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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의 가치 -"괴물" 보기-
이 영화의 영어판 제목은 “The Host” 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여러 차례 본 후에야 그 제목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의학용어로, Host는 기생충이나 세균, 바이러스 등을 몸
속에 지니고 있는 숙주생물을 말한다. 이 영화에서 괴물이
발견 초기에 미확인 바이러스의 숙주라고 오인되었었다.
그 괴물에 공격을 받은 한 미군병사가 심한 피부병변을 일
으켰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영어제목을“The Host”로
한 것 같은데,필자는 오히려“The Monster”가 더 적당하
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서 괴물과 바이러스
와의 관계는 핵심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이 영화는 한국영화 흥행1위를 기록한 영화이다. 일천삼백만이 영화관
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하는데, 이는 한국민 전체의 20%를 넘는 숫자이다. 만일
DVD나 인터넷으로 영화를 본 수를 감안한다면 한국의 어른이면 거의 모두가 이 영
화를 보지 않았나 여겨진다.필자도 이 영화를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또, 필자의
둘째아이 Esther는 이 영화가 지금까지 본 영화 중 최고라고 까지 평가했다.
“괴물”을 보면서 왜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이제 독자들
께서 필자의 성향, 즉 영화를 쪼개어 분석해보는 버릇에 대해 익숙하리라 여겨진
다. 때로 이런 작업이 간단한 것을 복잡스럽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필자는 이런 분석이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이를 통해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깨우
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시나리오 외적인 요소를 살펴보자.두달 전 살펴보았던 한국영화“집으로”
와는 달리 “괴물”에는 유명배우들이 꽤 등장한다. 그 중 괴물에게 납치된 소녀의
아버지로 연기한 송강호씨는 한국의 최고 배우 중 하나이다. 그리 잘 생기지는 않
았기에 한류 스타에는 끼이지 못하는지 모르겠다.하지만 그의 연기는 일품이다.
필자는 송강호씨를 “넘버 3”라는 영화에서 처음 보았는데, 그의 코믹한 연기에 배
를 잡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필자가 알기론 송강호씨는 전문적인 연기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아마도 그는 타고난 배우인가 보다.다른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송강
호씨는 이 영화에서도 뛰어난 연기를 보였다. 심각해야할 곳에서는 심각하고 웃겨야 할 곳에서는 적절하게 웃겼다. 연기파 배우의 매끄러운 연기가 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요소일 것이다.
두번째로 이 영화의 성공에는 섬세한 특수효과가 한몫을 했다고 믿는다. 필자가
듣기로 이 영화 제작팀은 괴물의 모양을 만들어내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모습을 최종 결정하기까지 2000개의 시안을 시도해보았다고 하니까. 또
이 영화의 컴퓨터 그래픽은“Spy Kid
3‐D”, “The Day After Tomorrow”,
“Superman Returns”, “Pirates of
the Caribbean” 등의 컴퓨터 그래픽
을 맡았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
에서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영화의 특수효과는 세계 최고의 수
준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 살펴보면, 필자는 “괴물”이 영화에서 만끽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미 요소들을 한꺼번에 축약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믿는다. “괴
물”은 기본적으로 공포영화이다.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이 영화는 또한 웃긴
다. 사실 영화 전체를 통해 웃기는 장면이 심각한 장면과 구분이 안되게 섞여있다.
예를 들어 장례식장 장면을 살펴보자. 그 장면은 장례식장에서 예상되는 전형적인
분위기로 시작한다.괴물에게 납치된(잡혀 먹어 죽었다고 생각되는) 소녀의 고모와
삼촌이 도착하면서 온 가족이 울기 시작한다. 하지만 곳이어 이 장면은 법석을 떠
는 코메디(가족들이 바닥에 쓰러져 뒹구는)와 웃기는 상황 (주차관리인이 차를
잘못 세워놓았다고 한 피해가족을 나무라는) 으로 연결된다. 또다시 심각한 분위기
로 변하나 싶더니, 곧 웃기는 장면 (방역공무원이 피해가족에게 바이러스 감염을
경고하는) 으로 바뀐다. 계속되는 이런 구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를 동시에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두번째로,이 영화는 많은 사회적인,또한 정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괴물
은 주한 미군이 불법적으로 한강에 방류한 독극물에 의해 태어난 돌연변이이다. 또
한 장면에서는, 자기 딸이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아빠에 대해 마치 이해하는
척하면서, 그를 바보로 만들고 실험대상으로 사용하려는 미국의 한 관리를 보여주
고 있다.이런 장면들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증가하고 있는,특히 지난 10여년간 좌
파정권 아래에서 급증한,반미감정을 대변하고 있다.또한 이 영화는 또한 생명을 구하는 데에는 별 관심도 없고 그저 뇌물을 챙기는 거만한 공무원들을 보여주고 있
다.이 영화는 아직 한국사회에 남아있는,좋아지고 있다고 믿지만, 잘못된 관료주
의를 비판하고 있다.아울러 이 영화에서 우리는 대졸 실직자들의 좌절을 본다.괴
물에 납치된 소녀의 삼촌은4년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얻지 못해,그 분노를
달래기 위해 술에 절어 사는 젊은이이다. 이 영화는 한국의 여러 가지 사회정치적
인 문제를 풀어놓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고 있다.
