․친공․좌파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목사의 목에 핏줄이 선다. 종교적 메시지가 아니라 마치 정치 연설을 듣는 것 같다. 이어 “기왕이면 예수님을 잘 믿는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하더니 이를 위한 ‘목숨 건 금식기도’를 선포한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정치권력에 큰 영향력을 지녀왔다는 것은 새삼스런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기독교의 이런 힘이 한국 정치에서 ‘소금’으로 작용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절에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사회현실에 침묵하다가 민주화로 정권의 물리력이 약해지자 과거 언제 그랬냐는 듯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는 행태는 다분히 기회주의적이다.

  1992년 김영삼 장로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천여명의 교역자들이 모여 “신앙인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며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이들의 기도 힘 덕분인지 김장로가 대통령이 됐지만 그의 당선으로 대한민국이 더 좋은 나라가 됐는지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1% 미만이었을 때 각료의 거의 절반을 기독교인으로 채웠던 이승만(장로) 정권의 부패상을 본다면 ‘종교’와 ‘정권의 도덕성’ 간에 긍정적 함수관계가 있다고 하기는 힘들다.


  점치러 다니는 교인과, 삭발투쟁 하는 목회자들과, 법명 받는 권사와, 위장전입 밥 먹듯 하는 장로와, 선거법 위반 하면서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급급한 목사라....  그러함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는 기도해왔습니다. 김목사님의 인도를 따라 토요새벽기도 때는 물론 수요 밤예배 때에도 기도드렸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고, 바르고 겸손하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지닌 그런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말입니다. 새로 당선된 이가 뉘우치고 거듭나서 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 되도록 계속 기도로 도와야 되겠습니다. 자랑스러운 내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평안과 축복이 함께 하시길. ✎ 이은모

미국 전쟁 지도자들과 기독교

-전쟁 이야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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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년 만에 귀환한 어재연(魚在淵) 장군기입니다. 열강의 배들이 조선 바다를 제 집 안방 드나들 듯 할 때였지요. 1871년 미국 군함 다섯 척이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보다 5년 전 미국 상선 General Sherman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교역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다가 조선 군민에 의해 불태워진 일이 있었지요. 이를 빌미로 그 책임을 질 것과 통상을 요구하며 쳐들어온 것입니다. Rogers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과의 전투.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등 조선군 350명이 전사했지요. 그러나 갑곶에 상륙한 미군도 조선군의 집요한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쫓겨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신미양요(辛未洋擾)라고 부릅니다. 그 동안 미해군 사관학교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던 이 장군기는 가로 4.15m, 세로 4.35m 의 큰 깃발. 한국 정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장기대여 형식으로 되돌려 받게 된 것입니다. 수(帥)는 장수를 뜻함입니다. 우리 선조의 장군기는 난생 처음 보는데 너무나 감격적이어서 실어봤습니다. 지난 10월 23일자 한국일보 기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삼베로 된 이 장수기는 강대국의 제국주의가 세계를 요리하던 구한말 약소국 조선의 풍전등화 같던 운명을 우리에게 아프게 상기시켜 주고, 새삼 국력이 강성해야 함을 깨우쳐 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사역을 인간이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어요. General Sherman 호 사건 때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인 목사 Robert Thomas란 분이 이 배를 타고 있었지요.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해 온 천주교 신자 김자평을 상해에서 만난 후 조선 선교를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배가 불태워지고 승선한 모든 자가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는 죽어가면서 한 권의 성경을 어느 조선인에 전달했답니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조선에 교회가 서게 되었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Isolationism이란 말이 있습니다. 고집주의 또는 외톨주의라고 하는데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여기에 속하겠지요. 미국이 19세기 말엽까지 지켜온 외교 정책입니다. 초대 대통령 George Washington이 퇴임하면서, 아직 어린 나라(Republic)에 힘도 없을 뿐 아니라 이루어야 할 일이 많으니 남의 나라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separation from others). 작년(2006년) 상하 양원 합동연설(State of Union Address)에서 Bush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는 고립주의의 허황된 안위(false comfort)를 배척해야 된다. 우리는 자유를 지키는 역사적 임무를 계속 수행해 나가야 한다." 실패한 그의 정책을 두고 이젠 옛 고립주의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비판적 주장에 대한 그의 반론이지요.

