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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공 ’과 ‘승 리 ’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작가 가운데 아더 밀러(Arthur Miller)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자신의 작품에서 두 가지의 질문을 제기한다. 하나는 “인간 이 성공을 추구할 것이냐”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인간이 승리를 추구할 것이냐”하 는 것이다. 그게 그거 아닌가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둘은 명백히 다른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윌리 노만이라는 사람은 성공적인 세일즈맨이었지만 마지막 자살로 자신의 삶을 종결하였다. 즉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나 패배한 인생을 산 사람이었다. 성공은 다분히 외면적인 평가이며 세상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에 승리는 그 삶의 내용에 대한 평가이며 세상적인 평가가 아닌 절대적인 평가이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공’은 곧 세상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이요, ‘승리’ 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반드시 네 가지 중 한 가지 부류에 속하게 되어있다. 하나 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람, 두 번째는 하나님께 인정받으나 사람에게 는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세 번째는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나 사람에게는 인정받는 사람, 마지막 네 번째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등 이처럼 모 든 사람은 네 가지 중 하나에 반드시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번 가만히 이 땅을 살다 간 많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사람들이 볼 땐 성공했 지만 실제로 패배한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역사에 오점을 남긴 사람들, 권력을 장악하여 하늘을 나는 새조 차 떨어뜨리는 권세를 누렸지만 종국엔 비극적인 결말에 이른 사람들, 세상에서 큰 재물을 모았지만 행복을 모르고 고독하게 살다간 사람들, 그들이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는지 모르나 결코 ‘승리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세상 에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승리한 사람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즉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혹은 세상적인 기준의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곳에 자기 삶을 온전히 불사르며 살다 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라는 자가 그 아버지에게 반역하여 부자 지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양진영이 사활을 건 대전투를 가지게 되는데 그 전쟁에서 다윗 진영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고 압살롬은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게 된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다윗 진영의 사령관인 ‘요압’은 다윗 왕에게 승전보를 전하게 되는데 누구를 보낼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 하면 이는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기쁜 소식만 전하는 자리가 아니라 다윗 왕을 슬픔가운데 빠지게 만들 나쁜 소식도 함께 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를 다 전해야 할 입장에 직면하여 이 소식을 전할 전령을 뽑게 되 는데 이 일을 위해 두 명의 전령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사람은 꽤 신분이 높 은 ‘아히마아스’라는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그저 ‘구스 사람’이라고만 소개되고 있는 사람이다. ‘아히마아스’는 일전에 첩자로서 위험을 무릅 쓰고 압살롬 진영에 숨어 있다가 전쟁의 승리를 다윗 쪽으로 가져오게 한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해준 사람이기도 하다.
처음에 요압 장관은 비록 승전보를 전하는 일이기는 하나 왕의 아들이 죽었다는 나쁜 소식까지 전하는 것이기에 신분이 높고 왕의 총애를 받는 ‘아히마아스’를 보내 기 보다는 구스 사람을 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그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아 히마아스’가 자신을 보내달라고 극구 고집을 피우자 결국 요압은 그도 보내게 된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전령으로 가게 되었는데 ‘아히마아스’는 지름길을 택해 먼저 출발한 구스 사람을 추월하여 다윗 왕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게 된다. ‘아히마아스’로부터 승전보를 전해들은 다윗 왕은 그 승전보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오직 압살롬의 안위만을 물을 뿐이었다. 그때 ‘아히마아스’는 다윗 왕의 물음에 “잘 모 르겠다”고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명백히 거짓말이었다. 그는 분명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일 때문에 요압이 ‘아히마아스’에게 가지 말라고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일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였다. 왜 그랬는가? 그는 왕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자신에게 일절 도움이 안 된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히마아스’는 전령으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전령, 실패한 전령이 되고 말았다. 전령이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소식을 제 대로 전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자신의 달음질의 목적을 다른 데 두었기 때문이었다. 즉 자신의 달음질의 목적 을 사명을 잘 수행하는데 두지 않고 오로지 명예와 출세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아히마아스’는 분명 승전보를 전하는 일에 상급이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다윗 왕에게 칭찬을 받고 출세할 수 있는 좋은 길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자신이 나서고자 했던 것 이었다. 그리고 구스 사람보다 먼저 도착하기 위해 지름길까지 택했던 것이었다.
‘아히마아스’의 행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우리 인생을 달음질로 표현할 수 있다. 가만 보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아히마아스'처럼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출세와 영화를 위해서 달려가고 있다. 즉 모두가 다 오로지 ‘성공’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조차 가리지 않는다. 마치 ‘아히마아스’가 어떻게 해서든 다윗 왕에게 먼저 나아가기 위해 지름길을택했던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그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기독교인들조차 오직 ‘성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 과 믿음조차 자신들의 출세와 성공과 축복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아히마아스’처럼 목적이 빗나간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히마아스’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한 사람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구스 사람’이다. ‘아히마아스’가 다윗 왕에게 압살롬의 안부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자 다 윗왕은 그에게 물러나라고 명했고 뒤이어 도착한 ‘구스 사람’이 승전보와 아울러 압 살롬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물론 예상했던 것처럼 다윗 왕은 그 소식을 듣고서 크게 절망하고 슬퍼하지만. 구스 사람은 그것이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 든, 그것이 자신에게 해가 되든 득이 되든 따지지 않고 전령으로서 자신이 전해야 할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그의 달음질의 목적은 오직 전령의 사명을 잘 수행하는 데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아히마아스’처럼 지름길을 택하는 편법을 사용하 지 않고 정도(正道)만을 달렸다. ‘
아히마아스’와 ‘구스 사람’ 두 사람의 달음질은 같은 달음질이었다. 그러나 그 내 용은 달랐다. 이는 그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은 ‘성공’을 추구한 달음질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승리’한 달음질은 ‘구스 사람’의 달음질이었 다. 겉으로 보기엔 ‘아히마아스’가 성공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구스 사 람보다 더 빨리 달렸기 때문이다. 다윗 왕에게 먼저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다윗 왕이 원하는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구스 사람이었다. 다윗 왕이 볼 때 정 작 성공한 사람은 바로 구스 사람이었다. 나는 다윗 왕이 아히마아스에게 한 말을 주 목하고 싶다. 아히마아스가 압살롬의 안위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자 다윗 왕이 그에 게 뭐라고 했는가? 성경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왕이 가로되 물러나 곁에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섰더라”
여기서 우린 아히마아스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토록 상급 을 원했는데 상급은커녕 오히려 멀찍이 물러서야 하는 비참함, 이것이 바로 빗나간 목적, 빗나간 방법 그리고 부끄러운 달음질을 했던 사람의 결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승리’가 아닌 ‘성공’만을 추구했던 사람의 결국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물론 ‘성공’과 ‘승리’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택해야 할 것인가? 두말할 필요 없이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아름다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김현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