세째로,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가족의 짙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괴물에 납치된
소녀의 할아버지, 아빠, 삼촌, 고모 등 가족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들이 가진 재산 전부를 쏟아 부었다. 경찰에 쫓기고 괴물과 맞서는 위험에 빠지는 것
을 마다하지 않고 구조에 나섰다.그 과정에서 할아버지는 생명을 잃기도 했다.이런
진한 가족애가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주요 요소 중 하나였다고 믿어진다.
위에 열거한 영화의 성공요소들에 필자는 한 가지를 더 덧
붙이고자 한다.그것은 영화의 종결부분이다.이 영화는 소녀
의 죽음으로 끝난다. 필자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 소녀가
생존한 채로 구조되길 바랬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괴물”
의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 속에서 그 소녀를 죽이고 있다. 왜
그랬을까?아시는 분이 있겠지만,사람들은 슬픈 이야기에
보다 감동을 받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울 때에 모종의 씻
겨지는 느낌,깨끗하게 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이를 카
타르시스라고 하는데, 카타르시스는 웃거나 재미있는 것을
즐길 때보다, 큰 슬픔이나 동정을 경험할 때 오히려 더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이 때문에 많은 연극과 영화들이 슬프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이 영
화의 작가도 그 효과를 노렸음에 틀림없다
하지만,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슬픈 종결이 아니다.필자가 더욱 인상깊
게 생각한 것은, 이 영화가 그 소녀가 한 꼬마를 살리기 위해 대신 희생되는 것으
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는 점이다. 소녀는 그 집 없는 꼬마를 괴물이 먹이를 모아
놓던 장소에서 처음 만났다.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가족이 아니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는 꼬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했다. 소
녀의 아빠가 괴물의 목구멍에 걸려있는 딸의 몸을 꺼내었을 때, 그 소녀는 꼬마의
몸을 감싼 채 숨져있었다. 소녀의 몸은 괴물의 날카로운 이빨이 꼬마를 다치지 못하
게 하는, 또는 괴물의 식도가 꼬마의 숨을 멈추게 하지 못하게 완충을 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소녀가 꼬마를 감쌀 때,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았을
것이다.그럼에도 소녀는 꼬마를 구하기 위해 그리했다.관객들이 눈치를 못했을
지도 모르지만,이 소녀의 희생이“괴물”을 감동적인 영화로 만드는 주요 요소 중
하나라고 필자는 믿는다.그리고 이런 종결이 관객을 감동시킬 것을 알고,영화의
시나리오 작가가 일부러 집어넣은 요소라고 생각한다.
사실,희생은 반가운 단어가 아니다.그것은 일종의 고통을 연상시킨다. 그 단어
는 우리의 본능에 잘 맞지 않는다. 우리의 본성은 그 단어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
이길 거부한다.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길 원치 않는다.오히려 적
은 투자로 많은 것을 얻으려 한다. 무언가를 줄 땐 적어도 비슷하게 받기를 원한
다.그것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본원칙이다.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의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면 우리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희생에 대
해 감동을 느낀다.우리는 사회에 기부하는 사람들,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
들,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왜 그런가?그들의 희생을 찬양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인가?아니면 그들의 희생
때문에 우리가 어떤 유익을 얻기 때문인가?필자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만일
그것이 단지 교육의 효과이거나 일부가 이를 통해 어떤 이익을 얻기 때문이었다면,
희생의 가치가 오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 올 수 없었을 것이라 믿는다. 만
일 그렇다면, 사람들은 희생이 부자나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
을 이용해 먹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희생의 가치는 인류역사에
서 곧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그 가치는“괴물”과 같은 최신 영화에서도 아직 사
용되고 있다.희생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감동을 주는 가치이다.희생은 그렇게 생
각하도록 교육되어지거나,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가 아니다.그것은 하나님
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간직하고 실행하길 원하시는 가
치이다.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거저 나누어주고,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라고 가르치는 교훈으로 가득차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교훈들을 따르는 데 늘 실패한다는 것이다. 오직 소수의 사람
들만이 이 가치를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가끔 우리도 희생적인 행동을 하는데
성공하지만,그 순간은 무척 짧다.우리는 희생적인 삶을 지속할 만한 능력이 없다.
하지만 필자는 적어도 우리가 그런 희생적인 삶에 대해 여전히 감사해 할 수는 있
다고 믿는다. 또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희생적인 가치를 실천하는데 조금이나마 도
움을 준다고 믿는다.
여기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희생이 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한
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예
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분명 예수님 자신을
말한다.그리고 친구는 우리이다.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생각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셨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라 불릴 자격
이 없다.우리는 죄인이다.예수님께서는 친구라고도 할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자
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셨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고.
우리가 “괴물”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의 희생적인 죽음에 대해 감동한다면, 예
수님의 우리 생명을 구하기 위한 희생에 대해서도 감동할 수 있는 것이 합리적이라
고 필자는 믿는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불공평하다.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의 크신 사랑, 위대한 희생 아래 굴복하는 것을 머뭇거리게 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만일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친구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적
어도 그 분의 희생에는 감동할 수 있길 바란다.그 분께 나아오길 바란다.또한 믿
는 우리들도 그 분의 사랑에 늘 감사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 그 분의 희생에 적합
한 감사를 돌려드리길 원한다. 비록 우리가 아직 희생적인 삶을 살고 있지 못할지
라도, 누가 아는가? 그 분의 희생에 대해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혹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씩이나마 닮아가게 될런지.
✎김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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