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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효심
‘어머니’ 하면 각 사람마다 떠오르는 상(Image)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애
로움’이, 어떤 사람은 ‘자식에 대해서 늘 염려하시는 모습’이, 혹 어떤 사람은 ‘늘 기
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각 사람마다 어머니에 대
한 상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어머니 상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
을 알기 위해서 우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삶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를 가져야만 했다. 사실 그것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로 인해 사랑하는 약혼자를 잃게 될 것이 뻔
했다. 정혼녀가 혼자서 애를 가졌다는데 누가 자기 아내로 삼으려 하겠는가? 사랑
하는 약혼자를 잃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다행일 것이다. 더 나아가 부정한 여자로
취급되어 사람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그 당시 간음한 여자는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을 당했기 때문이다. 즉 마리아는 그 아들 ‘예수’를 가짐으로 인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야만 했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의 개입으로 마리아는 모
든 위기를 잘 넘길 수가 있었다. 즉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정혼자도 잃지 않았다.
이어서 마리아는 만삭의 몸으로 아기 예수를 낳기 위해 나사렛에서부터 멀리 베
들레헴까지 여행을 해야만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장소에서 아기 예수를
낳기 위해서였다.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하면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출생하기로 되
어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마리아를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
로 보내셨다. 그 몸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아
는 것처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아기 낳을 곳이 없어서, 역한 냄새가 진동하는
더러운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야만 했다.
아기 예수로 인한 마리아의 수난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낳
자마자 헤롯의 칼날을 피해 멀리 이집트로 도망을 쳐야만 했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상당 기간 동안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이민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우리 자신들이
이민자들이기에 이민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지금도
그렇다면 2천 년 전의 이민의 삶은 얼마나 더 힘들고 어려웠겠는가? 이 모든 것은
아기 예수로 인해 그 어머니 마리아가 치러야 했던 고통이었고 희생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예수를 성장시켰다. 그랬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
서 가정을 떠났다. 예수님은 장남이셨다. 따라서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그 어머니마리아를 돌보았으면 오죽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 가정을 떠났
다. 아니, 집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 속이라도 썩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리아는
그 아들 예수로 인해서 늘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악평을 들어야만 했다. 우리가 아
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을 정신병자처럼 취급했다. 그렇다면 우린 어
렵지 않게 마리아가 고향 사람들로부터 많은 마음고생을 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마리아가 그 아들 예수로 인해 치러야 했던 지금까지의 고통과 희생만 해도 결코
작은 것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희생들은 오히려 작은 것들에 지나지 않
았다. 아직까지 어머니로서 치러야 할 더 엄청난 고통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자기
아들 예수가 극악무도한 자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것이
었다. 그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그 고통이야말로 이제까지 겪은 그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이 세상에 자식을 먼저 보내는, 그것도 처
참한 형장의 이슬로 보내는 어머니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겠는가? 십자
가상에서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예수님의 고통도 참으로 컸겠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고통은 아들이 당하는 고통보다 천배 만배 더 컸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살펴본 마리아의 삶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어머니 상은 어떤 상이라
고 생각되는가? 한 마디로 ‘희생하는 어머니 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자기 속으로 난 아들
이었다. 그 아들로 인해 마리아가 겪어야 했던 평생의 삶- 그것은 오직 희생뿐이었
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서 마지막 죽을 때까지 그 어머니 마리아는 그 아들로 인해
내내 고통의 삶, 희생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마리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희생의 상’, 그것이 단지 마리아만의 모습이겠는가?
마리아는 ‘메시야의 어머니’라고 하는 특별한 상황 때문에 남보다 더 특별한 희생
의 삶을 살아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희생하는 어머니 상은 모든 어머니
들의 공통된 이미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가만히 각자의 어머니를 떠올려보라! 모두
가 자신들의 어머니에게서 ‘희생의 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우리 한국의
어머니들은 더욱 그렇지 않나 생각한다.
이처럼 철저하게 희생하는 어머니에게 자식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어머니의 그 희생을 갚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에 과연 그 길이 있
을까? 결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린다 해도 세상의 그 어떤것으로도 어머니의 희생을 갚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이 어머니
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최소한의 효도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린 예수님의 효
심에서 그것을 배울 수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그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
도 끝까지 부모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그 자리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함께 있었다. 예수
님께서는 마지막 운명하시면서 그 어머니를 제자의 손에 부탁하셨다. 성경 요한복
음 19장 27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보라 네 어머니라!" 이게 무슨 말이겠는가? “네가 내 어머니를 대신 책임져다오,
네가 내 어머니를 네 어머니처럼 돌봐다오!” 바로 그와 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여
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효심을 읽을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하나님의 일을
위해 집을 떠나셔야만 했고 그로 인해 어머니를 돌보지 못하고 동생들에게 어머니
를 맡겨야만 했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효심이 없으시거나 어머니를 저버리신 것
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그 어머니를 위해 마음을
쓰시고 그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실 만큼 효심이 깊으신 분이셨다.
단순히 예수님의 효심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다. 이는 또한 우리가 어느 정도로
우리의 부모에 대해 효도할 수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그 어떤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부모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시는 순간, 그 순간은 결코 편한 자리가 아니었다. 극한 고통으로 인
해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던 것이다. 이는 곧 자식들이 어느
정도로 부모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 같은 예수님의 효심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
리스도인이란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
라 그 분의 삶을 본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 대해 극진
한 효심을 가지셨던 분이라면 우리 또한 마땅히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가끔 보면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로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은 기독교가 ‘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든다. 기독교가 ‘조상숭배’를거부하는 것, 이는 기독교가 불효의 종교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단지 ‘조상숭배’
가 옳지 못하며 우상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그 후손들의 공경의 대
상이지 결코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부모이며 조상이지 하나님이 아니
다. 따라서 그들을 ‘신’처럼 숭배하거나 섬길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기독교는 철저하게 부모 공경을 가르치며 강조하는 종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가운데서 가장 부모 공경을 강조하는 종교가 기독교라고 해도 결코 지나
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성경을 보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몇 가지 열거하고 있는
데 그 가운데 부모를 치는 자가 사형 죄에 해당한다고 했다. 아니, 치는 정도가 아
니다. 부모를 욕하는 자들도 사형시키라고 했다. 기독교는 그 정도로 부모에 대한
공경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있다.
십계명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고(제1계명-
제4계명) 다른 하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제5계명-제10계명).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이 있다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제5계명)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 그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같
은 자들이 잘 되고 장수하리라고 했다.(참조. 에베소서 6장 1절-3절) 그런데 이
같은 것을 가르치는 종교가 어찌 불효의 종교일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을 덮어두고라도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의 효심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
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얼마나 효심의 종교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마지막 극
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어머니를 돌아보고 어머니를 살피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우
리에게 보여주신 효(孝)이며 기독교가 가르치는 효(孝)이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어머니를 제대로 살피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 살펴드리
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우린 얼마나 어머니의 희생을 알고 감사하는가? 얼마나 그것
을 기억하며 살고 있는가? 육신의 어머니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그리
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육신의 어머니의 은혜를 알지 못하
면서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날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우리의 효심을 점검하며 부모님에 대해 소홀했
던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부모를 잘 섬기는 삶 그것이 사람다운
삶이요,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다. 부모를 잘 섬기는 삶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
는 삶이요 더 나아가 자자손손 복을 누리는 길이다.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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