장사꾼이야 나라 정책 따위 무시하고 돈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언제든지 갈 수 있겠지만 아직은 고립주의 정책을 지키고 있던 나라의 군함이 어떻게 먼 중국까지 와 있다가 조선을 침범할 수 있었는지...  당시(신미양요) 미국 대통령은 남북전쟁(Civil War)의 영웅 Ulysses Grant 장군. 엄청난 살육과 파괴가 있었던 그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지 겨우 4-5년이 지난 후였고 그 때 미국은 서부 개척에 여념이 없을 때였지요.

바람 불 듯 세월이 그 길을 빠르게 가는 동안 고립주의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산업 발전에 따른 외국 시장의 확보와 원료수입이 필요하게 되었고 자본가들은 외국에 투자해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지요. 미국 교회는 해외에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했고요. 국내 문제가 안정됨에 따라 거기 쏟던 에너지가 해외로 방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Appenzeller, Underwood 그리고 Scranton 등 많은 선교사가 이즈음 조선에 오게 되었지요.


드디어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Spanish-American War. 미대륙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치룬 첫 번째 전쟁입니다. Mckinley 대통령이 이끈 전쟁이었지요. 그는 PAN-AM 박람회 참석차 버팔로에 왔다가 이곳에서 암살당했다는 이야기 기억하시지요?

미국 대통령은 현재까지 43대인데, 사람 수로는 42명, 그 중 네 분이나 암살당했어요. Abraham Lincoln(16대), James Garfield(20대), William Mckinley(25대), John F. Kennedy(35대).

그 외에 암살을 모면한 대통령이 몇 분 있습니다. Andrew Jackson(7대)과 Harry S. Truman(33대).

Gerald Ford(38대) 대통령은 두 번이나 암살기도를 당했고, 얼마 전에 돌아간 Ronald Reagan(40대) 대통령의 암살 미수 사건은 그 TV 장면까지 우리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또 Theodore Roosevelt(26대)는 선거 유세 때 총상을 입은 일이 있고 Franklin Roosevelt(32대) 대통령은 취임 전에 암살을 모면한 일이 있습니다. 이토록 위험하고 살벌한 그 자리, 그 권좌가 그토록 탐이 나는지, 오 불가사의한 인간의 욕망이여!


'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의회는 특정 종교를 배려하는 어떠한 법도 제정할 수 없다.) 즉 국교의 설립을 금한다는 법입니다. 1791년에 제정된 수정 헌법 제 1조. 이 사항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헌법 1조 그 첫 머리에 이 구절을 넣었을까요. 이로서 미국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원칙, 즉 정교분리(政敎分離)의 법을 헌법에 명시한 지구상 최초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거의 모두 신앙인들이었는데(개신교) 어째서 이런 조항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하시지요? 그들은 종교가 정치에, 또는 정치가 종교에 휘말려들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유럽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 한 나라의 종교를 카톨릭으로 할 것이냐 개신교로 할 것이냐를 두고 기독교인끼리 흘린 피가 모든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뿌린 피보다 더 많았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 신대륙에 세운 이 나라에서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특정 종교가 권력을 잡는 것을 막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탁견 덕택에 미국은 지난 200여년간 유럽을 폐허로 만들었던 종교 전쟁을 한 번도 치루지 않고 여러 종파들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 사이좋게 지내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참 우스개소리 하는 것 잊을뻔 했네요. 어느 교회 주차장에 이런 Sign이 붙어  있더랍니다.

1. Church Car Park-For Members  Trespassers will be baptized!

   (교회 주차장-교인 전용  위반자는 세례를 받을진저!) 

2. Free Trip to Heaven. Details Inside!

   (무료 천국여행. 자세한 문의는 안에서)

3. Dusty Bibles lead to Dirty Lives.

   (성경에 먼지가 쌓이면 추한 삶에 빠지게 됨)

4. Looking at the way some people live, they ought to obtain Eternal Fire Insurance soon.

     (어떤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노라면 영원한 불심판 보험이 있어야 할 듯)

5. Running low on faith? Stop in for a fill-up

      (믿음이 약해졌나요? 와서 가득 채워가세요.)


 


전에 군목 베니모프가 이라크 전장에서 겪는 신앙적 갈등 이야기 드린 것 기억나세요? 지난 5월 7일자 Newsweek지에 난 특집 기사였지요. 같은 호에 미국 전쟁 지도자에 관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Evan Thomas와 Andrew Romano의 "In God they trust(저들이 믿는 하나님 안에서)를 소개합니다.


 

"나는 매일 밤 자정까지 백악관 복도를 서성거렸다."

Mckinley 대통령의 회고. "나는 무릎을 꿇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옳은 길을 비춰 달라고(Light and Guidance) 간절히 기도했다." 1889년 Spanish-American 전쟁 때의 일로 미군이 스페인을 일방적으로 이겨 필리핀을 점령한 후 이 나라를 합병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그는 크게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답변이 왔다. "합병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 필리핀인들을 교육시켜 문명인으로 만들고 또 기독교인으로 만들어야 되겠다." 그러나 그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필리핀인 대부분은 이미 카톨릭 신자들이었고, 그들은 남의 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합병으로 잔인한 반란군과 3년을 싸우게 되어 결국 미군 4000명과 필리핀인 50만 명이 죽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 기간에 미군은 처음으로 water-boarding이란 방법의 고문을 했고, 그들이 구원하기를 원했던 이 아시아인들을 "Gook"이라 업신여겨 불렀다.


*water-boarding을 물고문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이 방법으로 적을 다루어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고문이냐 아니냐 라는 논쟁을 한창 벌이고 있는 터에, CIA가 테러분자들을 물고문하는 장면을 찍은 테이프가 없어진 사실이 몇 주 전에 밝혀졌지요. 워싱톤은 온통 수라장. Bush 정부는 계속 미국은 고문을 하지 않는 나라다 라고 버티고. 수건을 얼굴에 덮은 후 물을 붓는 것입니다. 호흡장애는 물론이고 가슴이 뻐개지는 듯한 통증이 오게 된답니다. 어느 제대 군인의 글을 읽었지요. 이 방법은 Army Field Manual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병사 훈련 방법 중의 하나이니 고문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일제 때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들은 그 물에 매운 고춧가루를 섞었다는데 이래도 그게 고문이 아닌지...


많은 비평가들은 George W. Bush를 '성스러운 용사(Holy Warrior)'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9/11의 복수를 위한 그의 부적절한 언어 선택인 '십자군(crusade)'이란 용어라든가 그가 자주 쓰는 '악(evil)'이란 표현, 그리고 그의 연설들을 그들은 비판하고 있다. 워싱톤 포스트 기자 Bob Woodward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그의 아버지(41대 대통령)에게 자문을 구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그에겐 더 높으신 아버지(Higher Father)가 계시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의 신앙이 유별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요. 대통령 집무실 옆에 골방이 있어 그는 수시로 기도한답니다. 그의 하루는 아침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일로 시작하여 오전에 성경 읽고,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성경공부반에 출석하며 내각회의 시작 전엔 어느 장관에게 대표기도 해줄 것을 권고한답니다. NBC의 Tom Brokaw와의 회견 때였는데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예수"라고 답변.


"We think we are not like other people because God did shed his grace on us. We are going to save the world."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내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에 미연합감리교회는 부시에게 전쟁을 재고하라는 공개서한을 어느 기독교 잡지에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 형제 George W. Bush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선제폭력(preemptive violence)은 예수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부시는 감리교 신자지요.

재작년 어느 날 버팔로 신문 독자난에 아들을 이라크 전쟁터에 보낸 어머니의 짧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동료 아메리칸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면서 나는 부시 대통령이 어떻게 밤을 잠을 잘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Mckinley 대통령의 경우를 보듯이 부시는 전쟁 때 하나님께 호소하는 첫 미국 대통령은 결코 아니다. 저 유명한 Gettysburg 전투, 그 싸움에서 지게 되면 수도 와싱톤까지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Abraham Lincoln 대통령은 무릎 꿇고 기도한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내 모든 신뢰를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짐이 내가 질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무겁다." 그는 훗날 이렇게 설명했다. 백악관에서 그는 "더 이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는 압도적 신념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이 호소는 Reagan 대통령과 부시의 아버지 대통령이 종종 인용하는 말이 되었다. 


✎ 이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